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거짓말 [19] (19/28)

하얀 거짓말 [19]

"혼자 씻을 수 있겠어?"

재준의 집으로 와서 샤워하기 위해 욕실 문 손잡이를 잡고 있는 현수를 보며 재준이 묻자 걱정스럽게 따라오는 눈길을 슬금 피하며 현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배 고프지? 뭐 시켜줄까? 먹고 싶은 거 없어?"

"해주면 안 돼?"

싱긋 웃는 얼굴로 되물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유쾌한 미소가 재준의 입가에 걸렸다.

"재료가 많이 들고 손이 많이 가는 것 외에는 문제없어. 뭐 먹고 싶은데?"

"음.. 손이 많이 안 가는 거라.."

"후후..괜찮아. 일단 이야기해 봐."

"시원한 해물탕이나 매운탕~"

"그럼 일단 들어가서 씻어. 해물탕이 빠르겠다. 슈퍼에서 파는 팩으로 해도 되지?"

"그럼, 내가 찬 밥 더운 밥 가리게 생겼냐? 그럼 나 씻을게. 부탁해~"

"응. 얼른 들어가."

욕실 문을 탁 닫고 문에 기대서 현수는 잠수하다가 수면으로 막 부상한 사람처럼 숨을 가쁘게 몰아 쉬었다. 

혼자 몰래 먹다가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눈만 마주치면 재준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챌 것만 같아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의식하지 못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들이 의식이 되기 시작하니 그 어떤 사소한 것도 무거운 무게감을 주며

 자신이 품고 있는 불경스런 마음을 새삼 각인시켜주는 듯했다.

얼굴을 빤히 보고 있노라면 당장에라도 난 널 사랑한다고 고백할 것만 같았다. 그가 일반이었대도 현수는 고백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대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이미 들은 후였다. 그 어떤 무엇으로도 고개를 돌리지 않을 완고한 고집과 아집이 엿보이는 사랑이었다.

그 어떤 미모와 재력을 가진 사람이 고백을 하더라도, 설사 십년지기 친구가 고백을 하더라도 재준의 마음은 다이아몬드보다 

더 단단해 꿈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입을 통해 직접 그 감정을 들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나도 널 사랑하네, 라고 주접을 떤단 말인가.

현수는 샤워기의 물을 틀면서 자꾸 입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한숨을 막지 않았다.

두식이 봐준 장을 건네 받았을 때는 이미 밥은 다 완성된 후였다. 커다란 전골냄비에 다듬은 야채를 넣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양념장을 꺼냈었을 때 현수가 욕실에서 나왔다. 옷도 같이 넣어주었는데 젖은 몸에 뭘 입기 싫어하는 탓인지 아니면 같이 넣어준 옷을 

잊어 버렸는지 그는 맨몸에 팬티만 걸친 채 뭘 하나 싶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방을 훑어 보았다.

"옷은?"

"아.. 맞다."

아마 잊었는 모양이었다. 잊어버린 것을 재준의 지적으로 의해 알았으면서도 갑갑해서 입기 싫은지 욕실로 

돌아갈 생각보다 힐금힐금 주방을 보는 모양을 보니 배가 제법 고픈 모양이다. 얼른 해물과 양념장을 넣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고는 돌아섰다. 갑자기 웃기 시작하는 현수를 의아하게 보면서 재준은 그의 목에 걸려진 

수건을 벗기고 새 수건을 가져와 그의 젖은 등을 닦아주었다. 

"키키키킥..깬다. 깨."

"뭐가"

"너 그 앞치마 암만 봐도 환상이 깨져. 아아.. 레이스 달린 앞치마의 도 재준이라니..크큭.."

"환상은.. 무슨 환상."

"네가 사지는 않았을 테고 도대체 누가 사준 거야?"

"두식이"

"푸하하핫. 그럴 줄 알았어. 너도 그냥 앞치마 사와!! 라고만 했지?"

"그럼 뭐라고 해. 그냥 버리기도 뭐해서 입는 거야. 그리고 다른 사람들 왔을 때는 입을 일 없으니깐 그만 좀 웃어라.

