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짓말 [15]
가을이 되자 유난히 선 자리가 많이 들어왔다. 물론 그 내면에는 현수의 자청도 많았다.
재준의 마음을 알고 난 후 재준과의 묘한 거리가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예전처럼 먼저 다가가 웃으며 등짝을 내리치는 걸로 모든 일을 덮어두기에는
현수의 좁은 속내가 아직 얼어붙어 있었다.
자신이 다가가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고운 마음보다는 흉한 마음이, 이해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샘이 먼저 나오는 것을.
동욱을 우연히 만난 것은 선을 봤던 혜영을 택시 타는 곳까지 바래다주기 위해 걷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등이 휘청거렸다.
"야!! 이 현수!!"
돌아다보니 지난 동창회 때 만난 동욱이었다. 현수를 우연히 보게 된 반가움과 함께 호기심 어린 시선이 혜영의 얼굴에 꼽혔다.
"애..인??"
"아..오늘 선 봤거든."
어차피 소개할 가치를 못 느끼기에 슬쩍 몸을 돌려 시선을 차단하니 혜영이 먼저 간다는 인사만 남기고 훌쩍 떠나가 버렸다. 제대로 인사도 못
나누고 아리따운 아가씨를 놓치게 된 동욱이 물주라도 만난 듯 반갑게 현수의 손을 꽉 잡아 이끌었다. 동욱이 현수를 이끌고 간 곳에는 약속을
했는지 지난번 친하게 술잔을 섞었던 동창생들 세 명이 선객으로 앉아 있었다.
지하이고 시끄러운 생맥주집이라 자신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재준이 생각나긴 했지만 마음도 불편했고 그리고 분위기상 전화할 엄두도 못 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몇 시간 마시고 떠들다가 습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멀었다고 잡는 친구놈들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집으로 향하는 택시에
몸을 싣고 시계를 보니 11시였다.
습관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하고 씁쓸하게 웃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곧 통화를 할 것이니 먼저 전화를 안 해도 될 듯싶었다.
집에 도착하니 맞이하고 있는 것은 대구에 엄마가 보낸 커다란 김치통이었다.
일전에 대구를 내려갔을 때 김치가 잘 익었다는 말을 흘려 듣지 않은 엄마가 보낸 것이다. 이 많은 양을 어떻게 처치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현수의
머릿속에 반짝하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재준에게 반을 떠넘기는 것이다.
일전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진태의 말이 떠올랐다. 왜 자신의 집에 성큼 쳐들어오지 않는지를 고민할 게 아니었다. 어차피 현수도 마찬가지였으니깐.
뭔가 이상해진 것 같은 우정을 되살리기 위해 현수는 싱크대를 뒤져 커다란 김치통을 씻고 거기에 김치를 반으로 나누어 넣었다.
현수 역시 재준의 집에 자주 가지 않았다. 변명을 하자면 그럴 기회가 잘 없었다. 주로 밖에서 만났었고 술을 마시게 되면 으레 과음을 한 현수의
집으로 오게 되었다. 김치를 빌미로 이 어색한 상황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을 하며 현수는 집을 나섰다.
택시 안에서 김치통을 끌어안고 재준의 집에 점점 가까워지자 홀가분하게 나가자, 하고 다짐했던 마음이 심숭생숭해졌다.
그 심숭생숭한 마음은, 재준의 전화도 떨떠름하게 받는 이유는 재준이 게이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다름 아닌 형준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친구입장에서 재준을 생각해본다면 오래된 짝사랑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힘내라고, 그 녀석 좋은 녀석이니 잘해보라고 격려를 해줘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런 말이 목 구멍에서조차 올라오지 못했다.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이 움직이지가 않는 것이다. 흐릿한 무언가가 현수와 재준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얇지만 함부로 깰 수 없는 막이 형성이 되어버린 것 같아 현수는 스스로 답답하기만 했다. 재준에게 말할 수도 없는, 자신 스스로 결론을 내려야
하는 재준의 사랑에 대한 자신의 모호한 변덕이 자꾸만 현수의 뒷덜미를 잡고 있었다.
자주 오지 않는다고 하나 위치마저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현수네 집에서 택시를 타고 밀리지만 않는다면 삼십 분내로 도착할 수 있는 동네였다.
