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거짓말 [18] (18/28)

하얀 거짓말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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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착하자..침착하자..

몇 번이고 되뇌어도 머리를 굴릴 수가 없었다. 목은 바짝 타오르고 손이 저절로 떨려 왔다.

그런 재준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형준이 대신 상황판단을 해주었다.

"일단 가장 최근에 현수를 알고 네게 감정을 품을 사람은 은영이 뿐이야. 일단 잡아 두었지만 입도 벙긋 안 한다. 알지? 은영이 웬만해선 입 열기 

힘들어. 일단 핸드폰 추적부터 들어갔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테고 또 은영을 취조하는 것보다 현수를 찾는 게 더 급해 이리로 왔다만 선수들 

붙여 두었다. 보스께라도 손 빌릴까?"

재준이 머리를 흔들었다.

은영이 독하기는 하지만 조신하고 참한 여자였는데 상상외로 이런 독한 일을 저질렀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은영의 머리라도 치고 싶은데 형준의 

말대로 일의 순서가 그게 아니다. 전문이 있으니 뭔가 소식이 있다면 형준에게 전화가 올 것이니 여기서 현수를 찾을 실마리를 구해야 했다.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재준은 이제는 바닥의 돌멩이 개수를 다 셀 수 있을 만큼 들여다 본 현수네 빌라 앞마당을 또 들여다 보았다.

여기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것 같다. 늦은 시간임에 불구하고 빌라 이웃집의 초인종까지 눌러 혹시 뭔가 본 게 있는지 탐문을 했지만 상준과 

현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입술을 꽉 깨물면서 언제나 바라보았던 닫힌 이층 창문을 바라보았다.

"진정해. 너..피 나."

"혀..형준아..."

"그래. 근처를 뒤지고 있으니 곧 무슨 소식이 있을 거다. 상준이도 같이 간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야."

상준이까지 같이 갔다면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오히려 안 좋은 소식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라도 말을 돌리며 형준은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는 재준을 달래었다.

구름 뒤에 숨어버린 달은 한 줄기의 은은한 빛마저 감추었고 어두침침한 어둠이 내린 골목길에서 올려다본 이층 창은 온기가 한 점 느껴지지 않고 

서늘하기만 했다. 여태 올려다보았지만 오늘처럼 싸늘하지는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시려와 재준은 자신의 두 손을 꽉 맞잡았다.

"나....무섭다......"

형준은 안타깝게 친구의 외로운 등을 바라보았지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럴 때의 재준은 누군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줄 수도 없다. 그저 주위 애들이나 물리쳐줄 뿐이었다. 

"무서워...죽겠다..형준아.."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칠흑과도 같은 어둠 속에 사방에 번뜩이는 적군의 칼날 속에 있다고 한들 재준이 이렇게 공포에 떨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심장, 현수의 상실일 것이다.

"걱정하지 마. 그때처럼 넌 어린 아이가 아니니깐."

"그래. 어린 아이도 아니지. 그런데...왜 난 그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왜 난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멍청히 서 있기만 하지? 

왜!!! 왜!!!!!!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기만 하냐고!!!!! 왜!!!!! 난 이제 어른인데. 지킬 거라고 내 목숨을 다 바쳐서라도 꼭 지킬 거라고!!

! 털 끝 하나라도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하고 약속했는데!!!!!! 왜!!!!! 왜!!!!!!!!!!! 난 그때와 똑같냐고!!!!!"

"준아..."

툭 소리를 내며 재준의 무릎이 바닥에 떨어졌다. 사죄를 하듯 숙여진 고개는 더 이상 현수방의 창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이렇게..아픈데..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이렇게 미칠 것만 같은데.. 왜..난 아무것도 할 수 가 없냐고... 어른인데.. 나..이제는 힘도 있고 

권력도 있고 돈도 많은데..왜 아무것도 할 수가....왜........."

급기야 재준의 검은 두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무능력한 자신을 탓하는 타박이 고함이 되고 속 깊은 곳에서 뱉어내는 원통함이 갈라진 목소리로 나와 비명이 되고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짐승의 

포효와 같은 비명을 삼킨 속내는 통곡이 되어 눈물을 떨구었다.

"저..형님."

형준은 잘게 흔들리는 재준의 등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왜"

"이 전화 한 번 받아보십시요"

형준이 그제야 재준에게서 시선을 떼고 뒤돌아 민을 바라보았다.

