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짓말 [20]
은영과 영우가 현수의 집에서 나오는 것을 골목어귀에서 보면서 재준에게 보고를 하던 상준은 재준에게 급하게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현수의 집에서 달려나오다시피 현수가 뛰쳐나왔기 때문이었다.
현희의 말로는 아파서 병가를 내었다고 했는데 뛰는 걸 보니 다리가 불편한지 뛰는 걸음이 흔들거렸다.
재준에게 보고하기에 앞서 일단 현수의 뒤를 쫓아가는 게 우선이라 상준은 몸을 숨기면서 현수의 뒤를 쫓았다.
놀이터 어귀에서 가만히 서 있던 현수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육상을 권유받았을 만큼 뛰는 데는 자신이 있던 현수였다.
비록 오래간만에 뛰는 거라서 곧 숨이 차기 시작했지만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발은 통증을 호소하고 있지만 입술을 꽉 깨물고 참았다.
신경을 곤두세우며 살폈지만 이런 쪽에 둔감해서 그런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은 것처럼 앞만 바라보았다.
갑자기 우뚝 서 아무 택시나 잡아탔다. 그리고는 오 분도 채 가지 않아 택시를 세워 내렸다. 그러므로인해 현수는 자신이 의심했던 일이 착각이 아님을 깨달았다.
미친 사람처럼 또 낯선 거리를 뜀박질했다. 다행히 이 동네는 현수의 이모가 살던 동네였기에 골목골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잡을 수 있었다. 그 의심했던 주체자를.
"언제부터 였냐?"
거친 숨을 내쉬며 두리번거리던 상준이 놀라 등 뒤에 서 있는 현수를 돌아다 보았다.
"혀..형님."
"언제부터 내 뒤 쫓아다닌 거야?"
"......."
"우리 동네에 산다는 거, 우연은 아니었겠지?"
"형님..화 내지 마시고.."
"화? 내가 왜 화를 내? 재준이라면 모를까 네게 화낼 일 없겠지? 그리고 여태 그 모든 걸 우연이라고 생각한 나의 단순함이 문제지 네게 화낼 일은 없어."
신파극처럼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는 멍청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상대는
다름 아닌 십년지기 친구이자 '사랑'을 처음 맛본 사람처럼 떨리는 심장을 선물로 준 사람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너는 재준을 모른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예견된 확인절차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타인의 말들을 무시한 것은 자신에게는 확연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본 그 모습 그대로가 재준일 것이라고,
그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도 재준만은 자신의 아군일 것이라고, 내 가슴에 품은 유일한 뜨거운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고개 숙여 죄송합니다를 남발하는 상준이 말하는 무언의 사실 역시 믿지 않기로 했다.
두 눈으로, 재준의 입을 통해서 나온 말 외에는 믿지 않을 것이다.
설사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은 말을 할지라도 현수는 믿지 않기로 했다. 오직 재준의 말만 믿을 것이다.
그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이 아닌 이상 아직은 재준의 거짓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아아..죄송할 일은 없대도. 대신 오늘 나를 어디 좀 데려다 줘야겠어."
"어딜.."
"매튜라는 곳에 말이야"
상준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청담동 사무실이 전부가 아니었나 보더군. 얼마나 큰 사무실인지, 도대체 뭘 하는 곳인지,
과연 내가 모르는 그곳에 도 재준이 있는 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 믿겠어. 난 내 눈으로 보는 것 외에는 안 믿을 꺼거든.
그 헛소리가 맞는지 안 맞는지 봐야겠어. 앞장서."
"형님.."
"행여나 재준이에게 연락할 생각 하지 마. 얼른 앞장서. 내가 못 알아볼 것 같아서 이러는 거야? 난 지금 당장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
이게 하루쯤 뒤로 미루어진다고 해도 난 손해볼 건 없어. 어떻게 할래? 지금 앞장설래? 아니면 내일 그 매튜라는 곳에서 날 볼래?"
"알겠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하지만 형님. 큰 형님께서는.."
"감싸지 마. 그 어떤 변명도 듣지 않겠어. 내 눈으로 확인하고 내 귀로 재준의 말을 듣겠어. 입 다물고 안내하기나 해."
