하얀 거짓말[14]
현수는 아침까지 기다리지도 못하고 이른 새벽에 택시를 타고 재준의 집에 도착했다.
조심성 없이 삐꼼히 열린 현관문을 제치자 반기는 것은 코가 막힐 정도의 지독한 술냄새였다. 마치 방금 들이부은 것처럼 삭지 않고 팔팔하게 살아
있는 술냄새는 재준이 지난 일주일 동안 어떻게 지내었는지 증명하고 있었다. 현수는 신발도 채 벗지 못하고 멍하니 거실의 사태를 넋 놓고 보았다.
손가락 하나로 모든 것을 부려 먹을 것만 같은 재준이지만 실제로 그는 부지런한 사람이었고 집안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음식하는 것도 즐기긴 하지만 청소를 더 잘하는 편인 그가 가끔 현수의 집에 올 때 의례 하는 일이란 바로 청소였다.
가끔 현수가 결벽증이라고 놀릴 만큼 깔끔한 성격인 것은 그가 청바지라고 할지라도 손수 다려입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현수가 다려 입어야 할
면바지조차 툴툴 털어 입는 것에 비하면 결벽증이라 오버해서 말하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전쟁' 이라고 말하는 게 결코 과장이 아닐 만큼 재준의 집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술김에 던져 버렸는지 장식장의 유리에는 구멍이 나 있었고 바닥에는 치우지 않은 유리파편이 그대로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넘어지지 않고 멀쩡히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주방의 식탁뿐일 정도로 모든 물건들이 주인이 잠든 사이에 피터팬과 만나기라도 했는지 제 위치에 있지 않았다.
티브며..소파며..주방의 쟁반도 거실 바닥에서 나뒹구르고 있었고 날이 섰음이 분명한 셔츠는 구겨진 신문뭉치처럼 한쪽 거실 구석에 똘똘 뭉쳐져
있는 것을 들고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열려진 베란다 창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도떼기 시장처럼 어수선하게 거실바닥을 점령했던 종이조각들이
춤을 추고 있다.
이 난장판의 주인공을 내려다보며 현수는 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잠이 든 것 같았다. 깨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다가 결국 깨우기로
했다. 청소를 해도 자신은 엄두가 안 나 못할 테고 청소보다 이렇게 망가질 정도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야수 한 마리를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재준아..준아.일어나 봐. 응??"
민망하게 작은 검은색 삼각팬티만을 걸친 재준의 어깨를 흔들었다. 확실히 몸이 좋긴 좋다. 짙은 구리빛깔의 상체는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볼 수 없을
만큼 잘 짜여진 천처럼 조임이 좋았고 엉덩이 아래로 내려간 허벅지의 선은 여자의 미끈한 다리보다 더 보기가 좋았다.
작아서 그런지 슬쩍 보이는 몇 가닥의 음모를 보며 현수는 시선을 돌렸다. 계속 이 몸을 보고 있는 게 어쩐지 어색하고 이상하다.
"준아!!! 야!! 도 재준!!!"
살살 달래서는 일어설 기미가 없기도 했고 자신을 감싸고 있는 공기가 어딘가 어색해 원망을 재준에게 돌리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재준이
꼼지락거리며 눈을 힘겹게 뜨기 시작했다.
재준이 희미한 시야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깨닫고 놀라 몸을 채 일으키기도 전에 준엄한 꾸짖음을 들을 수 있었다.
"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너 이런 꼴 보였다고 해서 내 마음이 풀렸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야!! 자기 자신도 가눌 수 없는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용서할 마음이 생기겠어? 엉??"
기분이 많이 상했는지 모처럼 보는 정색한 얼굴의 현수지만 재준의 손은 현수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는지 덥석 그의 손부터 잡아 버렸다.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다. 다시는 이 사람의 걱정어린 꾸짖음도 가슴 한 켠이 아려올 정도로 예쁜 환한 얼굴도 못 보는 줄 알았다.
이렇게 마주볼 기회가 어쩌면 안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손아귀 아래 잡혀 있던 손이 빠져나가려는 의사를 보이자 이번에는 재준의 손이
현수의 상체를 끌어당겨 두 손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게 안았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현수의 무릎이 꿇어지고 마주 안아 재준의 강한 가슴 안에 가두어진 현수는 반항을 그만두고 친구의 맨 등을 쓸어 주었다.
생각보다 보드라운 살결이 푹신한 양탄자위를 쓸듯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나 거짓말 싫어하는 거 잘 알잖아."