"왜, 누군데?"

"제 전화로 걸려왔는데.."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은 재준을 힐낏 보며 민이 재촉하듯 자신의 전화기를 형준에게 다시 들이밀었다.

"이 분이 큰형님을 찾으셨습니다만 형님이 받아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민과 두식에게 재준을 지키라는 손가락 지시를 내리며 형준이 민에게 전화를 건네 받았다.

"여보세요?"

- 도..재준씨?

"아닙니다. 재준이 지금 곁에 있기는 하지만 받을 상황이 안 되어서 그럽니다. 누구십니까?"

- 좀 바꿔 주십시요. 직접 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재준이 집안 사람입니다. 형제와도 같은 사이입니다. 말씀하셔도.."

- 죄송합니다. 신중을 기해야하기에..옆에 있으면 좀 바꿔 주십시오. 

"신분이라도 밝히십시요. 그럼 바꿔드리지요"

- 혹시..이 현수라고..아십니까?

"누..누구십니까???"

- 저..현수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이제 그 사람 좀 바꿔주십시오.

"재준아!!!!!!"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있던 재준이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들었나 싶어 형준을 돌아다보았다. 소식 대신 형준이 건네준 핸드폰을 멀뚱하니 내려다보자 

형준이 상대의 신분을 대신 말해주었다.

"전화받아봐. 현수..아버지시래."

"뭐??? 여..여보세요??"

- 도 재준씨?

"네. 제가 도 재준입니다."

- 내 말 잘 들으십시오. 나 현수 아비 되는 사람인데.. 지금 시간이 되면 우리 현수 좀 구해주러 와  줄 수 있..

"어딥니까!!! 현수가 있는 곳을 아신다는 말씀입니까?? 어딥니까!!! 거기가 어디예요!!!!!"

- 다행이군. 자네가 가면 우리 현수.. 무사히 구해줄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제 목숨을 바치더라도..현수.. 구해냅니다. 어딥니까. 거기가."

- 고맙네. 거기가 어디냐하면.....

이미 차는 불 꺼진 현수네 집 앞을 떠나고 있었다.

구름 뒤에 숨었던 달이 슬금 얼굴을 비추며 황망히 떠나는 차의 뒤를 비추고 있었다.

**

머리의 통증과 함께 습한 곰팡이냄새를 맡으며 현수는 정신이 들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올해는 정말 다사다난하구나, 라는 생각을 할때 현수는 자신의 손이 뒤로 묶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이 묶이는 게 생각보다 많이 아팠다.

"괜찮으십니까? 형님."

생각지도 못한 음성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현수와 마찬가지로 뒤로 포박을 당한 상준이 얼마나 맞았는지 퉁퉁 부은 얼굴로 걱정스럽게 현수의 몸을 

살폈다.

"어? 네가 여긴 웬일이냐? "

마치 동네 마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느긋한 여유있는 목소리에 상준이 타박을 했다.

"지금 그런 태평스런 말씀 하실 땝니까? 괜찮으세요?"

"괜찮아 보이냐? 설마..내 얼굴도 너처럼 그렇게 알록달록한 건 아니지? 좀 심하게 아파 보인다."

"하하. 형님도 참"

"도대체 이게 뭔 일이래?"

"납치된 것 같습니다."

"뭐? 납치? 뭐하러?"

"글쎄요. 분명한 건 형님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나? 쓸데없는 나는 왜? 근데 넌 정말 여기 웬일이야?"

"아.. 어젯밤에 잠이 안 와서 동네 한 바퀴 돌고 있었는데 마침 형님께서 그놈들한테 당하는 걸 보고 달려들다가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지켜드렸어야 했는데.."

오지랍 넓게 끼어들기까지 했는데 지켜주지 못한 게 더 안타까운지 상준의 안색은 미안함으로 가득 찼다. 

재준에게서 상준이 제법 싸움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현수가 자신은 기억나지 않은 그때의 상황을 역으로 물었다.

"사람 많았어?"

"네. 한 다섯 정도 되었습니다. 사실 전문은 아닌 녀석들 같던데 뒤에서 급습을 하는 바람에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건 제 불찰입니다. 

이런 실수는 잘하지 않는데 마음이 급하다보니...."

"흠..누구지?"

