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짓말 [23]
"뭐야..엄마."
재준을 돌려보낸 다음에서야 현수에게 전화를 걸어 집으로 들어오라고 한 최여사에게 그 내심과 자신이 본 것에
대해 묻자 당사자인 최여사의 입은 오히려 꾹 맞물려졌다.
"재준이 언제부터 여기에 들락거렸어? 엄마 성격에 인.사.차. 들린 재준이에게 김장을 도와달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자주 왔었어? 왜? 뭣 때문에!! 엄마!!!!"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진지하게 묻는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재준이만큼은 아니지만 역시나 마음이 안 편한 듯 얼굴에 근심이 한 가득이다.
남의 자식의 얼굴이 홀쭉한 것에도 마음이 덜거덕 소리를 내며 불편했는데 자기 자식인데 그 애련한 마음이야 오죽할까.
"재준이가 네게 거짓말을 했다고."
"엄마..."
"재준이 여기 오는 거 몰랐지."
"응..짐작도 못했는걸. 고등학교 때부터 두 사람 뭔가 사이가 좀 껄끄러웠었잖아. 나 종종 태워주고 할 때 인사하는 게 다 인줄 알았지. 자주 왔었어?"
"내가 널 왜 불렀는지 알겠어?"
고개를 젓는 현수는 아까부터 대답을 회피하는 엄마의 마음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왔느냐 라던가, 자주 오는가, 또는 왜 오는가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원하는 대답은 아니지만 엄마의 말에 현수는 귀를 기울였다.
마구 헝클어진 실타래의 꼬랑지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재준이가 네게 거짓말을 했다고 했지. 이거 역시 재준이의 거짓말이다."
명치끝에 뭔가 쿡 쑤시며 아파 왔다. 머리를 누가 해머로 꽝하고 내리 찍는 것 같았다.
현수는 가는 실선을 보이며 금이 가기 시작하는 자신을 에워싼 검은 색 틀을 보는 듯했다. 대답조차 할 수 없는 먹먹한 가슴에 엄마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네가 왜 거짓을 싫어하고 혐오하는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왜 몰라. 안다. 알아.
재준이 녀석 나 혼자 있는 거 걱정이 된다고 처음에 내려왔더라. 그놈 검은 속이 보기 싫어 내쳤는데도
그 고래심줄보다 더 질긴 녀석 또 찾아오고 또 찾아왔다. 내 집에 발 들여 놓는데만 해도 반년이 넘게 걸렸다.
아무런 부탁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웃으며 자신은 머슴이란다. 현수 녀석 머슴이니 저 부려 먹으세요. 하더라.
네 녀석처럼 조잘거리는 놈이 아니어서 처음에는 지도 불편하고 나도 불편했지. 하지만 그것도 익숙해지니 괜찮아지더라.
올 때마다 형광등이야 수도꼭지야 뭐야 많이 들고와서 이것저것 고쳐주고 갔다. 어떨 때는 바쁘다며 과일과 함께 얼굴만 쏙
내밀고 갈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진종일 붙어 나와 티비도 보고 자신이 잘 만든다며 해물탕도 끓여주었어.
이유? 나도 모른다. 묻지도 않았고 묻고 싶지도 않아. 네게는 전혀 말도 안 했지?"
고개만 끄덕일 수 있는 현수의 가슴은 이미 진동상태였다. 울렁거리고 자잘하게 가슴이 떨려와 입을 열 수도 없었다.
그 애살맞지 않은 녀석이 자신을 싫어하는 줄 뻔히 아는 곳에 찾아가 고개를 조아렸다고 생각하니 왜!!
라는 의문과 함께 미안하고 고마웠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도 제대로 구실을 못했었는데 그 빈자리를
재준이 채워준 것이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아 현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그게 거짓말이다. 네게 말도 하지 않고 내색도 하지 않고 혹 대구 내려왔는 날 뭐했냐고 네가 물었을 때 재준이는 거짓말을 했겠지.
네 가슴에 피를 흘리게 하는 새빨간 거짓말도 아니고 네 가슴을 시커멓게 만들 악에 찬 거짓말도 아닌 하얀 거짓말이다.
