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짓말 [21]
영우와 은영의 행적을 보고받고 난 다음 상준이 전화를 줄 때가 되었는데 라는 생각을 했다.
느긋이 의자를 뒤로 제치며 담배를 입에 하나 물자 곧 투덜거리는 민의 타박이 들려왔지만 귀에 담지도 않고 줄담배임을 알지만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예약했지?"
"정확히 25번째 물어보시는 말입니다. 오늘 저녁 7시가 되면 가볍게 백 번 채우시겠군요. 미리 축하해 드릴까요?"
물론 잘 안다. 민의 성격상 자신이 명한 명령을 한치의 착오도 없이 진행할 것이라는 믿음이 분명 있다.
하지만 궁금한 걸 어쩌나. 혹시 잘못되지나 않았는지, 혹시 만에 하나 실수라도 하지 않았는지 조바심이 나는 걸 어쩌나.
"저도 대충 20번째쯤 묻는 겁니다만, 현수형님과 무슨 일 있으십니까?"
어딘가 나사 천 개쯤 몽땅 빠진 사람처럼 아침부터 샐샐 거리는 재준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살피며 민이 물었지만 20번째쯤 듣는 대답은 처음과 똑같았다.
"나도 몰라."
거짓은 아니었다. 재준도 몰랐으니깐.
다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었다. 오늘 저녁 만남의 중요성을 현수의 말이나 행동에서 느꼈을 뿐이다.
가을부터 어딘가 모르게 자신을 불편해하는 현수를 눈치채고는 그 원인이 우연하게 밝혀진 게이라는 말 때문이라
여기고 만나는 횟수도 더 자제하고 밤 전화 외에는 좀처럼 연락도 하지 않았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좀 괜찮아 질 것이라 스스로 위로하면서 현수의 눈치만 살피느라 간과한 사실이 오늘에서야 떠올랐다.
특별히 사귀는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현수가 최근 선을 전혀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제 눈을 마주치면 당황해 하던 모습, 그리고 급하게 입을 열려다가 머뭇거리며 오늘 밤을 약속하던 그 모습들과 함께 어우러진 망상은 이미 희망을 분만하고 있었다.
셀 수 없는 좌절에 익숙한 가슴이 느닷없는 분만에 놀라 수습을 하려고 애썼지만
이미 세상 밖으로 제 몸을 드러낸 희망이란 녀석은 큰 소리로 우렁찬 목소리를 터트려버렸다.
그럴 리 없겠지만 부끄러운 듯 오늘 약속을 다짐하던 현수의 붉어진 얼굴은 분명
청신호였다. 그리고 그 청신호의 영향을 고스란히 맨가슴으로 받은 재준이 오늘 하루를 정상적인 생활로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 오늘 결재 안 해!!"
"형님!!!!"
중요한 사안은 색깔 있는 포스트 잇으로 표시까지 해둔 결재서류들이 산더미 같은데 방학숙제 미루듯 쓱 밀어버리는
재준의 데스크 앞으로 다가서며 민이 다시 그의 앞으로 서류들을 소리 나게 탁 내려놓았다.
"연애는 연애고 그래도 할 건 하셔야 우리 현수형님 회도 사드리지요? 안 그렇습니까?"
"나 매튜에서 돈 안 받아도 우.리.현.수 회는 평생 사 먹이고 남는다. 그리고 노 민."
"네. 말씀하시면서도 서류 잘 보시는 형님. 귀 열어 둘 테니 결재나 좀 해주십시요. 네?"
"너 언제부터 우리 현수형님이야? 우리는 무슨 우리. 언제 네가 현수랑 '우리' 사이가 되었어? 어?"
"허이고, 이제 갖다 붙일 게 없어 그런 시시껄렁한 단어에까지 딴지를 거는 겁니까? 진짜 결재 안 해주실껍니까?"
"시시껄렁한? 딴지? 어쭈, 노 민. 너 많이 컸다?"
"결재 안 해주시면 제 마음대로 합니다. 나중에 주식 날렸니, 돈 떼어먹었니 말씀하지 마십시요."
"그래, 네가 다 떼어먹어라! 너 사장이잖아. 난 직함도 없다고. 암튼 난 오늘 결재 못 해. 아니 일 못 해. 6시까지 가만히 있다가 갈 테니깐 나 일 시키지 마!"
"왜요!! 누구처럼 노가다를 합니까? 서류 떼러 구청에 법원에 발로 뛰기를 하십니까?