"저도 처음 보는 얼굴들인지라..만약 저희 쪽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으면 곧 알 수 있을 겁니다."

"아아.. 몰라.누구든 모르겠다. 죽기 아니면 살기겠지 뭐."

"형님!!"

대체로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은 일을 당하게 되면 당황하게 마련인데 현수는 그만의 특유한 낙천성 때문인지 긴장하는 기색이 안 보였다.

손목을 조이는 밧줄이 살을 파고드는 듯 아파 오자 뒤척이며 손을 움직여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픔뿐이고 끈은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상황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은 상준에게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목에는 신경을 끄고 느긋하게 벽에 상체를 기대었다.

차가운 벽의 한기가 몸속에 흡수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차가움이 가슴의 뜨거움마저 식혀주면 좋겠다 생각을 하며 현수는 눈을 감았다.

"사람이 큰일에 놀라면 작은 일에 무뎌지는 거라고. 내가 워낙 심하게 놀란 일이 있어서 말이야. 뭐, 내가 여자도 아니고 기껏해야 얻어터지기밖에 

더 하겠어?"

"하지만 이건 납치라고요!! 납치!!!"

"알아. 하지만 재준이놈.. 나 찾겠지?"

"물론입니다. 지금쯤 청솔까지 비상에 걸렸을 거예요."

"청솔? 그게 뭔데?"

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는 현수를 기가 막힌 얼굴로 보던 상준이 잠시 실내를 살폈다. 

위층에 발소리가 들려오는 걸로 봐서는 일반 주택의 지하실인 것 같았다. 이래서야 재준 일행이 여길 찾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초조함에 입안이 바싹 마르는데 현수는 오히려 한술 더 뜨는 것만 같았다.

"이거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큰형님께서는 현수형님의 일이라면 모르는 게 없을 텐데 저희 큰형님께 관심 좀 가져주세요."

"그러게. 나도 요즘 각성중이야. 너무 재준이에 대해 몰라서 반성중이라고. 물론 그 녀석 미주알고주알 말해주지 않는 스타일인 것도 문제지만 

말이야."

"그렇긴 하지만 형님께서 물어보셨으면 다 말씀해 주셨을 겁니다."

"그렇겠지? 준이는 뭐랄까. 너무 자기 관리를 잘한다고 할까, 완벽하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 들어서 자기 일 잘 알아서 하는 것 같더라고. 

내가 들어줄 고민거리도 없는 완벽한 녀석처럼 보였어. 꼬치꼬치 캐묻는 게 오히려 이쪽에서 실례를 하는 기분이 들어서 말이야. 

왜 어른들에게 애들처럼 차 조심해라, 어째라 라고 말하면 간섭처럼 여겨지잖아."

"마인드 컨트롤이 뛰어나셔서 제가 십 년을 넘게 모셨지만 흐트러진 모습 한 번도 본 적이 없긴 합니다."

"거봐. 그렇다니깐. 예외가 없어요!! 예외가."

"하지만 예외는 있습니다."

"그래? 무슨 예외?"

상준은 손바닥만한 창조차 없는 어둠 속이지만 지하실 입구의 켜진 등의 도움으로 현수를 바라볼 수 있었다. 재준이 오랫동안 숨겨온 마음을 아무리 

그를 돕는다는 선의의 동기라 할지라도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이런 감정을 말하는 건 재준의 고유의 선택권일 것이다.

"형님께서 마음에 두신 분이 계십니다."

"아아..그 사람. 들었어."

"네?? 들..으셨다니.."

"응. 그 사람한테서 받은 크리스마스카드가 제1호 보물이라고 하던걸."

어쩐지 심드렁한 말투의 현수를 보며 상준은 현수의 생각을 헤아릴 수 없었다. 도대체 뭘 듣고 뭘 보고 말하는지 알 수 없다.

"카드는 모르겠지만 그분을 아신다니 의외인걸요?"

"뭐야!! 너도 내가 재준이 일 모른다고 타박할 셈이야? 칫. 다들 나더러 재준일 아니 모르니 그런 말밖에 안 한다니깐. 그 사람을 안다기보다는 말만 

들었어. 마음에 둔, 재준이를 게이로 만든 ..하! 재준이가 뭐라고 한 줄 알아? 심장이래. 그 사람...재준이 심장과도 같은 사람이래.  

