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거짓말 [17] (17/28)

하얀 거짓말 [17]

"누나-"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떠맡은 소심한 말단직원처럼 기나긴 한숨과 함께 들어서던 현수는 반기는 은수에게 인사를 건네기전에 

호소하듯 누나의 이름부터 불렀다.

"어라? 상태가 불량해 보인다?"

"어서와 처남."

진태의 권유로 신발을 벗고 들어서 푹신한 거실의 소파에 지친 몸을 묻었다. 진태가 시원한 주스 한 잔과 함께 숨기지 않은 호기심을 두 눈에 가득 

담고 현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는 거니?"

걱정스러워하는 누이를 한번 보고 언제든지 카운셀러를 자청하던 진태를 한번 보고 어두워 바깥의 풍경 대신 거실의 실내를 반사하고 있는 거실창을 

보면서 밖에 버려 두고온 재준을 생각했다. 복잡하기만한 정리 되지 않은 마음속을 비워볼려고 한숨을 내뿜어도 마음속은 여전히 탁하기만 하였고 

예민해진 촉각은 실내에 머물지 않고 밖을 서성이고 있는 듯 했다.

집에는 잘 들어 갔는지 도망치듯 은수네 집으로 와 버렸는데 놀라지는 않았는지, 아니 다른 그 무엇보다 신경쓰이는 것은 눈치가 빠른 그가 혹시 이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속을 훔쳐보고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이다.

쓸모없는 짐짝을 버리듯 버리고 도망쳐왔지만 자신이 더듬어보아도 평범하지 않았던 자신의 행동에 재준이 놀랐을 걸 생각하니 안 그래도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무슨 일이야?"

"누나-"

"뭔데 그래?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나답지 않다..그래, 나답지 않아.. 그래, 이건 정상적인게 아니야. 아니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자신만의 생각의 세계에 갇힌 채 중얼거리는 현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태의 물음에 은수의 놀란 눈이 진태로 향했다.

"아니, 두 사람이라니? 당신 애가 왜 이러는지 뭐 알고 있는 거야?"

"뭐..알고 있다기 보다는 짐작하는 거지."

"뭘?"

"글쎄"

"무슨 말이야!! 뭔데? 당신 뭘 알고 있는데?"

"그건 처남한테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니야?"

"어, 그렇지. 현수야!! 뭐야? 너 무슨 일 있는 거야? 두 사람이라니, 너 저번에 만나던 아가씨랑 헤어졌다며? 또 누구 사귀고 있는 거야?"

"사귀긴 뭘 사겨!!!! 그런거 아니야!!!"

버럭 고함을 지르던 현수였지만 걱정으로 물든 은수와 진태를 보며 바로 사과를 했다. 비록 자신의 정신상태가 어지럽다고하나 아까까지만 해도 

구원처럼 여겨져 반기며 은수네 집으로 향했던 자신이 아닌가. 이제와서 아무 일도 아니다 라는 말로 돌아갈 수도 없어 현수는 어깨를 들썩이는 걸로 

복잡한 마음을 털어 놓기로 결정했다. 뭔가 꿍하니 복잡한 것을 가슴에 품는다는 것은 성격에 맞지 않았다. 비록 고민제공자에게 털어놓는 과감함은 

없지만 그래도 다른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주변머리정도는 현수에게 있었다.

"누나...나.. 이상해졌어. 이건 정상이 아니야."

"뭐가?"

"몰라. 나도 모르겠어."

"야! 이 현수. 너 누나 약올리고 있는 거야?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무슨 일인데 그래? 응? 말해봐."

"그게.."

"재준이라는 그 친구때문에 그러지?"

자신을 바라보는 두 쌍의 눈을 보며 진태는 확인하듯 현수에게 다시 되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긍정에 은수는 재준이라는 이름을 씹다가 그 이름이 

현수의 고등학교 동창친구임을 알게 되었지만 그게 왜 현수에게 고민의 대상이 되는지 몰라 현수를 다그쳤다. 