 그리고 너 등 좀 닦아. 애냐? 지 등도 못 닦고?"

"손이 닿아야지 닦지. 냅 둬. 마를 텐데 뭘."

"마르는 동안 춥지는 않고? 벌써 11월 다 되었어. 감기 걸려."

"집 안에서 뭔 감기야. 아아..배 고파~ 다 되어 가?"

"어. 조금만 기다려. 옷 다시 가져다줘?"

"아니 좀 있다가 내가 가져와서 입을게. 뭐 도와줄 건 없어?"

"많이 드시기나 하셔."

십분 후 현수는 한 숟가락의 따뜻한 국물을 떠먹고서는 감탄을 연발했다.

"캬하~ 기가 막힌다. 정말 맛있어. 우와~"

재준은 그런 현수를 바라보기만 할 뿐 정작 먹지는 않았다.

"맛있어?"

"응!! 응!! 정말 맛있어. 이거 어떻게 한거야? 정말 맛있다~!!!"

"다시마 국물로 육수 우려내서 하면 시원하고 맛있어. 그래도 양념장을 미리 준비해서 냉장고에 묵혔다가 했으면 더 맛이 좋았을 텐데.."

"아냐~!! 진짜 꿀맛이라니깐. 어쩜 이렇게 잘 하냐?"

"말했잖아. 요리하는 거 좋아한다고"

"야, 요리 좋아하는 놈의 집 냉장고가 어쩜 그렇게 텅텅 빌 수 있냐? 너 혼자 집에 있을 때는 안 해먹지?"

"뭐.."

"갖은 양념에 개량컵까지 있으면서 냉장고는 과일 한쪽도 없어요. 난 내가 요리 잘하면 냉장고에 빵빵하게 요리해서 넣어 놓겠구먼"

"요리 잘하는 게 부러워?"

"그러엄~!! 아시다시피 난 미식가지 않수. 요리 잘하는 사람이 제일 좋아.히히히..아 시원해~캬..죽인다!!"

"그럼....시집갈까?"

"케케케켁!!!!!!"

언젠가 추석 때 웃으며 농담했던 것을 되받아치는 것뿐인데 현수는 사레가 걸리고 말았다. 

저번처럼 농담으로 넘겨버리기엔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시집오라고~ 너 정도는 

내가 책임지고 먹여 살린다고 웃으며 농을 받아쳐야 하는데 현수는 재준이 건네준 물을 마시고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뭐..뭔..농담을 그리 살벌하게 하냐? 아고..목 따가워.."

"좀..괜찮아?"

"응. 근데 넌 왜 안 먹냐?"

"아..별로 생각이 없어서.."

"너한테 요리나 배울까나??"

라면도 제대로 못 끓인다는 타박이 있을 줄 알았던 현수가 멀뚱멀뚱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재준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현수의 시선에 퍼득 놀란 재준이 머쓱하게 웃으며 현수의 요리의욕이 제대로 펼쳐지기도 전에 꺾어 버렸다.

"어이, 아메바!! 네가 배운다고 되겠어?"

"어쭈?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면 또 알아? 너만큼 잘 할 수 있을런지."

"배워도 나만큼은 안 될걸."

"왜에??"

"넌 취미겠지만..난 그게 아니었으니깐.."

"응? 뭔 말이래? 넌 취미가 아니면 뭐냐, 생업이냐? 요리 안 하면 굶어죽냐?"

"그럴지도 모르지."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재준이 깐 새우를 건넸다. 넙죽 받아먹으며 현수가 대화를 이어나가려고 했지만 재준이 슬쩍 끊어버렸다.

"그나저나 동생이라니 무슨 말이야? 너 동생 없잖아."

"아.. 나 이거 다 먹고 이야기해줘도 되지?"