그 사람 때문에 사는 거라고 하더라. 기가막혀.. 가만..그럼 너도 알고 있었는 거네?"

슬쩍 떠보니 아니나 다를까 발끈하며 말하는 품새가 어디서 잘못된 정보를 들은 모양이다. 그 헤매는 폼이 상준이 보기엔 가관이었다.

남의 심장 산채로 씹히는 줄도 모르고 투덜거리는 모양을 보니 입이 저절로 근질거렸다.

"아..저희야 큰형님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니깐요. 그렇다고 해도 아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저희 세 명과 형준형님 정도뿐일겁니다."

"뭐?? 그 사람이 형준이 아니야??"

상준은 현수가 어디서 뭘 들었는지 꼭 캐묻고 싶었다. 아까부터 안다고 했을 때 뭔가 이상하다 생각을 하긴 했었다. 그 상대가 누구인지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최소한 맞다, 아니다의 말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아 입을 열때였다. 다시는 열릴 것 같지 않던 지하실 문이 철컹 소리를 내며 열렸다. 

상준은 어두운 조명에 지하실로 내려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현수는 아는 사람인 듯 낮은 탄식을 내뿜었다.

"뭐야? 자세가 너무 편해 보이는 걸? 발도 묶을 걸 그랬나?"

"너.....너......."

"이런..이런.. 그렇게 눈을 부라리면 나 겁먹지~ 좋게 웃으며 이야기하자고. 응? 안 그럼 좋은 꼴 못 볼텐데.."

"이게 무슨 짓이야!!! 너 왜 이래. 응?"

"그러게 왜 허튼짓을 하고 다니냐고. 응?"

사내의 머리칼이 요란스러운 빛깔로 물들어진 것이 어두운 지하실 불빛 아래에서도 그 찬란함을 볼 수 있었다. 제법 다부진 상체에 키는 180센티미터 

즈음 되어 보이고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가지만 않았다면 그럭저럭 어디 가서도 남자답게 생겼다는 말 정도는 들을 수 있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매사 자신의 일 외에는 지나칠 정도로 무관심하다고 스스로 성격을 판단하던 현수에게는 특별한 일로 이 사내는 처음 볼때부터 그러니깐 저 요란한 

머리칼을 볼 때부터 이 사내가 안쓰러웠다.

마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 오버액션을 취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훤히 내려다보이는 속내가 애틋했다.

아마 그래서 재준에게 이 사내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름대로 보호해주고 싶었으니깐.

하지만 그런 현수의 마음과는 달리 현수를 계속 노려보고 있는 눈빛에는 불만이 가득 차 있는 듯했다.

"너. 이름이 뭐야"

"어이고~ 이거 황송해서.. 어찌 이 보잘것없는 미천한 것의 이름까지 알려고 듭니까? 관두슈. 내 이름을 친절히 가르쳐줄 만큼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너, 목적이 뭐야. 도대체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잘 살다가 이제 나타나서 어쩌라는 거야?"

"처신을 잘 했으면 내가 이렇게 나타날 일이 있었겠어? 자기가 잘못한 건 모르고 몽땅 남의 탓하는 양반네군 정말 못 쓰겠어."

"야!!! 너!!! 효자동!!!"

"하하하. 이런이런.. 효자동이라니.. 누가 들으면 내 성이 효씨요 이름이 자동인줄 알겠네. 난 옛날부터 네 이름을 다 알고 있었는데 나한테 너무 

관심이 없는 거 아니야? 그나저나 이 떨거지는 어쩐다?"

기다란 각목으로 상준의 턱을 치켜세우며 중얼거리는 사내를 보며 현수는 벌떡 일어서 상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상준이 뒤에서 놀라 일어서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상준은 발목도 묶여 있는 상태였다.

"건드리지 마. 너랑 상관이 없는 사람이잖아. 나한테 볼 일이 있는 거 아니었어?"

"아..물론. 하지만 신경이 쓰여서 말이야."

"나한테 이러는 이유 뭐야? 확실하게 태도를 밝혀. 뭘 원하는 거야?"

"원하는 거라.. 말하면 다 들어줄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군. 내가 말하면 다 싫다고 발뼘할 주제에 끝까지 잘난 척은"

"뭔데? 뭘 원해서 이런 일까지 벌이는 거야?"