처음에는 당장이라도 하소연을 줄줄 늘어놓을 것처럼 보따리를 풀던 현수였지만 막상 멍석을 깔으니 모호한 단어로 흐리멍텅하게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럴것이 현수 본인도 자신의 상태를 뭐라 정의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좀 이상해."

"아, 글쎄!! 도대체 재준이라는 친구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재준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이상한 건 나야."

"그러니깐!!! 네 뭐가 이상한 건데? 너 누나 혈압으로 쓰러지는 거 볼래? 확!! 시원하게 이야기 못해? 숨 넘어가겠다. 이 놈아!!!"

"오늘 영화보러 갔는데 말이야.."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반짝이는 두 쌍의 눈동자를 마주보고 말을 할 용기가 없어 시선을 돌려버린 현수의 입에선 거침없는 갈등이 쏟아져 나왔다.

"이건..마치 연애인을 좋아하는 여고생이 된 것 같아. 그 놈처럼 편한 친구 없었는데 무지 불편해졌어.

 의식된다고 할까, 아아..몰라. 나도 모르겠어. 내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아니, 어쩌면 갑자기가 아닌지도 몰라. 신경쓰여 미치겠어!!! 

내가 좋아서 보자고 한 영화였는데 영화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오죽하면 보다가 뛰쳐 나왔을까.....이건 이상해!!! 누나!! 나 이상해졌어!!! 어떻게 해!!!!"

뻘쭘해서 시선을 돌리던 현수의 눈이 은수를 향해 당장 해결해 달라는 듯 조르고 있었다.

"의식된다?? 난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걸? 뭐가 의식된다는 말이야?"

설명을 들어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드는 은수의 곁에서 진태는 역시,라는 말을 뱉았다.

"사랑에 빠졌군." 

라는 자신의 말에 놀란 아내와..

"미쳤어???"

그 단어 자체가 어색하기만 하는 사랑새내기 처남이 

"예에???????"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기에 진태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친구사이야!! 사랑은 무슨 사랑!!!"

"그 친구가 성적으로 의식된다는 말이지? 곁에 있으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작은 접촉에도 움찔 놀라게 되고 그래서 영화에 집중도 못했다는 말 아니야?"

"마..맞긴 하지만..."

"세상에.. 너 미쳤구나??"

살인죄라도 지은 듯 고개를 숙이는 동생을 보며 은수는 기가막혀 그의 머리를 쥐어 박았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결혼하기만 손꼽아 기다리시는 네 어머니는 어쩌고!! 네가 생각이 있는 애야 없는 애야!!! 응?"

"나..나도 몰라!!!! 사..사랑까지는 아닐..."

어머니란 말에 흠찟 놀라며 반박을 하던 현수의 말꼬리가 흐릿해지고 말았다. 은수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랑이라니..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진태가 오버해서 생각하는 것이라고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 심심치않게 나오는 말이라서 그렇게 억측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 그런 

맬랑꼬리한 감정의 이름은 도데체 뭐란 말인가!!!!

하지만 그 단어가 촉매역활이라도 한 듯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지나친 호감, 깊은 우정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친구사이에 흔히 있는 말다툼조차 제대로 해 본적이 없었다. 재준의 너그러운 양보도 많았지만 그건 현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저 재준이 좋았다. 싸우고 말고 할 여지도 없었다. 여태 우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랑이란다.

'사랑'이라는 단어에 거부감 대신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는 것을 현수는 이제는 똑바로 알 수 있었다.

"재준이라는 친구, 사랑하니?"

"자..자형.."

"그런 거야?"

"모..르겠어요. 사랑...이 어떤건지..잘 모르겠어요"

사랑한다는 말 많이 했었다. 횟수를 셀 수 없을만큼 했었다. 최근에는 정희한테도 몇 번이나 했었고 그 전에 만났던 여자들에게도 했었다. 

현수에게 있어서 사랑이라는 말은 가벼운 단어는 아니었지만 무거운 단어도 아니었다. 그런데 재준이 상대가 되고 보니 너무 무거운 단어가 

되어버렸다.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걸림돌이 너무 많다. 일단 남자였고 친구이지 않은가. 어떻게 남자고 친구인 상대와 '사랑'이라는 단어가 이콜이 

될 수 있는지 그것이 현수가 가진 딜레마였다.