지은 지 한 십 년쯤 된 24평의 아파트였다. 택시에서 내려 재준의 아파트를 물끄러미 한 번 쳐다보고는 재준이 사는 7층에 내려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에서 오른쪽의 9채 가운데 제일 마지막 집이 재준의 집이었다.
밤 늦은 시간 복도에 울리는 자신의 구두발자국 소리가 무슨 괴기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음산하게만 들려 보호장비인 듯 김치통을 꼭 끌어안은 채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느닷없는 방문에 놀라면서도 반길 재준의 얼굴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새어나갔다.
가까이 갈수록 뭔가 이상했다. 재준의 바로 옆집인 708호의 현관문을 지날때 즈음에야 709호의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이 열려 있으니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평소 문단속을 허술하게 하는 녀석이 아니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709호의 문 앞에 다다랐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생각은 했지만 게의치않고 김치통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는 손을 대신해 발로 열려진 문 틈을 잡고 문을 열었다.
"주...준?"
다가가니 문이 조금 열려있는 게 보여 재준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현수가 들고 있던 김치통이 쾅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뚜껑이 열리면서 그 충격으로 뚜껑이 열리고 벌건 김칫물이 바닥을 적시었다. 하지만 현수의 눈은 앞의 두 남녀에게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어머!!!!!!!"
여자는 비명을 질렀지만 현수와 재준은 입만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볼 뿐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막 삽입 직전인듯한 하의만 벌거벗은 재준의 굵은 심볼이 장애 하나도 없이 눈에 들어왔다. 재준의 아래에 있던 풍만한 가슴의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가슴을 가렸지만 여자의 벗은 몸은 현수의 시선을 빼앗지 못하고 있었다.
"혀..현수야.."
두근두근..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재준에게 흘러나오고 재준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나며 그것을 옷 속에 넣는 동작까지 멍하니 바라보다가 바지의 자크마저
채우고 어색하게 손을 뻗는 재준의 동작에서야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서 뛰쳐나왔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추어지지 않는다.
[띠리리리리링~]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왔는지 기억할 수조차 없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문부터 잠그고 차가운 현관문에 기대어 호흡을 고르고 있을 때 차임벨이 울렸다.
누군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방문자는 끈질기게 벨을 누르고 있었지만 현수는 문을 열 수 없었다. 붉어진 얼굴을 진정 시킬 수가 없다.
자주 하지 않던 방문이 오늘은 연달아 이렇게 두 번씩이나 하게 될 줄 몰랐다. 한 번은 현수가 재준의 집을,
이번에는 재준이 현수의 집을 예고도 없이 방문한 것이다.
"재..준아."
끊임없이 울리던 차임벨이 멈추었다. 열쇠는 있지만 걸쇠에 걸려 들어오지 못하고 있던 재준이 작은 틈새를 눈으로 훌으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현수를
불렀다.
"현수야. 현수야~ 문 좀 열어봐. 응?"
문을 열면, 그러면?
누가 잘못한 것도 없고 용서할 일도 없다. 사과를 하자면 그런 시간에 연락도 없이 들이닥친 자신이 사과를 해야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현수는 재준이 무슨 배신이라도 한 듯 괘씸했고 심장은 아직도 현수의 의지대로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자신도 몇 번 가보지 않은 공간에 처음 보는 여자를 들인 것부터, 침실도 아닌 현관문턱에서 성급하게 바지부터 내린 재준의 욕망도 참을 수 없을만큼
화가 나는 것이다.
화낼 일도 아닌데, 그냥 머쓱하게 웃으면 그만일 일을 가지고 호들갑스럽게 자신이 수선피는 것 같았다.
알면서도 진정되지 않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심장이 진정되지 않는다.
"괜찮아? 응? 괜찮은 거야? 현수야?"
12시가 넘은 시간이건만 재준의 목소리를 컸고 걱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응. 괜찮아. 뭘 그런 일로... 다시 오냐? 오길."
"하아..정말 괜찮아?"
"그럼~ 화끈한 실사에 좀 놀랐다는 것뿐이지 달리 뭐가 있겠냐?"