"우리 여왕님께서 네가 설치는 꼴을 도무지 못 보겠다고 하셔서 말이야..그러게 내가 저번에 한 번 경고했을 때 들었어야지.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이런 무식한 방법을 쓰는 거잖아."

일전에 블루의 뒷문에서 만났을 때는 그 '효자동'이라는 말에 얼이 빠져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았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그때 뭔가 다른 말을 들은 게 기억이 났다.

마치 기억을 더듬고 있는 현수의 굴러가는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았는 듯 사내가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주었다.

"주변정리하라고 했잖아. 안 그러면 좋은 일 없다고. 도 재준씨와 인연 끊으라고 말이야. 그런데 그런 제스츄어는 커녕 우리 여왕님과 헤어지게까지 

했다면서? 쯧쯧.. 그러게 왜 사고를 쳐. 가만히 있어도 내쳐질 판국에 더 설치더군"

"설마..이 일을 사주한 사람이....은영씨란 말이야?"

"들은 것보다 더 멍청하군. 경고도 한 번 했는데 깔끔하게 잊어버리셨군. 그때 충격이 좀 약했었나?"

몸의 충격이 약했다기보다는 정신의 충격이 커서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렸었다.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해서 한달음에 대구까지 내려갔었다. 

그리고는 다 잊어버리자고 나름대로 결론까지 내린 일이었다. 

"그나저나 마음의 준비나 하라고."

"무슨 말이야.그게."

"흔적이 남으니 죽일 수는 없고..."

사내가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들었다. 처음에는 뭔지 몰라 현수와 상준이 어리둥절하게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물체가 뭔지 알수는 없지만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상준이 묶인 손과 발을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형님!! 도망가십시요!!! 얼른..."

"그게...뭐야?"

날카로운 끝이 불빛 아래 드러나고 정체모를 액체가 담긴 몸통은 음침하게 뿌옇다. 주사기를 휘휘 돌리며 사내가 현수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앉은 자세에서 버둥거리는 상준에게 가볍게 비웃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죽일 수 없다면 죽게 만들면 되지 않겠어? 그게 제정신이 들었을 때 지난 치욕의 시간을 떠올려 스스로 죽던 아니면 약 기운에 취해 과도한 섹.스로 

죽던. 더러운 사창가에서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니 우리까지 추궁을 당할 일은 없다 이거지."

다가오는 어두운 그림자에 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이러지 마.. 왜 이래. 야..너.. "

"이게 너와 나 차이다. 이 현수. 난 네 이름을 내가 철이 들기도 전에 알았는데 넌 전혀 모르지. 안 그래? 다 가진 사람이 그래 우리 여왕님께 남자 

하나 양보를 못 해? 과욕은 죽음을 부른다고. 너무 욕심을 부렸어."

"넌 이러면 마음이 편해? 이러지 마. 그리고 재준이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잖아. 내가 은영씨와 헤어지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나에게 이래. 이건 은영씨와 재준이가 해결할 문제라고."

"아니. 우리 여왕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던걸? 네가 사주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고. 그리고 물론 이 주사기엔 나의 사감도 충분히 들어갈 만큼 

들어가 있지. 당신의 무너진 모습을 보고 그 양반이나 네 어머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난 아주 궁금하거든."

"당장 치우지 않으면 네가 죽을 거다!!!!"

두 눈을 부릅뜬 상준의 호통에 사내가 가소롭다는 듯 높은 목소리로 웃었다.

"제 몸 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네놈이나 걱정하지. 그리고 네 대장이 여기를 찾아올 거란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아. 여긴 찾을 수 없을 테니깐. 

아아..가장 치명적인 예를 하나 들어줄까? 도 재준이는 나를 모른다. 그 녀석의 똘마니이니 너도 알겠지? 나를 모르는 자가 어떻게 나의 아지트인 

여길 찾는다는 거야. 하하하. 네 녀석은 그저 이 현수의 발광만 두 눈으로 자세히 지켜보라고. 도도한 척, 혼자 잘난 척, 모든 것을 가진 척하던 

녀석이 굶주린 사내들의 밥상이 되는 꼴을 똑똑히 지켜보라고. 어차피 너희 둘은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할 테니깐. 영원히..."

독기어린 말투에 현수는 그제야 불안으로 몸을 덜덜 떨었다.

"아..아직은 아니야..아직은..안 돼...."