"한동안 안 보면 보고 싶어싶지"

"네"

"재준이 다른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거 보면 속도 상해?"

"아...네."

"그리고?"

"네?"

"그리고 어떤 경우에 속이 상했어?"

"................형준이라는 친구가 있어요..저보다 더 오래된 친구인데 이해하자 하면서 세뇌를 시켜요. 그래도 두 사람이 친할 걸 보면...여

기가 아파요."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짚은 현수의 생각은 재준을 더듬고 있었다.

"저한테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재준이 게이라는 말은 생략했다. 

"저..거짓말 싫어하는 거 아시죠? 그걸 다른 그 누구보다 제일 잘 아는 녀석이 재준이었어요. 그가 거짓말했을 때 자그마치 십 년이나 절 속였다는 걸 

알았을 때 제가 뭘 가장 속상해했는지 아세요? 거짓말을 했다는 것,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아니었어요. 제가 재준에게 고함을 지르며 당장 절교라도

 할 듯이 화를 낸 것은... 그가 날 무시했다는 것 때문이었어요. 거짓말이 문제가 아니라 절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때문에요. 그 거짓말의 

내용이 그런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면 어쩌면...전 재준이 제게 거짓말을 했다는 걸 용서해주었을지도 몰라요. 다른...사람을 사랑한다고 했어요. 

준이가.. 마치 그 사람이 당장 네 심장을 달라고 하면 머뭇거림없이 제 손으로 심장을 팔 것처럼 ..... 자형...."

진태에게 말하면서 현수는 자신의 혼돈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랬다. 거짓말을 한 것,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 자신의 존재가 거짓말을 해도 

되는 가벼운 상대로 비추어진 것이 속상했다. 그래서 더 화를 내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솟구쳤지만 자신때문에 식음을 전폐한다는 말을 듣고 그 

모습을 보고서야 마음이 풀렸었다. 물론 재준의 사랑을 확인하는 아픔도 주었지만.

"그래."

"그때, 그 말을 듣었을 때 그럼 나는 어쩌라고, 라는 말이 입 밖에 나올려는 걸 억지로 참았어요. 다른 건 몰라도 재준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건 

듣기도, 보기도 싫었어요!"

상상되어지는 그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부정하듯 머리를 젖는 현수를 내려다보며 진태는 그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너무 친하게 지내서 그래. 여자 친구들끼리도 그런 경우 많아.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 애인이 생기면 샘도 나고 질투도 하고 그러는 거야. 

사랑과 우정의 질투를 착각하지마!!"

은수의 자르는 듯한 단호한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은 지 현수는 싫다는 말만 내뱉았다.

그래, 싫었다. 재준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이, 카드인지 뭔지를 떠올리며 짓던 사랑스러운 표정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때문에 지어지는 

얼굴이라는 게 싫었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처남의 경우는 조금 달라."

"뭐가 다르다는 거야?"

"심장의 박동수가 달라. 그렇지 않아?"

"......누나..."

"심장의 박동수라니. 걔를 보면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는 말이야? 정말이야?"

"나...좋아하나 봐...."

"미쳤어? 너 미쳤어??? 그래, 좋아는 하겠지. 친.구.로.서!!!!!"

"그것보다 더 가까이 가고 싶어. 친구는..너무 가벼워. 내 존재가 더 무거워지길 바란다고. 재준이의 사랑에 박수를 쳐주고 축복해주고 싶은 마음 

털끝만큼도 없어. 다른 사람을 위해 심장을 파는 꼴 따위는 절대 이 두 눈으로 볼 수 없다고!!! 다른 사람이 건네준 카드따위는 다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 내가 다 찢어버릴 거라고!!! 내가 준 것만 입고 내가 준 것만 보물 1호가 되고 2호가 되었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에게 먼저 전화해 

술 마시자는 말 하는 꼴 다시는 보기 싫다고. 내가 먼저... 뭐든지.. 내가 먼저였으면 좋겠어!!!"