마치 지 마음 알아달라는 듯 투명하고 그 위에 어떤 감정이라도 그려넣을 수 있는 하얀 백지와도 같은 거짓말이야.
나도 재준이에게 배웠다. 하얀 거짓말의 존재를 말이다. 내가 걱정이 되어서 왔다고는 하지만 네 마음을 헤아리지 않았다면
대구까지 올 수 있겠어. 대답해봐라. 현수야. 거짓말을 일삼는 재준이가 잘못한 거야?"
"엄마.."
"넌, 넌 어때? 재준이에게 숨기는 거 없어? 남의 거짓을 탓하기 전에 네 거짓부터 돌아봐. 제 눈속에 대들보도 못 빼는
녀석이 남의 눈에 들어가 있는 대들보는 탓하는 거냐. 나도 내가 왜 널 불러 그런 모습을 보여줬는지 모르겠다. 내가 하고싶은 말은 여기까지다. 늦었다. 가라. "
"엄마.."
"가래도!!! 자고 갈 생각 아예 말고 버스 끊어지기 전에 어여 가. 버스 안에서 생각해봐라. 재준의 거짓을 탓할 자격이 과연 네게 있는지 말이야. "
자고 가려는 현수의 말에 기어이 거절하시는 엄마의 내몰림에 현수는 어쩔 수 없이 주섬주섬 외투를 걸쳤다.
신발을 신기 위해 현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철재로 된 밋밋한 현관문뿐이다.
하지만 저 너머에는 엄마가 오랫동안 가꾸어왔던 화단과 오늘 재준이와 함께 묻은 김칫독도 있을 것이다.
닫힌 문은 열어야 하고 감정은 뱉어내야 숨을 쉴 수가 있을 테다.
"나... 결혼...안 해도 돼?"
"무슨 소리야. 결혼을 왜 안 해!!! 너 35살까지는 내가 권하는 선 다 보고 여자 만나러 가서 얼른 결혼해야지. 그래서 손주 안겨줘야지 무슨 소리!!!"
"그럼...35살 넘으면?"
제아무리 호기 있는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죄스러운지 등을 돌린 채 말을 하는 현수의 야윈 어깨를 보며 최여사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있지. 엄마. 나 아무래도...재준이를.."
"가라."
"엄마."
"어여 가. 차 끊어지면 택시 타고라도 서울 가!!! 가서 네 거짓까지 다 털고 다시 이야기하자."
"엄마.."
"어허!! 안 가??"
현수를 내쫓듯 내몰았지만 걱정이 되는지 창가에서 아들의 힘없는 걸음을 바라보았다.
"쯧쯧..나도 알게 모르게 세뇌를 당한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왜 그 녀석 편을 들어.
편을 들길. 오죽 답답했으면 내가 이랬겠어. 애물단지 같은 녀석. 나도 모른다! 이 녀석아!!!!"
검은 어둠을 가르는 고속버스 안에서 현수는 잠을 잘 수도 없었다. 한 달 가까이 모두가 꺼리는
전국적인 실사를 하고 오니 몸도 지치고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마음까지 지쳐버린 것 같았다.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그 지친 마음이건만 오뚝이처럼 발딱 서는 감정 하나.
눕히고 밟아도 일어선다. 그리고 이제는 아예 작은 희망 불빛마저 하나 밝히며 희죽 이쁜 웃음 하나 보여준다.
대구에 다녀온 결과는 이미 결정이 나버렸다.
재준이 어떤 생각으로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그렇게 대했는지 모르겠지만 문제는 자신의 마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내심 그렇게 작정을 했을 때 현수의 핸드폰이 진동을 하면서 어서 받으라는 재촉을 했다.
발신 번호는 낯선 번호였지만 혹시 재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현수는 얼른 폴더를 열었다.
"........."
하지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재준을 상대로는 언제부터인지 '여보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았었다.
아니 그 어색한 단어 때문이 아니라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의 좁은 사이로 말이 나오지 않은 탓이다.
- 여보세요? 이 현수씨 핸드폰 아닙니까?