"조금 더 화기애애한 재회 장면을 상상했었는데 나의 즐거운 상상을 이런 싸구려로 전락시킨 장본인은 입을 다물어 주면 좋겠는 걸."

그의 말이 너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말 그대로 재준은 이 사내를 모른다. 그리니 이 위치 또한 모를 것이다. 어떻게 그 원인이 은영임을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은영이라는 여자를 보아컨데 쉽게 입을 열 여자가 아니었다. 어두운 지하실이지만 기껏 해봐야 아침나절임을 느낄 수 있었다. 

겨우 반나절이 지났을 뿐인데 재준이 여기를 알 수 있을 턱이 없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처럼 절실하게 현수의 가슴속에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욕심이 하나 있었다.

"아직은...아직은...안 돼..아직은 아니라고!!!!!"

죽음의 유무를 떠나 현수는 그 '아직'이 더 절박했다. 이제 겨우 자신의 혼돈과 마음을 깨달았다. 비록 친구지간이지만 그리고 재준은 이미 다른 사

람을 보고 있지만 이대로 죽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지켜내지 못하는 '친구'로 남겨지기 싫다. 아니 그에게 남겨지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아직 말 한마디 못해보았다. 널...사랑한다고, 널 내가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고, 널 보고 싶다고 말 한마디 못 꺼내보고

 이렇게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서 널브러질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 감정을 깨닫기까지 얼마나 걸렸는가. 얼마나 어지럽고 복잡했던 마음이었나. 말 한 마디 못해보고 죽는다면 그것이 천추의 한이 되어 

죽어서도 억울할 것이다. 

우정이라고 하기엔 이상하기만 했던 그 혼탁한 감정들의 정체를 이제야 알았고 보듬어 고백할 용기까지 겨우 만들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간다면 

자신의 몸이 불타올라도 그 마음 하나만은 사리가 되어 구천을 떠돌것이다. 

"아직? 훗, 웃기지 마. 넌 예전에 죽어버렸어야 할 사람이었다고!!!!!"

"재... 재준아!!!!!!!!!!!!!!!!!!!!!!"

다가오는 날카로움을 피하며 재준의 이름을 부른 것은 호명(號名)이 아니었다.

그를 사랑한다는 말이었고 그가 보고 싶다는 말이었고 날 구해달라는 호소였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호소를 들은 백마 탄 왕자님은 시기적절하게 지

하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한 뭉텅이의 그림자가 지하실 입구에 어른거렸다. 그리고 계단으로 걸어내려 오는 것이 아닌 선두에 선 그림자 하나가 휙 지하실 바닥으로 바로 

뛰어내려 현수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꿈이 현실로 나타난 것 같았다. 재준의 얼굴이 낯설어 한참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도 재준이 맞나요? 이 사람이.. 절대 올 것 같지 않던 사람이.. 도 재준이 맞나요? 꿈이 아닌가요?

하늘 저 어디에 살고 있을 그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 이 사람이 도 재준이라는 사람이 맞는지 묻고 싶었다.

그리고 재준이 현수를 꽉 끌어안고서야 현수는 낯익은 재준의 체향을 맡을 수 있었다.

처음에 그에게서 '체향'이라는 것을 인식했을 때 색깔로 표현하자면 검은 느낌이 들었었다. 검지만 따뜻한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섹시하고 

매혹적인 향내였다. 

지금은 마치 그 검은 체향이 현수를 감싸 안는 듯했다. 그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결계라도 쳐진 듯 편안하고 아늑했다.

"놀랬지?"

"아...너...구나.. 재..준이.."

"그래, 나야.  놀랬지? 응?"

"으응...조금..아니 많이.."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는 손길에 서서히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친구가 아닌 완전한 연인으로 탈바꿈이 된 마음 준 사람의 심장뛰는 

소리를 들으며 현수는 아쉬웠지만 재준의 가슴에서 파묻혔던 얼굴을 들었다.

걱정하는 기색이 완연한 눈빛은 아직도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안심시켜주기 위해 씨익 웃으니 그제야 재준도 같이 웃어주면서 가볍게 

콩 하고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씨이- 거리며 반박하려는 현수를 재준이 오히려 타박했다.

"싸울 때 발은 사용 안 하는 줄 알지? 이 바보 아메바야!!!"