약속한대로 밥을 한 공기 뚝딱 해치우고 따뜻한 온기를 지닌 커피잔을 손에 쥐고서야 현수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말했었지? 우리 엄마 이혼한 사정"

"응"

예전에 군에 가기전즘인가 혼자 계시는 어머니 불쌍해서 어떻게 하느냐고 재준의 앞에서 운 적이 있던 현수였다.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눈물을 보였던 현수였다.

"아버지 바람 펴서 이혼했다고.."

"응. 저번에 나 블루에서 깡패 만났다고 한거.. 그때 본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야. 아버지가 바람 펴서 낳은 아들. 엄연히 말하자면 배다른 동생이 되나."

"그렇군. 그런데 그 사람이 왜.."

"아마..은영씨를 아나봐."

"은영의 사주를 받은 모양이군"

꽉 다문 입술로 복수를 감행할 듯 보이는 재준의 손을 잡으며 현수는 성난 재준을 달래었다.

"내가 감싸줄 만큼 정이 있는 건 아닌데 후후..이런 게 내리사랑인가, 하여튼 마음이 좀 그래.

 나한테 그렇게 행동했지만 그때 블루 뒷문에서도 이번에도 그애.. 아파 보였어. 말과 행동은 거친데 마음은 안 그런 것 같았거든.

 뭐랄까.. 나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 아, 물론 내 억측이겠지만. 그래서 말인데 재준아."

"어"

"두 사람 풀어줘. 응?"

"현수야.."

"결론적으로 나 안 다쳤잖아. 상준이가 좀 다쳤지만. 잘 되었잖아. 응? 그렇게 하자."

"흠.....네가 그러자면 그래야지. 하지만 이대로 풀어주었다가 또 무슨 일을 당하게 되면.."

"설마 그러겠냐. 그나저나  청.."

"음?"

현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와 같았다. 청솔이 뭔지, 어떻게 자신이 갇힌 곳을 알았는지.. 

아니 그 무엇보다 하고 싶은 말은 그 산더미와 같은 말보다 더 무거운 단 한 마디뿐이다.

산만한 늦은 일요일의 오후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두 사람이 나누기에는 너무 무거운 단어라고 생각했다. 

"나, 네게 할 말이 있어. 묻고 싶은 말도 많고. 내일 저녁에 바빠?"

"어. 괜찮아.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해."

"아, 아니. 에..길어질 것 같으니깐.. 내일 할게. 내일 다 할게. 묻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다 할게. 내일 저녁에."

"그럼 대해에서 볼까?"

"응. 조용하고 좋겠다. 예약 좀 해줘."

"오케이. 그럼 저녁 7시면 되겠지?"

저녁 무렵에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현수는 자신의 발이 퉁퉁 부은 것을 깨달았다. 다친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간밤에

 움직이면서 어떻게 발이 삐끗한 모양이다. 처음에는 아픈지도 몰랐는데 이제는 발이 땅에 닿으면 조금 찌릿해졌다.

별로 대수롭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월요일의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는 것과 함께 발은 더 부어있었다. 

어쩔 수 없이 월차를 내고 병원에 가기로 결정했다. 어젯밤에 다가오는 다음날 저녁 7시가 주는 설렘에 밤잠을 설쳐서 

그런지 좀 피곤하기도 하지만 그건 기분 좋은 피곤함이었다. 

괜히 재준에게 전화를 해서 걱정을 끼치는 것보다는 저녁에 만나서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기에 전화도 하지

 않고 넉넉잡아 10시경에 병원으로 나설 생각을 하며 준비를 서둘렀다.

모처럼 테라스의 창도 열어 제쳐 찬 바람이 닫혀있던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겨울의 입새건만 바람 한 점이 없는 따사로운 햇볕은 봄날과 같이 따뜻하다. 

그 가운데 느껴지는 낮은 온도는 갈증 날때 마시는 한 잔의 차가운 우유처럼 시원하기만 했다.

기분 탓일 것이다. 현수는 알면서도 웃음이 새어나가고 마냥 행복했다.

그렇게 좋아했던 테라스에 팔을 걸치고 저 멀리 보이는 곳까지 시선을 던져보았다.