태연한 목소리에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다, 생각하면서도 현수의 눈 앞은 친구의 벗겨진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손을 붕붕 휘저어 지우려고 해도 신기루처럼 몽롱하지만 연기처럼 사라지지도 않았다.
"이 걸쇠 좀 풀어. 잠깐 들어가자 응?"
"얀마, 나 피곤해. 너 집에 그 아가씨 있을 거 아냐. 돌아가."
"없어. 보냈어."
"이런 나쁜 놈. 얼른 못 돌아가?? 그런 황당한 일 겪었는데 그냥 돌려보냈어? 이 매정한 놈 같으니. 당장 돌아가!!! 가서 아가씨한테 나 대신 사과
좀 해."
내심 섹스를 하려고 했던 그 여자보다 자신이 더 중요하게 여긴 재준의 태도가 마음에 들어 긴장되었던 마음이 슬금 풀리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말로는 이렇게 달려와준 재준이 고마워 집 안으로 들이고 싶지만 아직 지워지지 않은 신기루때문에 조심스러워 그를 물리쳐야만 했다.
"그럴 필요가.."
"얼른 안 가? 예의가 아니잖아. 예의가!!!"
짐짓 큰 소리를 내는 현수의 소리에 그제야 갈 마음이 생겼는지 밍기적 거리며 재준이 움직이는 소리를 현수는 들을 수 있었다.
"전화할게."
"벌써 12시가 넘었는데 뭘. 나 바로 잘 거야. 내일 전화하자. 아참, 김치는..어쩌지?"
"내가 정리할게."
정리도 안 하고 여자에게 위로도 제대로 하지 않고 바로 뛰어왔는 게 틀림이 없다. 현수는 그렇게 등을 떠다밀다시피 하면서 재준을 문 안으로
들이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종종 있는 일은 분명 아니지만 자신 역시 숱하게 여자들과 잠자리를 했고 재준 역시 말은 안 했지만 그랬을 테다.
공식적으로 인사를 받은 사람은 은영뿐이었지만 그만한 인물에 여자들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가 게이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그건
형준에 대한 마음 때문인 것 같았고 형준이 비록 게이라고 하지만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했었다.
그래서 말을 안 꺼낸 것 같지만 관계는 남자보다는 거의 여자와 한다는 말을 얼마 전에 들었었다. 그러니 상대가 여자던 남자던 성인인 재준이 다른
상대와 섹스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다..거기다가 남자와의 섹스를 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불쾌했다.
그리고 현수는 그 불쾌한 자신의 마음이 더 기분이 나빠졌다.
"아..역시..나 이상해졌어."
사라지지 않은 신기루를 지우는 것을 포기한 채 현관턱에 털썩 주저 앉았다.
"이건 마마보이도 아니고 시스터 콤플렉스도 아니고 뭐야, 프랜드쉽 콤플렉스냐? 바보. 이 현수. 젠장!!!!!"
그리고 그날 밤 현수가 당부했던 대로 재준의 전화가 없자 이번에는 전화기에 대고 재준을 욕하면서 현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결국 뜬 눈으로 밤을 새운 현수였지만 자신이 혼돈에 빠진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
문을 열고 들어서니 불 보고 달려드는 나방떼처럼 짙은 담배연기가 전기료를 야금 잡아먹고 있는 팬이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낯익은 방문자에게 확
덤벼들었다. 그리그의 페르귄트의 조곡은 슬프게 기다림으로 점철된 사랑을 눈물로 호소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내심은 사랑이 아닌 욕망뿐일 것이다.
몇몇 낯익은 얼굴이 아는 체하며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재준은 일별도 하지 않고 스툴에 엉덩이를 걸쳤다. 별말 없이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기심
어린 눈동자와 함께 다가오는 남자를 눈으로 흘기며 바라보았다. 막상 궁해서 오긴 했지만 연체동물인양 흐느적거리며 다가오는 섹시한 척하는 것들이
눈에 찰 리가 없다. 의도된 도발이 섹시해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재준의 취향은 의도된 도발이 아닌 무의식 중인 도발에 환장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예를 들면, 잠결에 무심코 흘러내리는 시트 사이로 불쑥 드러난 하얀 허벅지라던가.. 조금 깊게 파인 스웨터가 숙여진 상체로 인해 갈색빛 유두를
살짝만 보여주고 앙큼하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거라던가.. 짐짓 화난 표정을 하고 있으면 어쩔줄 몰라 눈 아래에서 왔다 갔다 분주히 움직이며 이쪽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피는 그 귀여운 행동에서도 종종 발정하곤 했다.