단지 서류보고 결재만 하면 되는 일인데 뭔 큰일을 하신다고 일씩이나 시키지 말라고 하는 겁니까? 도대체 왜 일 못하겠다고 땡.깡. 부르십니까! 네?"
지난 재준의 생일 때 술 마시고 현수와 함께 어깨동무를 한 채 노래를 부르던 것을 두식이 사진을 찍어 주었다.
작은 사진 사이즈 안에 자신의 얼굴 바로 곁에서 환하게 웃는 현수의 얼굴이 너무 좋아서 작은 액자에 넣어 책상 위에 놓인 사진 가운데 놓아두었다.
현수의 밝은 웃음이 전해지는 듯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슬금 풀어지고는 한다.
오늘은 민이 '땡깡'이 아닌 그 어떤 무례한 언어를 구사한다고 해도 다 용서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여유가 있었다.
"오늘은 정말 일 못하겠다. 내가 집중해서 하지도 못할 일 차라리 네가 하는 게 나아. 급하지 않은 건 내일로 미루고."
"아, 그러니깐 왜요! 왜 못한다고.."
"뇌가 머리에 들어 있지 않으니깐.."
"네??"
"심장이 가슴 속에 있지 않으니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래서 일을 못한다는 거다. 알았으면 나가 봐."
"모르겠는데요?"
"오늘 기분 좋아서 참으려고 했는데 말이야, 자, 선택해."
재준이 친절히 일어서며 손과 목을 이러 저리 움직이며 가볍게 풀자 민은 그제야 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재준의 앞에 놓인 서류들을 주섬주섬 챙겨 가슴에 품었다.
"내일은 뇌가 머리에 들어가고 심장이 가슴 속에 들어가 있기를 바랍니다. 형님."
"나도 몰라."
구겨진 인상의 민을 돌려보내고 재준은 덜썩 의자에 앉으며 담배를 또 물었다.
민에게 말했듯이 뇌가 머리에 없고 심장이 가슴 속에 없는 것 같았다.
머리로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고 오로지 모든 감각은 저녁 7시에 맞추어 진 듯했다. 그리고 심장은 이미 현수에게로 달아나버린 듯하다.
또다시 인터폰을 눌러 민에게 대해에 예약을 했는지 물어보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을 때 문이 노크도 없이 열렸다.
민이 포기하지 않고 또 서류들을 들고 오는 것이라 생각하고 감히 노크도 없이 들어온다 가볍게 혼쭐을 내려던 재준의
움직임이 멈추어버린 것은 들어서는 사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가끔 그런 상상을 하곤 했었다.
이 거짓된 길을 갈 때 현수가 가장 바라지 않은 방법으로 들키게 되면 어쩌나, 라는 생각을.
그런 불길한 상상을 할 때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고백을 하던가 아니면 철저하고 완벽한 거짓을 꾸미자. 라고 마침표를 찍곤 했다.
둘 다 못하게 된다면 밑을 볼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라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꿈이자 목표인
현수의 곁에 오래 살아남기가 0.00001 퍼센트도 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 일상은 두근거리는
심장만을 또렷이 기억해 두려움까지 꼼꼼하게 챙길 여력이 없었는 모양이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도망갔던 뇌가 숨을 멈추고 주인을 찾아간 심장이 제자리로 돌아와 뜀박질을 하기도 전에 놀라 얼어붙어 버렸다.
뭐라 변명을 해야 하는데, 저 고집스러운 입이 벌어져 다시는 주워담지 못하는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봉할만한 말을 꺼내야 하는데 재준은 넋 놓고 자신만의 연인을 바라볼 뿐 그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재준이야? 너 재준이.. 맞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바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도 믿기지 않은 듯 확인하는 현수의 배신당한 가슴이 너무 아파서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예상되는 현수의 말에 벌써 아파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 다른 사람 말 하나도 믿지 않기로 했어. 설사 네가 이 낯선 곳에 있더라도 네 말만 믿기로 했어.
그래서 여기까지 꾹 참고 나 성질 하나도 안 부리고 왔다. 나 잘했지?"
소리없는 눈물은 가슴을 꿰뚫고 들어왔다. 가슴이 아파서 미칠 것만 같은데,
이 사람의 눈물을 보는 게 숨이 막힐 정도로 목 안을 조여오는데 재준은 어설픈 위로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제 네가 대답해 줄래? 매튜라는 이 회사, 네 꺼야?"
"현수야.."
"아니야? 이거 다른 사람 거야? 얼버무릴 생각 하지마. 여기, 이 낯선 사무실이 네 소유 맞는 거야?"