입을 다물라는 명을 받기는 했지만 상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 것은 상준이 차를 출발한 지 십여 분동안 침묵 속에서 시간을 보낸 후였다.
"항상 현수형님 걱정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처를 했습니다. 형님께서 혹시 다치시지나 않을까.."
대답없이 창 밖만 무심히 바라보는 현수의 무반응에 더 초조해진 상준이 땀에 젖은 손바닥을 바지에 쓰윽 닦았다.
단호하게 맞물려 다시는 열릴 것 같지 않던 현수의 입이 열린 것이 그때였다.
"그때 지하실에서 말했었지. 그 청솔은 뭐야?"
"청솔은...어르신께서 세우신 조직입니다. 조직이긴 한데 조금 다릅니다. 흔히 말하는 조폭도 세대교체가 되었는데 어른의 경우 3기에 해당됩니다.
3기라고 하면 연장을 들고 싸우는 그런 기수를 말하는 건데 요즘은 4라고들 하지요. 10대들 몇이 모이면 다 조폭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런 것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단호하게 말하며 상준은 한 빌딩의 주차장으로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다른 사람이 다 뭐라고 욕을 한들 자신의 눈에는 청솔이 안방이었고 어른이 자신의 은인이며 재준이 자신의 생명이었다.
비록 다른 무리와 조금 다른 방법으로 산다고 해도 청솔이 타인의 눈물을 머금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준은 설명하고 싶었다. 자신에게 얼마나 청솔이 삶의 원동력이 되었는지를. 그리고 그 가운데 서 있는 재준에게 현수가 더 이상 상처주지 않기를 바랬다.
"조직이라고는 하나 이제는 예전같지 않습니다. 계보를 거느린 대조직의 경우 수사기관에 노출되기도 쉽고 조폭전담반까지 있으니 활동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요즘은 합법적인 일도 많이 하시고 여러 군데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주는 정도일 뿐입니다.
그리고 예전부터 아이들 잘 거두어 들이시는 분이셨는데 그 아이들이 커서 집안에 있는 것이지 예전과 같은 흔히 말하는 조폭과는 다릅니다.
그냥 청솔이라는 가족적인 회사처럼 여기시면 됩니다."
차를 주차하고 상준이 내려 조수석 쪽으로 가기도 전에 현수가 문을 열고 내렸다.
자신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표정변화가 없는 현수를 뒤따르며 조급하게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 말씀 안 하신 것은 특별히 말 하실 게 없어서 그러셨을 겁니다. 또 과거 조직으로 불렸지만 이제는 예전과 같은 일들 하지 않으시니깐.."
"이 차.."
"....."
"설마.......재준이꺼야?"
상준의 말을 듣고 있는 건지 아닌지조차 모를 정도로 대꾸가 없던 현수가 어떤 차 앞에 걸음을 멈추면서 상준에게 물었다.
상준이 숨을 멈출 정도로 놀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의 갈등 후 재준의 거짓에 놀라 아픈 발을 이끌고 여기까지 온 현수에게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비록 그 결과가 재준을 더 아프게 하는 진통을 낳더라도.
"..........네."
"하하.. 웃음도 안 나온다. 정문으로 가. 똑똑히 처음부터 살펴보겠어. 재준이의 거짓을."
차를 타고 다니지 않아 차에 관심이 없는 자신이 아는 유일한 외제차를 여기서 보게 되자 상준에게 물었더니 솔직한 대답이 나왔다.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우연히 스치며 눈길을 끈 차에 대해 물으니 재준이 상세히 이름을 가르쳐준 적이 있던 외제차였다.
그 후로는 그 차만 눈에 들어와 우연히 도로에서 이 차를 보면 반가워 재준에게 전화도 하곤 했었다.
'나 오늘 로드스터 봤어!!!' 라고 말이다. 그러면 재준도 반갑게 대꾸를 해주곤 했다. 어디서 봤냐고, 누가 타고 있더냐고,
남자 친구들이 흔히 하는 그런 식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호들갑스럽게 본 것만으로도 자랑을 하던 자신이었다.