현수의 가슴에 안겨 재준은 그가 말할 때 울리는 가슴의 진동을 눈을 감고 느꼈다. 살아 있다. 꿈이 아닌 살아 있는 현수의 심장 고동이 이렇게 귀로
느껴질 만큼 가까이에 현수가 왔다. 그가 왔다.
"응"
"그런데 왜 그랬어?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던 거야?"
"아니."
"그럼 왜 거짓말 한 거야."
"현수야..."
"그래. 말 해봐. 오늘은 네 말 다 들어줄게. 왜 그랬는지 말해봐."
재준은 자신의 몸에서 풍겨오는 지독한 술 냄새가 신경쓰였지만 현수의 등에서 팔을 떼지 않았다. 더 세게 옥죄이는 걸로 자신을 위로했다.
그리고 현수에게 감사했다. 용기없는 자신에 비해 서슴없이 먼저 손을 내밀고 발을 내딛어준 그에게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고마웠다.
"나한텐 너뿐이야."
"응?"
"내가 가장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고 곁에 있고 싶은 사람은 너뿐이라고. 널 잃기 싫었어."
"무슨 말이야, 그게."
"네게 사실대로 말하면.."
"그러니깐 네가 게이라고 한다면 내가 널 친구로도 생각 안 할거라고 생각했다는 거야?"
"응"
"미친놈."
낮게 웃는 재준의 품에서 벗어난 현수가 재준의 머리에 꿀밤을 내리꽂았다.
당당하게 허리를 편 현수의 허리에는 주먹 쥔 두 손이 걸쳐졌다. 술기운이 완연히 가신 듯한 친구를 내려다보며 친구가 생각하는 우정의 가벼움에
대해 호되게 혼을 내기 시작했다.
"도대체 넌 날 어떻게 생각한 거야? 물론 게이라는 게 익숙하고 일상적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이유 하나로 너와 절교하겠어?"
"그래도..일상적인 것은 아니니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거짓말은 왜 해!! 그것도 형준이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며? 네가 나 무시하는 것 같았단 말이야."
"형준이는.."
뭐라 대꾸할 말을 찾던 재준의 머릿속에 번뜩이며 떠오른 생각을 현수에게 달래듯 던져주었다.
"형준이도 게이거든. 그래서 말하기 쉬웠어."
"뭐? 형준이도??"
"응. 저번에 블루에서 봤던 도영이 알지? 두 사람 그런 사이야."
"아..그렇구나.. 그래도 진작에 말해주었으면 너나 나나 이런 고생 안 했잖아. 아무튼 너 이번에 무지하게 나빴어. 알아??"
"미안.."
"처음이니깐 봐주는 거야. 두 번은 없다!! 알겠어? 이 웬수야!!"
그동안 마음 졸인 게 억울해 현수가 손을 들어 다시 한 번 꿀밤을 내리 꽂으려다가 당신이 때리시는 거라면 무엇이든지 라는 포즈로 당당히 머리를
상납하는 재준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머쓱해진 주먹이 아래로 내려오자 그제야 미소를 띠며 미안한 기색으로 눈웃음을 친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현수가 재준의 맞은 편에 앉으며 바짝 다가갔다. 흠칫 놀라며 재준이 슬쩍 몸을 뒤로 뺄 만큼 다가간 현수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 빛났다.
".. 그럼 너는?"
"응?"
"너도 있어? 응? 너도 남자 중에 에..뭐라고 해야 하나. 애인같은 거 있어? 응? 정식으로 사귀는 사람 있냐고"
"아....."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재준은 현수에게 또다시 고백을 전했다. 비록 다이렉트로 그의 심장에 대고 말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오래전부터 해왔던
혼자만의 고백시간이 또 다가온 것이다. 비록 고백을 받는 당사자는 평생을 들어도 모르겠지만.
"응. 있어. 있고 말고.."
"혹시..너 토요일에 그럼 그 사람..만나고 있었던 거야?"
현수가 거는 전화는 다 받는 재준이지만 토요일만은 받지도 않고 그래서 만날 수도 없었다. 그건 벌써 몇 해부터 그렇게 정해진 두 사람 사이의
룰이었다. 도대체 뭐를 하냐고 몇 번 추궁을 했었지만 대답하기를 거부했던 재준이었다. 문득 생각이 나 물으니 재준이 난처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 안 해서 미안. 토요일이..그 사람과 관계된 일인 것은 맞아."
"그랬구나...하지만 내가 그렇게 캐물었는데 여태 비밀로 하고, 심했다. 도 재준. 그 사람.. 어떤 사람인데? 응? 혹시 나도 아는 사람이야?