하지만 재준이 아니었다.차가운 빗줄기 속에 불씨가 비명도 못 지르고 꺼지듯 현수는 자신의 심장이 소리도 없이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한 달 동안 담담했던 심장이 오늘 시야에 들어온 재준의 뒷 모습만 보고 갑작스레 뜨거워져 사막에서 물을 찾듯 재준을 보고파하고 있었다.
-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 아, 이 현수씨. 에.... 저 도영입니다만..
"도영?"
- 아..진짜. 도영이라니깐요!!! 저 모르겠어요?
"네."
- 야멸치게도 확실하게 대답하네. 블루요!! 블루
"아..."
- 바보 도 트는 소리 하기는.
다른 때 같으면 뭐라 한마디 하겠는데 힘도 없는 상태인데다가 말도 섞기 싫어 현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도영이 말하는 것을 듣기만 했다.
- 이봐요. 듣고 있어요? 어디예요? 회사에 전화해봤더니 출장에서 돌아왔다면서요?
"내가 말해줄 이유 없지 않습니까. 용건만 말해주고 끊지요. 오래 전화할 상황이 못 됩니다."
- 아이 참,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지 말아요. 저...용기내서 전화하는 거란 말입니다.
"형준이에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저 그쪽 사람들과 통화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형준이 시키던가요?"
-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오해하지 말라고요~ 저 이 전화한 거 알면 죽어요. 죽어!! 내일 아침에 한강에 변사체로 뜰지도 몰라요!
그러니깐 제가 전화했다는 거 비밀로 해주세요. 네에?
"........."
- .....대답도 안 하네...
"그쪽과 할 이야기도 없고 수다 떨 마음도 없습니다. 용건이 있어 전화를 했다면 얼른 하고 아니면 그냥 심심풀이로 했다면 지금 바로 끓겠습니다."
- 역시..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네. 재준씨한테도 그렇게 정떨어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어요?
"이봐요. 그쪽이 간섭할 일이.."
- 도영이라고요!! 도영!!! 젠장, 다른 사람들은 이름 들으면 바로 기억해주고 이름 마구 불러주던데 사람 성격이 왜 그래요?
현수는 전화를 그대로 끊어 버렸다. 다행히 몇몇 커플로 보이는 사람들이 소곤거리며 대화를 하고 있기 망정이지
오랜 시간 통화하기란 야간 고속버스 안이 불편했다. 불편하고 안 하고를 떠나 도영이라는 수다스러운 사람과 통화할 의사가 없다는 말이 맞겠지만.
눈을 감고 오지도 않은 잠을 청하려 할 때 또다시 핸드폰이 진동을 했다. 발신자는 역시 도영이라는 사람이다.
밧데리리 빼놓을까 하다가 대구의 어머니께서 전화하실 것 같아 하는 수없이 전화를 받았다.
아마도 전화를 받지 않으면 받을 때까지 전화를 하고 남을 사람 같았다. 비록 몇 번 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 아아..알았어요. 화내지 말아요. 응? 제발 화내지 말고 전화도 끊지 말아요.
"용건이 뭡니까."
- 저..지난 번에 블루에서 일, 정말 미안해요. 저, 진심으로 사과하는 겁니다. 진짜 진심이라구요!!
"허참.."
- 그때 그 녀석들 자꾸 끈적거리는데 뗄 방법도 없고 해서 그냥 그 녀석들 떨굴 생각만 해서 그랬어요. 정말.. 미안해요. 저, 다시는 그런 짓 안 할게요. 네??
"다 지난 일 이제 와서 사과하면 뭐하고 용서해주면 뭐합니까.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면 됐습니다. 다 잊었어요."
- 진짜요? 정말 다 용서한거죠? 진짜로?
어린 아이 같은 다그침에 어이가 없었지만 마음이 조금 느슨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현수의 용서한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화기 너머로 야호~와 같은 기쁨에 찬 괴성이 들려왔다.
"그럼 용건은 끝났습니까?"
- 아..저 그게.. 부탁할게 있는데..
"부탁 안 들어드리겠습니다. 용서야 그렇다 쳐도 우리 사이가 부탁을 할 사이는 아니.."
- 제가 아니고 재준씨 때문인데요?