잔잔하던 호수에 커다란 바윗돌이 빠진 것처럼 사랑의 파동이 인식되자마자 욕심이 일파만파로 온몸에 퍼졌다.

처음 동창회에서 형준과 다정한 모습을 보이던 재준에게 느꼈던 감정이나 은영을 소개 받았을 때 또 낯선 여자와 섹스를 하려고 하던 재준을 보았을 

때 받았던 충격들이 다 한 점으로 귀결되어졌다.

사랑받고 싶다. 

그 다른 어떤 누구보다 더 가까운 사람으로,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것이다.

"남자랑 너...섹스 할 수 있어?"

"뭐??"

"섹.스 말이야. 너 이성처럼 좋아한다는 말이잖아. 설마 이제와서 플라토닉이니 어쩌니 그런 말을 할 셈이야?"

"몰라. 하지만... 재준이라면...."

가벼운 신체접촉이 불편했다는 것은 그를 육체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는 말이 되었다. 그와 잡은 손, 그와의 키스...생각만 해도 심장이 후끈 달아 

올랐다. 아직까지 섹스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재준이라면 불쾌감이 안 들것 같았다. 현수는 재준과 함께라면 ... 뭐든지 가능할 것 같았다.

"정신차려!! 이 현수. 네 어머니를 생각하고 네 미래를 생각해보라고. 개방되었다고 해도 이건 아니야. 이건 네가 평생 짊어질 굴레라고. 절대로 

완벽한 사랑이 될 수 없어. 절대로 될 수 없다고!!!"

"왜?"

당연한 말에 질문을 하는 남편의 말에 은수의 눈은 동그랗게 떠져 반박을 했다.

"당연하지!! 남자라고. 남자!! 현수가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은 재준이라는 친구라고!! 남자야! 알아?"

"그럼 내가 모르고 그런 말을 했을까봐? 당신이 생각하는 완벽한 사랑의 기준이 뭔데?"

진태는 진지하게 아내에게 물었다. 현수에게 말하듯 아내에게 차근차근 진태는 자신이 생각하는 완벽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완벽한 상대와 하는 사랑이 완벽한 사랑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 완벽한 사랑이란 불완전한 상대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사랑으로 그 결점까지 사랑의 

이유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게 완벽한 사랑이야. 당신이 그걸 모른다고 하지 않겠지?"

"당신.."

생각하기 싫은 과거의 잔재가 불쑥 튀어나와 어둡게 안색을 굳힌 아내의 여린 입술에 진태는 가볍게 입을 맞추는 것으로 자신의 사랑을 전달했다. 

은수는 어린 시절 강간당한 기억때문에 타인과의 접촉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며 감정까지 차단시켜며 살아 왔었다. 대학교에서 진태를 만나기전까지는.

"난 처음부터 생각했었어.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의 결점이 나에게는 결점이 아닌 당신이 성장하는데 필요했던 영양분이라고 말이야. 

물론 다시는 생각하기 싫은 끔찍한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당신의 결점으로 보이지 않았다고. 당신은 스스로 자신의 결점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거부했었지만 난 당신이 가진 모든 점을 사랑했어. 그 과거까지도 말이야. 내가 곁에 있어주지 못한 게 한이지만 그게 당신을 사랑하는데 

방해가 될 수는 없었어."

"당신.."

"현수야."

"네."

"난 네가 그 친구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 친구가 남자라는 이유로 반대하지는 않을 거다. 평범하지 않다고 해서 네 사랑이 가벼운 건 아닐 테니깐 

말이야. 네 감정도 아직 정확하게 선을 그은 건 아닌 것 같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말해주고 싶어. 사랑이란 광활한 대지와도 같은 거다.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지. 국경도 이념도 나이도 그리고 성별도 다 포함시킬 수 있는 넓은 대지라고 생각해. 네가 그 포용을 거부하고 단지 그가 

같은 성별을 가졌다는 그 이유를 결점으로 보고 사랑을 거부한다면 네가 평생 후회할거라고 내 장담하지. 사랑이라는 감정은 흔히 쉽게 지나쳐가는 

바람과 같은 게 아니거든. 운명과도 같은 작렬이지. 내 머릿속을 꿰뚫고 지나가는 번개와도 같은 희귀한 것이라고. 네가 게이가 되길 부추기는 건 

절대 아니야. 다만 네가 결점으로 구분해야 할 것과 그렇지 말아야 할 것을 잘 판단하길 바래."