딱히 이 차를 가지고 싶다는 욕심은 없었다. 운전도 못하는데다가 더더군다나 외제차가 아닌가. 언감생심 꿈도 못 꾸었다.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그저 날씬하게 잘 빠진 빨간 스포츠카라는 게 좋았을 뿐이었다.
가끔 경운기 소리를 내는 소나타를 끌고 오는 재준에게 로드스터로 바꿀 생각 없냐고 웃으며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서민들이 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그건 환상이고 꿈이었다.
환상이 더 이상 환상이 아니고 꿈이 제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현실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상준의 안내로 도착한 곳은 명동의 한복판이었다. 커다란 검은 유리로 만들어진 건물이 뾰족하게 솟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지어진 것이 오래되지 않았는지 깨끗한 외관과 유명 건축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세련된 고층건물을 올려다보니 갓 시골에서 상경한 촌부처럼 아찔해졌다.
언젠가 가보았던 청담동의 15평 남짓한 사무실이 전부인 줄 알았다.
물론 그것도 우연히 그 근처에서 두식을 보았고 두식을 추궁해서 가보니 그 사무실에 재준이 있어서 당연히 그것이 다 인줄 알았다.
재준을 '형님'이라 부르며 따르는 열 명 남짓한 덩치들이 있기에 매번 깡패라 놀렸지만 블루라는 술집 때문에 존재하는 그저
그런 동생이자 블루를 보호하는 기생된 관계의 동생들이다 라고만 지레짐작했었다. 그리고 민과 두식의 경우는 학교후배도
되기 때문에 그들이 재준을 따라 여태 붙어 있는 것이라만 여겼다. 재준의 아버지 일을 거든다고 들었을 때만 해도 재준의 말에 의하면
'여러 가지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의 일이 어떤 것인지 전혀 짐작도 못했다. 그저 그런가 보다, 라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형준이 조금 더 깊게 '깡패' 접근된 생활을 하는 것이고 가끔 싸움판에 끼어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싸움 잘하는
녀석의 감출 수 없는 습관 같은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그것이 조직화된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는 편안하고, 음식 잘하는, 술만 마시면 생각나는 매우 좋아하는 죽마고우일 뿐이었다.
확 트인 높은 천장으로 시야를 넓게 확보한 로비를 지나 여러 대의 엘리베이터 가운데 상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른 상준이 문이 열리자 현수가 먼저 탈 수 있게 몸을 살짝 비켰다.
눌러진 버튼은 19층. 엘리베이터 안에는 층별로 안내문이 있었고 19층은 소비자금융 매튜였다.
소비자금융
낯선 단어가 현수의 가슴을 찔렀다. 게이라는 단어가 가슴을 찌르더니 이제는 이 단어가 찌른다.
얼마나 날 찔러야 널 벗길 수 있을까?
오늘이 디데이였다.
비록 재준이 마음을 준 첫 사랑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감정, 이런 느낌 처음으로 준 사람에게 감정을 뱉고 싶었다. 설사 그것이 '이별' - 사귀지도 않았는데 이별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허용한다면 - 이라는 불운의 결과물을 가져다준다고 해도 용기를 내어볼 참이었다.
어차피 이제는 '친구'가 성립이 안 될 것이다. 막말로 모 아니면 도 다. '모'는 안 될 테니 이왕 버려진 '도'가 될 바에야 던져보기라도 해야 한다는 게 현수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건 '도' 도 아니다. 친구라는 자리에조차 자신의 자리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아니 그 무엇보다 자신을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대우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친구라는 '도'의 자리라도, 그래서 던져볼 수 있는 기회라도 얻기를 바랬다. -그것의 결과의 승패를 떠나서 -
말로만 특별하다 했지 결과적으로 하나도 특별하지 않았다.
아니, 특별한 거 였나? 모든 주변의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으니.