후...이래서야 원..
달은 몸을 식히기 위해 발걸음 하지 않던 곳까지 와 놓고선 또 생각의 꼬리를 그에게로 향해 간다.
섹시라는 단어가 키워드가 모니터상에 쳐지면 저절로 그가 떠오르고 연이어 전혀 연관성이 없는 단어를 보아도 그가 생각이 난다.
그 어떤 단어도 종결은 한 이름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동시에 떠오르는 두 단어는 결혼과....사랑.
당장 결혼할 것이라고 반지부터 성큼 맞추던 그의 사랑이 사라졌으니 당분간은 조용하겠지만 그것이 폭풍전야의 고요함임을 모르지 않는다.
어차피 그는 결혼을 꼭 하고 말, 진정한 일반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사랑을 우정으로 겉포장한 비열하고 용기없는 로맨티스트다.
기다림을 노래하며 늙어버린 솔베이지의 흐느낌이 전이가 된 듯 우울해진 상념은 이 바를 찾은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게 하고 있었다.
손으로 휘저으며 거절을 하자 용기를 그러모아 말을 건넨 게 틀림이 없을 동그란 얼굴이 울상을 짓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가 아닌 다른 남자와의 하룻밤 상대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에 걸맞은,
아니 그를 떠올릴만한 사람이 어디 쉽게 있겠는가. 그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쉽사리 눈에 뛸 리가 없다.
재준은 차라리 여자를 고르는 게 나을 뻔했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자신에게 접근해오는 낯선 남자를 또 거절하였다.
"세상에..이게 누구야?"
하이톤의 맑은 목소리에 재준이 고개를 돌리니 기쁨을 하나도 숨기지 않은 작은 말간 얼굴이 화사하게 웃고 있는게 보였다.
"재준씨..어쩐 일로...아.."
은행에 가는 일은 은행에 볼 일이 있기 때문이고 숟가락은 밥을 먹기 위해 들고 있는 것일 테다. 반색을 하며 달려들던 도영이 멈칫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보며 어차피 접었던 마음 이대로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을 하며 대꾸도 하지 않고 재준은 스툴에서 일어섰다.
"자,,잠깐만!!"
재준은 무심하게 자신의 팔을 잡은 도영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의도를 알만하지만 모르겠다는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저... 나..나..는??"
아마 '나와 오늘 밤 보내는 것이 괜찮은가요' 라는 의미일 테다.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쯤은 도영의 직접적인 고백을 떠올리지 않아도 쉽사리 알
수 있다. 열기를 품은 반짝이는 눈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다른 남자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마음까지 헤아릴 여유가 재준에게는 없었다.
아니, 여유가 있다고 한들 어쩌겠는가. 딱히 내키지도 않은 그가 아닌 남자와의 잠자리를 위해 친구마저 잃을 수는 없지 않은가.
"두 사람 사귀기로 한 거 아니었나?"
"네?"
"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어."
"저..그게.."
"일전에 수고를 끼쳤더군. 앞으로 내 일에 끼어드는 일이 없기를 바래. 물론 보복할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내 일에 끼어든 보답이라도 해야겠지?"
난처한 기색을 보이는 도영을 앞에 세워두고 말도 없이 핸드폰을 꺼내 형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기 샤크다. 와서 네 물건 데려 가."
뜬금없는 말이었건만 금세 그 내용까지 파악한 형준의 괴성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뭐야?? 이놈의 자식을.. 나한테는 쇼핑하러 간다고 해 놓고선 샤크로 갔단 말이지. 도영이. 너, 오늘 죽었다."
도망가는 도영의 뒷덜미를 잡자 놓아 달라는 애원의 눈빛이 희미한 실내등에서 애처롭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가 아닌 다음에야 타인의 애원에 마음이
움직일 재준이 아니었기에 그를 한 손으로 끌며 샤크를 빠져나왔다. 그동안 형준은 지금 출발한다고 미안하지만 그를 좀 잡아 달라는 염치없는
부탁에 들어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을 발견하고 다가오는 두식에게 양도하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내가 뭣 하러."
