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짓말 [24]
거울이 비친 모습이 낯설었다. 자신의 모습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어색하고 낯설어서 현수는 길게 숨을 내쉬어 보았다.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고 긴장감으로 상기된 자신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 같지 않았다.
셀 수 없을 만큼 선을 많이 보고 개중에는 결혼 이야기가 나온 사람도 몇 되었었다. 그 몇 가운데 서너 명쯤에게
'사랑한다'라는 말을 뱉기도 했었다. 잠자리에서도 그랬고 붉은 장미꽃다발을 전해주면서 말도 해봤었다. 그러니
'너를 사랑해'는 현수에게 있어서 이렇게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거나 얼굴을 붉게 만들만큼 대단한 단어는 아니었다.
그런데,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긴장이 되고 손에는 땀이 솟구쳤다.
띵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현수는 정면을 바라보니 어느새 19층에 도달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도착지에 다다랐지만 현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못했다. 두 사람의 사내가 현수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영업시간 끝났습니다. 용무가 있으시면 내일 다시 찾아와 주시겠습니까?"
예의바른 말이 저런 얼굴에서 나오면 그건 예의바름이 아닌 협박이 될 수도 있구나, 생각을 하며 현수는 정확한 발음으로 말을 했다.
재준과 같이 어울려 다녀서 그런지 이런 조폭류의 사람들에게 크게 긴장하지 않는 자신의 큰 규모의 간이 다행스러웠다.
오히려 긴장되는 것은 주먹만 뻗으며 그대로 기절이라도 할 것 같이 생긴 이 사내들이 아니라 자신의 십년지기 친구인 재준을 만날 것을 상상하는 것이다.
"노 민 있습니까? 전해주시겠습니까? 이 현수가 찾아왔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제 앞을 가로막은 게 민에게 보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게 무례를 범했다고 민에게 추궁받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현명하게 대처하시기 바랍니다. 오래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멈칫거리며 두 사내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제야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수 있던 현수지만 더 나아가지는 않았다.
어차피 오버브리지를 건너려면 민이 있어야 할 테고 만약 재준이 회사에 있다면 민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민부터 찾았다.
현수의 생각이 맞았는지 일 분도 걸리지 않아 민을 부르러 간 한 사내보다 더 앞에 뛰어오는 민을 볼 수 있었다.
"혀..형님!!!!"
뛰어온 민이 숨을 가쁘게 쉬며 현수를 불렀다. 평소 다른 녀석들보다 깔끔한 외양을 유지하던 민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며칠 밤샘작업을 한 사람처럼 초췌한 모습에 놀라기도 전에 민의 왼쪽 이마 부분에 검푸른 멍까지 장식되어 있었다.
낯선 모습에 현수는 인사도 없이 민의 몰골을 먼저 입에 댔다.
"너, 왜 그 모양 그 꼴이냐? 우리 채 실장님이랑 연애한다는 녀석 얼굴이 왜 해골이야? 그리고 이건 웬 장식이야?"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어쭈? 너 많이 컸다? 감히 이 지엄한 선배에게 지금 고함 질렀냐?"
"형님!!!"
민이 두 손을 뻗어 현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 부탁을 하는 민의 두 눈은 그야말로 길 잃은 강아지의 검은 눈동자보다 더 애처롭게 보였다.
"제발..제발 절 좀 살려 주세요~ 네에?"
"민아.."
"어떻게 좀 하시라구요!! 저 미치겠어요. 네? 형님~"
"재준이 때문에 그래? 어..어떻게 지내?"
"형님 보러 오신 거 맞지요? 제발 아니더라도 맞다고 해주세요."
"맞아."
혹시 현수가 뒤돌아 갈까 걱정이 되었는지 민이 재빨리 현수의 손을 잡고 오버브리지로 걸음을 옮겼다.
오버브리지의 앞에 선 두 사내가 민을 보고는 아무런 말 없이 길을 열어주었다.
"차라리 저번에 처럼 술도 드시고 고함도 지르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달랠 수 있지만
이번에는 아예 씨도 안 먹혀요. 오죽하면 형님 제일 오래 모신 두식이 녀석까지 무서워서 형님께 가지 못한다 하겠습니까?"