현수의 입에서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제 그 누구에게도 묻지 않을 것이다. 모든 질문은 재준에게 할 것이고 모든 대답은 그의 입을 통해 들을 것이다. 현수는 분노를 애써 다스리지 않았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의문의 19층이 시야에 들어왔다. 카라의 꽃 모양이 새겨진 아이보리 빛 벽지의 한쪽 벽에는 커다란 한글로 '매튜 소비자금융'이라고 표시가 되어있고 빨간색 카펫이 모두 깔린 복도에는 투피스를 입은 여자 두 명이 안내원인 듯 우뚝 서 있었다. 그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없는 듯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몇 개의 문이 보였지만 상준은 그 방으로 갈 생각은 없는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복도 끝에의 문 앞에 몇 명의 장정이 서 있었다.
궁금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현수를 보며 상준이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19층이 소비자 금융 매튜입니다. 사장은 민형님이십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전주는 큰형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오버브리지를 통하면 방이 하나 나오는데 거기가 큰형님께서 머무르고 계시는 사무실입니다.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는 곳이어서 형님 혼자 오셨다면 아마 통과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
"지금..재준이 있지?"
"네. 계실 겁니다. "
입구를 지키고 있던 덩치들이 상준의 얼굴을 보더니 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뒤에 서 있는 현수를 바라보자 상준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큰형님 손님이시다. 비켜."
"네!!"
열린 문으로 들어서자 투명한 오버브리지가 나타났다. 비밀의 통로처럼, 미지의 세계로 가는 열쇠처럼 느껴진다고
말을 했었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 현수에게는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러 가는 고통의 길일뿐이었다.
"오버브리지를 좋아하셨습니까?"
"으응??"
재준의 일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한 채 구름다리를 지나쳤던 현수가 뒤늦게 대답을 하자 상준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 이며 간단한 설명을 해주었다.
아마 재준에게서는 이런 설명을 들을 시간도, 듣고 싶은 마음도 안 들 테니 말이다.
"아닙니다. 이 빌딩은 본관이 동관, 오버브리지로 넘어온 곳이 서관으로 나누어집니다. 동관은 30층이고 서관은 20층입니다.
동관의 19,20층은 매튜가 쓰고 있고 서관은 19, 20층 역시 쓰고 있습니다만 서관으로 오는 오버브리지는 아까 보셨던 바와 같이
엄격히 통제를 하고 있어서 매튜의 직원들조차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관의 엘리베이터조차 18층까지 운행하고 있어서
서관 19층에서 로비로 내려가려면 오버브리지를 통해 동관 19층까지 와서 엘리베이터를 타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습니다만 그것이
큰형님께서 원하셨던 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2001년에 국내 기술로만 지어졌으며 최초의 인텔리전트 빌딩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설계는 부부건축가 원정수·지순씨가 맡았고 큰형님께서도 관여를 좀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서관의 19층은 비서실 노릇을 하는 곳이기도 하고 저희를 비롯한 큰형님을 따르는 몇 명의 식구들과 형님을 만나러
온 손님들이 머무는 로비 겸 휴식공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20층은 큰형님 혼자서 쓰시는 공간입니다.
20층에는 사전 허락없이는 저희도 못 들어갑니다. 여깁니다. 형님. 여기가 매튜의 산실,
큰형님께서 하루 일과를 보내시는 곳입니다. 늦게 모시게 되어 죄송합니다. 어서 오십시요."
상준이 문을 열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조용하지만 제법 수다스럽게 장난치며 놀고 있던 덩치 있는 서너 명의 사내들이었다.
눈썰미가 좋지 않은 현수의 눈으로 봐서도 몇몇은 눈에 익은 사내들이었다.
물론 그들의 이름은 전혀 모르지만 스쳐 지나가듯 인사를 나눈 녀석들도 있었다.
현수보다 더 놀란 눈으로 일어서더니 꾸벅 인사를 건네는 그들을 지나치자 뒤따라 오던 상준이 조심스럽게 현수에게 물었다.
"20층으로 가시려면 저쪽 계단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형님께...전화로라도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많이 놀래실 것 같은.."
"전화하지 마. 내가 직접 갈 테니깐. 안에 있어?"
상준이 옆에 서 있는 녀석에게 다시 묻자 질문을 받은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현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선형으로 길게 꼬인 계단이 너무 높고 멀게만 느껴졌다.