"......."

"네가 고생하길 바라지 않아. 네가 마음 따뜻하고 평범한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여러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내 식구를 소개할 수 있는 그런 

일상적이면서도 사랑스러운 가족을 가지길 바래. 하지만 그 보여주기 위한 가족때문에 네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평범한 남여의 

사랑보다 남남의 사랑이 더 힘들 것이고 그건 네가 잘 판단해야할 과제일꺼다. 쉽지않다는 것은 힘들다는 것이니깐. 하지만 처남. 사랑하는 감정은 

귀한거야. 아주, 아주 귀한 것이야. 흔히 입에 오르내리지만 결코 흔한 게 아니지."

결국 누나 부부앞에서 결론을 못 내리고 돌아서고 말았다. 데려다 준다고 하는 걸 억지로 말리고 천천히 걸어 집으로 향했다. 부지런히 걸어도 족히 

두 시간은 걸릴 거리지만 지난 시간을 더듬는 머릿속의 시계는 멈추어버린 듯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멈추어보니 어느새 빌라 앞이었다.

은수네 집에서 자고 온다고 전화하지 말라고한 게 다행이었다. 지금 안 그래도 복잡한데 여기서 재준의 전화까지 받는다면 더 감정이 복잡해질 것이다.

"아아... 머리아파"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으며 쥐뜯어보아도 다른 결론이 나질 않았다.

어쩌면 자신은 진태의 '사랑'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 감정의 이름표를 달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이른 새벽시간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하하 웃어버렸다.

재준에게 널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을 상상해보았다.

친구의 예상치못한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겠지. 그리고 어쩌면 그는 자신이 '게이'임이 밝혀진 것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게이이기 때문에 오랜 친구가 호기심으로 느낀 감정을 호소하는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는 난처한 기색을 띄우겠지.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을 했는데도 사랑을 호소하는 오랜 친구에게 매몰차게 대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보듬어 안을 수도 없을테니깐.

그 다음은 상상을 하지 않아도 결론이 나와 있다.

친구도 아닌 연인은 더더욱 아닌 남보다 오히려 못한 관계가 될 것이다.

그래서 형준에게 고백을 못했나 싶어 재준의 쓰린 속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픈 동병상련도 없을 것이다.

"이 현수씨?"

누군가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현수의 눈에는 검은 긴 막대기의 그림자가 얼핏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뒤통수에 강한 통증이 느껴지며 현수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지는 짧은 순간에조차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생각보다 내가 정말 재준을 

사랑하는구나, 라는 결론을 내리는 현수였다.

**

"너, 이것도 병이다. 아냐?"

"뭐가"

"집에 들어가 잠을 못 자는거."

부른 것도 아닌데 자리를 꿰차고 있는 주제에 집에 가고싶은지 툴툴 거리는 녀석을 보며 손을 휘휘 젓는 것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손짓의 의미를 알고도 남을 녀석이건만 일어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집에 안 들어간지 얼마나 되었어?"

"한 이주는 넘은 것 같습니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민이 대신 대답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불만을 토로했다.

형준이 민을 흘낏 보자 때를 만난 물고기처럼 민의 입이 자유분방하게 벌어졌다.

"차라리 호텔이라도 가셔 주무시면 말을 안 합니다. 이건 완전히 날밤을 새는 거라고요. 이러다가 차안에서 잠깐 눈을 붙이시는게 답니다. 

그렇게 만류를 했는데도 어디 저 어른이 제 말을 들을 분입니까. 오죽하면 제가 현수형님께 부탁을 해볼려고.."