누군데, 누군데, 그럼 원래는 게이 아니었는데 그 사람 때문에 게이 된 거야? 얼른 말 좀 해봐!!! 뜸들이지 말고, 응?"
또다시 두 사람의 극명한 차이를 느끼며 재준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라면 현수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유무를 이렇게 맑은 눈으로 묻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사랑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꼬치꼬치 캐묻기도 전에 가슴이 문드러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현수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친구의
연인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었다. 삐져나오는 한탄을 씹어 삼키며 재준은 손을 뻗었다.
항상 이렇게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사람인데 마음은 한없이 멀기만 하다.
뛰어 왔는지 엉클어진 현수의 머리칼을 정리하면서 현수의 '친구의 눈'를 외면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고백을 했다.
"너도..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누군지 말해 줄 수는 없지만"
"왜?"
"아..비밀."
"칫. 치사해!!!"
"하지만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는 말해줄 수 있어."
"힌트도 좀 줘봐. 알아맞춰 보자. 어떻게 만났어? "
"그는...오랫동안 내 곁에 있었지만 내 마음은 전혀 모르고 있어. 내가 용기가 없어서 고백을 못 했거든. 하지만 후회를 해 본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왜냐하면..그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난 살아가는 것 같았으니깐. 처음 보았을 때 난 꿈을 꾸는 것만 같았지. 내밀어 준 그 뽀얀 손을 잊을 수가
없었어. 순수한 호의로 나에게 도움을 주고자 손을 뻗어준 첫 사람이었어. 잊을 리가 없지. 첫눈에 반한다는 말 안 믿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난
그를 본 그 첫 순간에 반했던 것 같아. 처음 만나고 돌아섰는데 계속 잊혀지가 않는 거야. 그래서 다시 만나러 왔는데 마치 만났던 그 순간이
꿈이었는 양 사라지고 없었어. 하지만 꿈이라 여기기엔 증거가 남아 있었지."
"증거?"
마치 그 상대를 마주보고 있는 것처럼 재준의 시선은 아련히 서재 쪽을 보고 있었다.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듯 그 답지 않은 목소리는 나긋하고
아늑했다.
"예전에 말했던가, 서재의 내 책상 서랍에 있는 게 내 보물 1호라고 말이야. 그 사람에게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었어. 뭔지 알아?"
애인을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십대 소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재준의 입은 내내 웃으면서도 잘도 말을 하고 있었다.
사촌이 땅을 사도 이보다 더 배 아프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현수는 재준의 말을 자르지 않았다. 재준이 눈을 반짝이며 사랑하는 그 사람을
이야기하는 데 어떻게 자른단 말인가. 현수의 대답도 듣지 않고 혼자 문답을 하는 재준은 신이 나 있는 듯 보였다.
현수가 오랫동안 봐왔지만 오늘처럼 신나고 행복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크리스마스 카드야. 글씨는 또 얼마나 귀여운지, 하핫. 똘망똘망한 눈이 달린 귀여운 햄스터가 굴러다니는 것 같았어. 그리고 내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했어. 처음에는 화답을 못했지만 나중에는 용기가 생겨서 말해주었지.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나 처음이었어.
누군가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을 한 게 말이야. 그게 얼마나 가슴 떨린 행복한 기분이었는지..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부터 나와.
아마...그때 그 사람의 웃는 모습을 보며, 그 하얀 손을 만지며... 난 사랑에 빠져버린 것 같아."
"그..랬구나.."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만날 길이 없어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어. 그래도 만날 수 없었지.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만났는데.. 그때 결심했어.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사람 놓지 않겠다고 말이야.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사람 생각만 하고 그 사람만을 사랑해.
내가 숨 쉬고 있는 모든 매 순간 그를 사랑하고 그를 그리고 있어. 그는 내 심장과도 같은 사람이야."
긴 재준의 말이 끝나자 당장 찐한 러브스토리라도 듣지 않으면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덤비던 현수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멍하니 재준만 바라보았다.
기대했던 감정이 듬뿍 배인 말이었지만, 현수 본인이 재촉해서 들은 말이었지만 현수는 오히려 심장 부근이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이건 식당에서 은영을 소개하며 사랑한다고 말했던 때와 천지차이였다. 진지한 눈빛으로 말하는 재준의 말에는 한 톨의 거짓도 없었다.
정말이지 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심장이라도 당장 뚝 떼어줄 만큼 사랑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말따위는...싫었다.
"아..이런, 내가 너무 심각했나? 왜 그래 현수야."
"아..아니. 괜찮아."