차가운 날씨도 기분 좋게 느껴지고 도심 한복판임을 뻔히 알면서도 어디선가 쪼로롱 거리는 새소리라도 들리는 듯하다.

그건 아마도 자신의 마음속 한 가운데가 시원하고 가슴 한편에 새소리를 켤 만큼 기분이 좋아서 그럴 것이다.

결과가 두렵기는 하지만 이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다.

진태의 말처럼 이런 감정, 이 낯설기만 한 설렘은 흔치 않은 감정임은 틀림이 없으니깐.

"웬만하면 문 좀 열어주지그래?"

낯선 목소리에 덜컥 놀라 현수가 아래를 내려보니 은영과 이복동생이 이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나가던 새똥을 보고도 꺄르르 웃는 여고생의 가벼운 즐거움과도 같았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아 버렸다.

반가운 손님은 아니지만 어째 되었던 다시 한 번은 봐야 할 사람이었다고 여기며 무거운 마음을 털며 현수는 문을 열어 주었다.

손님이라고 해봐야 재준이나 어머니뿐이었던 방도 막 들어서는 방문자들이 낯선지 어색한 공기만 흘리고 있었다.

딱히 안부 인사를 할 사이도 아니고 그 일이 지난 지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그 일이 까마득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건 아마 재준에 대한 마음이 사고를 흐리게 한 까닭일 것이다. 

은영이 무슨 마음을 먹고 그렇게 했는지 또 두 사람이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따위는 현수에게 그저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그러저러한 궁금증에 지나지 않았다. 

지나친 개인주의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그 정도로 지금 현수에게 있어서 가장 큰 당면과제는 재준이었다.

디데이는 오늘 저녁이지 않은가.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현수에 비해 두 명의 손님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뭐야? 지나치게 멀쩡하잖아?"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은영이 동생을 노려보았다. 마치 자신의 명에 불복하는 부하를 혼내는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질책하고 있었다. 

"어차피 주사 한 방이면 끝나버릴 녀석인데 뭐하러 힘써?"

"그런데 주사는커녕 오히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어 쫓겨나게 생겼어. 이건 뭐라고 변명할 거야? 애초에 다리라도 하나 분질렀으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았을 거 아냐!!"

당사자를 앞에 두고 다리를 분지르니 마니 다투는 두 사람을 보고 친절하게 현수는 음료수까지 앞에 내밀었다.

영원한 손님인 듯 멀뚱하니 서 있기만 하는 두 사람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날아오는 것은 어이없어 하는 

두 사람분의 눈빛뿐 가타부타 말은 없었다. 두 사람이 맞은 편에 앉자마자 현수는 입을 열었다.

영양가 없는 말은 질색이다. 둘러치는 말도 싫다. 빨리 직진 길을 달리고 저녁을 향해 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걸림돌은 일찌감치 제거하고 싶었다.

"본론만 말해요.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왔겠죠?"

"호라. 상당히 냉정하시네? 날 보면 멱살부터 잡으며 죽이네 살리네 할 줄 알았는데?"

비아냥거리는 은영을 가볍게 무시하고 현수는 이복동생을 바라보았다. 밝은 대낮에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아버지를 닮은 듯한 시원한 이목구비가 어색했지만 역시 정감이 가는 얼굴이다.

"너, 이름이 뭐야?"

"아.."

"말하고 싶지 않다면 관둬."

머뭇거리는 얼굴을 앞에 두고 매몰차게 말하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역시 현수의 짐작대로 근본부터 나쁜 녀석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복동생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남인 사이인데 달갑지 않은 사람의 반쪽 피가 섞였다고 해서 이제 와 뭉클거리는 혈육의 정이 생길 리 만무했다.

 어쩌면 재준이 종종 말하는 '냉정한 성격'의 줄기인지도 모른다 여기며 현수는 다시 은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가봐야 합니다. 용건이 뭡니까?"

"호, 이거 이겼다, 이거야? 배짱 좋은데? 우리가 또 여기서 그쪽을 납치할 수도 있다고. 알아? 긴장을 좀 해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이쁜 얼굴이 여자가 아닌 마녀처럼 보였다. 