관심없는 척하던 재준의 눈빛에 험악한 살기를 띄우며 민을 보자 민의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집에 가라고 했다."

"저도 가고 싶다구요!!!!"

"가."

"싫습니다."

"그럼 입 다물어!"

민도 그러고 싶었다. 집에 들어가 편하게 잠을 잔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날 정도여서 매일이 피곤했다. 그래도 자신은 낮에 한가할때 잠시 

사우나라도 하러 가서 눈을 붙이기도 하지만 몸을 아낄 줄 모르는 자신의 주인은 결코 그런 요령조차 부릴 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었다.

외양은 든든해보이는데 그 여린 속을 알 수 있기에 민은 그의 집에 가라는 명에도 거절하고 그의 곁에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현수에게 찾아가 바지그랭이라도 잡고 애원하고 싶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괜찮은 척하지만 점점 불안해져만가는 재준이 너무 

안타까웠다.

"너도 적당히 좀 해라. 애들이 네 걱정하는 거 보이지도 않냐?"

"후훗. 곧 끝날지도 모르지"

"왜? 드디어 고백이라도 할 생각이야?"

"그럴 희망도 사라질지도 몰라."

"무슨 말이야?"

"오늘 드디어 내가 가까이에 가는 것조차 질색을 하던걸."

"에? 현수가?? 왜??"

"모르지. 내 더러운 마음을 눈치챘거나 아니면 게이인 친구가 손이 닿는 것조차 싫어졌을수도 있지"

"서..설마..현수랑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잖아."

"내가 생각하기엔 그런데 내가 게이라는 거 알았으니 일반이라면 충분히 더럽다고 생각할수도 있지."

그때 만나본 현수를 기억하는 형준은 그건 분명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싹이 트긴 하지만 그걸 괜히 재준에게 

말해서 기대하게 하고 싶지는 않기에 형준은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힘든 녀석에게는 더 이상의 실망감을 맛본다면 ... 상상하기도 싫은 생각에 

형준은 몸서리쳤다.

그때 재준의 전화가 울렸다. 구형 전화기의 벨소리에 재준은 블루의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1시다. 폴더를 여니 발신자는 상준이었다. 

현수가 자신과 함께 행동하니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라고 말했었다. 새벽의 전화는 언제나 불길한 냄새를 풍기며 큰 소리로 울렸다.

"무슨 일.."

- 혀, 형님..야!! 너 뭐하는 새끼들이야!!!! 

재준에게 말을 하는 순간 주위에 다른 사람들이 있는 양 상준의 목소리가 잠깐 멀어졌다. 둔탁한 싸움소리가 들려오자 재준은 벌떡 일어났다. 

"야!!! 김 상준!!!!"

들려오는 대답은 핸드폰이 부서지는 소리와 상준의 신음소리뿐이었다.

"상준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겁니까?"

"현대빌라로 간다."

"에?"

민과 형준이 따라오던 말던 재준은 뛰다시피 블루를 빠져나왔다. 술을 마신 것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 문을 열었다가 뒤따라 나온 민에게 

앞자리를 빼았겼다. 하는 수 없이 조수석에 앉으니 민이 재준의 다급한 마음을 아는지 그답지 않게 액셀을 강하게 밟아 재준의 상체가 휘청거렸다.

상준은 민과 함께 고등학교때부터 재준을 따라다녔던 친형제와도 다름이 없는 녀석이었다.

싸움실력도 실력이지만 입이 무겁고 진중한 녀석이라 재준이 현수의 뒤를 맡길 수 있었다. 집에서 나왔을 때 서슴치않고 재준을 따라나온 세 사람 

가운데 가장 듬직한 녀석이었다. 

만약 혼자 싸움판에 떨어졌다면 재준에게 폐가 된다고 생각하며 죽는 순간에조차 연락을 하지 않을 녀석이었다.

그런 그가 전화를 했다는 것은 단 하나의 결론뿐이었다.

바로 현수의 안위와 연관되는 일.

불끈 쥔 주먹안에 손톱이 살을 파고 들고 있었지만 재준의 온 신경은 전방에만 있는 듯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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