"그..눈에 상처 준이가 그랬어?"
"아..네. 제가 좀 덤볐거든요."
"네가? 네가 그럴 리가 없잖아."
"아뇨. 그랬습니다. 입 다물라고 하셨는데 제가 안 다물었거든요."
아주 맺힌 게 많았는지 서관으로 향하면서 고자질쟁이가 된 민의 입은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멍까지 들게 했다고? 맞은 건 아닌 것 같고..서..설마..재떨이 같은 거에 맞은 거야?"
훗, 하고 가볍게 웃으며 민이 서관 19층의 닫힌 문을 열었다. 예전과 달리 조용한 침묵 속에 쌓인 서관 19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 빈 어둠만이 현수를 반기고 있었다.
"재떨이면 다행이게요. 뭐에 맞았는지 아십니까?"
재준과 민 일행을 본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였다. 재준을 처음 본 고 2 때 그들은 고 1일이었으니 재준이를 본 것만큼 오래 그들을 봐왔었다.
고등학교 때 싸움질을 많이 해 가끔 피투성이가 되곤 했지만 재준에게 맞아서 그렇게 된 것을 본 기억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 재준에게 맞았다고 하니 현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그럼?"
"무려 팩.스.기 입니다."
"뭐어?????"
"다행히 피했지만 모서리에 퉁 하고 받혔다고요!!!! 머리에 정통으로 맞았으면 저 골로 갔습니다. 제가 이렇게 살아야겠습니까?
저 내년에 결혼도 해야 할꺼라고요!!"
"맙소사.. 팩스기라니..심하다.."
"이게 심한 정돕니까!! 살인미수예요 살인미수!!!"
현수는 어둠 속에서 20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문 틈으로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저기에... 재준이 있는 거야? 있어?"
"네. 10시경에 도착하셨습니다. 형님."
진지한 민의 호출이지만 현수는 높은 계단에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우리 형님...불쌍하신 분입니다. 큰 사모님 돌아가시고 처음 정을 붙이신 게 현수형님입니다. 저희 형님께 기회를.."
"민아.."
"네."
"오늘따라 저 계단이 왜 그렇게 높아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때도 그랬어. 처음 저 계단을 오를 때 말이야.
너무 멀고 계단을 오르는 게 왜 그렇게 힘이 들던지. 그때 계단을 오를 때는 내 가슴에 분노만이 있었어.
말로 다 뱉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나서 한 계단 한 계단을 밟을 때마다 내 가슴속에 화가 한 개씩 더 생기는 것 같았어.
그런데 오늘은 저 계단을 오를 때마다 다른 말을 되뇔 거야. 내가 숨기려고 했던 말을, 내가 거짓말로 때우려고
했던 말을 하고 또 해서 저 문까지 갈 거다. 그럼 이 두근거리는 마음도 좀 가라앉겠지? 이 기회가
나나 재준에게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로 벌거벗고 숨겨둔 모든 감정의 찌꺼기를 뱉아 낼 기회가 될 거야.
넌 여기서 빌어줄래? 내가 솔직할 수 있도록, 재준이가 솔직할 수 있도록 말이야."
"형님.. 문 앞까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니, 나 혼자 갈래.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나 혼자 갈래. 다시는 후회하지 않게 이 마지막 기회를 아끼지 않고 다 말하고 올게.
넌 밑에서 우리 두 사람을 위해 기도해줘. 나..간다."
첫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문득 동욱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친구가 무척 많은 것 같으면서도 넌 은근히 까다롭다고.
두루두루 친하긴 한데 속마음을 터놓고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라고.
동창회를 하면 제일 먼저 나와 웃을 것 같던 네 녀석이 연락도 안 되기에 자신이 생각했던 성격이 맞았나보다, 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재준에 대한 마음을 깨달은 것은 얼마 안 되었지만 상당히 오래전에 우정 뒤에 숨어 있었는지 모른다.