그리고 현수는 여자에게 약할 뿐 마녀에게는 약하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모르고 당했지만 이런 벌건 백주에 내가 눈 뜨고 당할 거라고 생각하나 봐? 이봐. 은영씨. 두 사람 어떻게 안 사이인 줄 모르겠지만 

내가 얼굴도 모르는 이복동생 끌어다가 협박하면 눈물이라도 흘리며 엎드려 빌 거라고 생각했어?

 착각하지 마. 난 아버지도 없는 사람인데 이복동생은 무슨 이복동생.

 같잖지도 않아. 그리고 재준이 마음 돌리고 싶으면 재준에게 찾아가 호소하는 게 순서 아닌가? 

왜 애꿎은 내게 이러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런 일을 하고도 또 내게 볼일이 남아 있단 말이야? 

그래, 그 볼일이란 게 뭐야? 설마 나더러 재준일 설득시켜달라는 건 아니겠지?"

"상당히 쿨한걸? 영우녀석이 질질 짜면서 하소연 풀어놓기에 너도 그런 줄 알았는데 이건 형만한 아우가 없는 건가?

 너무 무덤덤해서 이쪽에서 오히려 놀랐다고. 그래,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나도 당신과 길게 말 섞고 싶은 마음 없어.

 재준씨가 우리 두 사람 사지 멀쩡하게 풀어준 것만 해도 감사히 여기고 기회가 닿을 때 우리도 몸 사려야 하니깐 빨리 일어서야 해.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려니 너무 배가 아파서 말이지."

재준이 현수의 말을 받아들여 밤새 두 사람을 풀어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가벼운 여행복차림인 것도 그렇다.

여기 온 것을 재준이 알겠지만 은영의 입장에서는 그냥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너무 억울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온 것이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은영은 당장 나갈 것 처럼 일어섰고 현수의 이복동생인 영우도 덩달아 일어섰다. 현수는 물끄러미 그들이

 손도 대지 않은 음료수 잔을 바라보며 이걸 버려야 하나 두었다가 내가 마셔야 하나 라는 영양가 없는 생각을 잠시 했다.

고개를 들어 은영을 바라보았을 때 은영의 두 눈은 아름다움이 아닌 심술로 빛났다.

"내가 끝까지 내 본 마음을 숨기고 재준씨 곁에 있었는 이유, 뭔지 알아? 그 하나는 재준씨가 가지고 있는 힘을 차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두 번째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으니깐."

어떤 날? 심상치 않은 공기에 일어서 은영을 마주 바라보았다.

마치 예전에 한 번 스쳐 지나갔던 일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떤 데자부인지 가물가물하다. 심장이 불온한 기운을 알아채고서 조심스럽게 소리 내며 뛰기 시작했다.

"그래서 도망가는 사람과 달리 상처입은 재준씨의 곁에 끝까지 남아 그를 보살펴줄 그런 기회가 반드시 온다고 여겼거든."

도망가는 사람? 상처입은 재준?

궁금증이 입안에 맴돌았지만 나오는 것은 억눌린 숨소리뿐이었다. 

지진이라도 일어나고 있는 듯 견고한 성이 땅이 움직이면서 흔들리고 있었다.

"당신같이 재준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게 난 너무 억울하다고.

 사랑은 서로를 가장 잘 알아야 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 세상에서 재준씨에 대해 당신만큼 모르는 사람 없을걸?"

지반이 흔들리면서 유리창부터 깨어지기 시작한다. 날카로운 유리조각에 심장이 베인 듯 심장 한구석이

 아직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마수에 벌써 찔려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

"후, 재준씨에게 전혀 인정받지 못한 친구? 우정? 그딴게 어떻게 존재하냐고? 자, 이걸 봐. 이게 도 재준의 일터라고. 알기나 해?"

건네주는 명함을 떨리는 손으로 받았다.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은 시야로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매튜 소비자금융' '도 재준' 그리고 낯선 핸드폰 번호.