"...............응"
"로드스타도 네 꺼고?"
"...............응"
"청솔인지 뭔지도 진짜고?"
".............현수야."
"대답해."
"현수야...."
"대답하라잖아!! 네 입으로 똑바로 대답해보란 말이야!!!"
"......."
현수의 눈물이 주는 통증을 참지 못해 현수에게 다가가 얼굴에 손을 뻗으려고 할 때 현수가 매서운 손놀림으로 재준의 손을 거두게 했다.
십여 년 넘게 알아 왔지만 현수의 눈물은 이게 두 번째였다.
처음에는 현수의 어머니께서 대구로 가신다고 하셨을 때 자신을 배신한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재준의 품에서 운 적이 있었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
재준은 현수의 눈물 한 방울이 자신이 흘린 피 한 바가지보다 더 아프다 생각하며 안아 줄 수도, 여기까지 찾아온 마당에 섣불리 위로의
말을 뱉을 수 없는 자신의 가난에 입술을 꽉 깨물 수 밖에 없었다.
눈물에 젖은 두 눈동자가 담고 있는 것은 그 어떠한 감정도 파고 들 수 없을 만큼 붉게 타오르는 분노만이 여백도 없이 들어차 있었다.
"너 게이이라는 거 밝혀졌을 때 뭐라고 했어? 기억나? 내가 다시는 용서하지 않는다고 한 거 기억은 나?"
"그래.."
"하. 기억이 난다고? 기억 나는 사람이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건데?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건데? 너 나 만날 때마다 그 구형 소나타 바꾸고 왔어?
그러면서 내가 로드스터 봤다고 네게 전화할 때 너 재미있었겠다?"
"현수야.."
"내가 고작 횟값 더치페이 하자고 할 때 너 왜 내 돈 받았어? 너 돈 많잖아. 안 그래? 난.. 난...."
울음을 꿀꺽 삼켰다. 다가오는 손을 뿌리치고 안타깝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외면했다. 뭐가 진짜인지 이제는 그것마저 알 수 없었다.
진심 어린 저 눈을 보면서도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진실이라고 믿었던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네가 좋았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더 진심으로 너 생각했어. 너 믿었다. 도 재준. 널 믿었기 때문에 네가 날 십 년 넘게 속여왔던 거 넘겼어.
그만큼 널 좋아하고 널 믿었기 때문에. 그런데 이거 뭐야. 차라리 나 친구 하기 싫다고 말하지 그랬어. 나 귀찮다고,
나 꼴도 보기 싫다고 말만 했더라면 나 간단히 네 인생에서 물러나 주었을 텐데 번거롭게 이거 뭐 하는 짓이야. 왜 이랬어.
거짓말 끔찍하게 생각하는 나한테 너 이거 무슨 짓이야. 왜 이래. 나한테 왜 이랬어. 응? 내가 그렇게 우스워보였어?
내가 그렇게 가지고 놀기 쉬운 장난감처럼 보였냐고!!!"
어느새 눈물을 훔친 현수의 붉어진 눈동자는 또 당장 눈물을 쏟을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지만 뱉어내는 말은 얼음보다 차갑고 시렸다.
"그런 거 아니야.. 널...널 우습게 본건 아니야. 절대..그건 .."
"그럼? 뭔데?"
"현수야 진정하고.."
"손 대지 마!!!"
선 채로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길 것 같아 자리에 앉히려는 재준의 손이 공중에서 멈추어버렸다.
손이 멈춘 것과 동시에 심장의 박동질도 멈춘 듯 숨쉬기조차 곤란해졌다. 눈이라도 녹일 듯 따뜻하고
다정했던 눈동자는 한겨울 한파보다 더 차가워서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이런 차가운 눈빛의
현수는 보이는 그대로 말도 차가워 말을 듣는 순간 재준의 몸속에 있는 피마저 얼려버릴 것만 같다.
"이유가 뭐야. 나에게 이런 엄청난 거짓말한 이유가 뭐야?"
".............처음에... 널 봤을 때 놓치고 싶지 않았어. 곁에 있고 싶었어. 그런데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네가 부자에게 혐오감을 느끼는 것 같아서.."
"그딴게 이유라는 거야?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그 수 많은 거짓이 오직 그 이유 하나만으로??"
"아니!!"
재준은 뻣뻣하게 고개를 들었다. 마주 대하는 차가운 눈이 시리기는 하지만 두 주먹을 불끈 쥐는 걸로 용기를 가졌다.