재준의 구박 아닌 구박에 현수는 평소와 같이 농담으로 받아치지도 못하고 고개를 들어 어두운 지하실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감정을 깨닫고 처음 보는 것임을 뒤늦게 깨달으니 심장이 또 비정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뛰다가는 과다심장박동 이라는 

이상한 병명으로 죽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재준도 제법 놀랐는지 상기된 낯선 얼굴이 안도감과 섞여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매번 그가 하는 '최 민수'식 버전이 형준이 말하는 돌쇠 머슴 버전으로 바뀌어 떠나는 아씨의 치맛자락 이라도 붙잡는 듯 당장에라도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일 년치 농사를 풍년으로 만들었는지 일그러진 얼굴 한가운데는 희희낙락이다. 잠이라도 설쳤는지 까칠한 얼굴빛인데도 

불구하고 자꾸 웃음이 나왔다.

'납치'라는 일생에 단 한 번도 경험하기 힘든 일을 겪었는데 불구하고, 바로 일 분전에 그 날카로운 주삿바늘이 자신의 팔을 꿰뚫을지도 모르는 

공포를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 이렇게 자신의 일에 사색이 되어 허겁지겁 뛰어온 사람, 자신의 호명에 짜잔 하고 나타나준 이 사내, 

이 두근거리는 기분 좋은 감각을 준 이 사람이 너무 좋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재준에 대한 감정에 확인 도장을 찍는 것 같았다. 진태와 말을 나누었을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던 마음이 본인을 앞에 두고 확연히 

깨달은 것이다. 

'사랑'은 낯선 단어, 아직은 우정이 더 편안하고 부담이 없지만 아니었다.

자신의 일에 그답지 않은 일그러진 얼굴을 보여주는, 땀냄새가 날 정도로 긴장하고 놀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기만 했다.

그에게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것이,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어떤 확인과도 같이 느껴져 기분이 좋은 것이다.

우정이라는 단어는 어딘가 미약한 느낌이 들고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 달콤하기만 해서 허파에 바람든 여편네처럼 실실 웃음만 새어나온다.

좋다. 이 사람이, 이 사람이 너무 좋다. 

급하게 뛰는 심장은 현수의 독백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마치 심장이 말하는 것 같았다. '사랑'이라고.

"발이라도 걷어찼어야지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으면 어떻게 해? 아무래도 너 나한테 특훈이라도 받아야겠다! 어쭈? 웃어?? 날 만만하게 봤다 

이건데..나 이래봬도 제법 엄격한 사범이라고. 알아?"

대답을 위해 입을 벌리면 재준이 원하는 말이 아닌 엉뚱한 속내가 불쑥 주인의 허락없이 나갈 것 같아 현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너스레를 떠는 자신의 가벼운 말투에 대답조차 하지 않은 현수를 걱정스럽게 살피며 재준의 손이 머리칼을 쓰다듬자 

그 감촉을 더 느끼기 위해 현수는 눈을 살짝 감았다.

"상준이가 머리를 받지 않았으면 너..위험했다고. 정말...위험했어."

"상준이가 그랬구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재준의 모습뿐이어서 어떤 상황이었는지 현수는 몰랐다. 상준이 묶인 발로 일어나 콩콩 뛰어 그 

사내의 배를 머리로 받았다고 했다.

"스카이 콩콩처럼?"

"훗. 그래."

그때 두식이 다가와 재준을 불렀다.

"이 녀석 청담동 사무실로 데리고 갈까요?"

"그래, 적당히 주물러 놓고 기다려. 내가 가서.."

"안돼!!!!"

느긋하게 재준이 주는 안식을 즐기던 현수의 눈이 부릅 떠졌다. 그제야 현수는 여러 명의 사내들에게 린치를 당하고 있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때리지 마!!! 때리지 말라고!!!!!!"

현수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멈칫거렸고 재준이 현수를 보면서도 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 물러났다.

"현수야.."

"때리지 말라고 해. 때리지 말라고!!!"

"그래. 알았어. 진정해. 이제 안 때린다. 무슨.."

"그는....."

이미 기절을 한 것인지 의식이 없어 보였다.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맞았는지 눈두덩은 퉁퉁 부어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을 것 같았고 입고 있던 

깔끔한 하얀색의 셔츠는 발자국으로 회색빛을 띄고 있었다.

이름을 왜 안 물어봤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현수는 재준을 바라보았다. 안타까움에 물든 현수를 보는 재준의 눈빛은 의아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동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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