- 야!!! 친구란 놈이 내 부탁 하나 못 들어주냐? 십 분이면 간다잖아!! 십 분!!!"
"두식이한테 맡겼다. 찾아가."
- 잠깐.
두식에게 차 키를 건네 받고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시동을 걸었는지 안 걸었는지도 모를 만큼 부드러운 진동이 있은 후 재준의 차는 샤크의
주차장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너...왜 샤크에 간 거야?
"끊어."
- 재준아.
치부를 다 드러낸 친구는 이게 문제다. 하나의 행동으로 숨겨진 열 가지의 마음을 훔쳐볼 수 있다는 것. 때로는 모른척 해도 좋으련만 자신의 일에
감초 노릇을 톡톡히 하고픈 친구에게는 알고도 눈 감아 준다는 선행심은 없는 모양이다.
- 욕구불만이냐?
"........."
- 네가 남자를 찾을 만큼... 욕구불만이야?
"........."
마음을 맡겨버린 친구의 이런 점이 단점이긴 하지만 장점이기도 하다. 대꾸를 일일이 하지 않아도 된다. 기분이 별로일 때는 종종 이렇게 입을
다물어 버리는 자신의 습성에 익숙한 친구는 이미 재준과 대화중이다.
- 원나잇 상대....못 구했지?
"......."
- 집으로 갈 거야?
"......."
- 집으로 여자 한 명 보내줄게. 너.. 참다가 왔을 텐데 괜히 참지 마라. 풀어야 또 한동안 견딜 거 아냐. 뭐, 풀리는 게 내일 아침이면 다시 쌓이게
되겠지마는 그래도 안 푸는 것보다는 낫겠지. 보낼게. 집으로 곧장 가. 알았지?
"......."
- 재준아 알았지? 응? 바로 집으로 가. 다른 데로 새지 말고. 현수네 집으로도 가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가. 바로. 응?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그의 걱정어린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대꾸도 없이 폴더를 닫았다. 우울하다. 여기서 더 이상 무슨 자극이 있다면 애써 다독이며
숨겨 두었던 야수가 오랜 금기를 깨고 눈을 뜰 것 같아 집으로 향했다. 이런 날 그를 만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벌써 오 년이나 지난 일이건만 삼촌은 여전히 배신감에 부르르 떠는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 미친놈. 잘하는 짓이다. 응?
오래간만에 듣게 된 삼촌의 목소리에 반가움의 인사가 건네지기도 전에 싸늘한 일갈이 재준의 귀를 덮쳤다.
- 넌 뭐 하는 놈이야!!! 어? 지 사랑이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말하던 새끼가 왜 그렇게 물러 터졌어!!!! 너 그러고도 형님 아들이라고 어디 가서
씨부리기만 해!! 당장 달려가 네놈의 목부터 따버릴 테니깐!!!
- 사..삼촌?
- 나한테 그만큼 얻어터지면서도 신음하나 안 흘리던 네 깡으로 왜 못 당겨!!!
재준의 품으로 당기라고 한 목적어를 인식하고서 재준은 왜 갑자기 삼촌이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오늘 내가 뭘 봤는지 아냐? 이 새꺄!! 내가 오늘 뭘 봤는지 아냐고!!! 오늘 내가 신라호텔에서 누굴 봤는지 아냐고!!!!
오후 내내 자신을 괴롭히던 상상의 공간이 삼촌의 레이더에 걸려 버린 모양이다. 재준은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 전화로 이야기하길
망정이지 삼촌이 앞에 있었다면 아마 삼촌은 재준의 멱살을 잡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멱살로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먹부터 먼저 날렸을지도
모른다.
- 아씨는 무슨 개뿔이 아씨!!! 이 여자 저 여자한테 붙어다니면서 네놈한테는 암내만 풍기는...
- 삼촌!!!