친절한 설명까지 은영이 덧붙였다.

"재준씨 외할아버지 때부터 해오던 소비자금융의 전주를 재준씨가 25살 때 이어받았지.

 그때 청솔에서 빠져나왔고 말이야. 청솔이 뭔지는 알지? 요즘 들어 제법 양지화 되었다고는 하나 흔히 말하는 조직이지. 

유일한 후계자였던 재준씨가 나오는 바람에 형준씨가 지금 후계자 노릇을 하고 있지만 청솔 사람들은 다들 재준이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지.

 그리고 재준씨가 돌아온다면 당연히 그 자리는 재준씨가 차지할 테고 말이야. 재준씨가 가진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기나 해? 

이 내가 욕심을 낼 만큼 이라고. 명동지역에 터줏대감으로 있던 전주가 융통하는 돈 액수가 얼마쯤인지 상상도 못해볼걸? 

그런 사람이라고. 도 재준씨는. 네게 비유 맞춘다고 꾸질 꾸질한 24평짜리에 살고 있지만 재준씨 이름으로 된 집 서울에만 수십 채가 넘어. 

당신 재준씨에 대해 뭘 얼마나 잘 알고 있기에 그렇게 뻔뻔하게 얼굴을 치켜들고 있는 거야? 

그러고도 재준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을 자격 있다고 생각해? 이러고도 당신이 재준씨에게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성은 무너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커다란 광음을 감추지 않고서 성한 곳  한 군데도 남기지 않고 아낌없이 무너져 내렸다.

은영은 털썩 주저앉은 현수의 머리통을 바라보며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돌아서 가는 길에 마지막 한 방을 더 던졌다.

"아, 내 말 못 믿겠으면 당장 밖으로 나가봐. 재준씨가 네게 붙여둔 사람, 상준이 짜잔 하고 나타날 테니깐. 

여태 왜 매번 시기적절 하게 상준이 나타났는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면 당신, 바보라고. 하하. 꼴 좋다.

 이 현수. 날 이 모양으로 만들어놓고 어디 잘 사나 보자고!!"

**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간사한 것이어서 맨 처음 봤을 때 이놈이 우리 현수 상처 낸 놈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 팔다리 다 분질러도 속이 안 시원할 것 같더니 알고 보니 우리 현수 하나뿐인 형제다, 라고 생각하니 나쁜 짓을 하기는 했지만 호감이 생겼다.

물론 겉으로야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재준은 현수의 당부를 미루어두고서도 이 사내를 험하게 다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렇게 풀 죽은 것이 사과를 하고 싶기는 한데 용기가 없어 못하는 어린아이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 일은 전적으로 자신의 실수라 생각했다.

현수의 몸만 보호할 줄 알았지 그의 주변 환경에 대해 조사를 할 생각을 전혀 못한 자신의 실책이었다.

기껏해야 현수가 최근에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에 대한 조사가 전부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현수를 처음 본지 벌써 1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고 1 때 다시 봤을 때 형준이 조사한 것이 전부였다.

같이 살지도 않은 현수의 아버지까지 추적할 생각은 당시 형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현수가 군대에 가기 전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비추었을 때 들었는 이혼사유가 재준이 알고 있는 전부였다.

일부러 조사까지 할 생각을 못했었는데 그 판단착오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또 하나 문제가 있었다면 분명 이 영우라는 이 사내가 현수의 주변에서 얼씬거렸을 텐데 상준이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

은영의 감정을 소홀히 생각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죽이고 싶었다."

감히 겁도 없이 나온 망발에 재준의 눈이 순식간에 살기를 띄웠지만 영우의 웃음만 살 뿐이었다.

 배짱이 좋은 것인지 겁이 없는 건지. 그런 작은 점에서도 현수와 겹쳐지는 것은 아마 혈연이라는 단어가 주는 연계성 때문일 테다.

"훗, 겁나게 좋아하면서 말도 벙긋 못해본 병신이라며?"