동욱의 말대로 재준이만 있으면 된다고 예전부터 생각했었다. 다른 친구는 '따위'로 매장해버렸지만
재준이는 '유일한' 친구로 남겨두었던 그 진실을 이제야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두 번째 계단에 올라섰다.
'사랑해'라고 고백했던 여자들에게 차였을 때, 아니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아 여자와 헤어졌을 때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오늘은 재준이를 부르면 이 녀석이 바쁘다는 말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날름 달려와 나에게 오겠구나, 라고 생각했던 적이 떠올랐다.
가슴이 아프고 속이 상하긴 했지만 그 내면은 매번 자신의 호출을 거절한 그를 만날 구실이 생겼다는 점에 은근히 기쁘기도 했다.
바쁘다는 말을 하는 재준에게, 또 실제로 만나면 지극히 다정하게 대해주어서 바쁘다는 말이 진심으로 느껴지는 그 말의 강한 압박을
느슨하게 할 수 있는 핑계가 자신이 여자와 헤어져 술 마신다는 일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자신의 언어도단이 시작되었다 생각을 하며 현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세 번째 계단에 밟았다.
은영을 소개 받았을 때 처음으로 그 언어도단의 실체를 깨닫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때 느꼈던 불안정한 마음이 우정에 대한 질투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질투였음을 그때는 몰랐었다.
그리고 나중에 은영과 헤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친구의 실연에 같이 가슴 아파하기보다는 내심 좋아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렇게 사랑보다 사랑을 품은 질투가 먼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네 번째 계단 위에 조심스럽게 발을 뻗었다.
그래, 동창회 때 깨달았어야 했다. 형준에게 허락된 재준의 마음을..
다섯 번째 계단에 오르면서 욱신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재준이 사랑의 상대로 느껴진 것이 재준의 본가에서의 접촉이 아니라 게이라는 거짓말에 화를 내었다가
그의 집을 찾아갔을 때 보았던 그의 반라 차림에 두근거렸던 심장이 처음일 것이다.
온천에서 벌거벗은 모습을 보았을 때도 괜찮았는데 처음 보는 재준의 흐트러진 얼굴과 몸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완성형이라 여겼던 그의 모습이 아닌 보통사람처럼 무너진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해서 가슴이 설렜는지 모른다.
그가 나로 인해 움직이고 아파한다는 것, 그것은 쾌감과도 같은 만족감을 주었다.
여섯 번째 계단은 아프기만 하지 않는다.
그때를 상상하니 저절로 심한 박동질을 시작하는 심장 때문에 기분이 묘해졌다.
남자와 하는 스킨십이 어떨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재준과 함께라면, 그의 그 든든한 품이라면 뭐든지 가능할 것 같다.
일곱 번째 계단에 우뚝 섰다.
한 템포 쉬고 다시 시작되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다시는 우정이라는 너울을 쓰며 자신의 본 마음을 숨긴 채 병신춤을 추지 못할 것이다. 이 계단을 오르면 같이 손을 잡고 나오지 못한다면 추락할 뿐이다.
여덟 번째 계단을 향해 힘차게 다리를 움직였다.
그래, 몰랐으면 모를까, 이제는 그런 병신춤 못 춘다. 추락할 때 할 값에라도 절대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
작은 희망에 기운을 내어서 여기까지 올라왔다. 그것이 자신만의 착각일 수도 있고 또다시
그때처럼 재준의 다른 사람을 향한 열띤 사랑을 훔쳐보면서 겨우 다스렸던 속이 다시 한번 뒤집어 질 수 있겠지만, 후회하고 싶지 않다.
제대로 뜨거운 감정 내뿜지도 못하고 삭히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아홉 번째 계단에서야 편안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이제야 오래된 사랑을, 진실한 사랑을 찾았다. 본 마음도 깨닫지 못한 지난 세월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 시간이 있었기에 사랑이라는 욕심꾸러기가 튼튼해졌을 것이다. 지난 세월을 보상해주지 못할지언정
말도 못 꺼내어 남은 시간을 또다시 헛으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열 번째 계단에서 오랜 시간 만들어 낸 사랑의 종지부를 찍었다.
십 년이 넘은 시간을 통해 깨달았다.