비록 친혈육처럼 따르고 믿는 사부라 할지라도 건드리지 못하는 성역이 있었다. 날카롭게 지적을 하자 당장에라도 재준이 있는 곳으로 달려올 것
같았던 삼촌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 알고는 있었는 거냐
현수의 일을 재준이 모를 리가 없다. 오히려 아는 게 병이다.
- 알고도 선 보라고 보내준 거냐? 왜 아직도 그 모양 그 꼴로 사는 거냐? 왜 그렇게 마음에 두고 있는 거야? 네 사람 안 된다 싶으면 일찌감치
포기를 해야지. 아니면 네 사람으로 만들던가. 왜 병신처럼 그렇게 있어!!
오히려 욕을 하며 큰 소리치던 삼촌이 더 편했다. 걱정이 잔뜩 서린 목소리로 그렇게 물으면 대답을 안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재준에게는 대답할
거리가 없었다.
오늘 선을 본 여자의 이야기를 수다스럽게 할 현수의 전화를 기다리던 저녁 무렵에 걸려온 삼촌의 전화로 기분이 더 아래로 치달았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렸던 전화는 10시가 넘어서도 오지 않았다. 오후 1시에 만난다고 했다. 그러면 보통의 그를 생각하면 빠르면 4시 늦으면 6시면 전화가
올 시간이었다. 그는 물론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배려를 한다고 생각해서 상준도 붙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 누구와 함께 있는지도
재준은 몰랐다. 그 아무것도 모르는 사실이 검은 먹구름이 되어 재준의 가슴을 온통 뒤덮었다.
여자 좋아하는 놈이니 마음에 맞는 여자 만나 어느 호텔에서 그 야한 허리를 흔들며 여자의 깊은 곳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하며 재준도
전화를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그가 하는데 자신도 못할 리가 없다. 마치 복수라도 하듯 게이바로 갔지만 역시 성과는 없다.
그게 자신과 그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생각을 하며 재준은 집안으로 들어섰다. 거실로 들어서니 희망처럼 불을 밝히던 현관 등이 꺼지고 검은 어둠이
재준의 몸을 덮쳤다.
재준은 현수가 아닌 남자와 섹스를 하지 못했다.
겨우 고르고 골라 남자를 데리고 시도를 해봐도 그 욕망이라는 게 생기질 않았다. 그의 모습과 비슷한 낯선 남자에게 키스를 하고픈 마음도 들지
않는데다가 몸도 만지기 싫었다. 몸도 만지기 싫은데 섹스할 수 있을리가 없는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남자를 돌려보내고 덩그러니 혼자 호텔
침대에 누워 집에서 그러는 것처럼 그를 안주 삼아 자위를 했었다. 그와 함께 이 호텔에 와 있는 거라고 서글픈 몽상을 하면서 손을 움직였던 적이
몇 번인가.
갑자기 울리는 초인종소리에 재준은 화들짝 놀라 문부터 성급히 열었다. 그가.. 왔을지도...
하지만 열려진 문에는 화사한 미인 한 명이 서 있었다. 들어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가벼운 눈인사와 함께 성큼 안으로 들어오더니 구두를 벗고
거실로 발을 옮긴다.
"어머? 어두운 데서 뭐하고 있었어요?"
거실 불부터 밝힌 여자는 그제야 현관에 장승처럼 서 있는 재준에게 다가와 웃음과 함께 옷을 벗기 시작했다. 벌거벗은 여자의 등 뒤의 시계는
11시 30분으로 치닫고 있었다. 아직까지 전화가 없는 괘씸한 현수지만 12시의 전화를 그래도 해야 할 테다.
"박 사장님께서 특별히 당부하시더군요. 화끈하게 사장님 몸 좀 풀어 드리고 오라구요."
탄력 있는 가슴이 출렁거리며 뽀얗게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현수가 연락도 없이 재준의 집에 덜컥 찾아온 것은 한 번도 없었다.
오게 되면 같이 왔었고 주로 밖에서 만나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왜 그런 기대를 했는지.
재준은 오늘 하루는 확실히 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현수와 겹쳐져 안 되지만 여자라면 언제든지 배은망덕한 아랫놈을 세울 수 있으니
문제도 없다. 형준이 직접 지목했을 법한 화장기 없는 얼굴이 수수하지만 접히는 눈매가 화사한 여자의 가슴을 덥석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