막다른 골목까지 오게 된 감정이 슬금 검은 오오라를 내뿜으며 제 형태를 찾기 시작했다. 숨길 수 없을 만큼 커다랗고
손을 뻗기 시작하면 저 멀리까지 닿을 정도로 기다란 욕심을 지닌 것이 오랜 인내의 잠에서 깨어났다.
목을 추스르며 기지개를 켜는 감정에는 불안감의 패는 이미 쥐고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게 양손으로 덮어버렸다.
찬란한 미래 따위는 꿈도 꾸지 않는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지금 가진 감정이 얼마나 크며 얼마나 나를 삼켜 버렸는지를.
"그 이유는..내가 널..ㅅ...."
"날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려는 거야?"
고개를 내밀던 오오라의 목이 뎅강 잘려버렸다. '사랑'이라는 재준에게 있어서 뜨겁고 생각만 해도 좋기만
한 감정의 단어를 뱉는 현수의 입술은 비웃음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런 거야?"
침묵으로 긍정을 표하자 풋- 하고 현수가 비웃는다.
추락하는 감정의 진통이 온몸으로 들이닥쳤다.
"날 사랑해서, 날 곁에 두고 싶어서,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날 상처주기 싫어서? 하.하. 똑같애. 어쩜 그리 그 인간과 똑같니? 넌 다를 줄 알았는데 말이야."
현수가 말하는 '그 인간'이란 현수의 아버지를 말하는 것임을 알고 있기에 재준은 늦게나마 현수가 말한 '사랑'이라는
단어가 자신이 품고 있는 단어와 다른 뜻임을 알 수 있었다. 허나 이제와서 그 차이를 말해주기에는 현수의 감정이 지나치게 예민해져 있었다.
"그 인간도 그랬지. 날 사랑하고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그랬대. 엄마를 사랑해서, 엄마가 아파하는 걸 보기
싫어서 그랬대. 말이 돼? 말이 된다고 넌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너도 그 인간과 똑같은 대답을 하고 있는 거야?
지금?? 이 나쁜 놈아. 차라리 처음부터 말하지 그랬어. 차라리 처음부터 난 이러저러한 놈이지만 너와 친해지고 싶다,
라고 말하지 그랬어!!!! 왜 여기까지 왔어. 왜 이 낯선 빌딩에, 이 긴 계단을 왜 나 혼자 걷게 만들었어!!!!
왜 네가 게이임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게 만들었냐고!!!!!! 내가 어떤 마음으로 내 감정을 이끌었는지
너 안다면 이렇게 날 무시못해. 내가 어떤 용기를 품었는지, 내가 어떻게 네게 인정을 받고 싶었는지..."
"제발....울지 마. 울지 마...현수야. 응? 제발... 내가 잘못했어. 응? 내가 잘못했으니깐..제발 울지 마.."
"이런 식으로 ..없는 사람 취급하지 말란 말이야. 이런 식으로.. 사람을 무시하는 거 아니야. 이런 식으로..날 비참하게 만들지 말란 말이야!!!!!"
"미안..미안... 미안 현수야.."
눈가의 눈물을 손으로 닦으며 현수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유리를 통해서 보는 시원한 도시의 풍경이 많이 낯설었다.
낯선 환경처럼 멀뚱하니 서 있는 재준도 낯설게 여겨졌다. 마치 타인처럼.
"이성은 아니지만 붉은 실이 너와 엮여졌다고 생각했어. 뗄레야 뗄 수 없는 쌍둥이 형제처럼 난 네가 좋았다.
왜 나에게 그 실을 끓게 하게 만들었어. 바보야. 오랫동안 나 살펴주느라 고생 많았다.
이제 앞으로 내 입에서 네 이름 부를 일 없을 테니 너도 더 이상 네 입에서 내 이름 나오는 일 없기를 바래."
"혀, 현수야.."
"사랑? 후, 내가 그 인간한테 했던 말 그대로 해볼까? 거짓투성인 사랑 따위 다 네가 가져. 난 거짓없는 절교를 가질 테니."
"현수야, 제발 내 말 좀 들어. 내 말 좀.."
"네 말? 무슨 말? 여기 네 회사 아니야? 그 차 네 차 아니었어? 너 게이 아닌 거 였어?"
"아니, 그건 아니지만.."
"또 무슨 거짓말 하려고? 다시는 너 보고 싶지 않다. 도 재준."
현수의 말에 재준이 현수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현수가 놀라 재준의 머리를 내려다보았지만 이미 식은 눈동자는 온기를 찾지 못했다.