"이봐요. 어디까지 간섭할 생각입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 두 사람의 문제로.."
- 알아요. 안다고요!! 그래서 형준이나 민이 모두 전화하고 싶어 안달을 하면서도 입도 벙긋 못하는 거잖아요. 저도 그쯤은 안다고요.
"알면 되었습니다. 그럼.."
- 하지만 무섭잖아요!!
"뭐?"
- 무서워 죽겠다구요!!! 이 바닥에 그렇게 굴렀지만 그렇게 무서운 사람 처음 봤다구요.
앞에 서면 간이 콩알만 해지는 것 같고 숨도 제대로 못 쉬겠는걸요. 어떤지 알아요??
도영이 말하는 그 무서운 사람이라는 게 설마 재준을 말하는 건가 싶어 촉각이 곤두섰다.
문득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일전에 일주일 동안이나 밖에 나가지도 않고 술만 마셨던 재준의 몰골이었다.
그런 거짓말을 할 정도로 자신의 가치가 없다면 재준의 그 몰골이나 도영이 말하는 재준은 뭐란 말인가.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났다.
'마치 지 마음 알아달라는 듯 투명하고 그 위에 어떤 감정이라도 그려넣을 수 있는 하얀 백지와도 같은 거짓말이야.'
뭘 알아 달라는 거지? 뭘 그려 넣고 싶은 거였지?
현수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도영의 수다는 끊어지지 않았다.
- 차라리 술 마시는 나아. 사람 같지가 않다구요. 술 마시고 주정하면 그래도 사람 같아 보이지 이건 완전히 사이보그로 변했다니깐요.
사이보그요. 심장도 없고 피도 없는 사람 같단 말이에요. 나를 좀 귀찮게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는 척은 했었는데 어떤지 알아요?
날 보고도 아는 척도 안 해요.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해도 눈도 안 준다고요. 어디 나 뿐인 줄 알아요?
일에 관련된 사람이 아니면 보고도 다 무시한다니깐요. 형준이도 그랬다구요!!
오죽하면 재준씨 아버지랑 형준이 아버지까지 회사까지 왔었는데 그냥 돌려보냈겠어요.
얼굴도 안 보고 자기 사무실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대요. 집에도 가지 않고
잠도 안 자고 회사에서 일만 한다는데. 믿어져요? 그 잘생긴 얼굴이 해골 같아졌어요!!! 아..끔찍해!!!!
형이 직접 안 봐서 모를 거야. 안 그래도 날카로운 인상이 완전히 저승사자처럼 변했어요. 얼굴 살이 다 빠졌다고요.
아아..어떻게 해요~ 저.. 제발요.. 제발..우리 재준씨.. 원래대로 좀 돌려놓아 줘요? 네??
"집에도..안 가?"
- 네!! 회사에서 먹고 자고 하는데.. 가끔 먹기는 하는데 왜 그렇게 살이 빠지는지 모르겠다고 민이형이 그랬어요.
밤에는 아예 20층에 못 오게 해서 모르겠지만 일처리 해 놓은 거 보면 잠도 안 자는 것 같대요. 부탁해요~ 네? 달랠 수 있는 사람은 형뿐이잖아요~
넉살 좋게 대뜸 '형'이 나오자 어이가 없다. 하지만 덕분에 분위기는 좋아진 듯했다.
"도영씨. 그렇다고 해서 내가.."
- 말 놓아요. 도영씨가 뭐예요. 촌스럽게. 그냥 도영아 하세요.
"그래도.."
- 아 거참. 본인이 괜찮다고 하는데 어때. 말 놓으세요. 형
어쩔 수 없는 한숨 뒤로 말을 놓아 버렸다. 상대의 말투 역시 친절하게 존대를 하고프게 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재준을 찾아갈 요량이었지만 제 삼자인 도영이 재준을 만나라고 조르자 짐짓 성질을 내는 척 했다.
지가 뭔데 우리 사이를 간섭한단 말인가.