첫 계단에 발을 딛자 짜르르 통증이 느껴졌다. 구두 안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얼핏 내려다봐도 퉁퉁 부은 발을 볼 수 있었다.
아프지만 위를 보면서 한 계단 한 계단 천천히 밟아 올라갔다.
네게 가는 길이, 네 본 모습으로 향하는 길이 이렇게 멀었구나. 도 재준.
난 그것도 모르고 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자랑스러워했었지.
왜 그랬어. 왜 나에게 이 먼 계단을 나 혼자 밟게 했어. 왜.
난 별다른 걸 바란 게 아니었어. 단지..네게 인정을 받고 싶었을 뿐이야. 친구로서, 사람으로서, 믿을 수 있는 동지로서.
왜 내 마음도 전할 수 있는 용기마저 넌 꺾어버린 거야.
왜 날 이렇게 비참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거니. 내가...그렇게 싫었어??
...........
아니, 싫어하지는 않았을 거야. 네 행동, 네 다정한 눈빛 다 진실이라고 믿어.
그 사람이 나를 대했을 때 다정하고 날 특별히 여겨주었던 것처럼 말이야.
그 사람이 세상에 하나뿐인 혈육인양 날 대했듯 너도 날 하나뿐인 절친한 친구로 대했었지.
그 각별함에 또 속고 또 배신당하는 구나.
난 또 내 전부를 다 내주었던 사람에게 등을 돌리는구나.
그런데... 너무 오래전의 일이어서 그런가? 아니면 그 사람보다 네 무게가 더 커서 그런가?
왜 난 이다지도 아프지? 그때는 견딜만 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심장이 찢어질 듯 아픈 거지??
오늘 저녁에 하려고 했던 말 지금 나 혼자 독백한다 재준아.
널.. 사랑해.
널.. 사랑했어.
현수는 제대로 열릴 것 같지 않은 커다란 문 앞에 도달했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는데 문은 큰 제 몸뚱이가 무색할 정도로 소리도 없이 열렸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환한 대낮의 정경이 그대로 느껴지는 눈부신 밝음이었다.
확 트인 공간, 투명한 유리, 어디선가 공기청정기라도 금방 틀었는지 상쾌한 공기,
부드러운 카펫과 곳곳에 배치된 관엽식물들, 푹신한 소파와 같은 디자인의 테이블,
우아한 테이블과는 어울리지 않은 지나치게 사무적인 전화기의 우스꽝스러운 모습까지 꼼꼼히 살피고서야 시선을 돌렸다.
서너 사람이 충분히 쓸 수 있을 넓은 책상 앞에는 몇 대의 전화기와 두 대의 컴퓨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컴퓨터의 사이에서 한 사람이 현수를 발견하고는 놀라 벌떡 일어섰다.
얼마나 갑자기 일어났는지 반동에 의자가 밀려나 유리에 쿵하고 소리를 내며 박을 지경이었다.
저런 소리가 났는데도 유리가 깨어지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며 현수는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랑의 완성은 믿음이라 여겼다.
사랑의 가치는 존중이라 믿었다.
그래서 믿음과 존중이 결여된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고 16살 그 슬픈 크리스마스 때 결론을 내렸다.
'아빠'라고 부르던 사람을 '그 사람'으로 말하게 되면서 다시는 거짓을 말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리고 여태 사랑이라 믿었던 감정들을 유치원 때 겪었던 어린 감정으로 치부해버린 놀라운 능력을 가진 성인의 감정으로
뜨겁게 다가온 사랑의 주인공이 뱉어내는 것은 오직 거짓뿐이었다.
예전에는 가장 절친한 친구라 여겼던 사람,
막 걸음마를 떼는 아기처럼 사랑을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엉거주춤 앞을 향해 걸어보려고 욕심내었던 사람,
용기를 내어보기도 전에 좌절부터 안겨준 사람,
그 사람의 놀란 눈동자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마지막 독백을 해보았다.
사랑해. 도 재준.
하지만....
현수는 재준을 보는 순간 흐르는 눈물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