"깐죽대지 마라. 오늘 여기서 네 발로 걸어갈 수도 있어."

"호~ 이거 무서운걸? 아니, 네 발로라도 걸을 수 있게 해주는 것에 감사히 여겨야 하나?"

"이 영우."

"아아..알았어. 알았다고. 계속할께. 그 녀석 아주 잘난 척하고 오만한 녀석인 줄 알았지.

 어릴 때는 내 아버지와 우리 가정의 행복을 파헤치는 주범으로, 커서는 아버지의 방황과 어머니의 히스테리를 불러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녀석 바보더라."

아버지가 현수의 모친과 이혼하기 전의 어머니는 의무감에 가끔 얼굴을 비추기만 하는

 아버지에게 매일같이 이혼하라고 성화였고 정작 이혼을 하고 돌아오자 이번에는 아버지의 방황이 이어졌었다.

물론 그런 결과를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집은 항상 어머니의 비명과도 같은 고함소리와 아버지의 침묵으로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버지가 연락했지?"

"그래. 어떻게 연락처를 알고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아아.. 고맙게 생각하라고. 내가 일부러 흘리고 다녔으니깐. 마음만 먹었다면 그 녀석 영 못 찾았을 걸?"

호언장담을 하는 씨익 웃는 얼굴은 많이 봐주었으니 감사히 여겨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럴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너도 무사하지는 못했을 거다. 이 영우. 나를 알고 있다면 그것도 알 테지."

영우의 눈을 뚫어질듯 노려보며 재준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테이블 위로 올라가 영우의 목줄기를 바로 눌렀다.

순식간에 목이 졸린 영우가 자유로운 두 손으로 재준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온몸을 버둥거리며 재준의 손을 떼려고 해보았지만 재준의 숨막히는 악력은 영우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 십 초만 흐르면 넌 정신을 잃게 되겠지. 그리고는 어찌되는지 아나? 피가 차단되어 뇌에 있던 피가 심장으로 흐르지 못하게 돼.

 내가 손을 놓아도 몇 분만에 너는 뇌울혈이 되고 뇌압상승으로 심장을 지배하는 뇌 부위가 파괴 되지. 그럼 간단해. 

요행이 살아나도 넌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는 거다."

재준의 손을 놓자 영우는 트인 숨을 몰아쉬며 구토감이 이는 속을 겨우 다스렸다.

"현수 동생이라고 털끝만큼 봐줄 생각 없다. 이 영우. 말조심해라. 그를 두고 내 앞에서 협박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기를 바래.

 난 이미 열다섯도 되기 전에 무기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백 가지도 넘게 터득한 사람이니깐."

담배를 하나 물며 재준은 영우가 호흡을 가다듬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똑바로 불어."

"허..헉.. 정말.. 심하군. 이거. 너무 한 거 아니야? 정말 죽는 줄 알았다고."

"경고는 단 한 번뿐이다."

"아..알았어."

"그럼 네 말은 현수 아버지께서 현수가 세 살 때부터 두 집 살림은 했다는 건가?"

"뭐 그런 셈이지."

"그걸 현수와 어머니께서 아신 것이 현수가 16살때?"

"아버지는 현수, 현수 말마다 현수뿐이었지. 그 해도 그랬어.

 올해는 나와 반드시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기로 연초부터 약속에 약속을 하셨는데 어떻게 

그 녀석이 아르바이트까지 해서 아버지 선물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 엄마의 약속 같은 건 내팽개치고 본가로 가셨지. 

물론 그걸 안 불 같은 성질의 우리 엄마 오랫동안 참아왔던 울분을 그대로 가지고 현수네 집으로 쳐들어 갔어. 

뭐 그러고는 뻔한 거 아니겠어? 그 어른 성격에 이십 년 가까이 가족을 속인 남자를 참고 받아주었겠어? 아무리 잘못했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말이야."

"아.. 그 해..크리스마스..였군."