열한 번째 계단에서는 더 이상 망설임이 남아 있지 않았다.
너를 사랑해.
열두 번째 계단은 수줍은 작은 발소리를 내고 있었다.
재준아..너를 사랑해.
열세 번째 계단은 뜨거웠다.
준아.. 널...진심으로..정말로..사랑해.
열네 번째 마지막 계단은 발에 물이 묻어 날 만큼 축축해졌다.
널..사랑해..너는??
닫힌 문앞에서 현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문을 천천히 열었다. 19층과 마찬가지로 어두움에 휩싸인 20층
재준만의 방은 그의 내면을 보여주듯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둡기만 했다.
"진짜 내 손에 죽고 싶은 건가. 노 민. 허락없이 내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차갑게 뱉어지는 말이 시려서 현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오늘 오전에만 해도 자신의
어머니 앞에서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보이던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차가운 말이었다.
제아무리 오랜 시간을 같이한 민이라 할지라도 당장 살심을 일으킬 것만 같았다.
"당장 나가!"
낮은 명령조의 말에 현수의 몸이 저절로 움찔거려졌다. 현수가 보는 앞이 아니더라도 아마 평소에 재준이
저런 안하무인의 자세로 민을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민을 보면 알고 두식이나 상준이 재준을 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강압적인 태도에 길든 복종이 아니라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순종이었다. 그런데.. 저 낯선 황량한 말투는 뭐란 말인가.
민이 부리는 방종한 태도라 여겼는지 민의 이름을 버럭 부르며 일어서던 재준의 목소리가, 거친 몸짓이,
성난 얼굴이 몸을 돌려 현수를 확인하는 순간 멈추어버렸다. 난처하게 웃으며 현수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지만
태연한 손동작과는 무관하게 심장이 급작스럽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아..안녕. 오래간만이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것이. 거진 두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전화도, 만나지도 못했었다.
오늘 낮에 멀리서 본 얼굴은 좀 야위었다, 정도였는데 검은 어둠 속이지만 마른 몸을 알 수 있었다.
기름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마른 몸은 만지면 퍼석 거리는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혀..현수야.."
어둠 속에서 놀란 재준의 목소리를 들으며 불도 켜지 않고 재준에게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 재준의 자세한 표정을 읽기는 어려웠지만
커다란 창을 통해 넘어들어오는 달빛 덕분에 재준이 놀라 경직된 것은 볼 수 있었다.
"불 켜지 마."
가까이에 있는 스탠드라도 켜려는 손이 그대로 멈춘다. 그리고 묻듯이 마주보는 눈동자.
현수는 씨익 웃어 보였다. 반갑다. 이렇게 마른 몸이라 타박을 하기도 전에 안고 싶어졌다.
아무런 말도 없이 달려가 그의 품에 푹 안기고 싶었다. 그러면 아마 재준은 왜 그러냐는 말도 묻지 않고
그저 현수의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등을 쓰다듬어 줄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는 버릇이 너무 지나치게 없다고 생각한 자신이건만 단 한 사람. 도 재준의 앞에서는 이렇게나 의지하고 기대었던 모양이다.
늦게나마 깨달은 수많은 사실 중에 하나였다.
"저번에 할 말 있다고 했지?"
그 할 말을 전하기로 한 날 낮에 여기로 들이닥치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었다.
재준 역시 그걸 떠올렸는지 안색이 굳어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현수는 성큼 재준에게로 다가갔다.
중간의 소파를 지나 두 계단이 더 높은 곳에 재준의 데스크가 있다. 그 데스크의 옆에는 커다란 창이 있어 20층 아래의 건물들이 훤하게 다 내려다보였다.
움직이지 마. 라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얼음동상이라도 된 듯 딱딱한 처음 그 자세로 서
있는 재준의 코앞으로 다가가 재준의 어깨에 시선을 맞추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샤워라도 했는지 상큼한 향내가 풍겼다.
이 군신처럼 서 있는 사내의 심장은 어떤지 궁금해 현수의 손이 재준이 심장을 향해 뻗쳤다.