"그럼 이제 나 용서해주는 건가?"
"으응.."
용서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뭣 때문에 여기 왔는지도 생각이 안 날만큼 현수의 머릿속은 혼돈의 아우성으로 가득 찼다.
"아..그러니깐.."
황망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둘러보았다. 뭔가 말을 해야 할 텐데, 자신의 이런 복잡한 심사를 덮어줄 일상적인 말꺼리를 찾아 현수는 두리번거렸다.
"야, 너 바지 좀 찾아 입어라."
"어? 이건.."
그제야 자신의 상태가 반라에 가깝다는 것을 인식했는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재준이 일어섰다. 새삼 압박되는 장신과 벗은 상체에서는 남자 냄새가
물씬 풍겼다. 놀란 것은 현수이건만 재준이 더 놀란 듯 뛰듯이 침대방으로 재준이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현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말이고, 몸이고 오늘은 어쩐지 재준이 위험하게 느껴졌다.
집까지 바래다준다는 재준을 억지로 말리고 재준의 아파트를 나서며 현수는 형준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심증이 가기는 하지만 확증이 필요했다. 예전에 은영을 바라보던 눈빛과는 완연히 다른 낯빛이었다.
마치..그가 없으면 당장에라도 죽을 것처럼 비장함마저 스며든 사랑 같았다. 진심으로 사랑하냐고 몇 번이나 되묻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었다.
재준의 대답은 뻔하지만 묻고 또 묻고 싶었다. 마치 믿기 싫은 것처럼..
- 어디야? 재준이한테 가봤어?
"응. 지금 나오는 길이야."
- 용서 해준 거지? 고맙다. 현수야. 역시 너 뿐.."
"형준아."
- 응?
"혹시..말이야."
- 그래, 뭐 말해봐.
"혹시..너 재준이한테 크리스마스카드 준 적 있어?"
- 크리스마스카드?? 그건 왜?
"이유는 묻지 말고 대답해 줘. 준 적 있어?"
지난 시간을 더듬는 형준이 글쎄..라는 말로 얼버무리기에 그 상대가 아닌가 하고 알았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형준의 말이
핸드폰으로 넘어왔다.
- 커서는 없지만 어릴 때는 몇 번 주고받은 적은 있었지 아마? 딱히 언제였는지 어떤 내용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말이야. 만들어주기도 했던 것
같은데.. 왜 우리 때 다 그랬..
"알았어."
-현수야, 무슨 일 있어?
"아니야. 내가 지금 전화한 거 재준이한테 말 안 해주었으면 좋겠다. 끊는다."
뭐라도 대답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냥 몸조리 잘하라고 여태 수선을 떨었던 것이 아무런 일도 아닌 양손을 휘저으며 도망치듯 재준의
아파트를 빠져나온 현수였다.
이제는 재준이 게이니 일반인이니 따위는 이미 생각 저 멀리 가버렸다. 중요한 것은... 재준이 그렇게 사랑하고, 그를 게이로 만들고 그에게 그런
행복한 웃음을 준 사람이..............바로 형준이라는 것이다.
심장이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진 것 같았다. 그 심장이 떨어진 부위가 말도 못하게 쑤셔왔다.
어째서 여태 단 한 번도 크리스마스카드라는 걸 주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가 화들짝 놀랐다.
이건 또 무슨 생각이람.
가라앉지 않는 불난 속이, 솟구치는 이 짜증이 더위 때문인양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태양을 한 번 노려보고서는 작게 욕설을 뱉어냈다.
"진짜 더워 미치겠군!!!!! 망할~!!!"
비 온 뒤 제법 시원해진 바람이 머쓱해져 현수의 곁을 휙 하고 지나가는 듯하다.
**
바래다주겠다는 걸 사양하고 또 사양하던 마음 한구석에는 '게이 친구'가 불편해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득 들어 그냥 보내주고 말았다.
처음과는 달리 이제는 그 상대에 대한 호기심마저 보이는 걸로 봐서는 그렇게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습관처럼 했던 집에
바래다주는 일을 거절한 내심에는 분명 작아도 거리낌은 있었을 것이다.
현수가 있을 때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엉망진창인 집안 꼴이 암만 봐도 어이가 없었다. 거기다가 위험스럽게 그 작은 삼각팬티라니..
이 끔찍한 사태의 범인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 녀석들이 자신을 걱정해서 이런 퍼포먼스를 벌린 것을 알기에 그냥 넘어가야 할 것이다.
기운은 없었지만 그래도 현수의 만남으로부터 힘을 얻은 재준이 기운 내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을 때 집 전화가 울렸다.