중얼거리는 재준의 말을 가볍게 넘기며 영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지긋지긋한 그 집과의 인연을 끊으면 돌아올 줄 알았던 아버지의 마음이 이혼과 함께 방황으로 돌아오자 엄마의 노여움은 하늘을 찔렀다.

돈 대어주면서 일으킨 사업마저 고스란히 날려버린 채 넋 놓고 현수와 그 모친의 이름을 부르면서 술만 마셔대었다. 두 집 살림할 때는 

그래도 완전한 식구는 아니었지만 어엿한 가장의 모습을 가끔 비추던 사람이 거짓처럼 싹 사라져버리고 조강지처에

 대한 애정과 애틋한 부성에 울부짖음만이 남은 폐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신은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않도록 현수의 이름을 들었건만 정작 현수는 

자신의 존재도 모르는 것이 분하고 음지에서 자란 것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도 미웠다.

 그래서 그 뻔뻔한 얼굴에 주먹이라도 갈기고 싶어 현수의 동네에서 배회하다가 현수를 만난 적이 있었다.

편의점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에 덮치려고 작정을 하고 있었는데 현수가 편의점을 나왔을 때 초등학생 쯤으로밖에 안 보이는 

소년이 길을 잃고 울고 있는 것을 현수가 발견한 것이다. 아이와 몇 마디 나누더니 편의점으로 다시 데리고 들어와 컵라면을 

사 먹이고 아이의 집까지 바래다주는 걸 몰래 뒤따라 가서 보았었다.

정말 바보 같은 녀석이었다. 그냥 파출소에 넘기면 될 일을 그 꼬마의 형이라도 되는 양 손잡고 집에서 두 시간이나 걸리는 곳까지 가서 문 앞까지 데려다 준 것이다.

 그리고는 계산을 못 했는지 정작 돈 한푼이 없어 그는 걸어서 집까지 돌아왔었다.

터덜터덜 걷는 녀석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나는 왜 이러고 있지? 라고 몇 번이나 생각해보았지만 그냥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현수가 집에 들어가고 문 앞까지 나온 현수 모친의 꾸지람을 듣는 것을 보고서야 뒤돌아 왔었다. 

"개인주의 적인 성향이 짙은 녀석이야."

영우의 말을 듣고서 재준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람 얼굴 기억 못하고 지난 일도 기억해야만 하는 한 가지만 기억하는 녀석이지. 그 외에는 다 기억하지 못해. 

네 말대로 바보같이 멍청해서 다른 사람의 감정 따위는 잘 읽지 못하면서도 마음이 불쌍한 것은 눈치를 잘 채어서 감싸주곤 하지. 

사람의 약한 면을 잘 파고든다고 할까.."

"칫,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얼굴이군. 징그럽다. 면상 치워라."

"이 영우"

"왜!"

"은영이 접근했을 때 일부러 협조했지? 안 그럼 은영의 성격상 누구라도 끌었을 테니깐. 그리고 내 눈을 속이지 못해."

"무..뭘?"

"주사기를 칼처럼 높이 치켜들어서 어떻게 팔에 주사를 놓아. 주사를 놓을 작정이었으면 팔을 잡았어야지. 안 그래?"

"흠흠."

"약속은 약속이니 은영과 잠시 시외로 빠져있어라. 뒤는 내가 봐줄 테니. 은영같은 여자를 조용히 처리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니 잠시만 부탁하자. 

은영이 또 널 믿고 있으니 다른 짓 못하게 은영을 감시해줘."

불만이라는 듯 머리를 벅벅 긁는 영우지만 부정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뭐하러, 라는 말을 중얼거리던 영우의 말이 멈추어 진 것은 눈앞에 보인 손 때문이었다.

뭐야? 라는 시선으로 재준을 바라보니 아까 목을 조르며 살기를 띄우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로 가볍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음에 보게 되면 정식으로 인사하지."

머뭇거리며 영우가 재준의 손을 잡으며 악수를 하자 재준의 미소는 한창 더 짙어졌다.

"반갑네. 처남."

"으아아악!!!!!!!! 놔. 놔!!! 이 새꺄. 이 손 안 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