"어..어떻게 하면 되겠어. 어떻게 하면..내가 어떻게 하면 날 용서해줄래?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일찍 그렇게 생각하지 그랬어. 네가 친구 앞에서 무릎을 꿇기 전에, 내가 이 낯설고 긴 계단을 혼자 오르기 전에,
내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널 알기 전에..."
그리고 내가 내 마음을 알기전에..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며 현수는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용서해주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이기적인 욕심꾸러기가 자신의 심장을 파고들지 않았더라면.
물론 불같이 화를 내기는 했겠지만 자신 앞에 무릎까지 꿇은 재준을 보며 마음이 찐해 그를 부축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본적인 대우조차 받지 못한 사랑이 받지 못하는 사랑의 울분을 이런 식으로 터트리는 것이다.
'모'를 가지지 못할 바에야 버리는 패를 선택한 것이다.
"네 거짓들이 다 거짓이 아닌 다음에야 난 널 용서하는 일 없을 거야. 속 시원하지 않아? 거짓을 말할 필요가 이제 없어져 버렸는데. 잘 지내라. 안녕."
문을 닫고 긴 계단을 내려오자 상준의 연락을 받은 것인지 민과 두식이도 19층에 모여있었다. 현수를 보자 민이 제일 먼저 앞으로 달려나왔다.
민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현수가 먼저 못을 박았다.
"앞으로 볼 일 없었으면 좋겠다. 노 민. 상준이도. 두식이도 마찬가지야."
"형님.."
"내 말 자르지 마. 어떤 경로가 되었든 재준이 소식 물어다 주지 마. 그런 일이 있으면 다 재준이가 시켜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해버릴 테니깐.
재준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일 당장 죽는다고 해도 연락하지 마. 우리는 이제 완벽한 남남이니깐 말이야."
민의 대답도 듣기 전에 문을 열고 나섰다. 현수는 아찔한 높이가 여과없이 그대로 보이는 오버브지리를 통과하면서 채현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장님. 네...네. 결근하게 되서 죄송합니다. 네. 다름이 아니라 어제 말씀하셨던 부산 실사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이번에 제가 가겠습니다. 네. 이왕이면 경남지방도 다 돌고 올까 합니다. 네. 네. 압니다. 그래도 간 길에 다 같이 하고 오면 삼 개월은 조용하지 않겠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네. 그렇게 조치 취해주시면 내일 바로 가겠습니다. ..... 아니요. 아무 일 없습니다. 아침에 출근하고 가겠습니다.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건물을 빠져나와 뒤도 안 돌아보고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무릎을 꿇은 채 고개 숙이던 모습이 환영처럼 따라왔지만 현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두 눈을 감았다.
속이 시원해야 할텐데 쓴 약을 바가지로 마신 듯 입이 쓰기만 했다.
**
현수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민이 뛰다시피 계단을 올라갔다. 차마 문을 벌컥 열 수는 없어 노크와 함께 재준을 불렀다.
"형님. 형님. 괜찮으십니까?? 형님~!!!!"
"들어오지 마라."
"형님."
"내 말 안 들려!!!! 나가!!!!!!!"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재준의 상처를 보는 것 같아 민은 그대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재준이 계단을 내려온 것은 그로부터 1시간이 지난 후였다.
"괜찮으십니까? 현수형님께서는........."
찰싹!!!
소리와 함께 민의 상체가 뒤로 쭉 밀려났다. 사무실에 있던 사람 모두 놀라 재준을 바라보았지만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밑의 아이들에게는 손을 잘 안 대기로 유명한 사람이 재준이었다. 괜한 화풀이 따위를 할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더더군다나 민이 뭐라 항명한 것도 아닌데 손에 사정도 두지 않고 뺨을 내리친 것이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그 이름 입에 올리지 마라."
그리고는 어디 나간다는 말도 없이 휭하니 나가버렸다. 나중에서야 재준이 차를 가지고 나간 것을 알 수 있었다.
성난 사자처럼 날카롭게 신경이 곤두서 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다음날 부터 출근하고는 퇴근도 하지 않았다. 20층의 혼자만의 공간에서 숙식을 모두 해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전과 달리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마치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일하고 밥도 잘 먹었다. 하지만 일절의 농담도, 웃음도, 미소조차도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형준이와도 민 일행을 대하듯 하였고 그 어떤 손님이 와도 하나의 행동만 인식시킨 로봇처럼 예절 바른 인사와 일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마치.. 재준은 심장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