"거짓말 한 녀석 뭐가 이뻐서 달래. 그리고 걔가 애야? 달래고말고 하게. 내버려둬. 그대로 비쩍 마르라지. 고생 좀 해도 돼. 그 녀석은"
- 아이 진짜!!!! 형 좋아하니깐 거짓말 한 거잖아요!!!! 형 무서워서 거짓말한 거 가지고 그렇게 야박하게 나올꺼예요!!!!
"그런데, 너 재준이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 좋아야 하지요!! 하지만 너무 속상하단 말이에요. 속상해서 미칠 것 같다구요!!! 나 좀 살려줘요? 네??
형이 재준씨 달래줘서 평상시 모습으로 돌려주면 여러 목숨 구하는 거라구요. 우리 형준이도 그럼 신경질 덜 낼테고..
"원인은 그거군."
- 아이참, 형은 무슨 말을!!! 아무튼 네?? 재준씨한테 한 번만 가봐 주세요. 네에??
"그럼 지금 회사에 있는 건가?"
- 네!! 그럴 거예요. 재준씨 약속도 없대요. 사람도 안 만나고 꿀이라도 발라났는지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선
사무실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는다잖아요!! 그러다가 재준씨 죽으면 어떻게 해요~
"방정맞은 소리 한다."
- 형이 책임져요!!!
"책임은 못 지더라도 갈 거다."
- 지..진짜요? 진짜 재준씨한테 가는 거죠? 진짜?
"그래.."
- 가서 뭐라 할건데요? 거짓말한 거 다 용서 해줄 꺼예요?
"...........나도 몰라.."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머니의 말씀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거짓말 하나도 하지 않고 다 내뱉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가진 거짓말도 다 풀어헤치고 올 것이다.
현수는 서울에 도착해서 어머니께 걱정 말라는 전화를 하고 바로 택시를 탔다.
재준의 회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두 손을 꽉 쥐었다.
긴장감이 서렸지만 오늘 어떻게 해서든 두 사람의 사이가 결정이 날 것이다.
인연을 끊던지, 아니면 새로운 인연을 만들지.
**
- 니놈이 이럴려고 그때 그 생쑈를 했냐? 니가 그러고도 내 제자고 내 조카고 형님 아들인 거야!!!!
삼촌의 호통 너머로 침착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면 아마 아버지의 서재에서 스피커폰을 켠 모양이다.
- 됐다. 내버려 둬. 나중에 정신 차리겠지 뭐.
- 형님!!! 문전박대를 당하고도 그런 태평한 소리가 나오십니까!!!! 아니면 이 기회에 형준이 말고 재준이를 다시 청솔을 맡기시던지요
- 잘하고 있는 녀석을 왜 바꿔.
- 아니면 이 녀석 정신 좀 차리게 다른 사람 중신이라도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 싫다.
- 형님!!
- 이 고집쟁이 녀석이 그럴 리도 없고 나도 현수 아닌 사람 우리 식구로 맞이할 생각 없다. 너도 그렇지?
마치 재준이 없는 듯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재준이 아버지의 물음에 대답 대신 대화를 자르는 걸 택했다.
"전화 끊겠습니다. 나중에 마음 정리가 되면 본가에 들리겠습니다."
- 평생 안 오겠다는 말로 들리는군
".........."
- 현수 없이 네 마음이 정리가 될 리가 없지.
눈치도 충분히 있는 노친네가 아예 못을 박는다. 하지만 뺄 수 없는 못이라 재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네가 그때 청솔이 아닌 현수를 택했을 때부터 여기에 네 자리는 없다. 잘 알고 있겠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거니
돌아오려면 현수와 함께가 아니면 네가 아무리 여기에 발을 들이밀어도 나 역시 너 받아들이지 않겠다. 시체라도 받아주지 않아.
"물론입니다."
전화를 끊고 오늘도 어김없이 어두운 밤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물을 안 떠놓아도 될까?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모르겠는 걸. 물 떠넣고 달 보고 절하면 되나? 응? 그러면...
달님이 내 소원을 들어주는 거야? 그럼...너 다시 돌아와?? 그렇다면 나 절할게. 백 번, 천 번, 아니 만 번이라도.."
현수의 어머니께서 처음 대구로 내려가시던 날 현수가 자신의 거실에서 둥근 달을 보며 절을 한 적이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어머니의 무사하심을 달을 보며 기원하다고 했다.