돌아가던 현수가 마음이 바뀌어 집까지 같이 가자는 말인가 싶어 주방에서 뛰어 거실로 와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그 상대자는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 사장님. 저 은영이예요.
"아.. 그래."
- 몸이 편찮으시다는 말을 듣고 식사나 챙겨서 잠깐 들를까 하고 전화드렸습니다. 뭐 드시고 싶으신 거라도...
"뭐??"
현수가 남기고 간 따뜻한 공기에 전염이 되어 나근나근하던 신경 줄이 반갑지 않은 전화에 활시위처럼 팽팽해졌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내가 몸이 불편하다니."
- 며칠째 식사를 거르고 있다는 말을..
"어떻게 여기 전화번호 알았나."
- 사..사장님.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걸리적거리게 하지 말라고. 내가 했던 말 잊었나?"
- 사장님..그게 아니라 전 걱정이 되어서..
"걱정? 누가 누굴 걱정해? 지금 네 년 걱정이나 해야 할 것 같은데. 잠깐 애인 모양새를 내어달라고 했더니 그세 자신의 입장을 다 잊어버리고
기고만장해졌군. 은영. 그만 둔다고 내 분명히 말을 했는데 잊었나? 원심각이라도 챙기고 싶다면 정도껏 해라. 더 이상 기어오르는 꼴 안 본다."
뭐라 우는소리를 하는 은영의 말을 듣지도 않고 전화기를 소리 나게 내려놓고 민을 바로 호출했다. 멀리 있지는 않았는지 십 분도 안 되어 민과
두식이 들어섰고 그 둘은 어지러워진 집안 분위기보다 더 살벌한 자신의 큰형님을 보고서는 바짝 긴장한 채 재준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눈도 맞추기 전에 재준의 로우킥이 빠르게 민의 허벅지를 밀어 찼다. 그리고 연결동작으로 회전을 하면서 두식마저 무너뜨리고는
그 발을 거실용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채 일 분도 걸리지 않은 시간에 두 사람은 서 있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곧 몸을 추스르며 무릎을 꿇은 두 녀석의 노려보는 재준의 눈빛은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내가 너희에게 손을 안 대는 이유를 알고 있겠지. 너희가 날 실망시킨 적이 없었데 다가 또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또한 내 우위를 무기 삼아
주먹을 휘두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나를 실망시킨다면 매튜고 뭐고 다 해산이다. 그건 너희 세 사람 역시 내 곁에 안 둔다는 말이다."
"혀..형님!!!!!"
영문을 알 수 없는 청천벽력에 민과 두식이 놀라 재준을 바라보았다.
"지금 밑에 애들 몇 명이지? 그 수가 얼마든 간에 다 물갈이시켜!!!"
"네!!"
이유를 묻고 싶지만 지금처럼 예민한 신경의 재준에게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기에 민은 그의 지시에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도무지 재준의 화와
명을 이해할 수 없는 두식이 용기 있게 재준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혀..형님.. 애들은 왜.."
"은영이 알고 있더군."
"네? 뭘 말입니까?"
"여기 전화번호는 물론이고 내가 며칠째 밥을 안 먹고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이러고도 내가 너희를 믿어야 하나?"
재준의 호통에 두식마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매튜의 전주(錢主)가 나인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고 해서 내 행동까지 그딴 계집한테 다 까발려져야 해? 응? 그럼 날 아는 사람들은 이 현수의
존재에 대해 다 알겠군그래!! 이러고도 너희들이 잘했다고 말할 셈이야!!!!"
"죄..죄송합니다. 형님. 말씀대로 애들 다 갈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민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차라리 누군가가 재준에게 칼을 들이대며 협박을 한다면 그는 같잖다는 듯 웃으며 호기 있게 손가락을 까닥
대며 오히려 그 위험한 상황을 즐길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냄새 나는 공기에 이 현수라는 존재가 노출이 된다면 그는 절대 참지 않을 것이다.
설사 아무런 일이 안 일어난다고 해도.
"은영이 심어놓은 녀석 찾아서 처리하고 이후 원심각 지원 모조리 끊고 회수할 거 다 회수해."
"네. 알겠습니다."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현수의 단호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을 보며 어떻게 다른 거짓말을 숱하게 있다고 말을 할 수 있는가.
조심스럽게 어지러워진 방을 치우는 민과 두식의 모습을 보며 재준은 아까 현수가 잡아주었던 오른쪽 손목 안쪽을 만지며 그때의 감촉을 더듬었다.
산재된 거짓말이 이제는 무겁게 재준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