'미신이다 뭐다 말하지 말라고. 이건 다 마음이니깐 말이야.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없잖아. 그러니 마음속으로 비는 수밖에.
어차피 비는 거 소원 들어준다는 달보고 비는 게 좋지 않겠어? 너도 소원 있으면 빌어봐.'
그때 무얼 빌었는지 기억이 선명하다. 기억력이 좋은 게 아니라 무언가를 빌 일이 생기면 비는 것은 매번 하나이기 때문에 기억하는 것이다.
'그의 곁에 평생 머무를 수 있기를..'
그럴려고 커밍아웃을 하면서 청솔을 나왔었다.
아버지는 의외로 쉽게 허락을 해주었는데 아버지의 오랜 벗이자 청솔이 제법 큰 규모의 조직으로 발돋움하는데 발판을 마련했다시피한
삼촌이 크게 실망을 하면서 보내주지 않았었다.
형준의 아버지이기도 한 삼촌이 어린 시절부터 재준과 형준에게 무예를 가르치긴 했었지만 그는 정통성이라는 게 똑바로 내리박혀 있는 사람이었다.
태호를 따르는 마음을 당연히 형준에게 대물림 했었고 어릴 때부터 친구처럼 지내지만 언젠가는 재준의 오른팔이 되어야 한다고
목숨을 걸고 청솔의 후계자를 지켜야 한다고 말을 하곤 했었다.
그런 삼촌이기에 재준이 청솔을 나간다는 말과 형준이 재준을 대신해 후계자가 된다는 말이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던 것이다.
비록 자신의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용납하지 않았고 재준이 고집을 꺽지 않자 급기야 재준의 '반항'의 원인인 현수의 이름을 들고 협박을 했었다.
그때 재준이 오른팔을 쑥 내밀었다.
'뭐..야..'
멀뚱하니 재준의 팔을 바라보는 삼촌을 향해 망설임 없이 말했다.
'자르십시요.'
'뭐???'
'제 의지입니다. 현수의 생각, 현수의 권유 한 톨도 안 섞인 순수한 제 의지입니다. 현수를 입에 담으실 생각이시면 이 팔 자르고 담으십시오요.
제 사람입니다. 제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제가 지킬 사람입니다. 여기에 있는 한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라도 현수 다칠지도 모른다는
그 걱정 하나만으로 저 여기서 나갈 생각 했습니다. 제게 이 현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지금 현수를 납치한다 하셨습니까?
제 팔 제가 자를까요? 제 다리 제가 자를까요? 목은 못 자르겠습니다. 어떤 병신같은 모습으로 존재해도 전 살아남아 그의 곁에 있어야 하니깐요.
원하시는 부위 말씀만 하십시요. 심장과 목만 빼고 다 드리겠습니다. 현수, 건드리지 마십시요.'
'너...너....'
그래서 분노한 삼촌의 손에 무작위로 맞았었다. 단 한 번도 반항을 하지 않은 채 삼촌이 주는 청솔을 나가는 대가를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입원을 해야하는 사태까지 벌여졌지만 재준으로서는 손가락 하나 자르지 않고 무사히 청솔을 빠져나왔다는데 오히려 안도를 했었다.
그렇게 곁에 머무를 수 있기를 바란 사람이었다.
손을 뻗고 싶어도 참았고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는 사랑한다는 말을 꾸역꾸역 뱃속으로 밀어 넣었었다.
현수가 있을 이층 창을 바라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허허거리며 웃었지만 보고 싶다는 말이 핸드폰의 폴더를 열기도 전에 입 안을 맴돌았었다.
다 참았다.
너 답지 않다는 말도 사내답지 않다는 말도 용기없다는 말도 들으면서 끝까지 인내를 했었다.
그 인내의 이유는 오직 그의 곁에 머무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결과는?
달을 보고 있던 재준의 오른손이 심장 부위의 옷을 움켜쥐었다.
대구를 떠날 때만 해도 편안했던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아파 오는 것이다.
이렇게 현수가 없는 재준은 썩어 가는 시체와 다름이 없다 생각하며 자조의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