얼음동상 주제에 심장은 말도 못하게 뛰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이 손바닥 밑의 살을 지나면 용암보다 더 뜨거운 피가 혈관을 따라 콸콸 흐르는 것만 같았다.
이 심장을 내 것으로 하고 싶다는 욕심이 절로 생긴다. 욕심은 실낱같았던 희망을 어느새 수도관만큼 크게 해버렸다. 그래서 더 용기를 가졌다.
은은한 달빛조명을 받고 차마 얼굴을 보지 못한 채 현수는 고백성사라도 보는 양 낮은 목소리로 진실만을 말할 것을 스스로 다짐했다.
"나.. 그때 못했던 할 말, 지금 하려고 왔어."
"현수야. 내 말부터 좀 들어줘."
재준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결국 또 힘든 걸음을 한 현수에게 최소한의 성의있는 진실을 말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 진실들의 결과에 연연할 수 없다. 비록 최악의 결과가 나온다고 한들 이제는 더 이상 이 사랑스러운 사람을 기만할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힘든 결심을 한 재준의 마음을 모르는 듯 현수의 단호한 부정이 먼저 나왔다.
"아니. 오늘은 내 말부터 들어줘. 내가 먼저 예약한 거잖아. 안 그래?"
실쭉 웃는 얼굴이 눈을 맞추자 황급히 시선을 내리는 것을 보며 재준이 현수를 의아하게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고개를 들지 않는다. 여전히 손은 재준의 심장에 갖다 댄 채 였다. 무슨 말이든 앉아서,
차분하게, 최소한 이 손만은 좀 치워주고 했으면 좋으련만 재준의 아씨는 그럴 의향이 전혀 없는 듯 보였다.
권유도 못해보고 재준은 포기를 한 채 알았다고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그 기나긴 인내의 끝에, 고통의 끝에 들려온 말은 이미 현세의 말이 아니었다.
하늘의 말이었고 꿈속의 말이었다.
"나, 너 사랑하는 것 같아. 아니 사랑해."
"....?"
믿을 수 없어 현수를 내려다보니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분명 우리나라 말이 틀림이 없는데 무슨 뜻인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그러니깐.. 이성으로.....아, 아니다. 동성으로......... 아. 뭐야, 이것도 이상하네. 몰라. 아무튼 그래. 나..널..사.........사랑해..준아.."
얼마간의 침묵의 시간 후에 벌떡 쳐든 눈동자는 거짓이 아닌데 너무나 보고 팠던 그 사람의 눈동자가
틀림이 없는데 재준은 여전히 현수의 말이 심장까지 전달이 되지 않았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현수가
손대고 있던 재준의 가슴을 툭 밀면서 이제는 아예 큰 소리를 쳐댄다.
"아씨!!!! 야, 아무리 안 믿겨도 뭐라 대답 좀 해봐라!!! 엉.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자..잠깐.. 다..다시 한 번... 말해줄래? 나.. 제대로 못 들은 것 같아서.."
"젠장. 아우, 쪽팔려서 원. 좋아, 잘 들어!!!! 나 이현수가 도재준이 사랑한다고!!! 우정이 아니라 바로 이런 감정으로!!!!!"
자신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감출 수 없어 조바심이 나는데 매사 똑부러지던 재준이 자신처럼 아메바가 되어 헷갈려하자
그것이 거절하고픈 그의 마음일까봐 두려워 짐짓 큰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더 이상 뭐라 설명할 수가 없어 현수는
한 걸음 성큼 다가가 재준의 뒷 목덜미에 손을 뻗어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놀라 경직된 재준의 입술을 느낄 수 있었지만 생각보다 보드라웠다.
윗입술을 슬쩍 당기고 아랫입술을 갓난아기가 공갈 젖꼭지를 빨듯 쭉쭉 빨자 바보 삼룡이처럼 재준이 입이 헤..하고 벌려졌다.
그 틈을 노려 입 안으로 침투해 그의 혀를 살짝 만나고 날름 도망쳤다.
그 짧은 만남으로도 술을 됫병으로 병나발을 분 것처럼 얼굴이 뜨거워져 차가운 두 손으로 열을 식히며 재준을 보니 그 역시 붉어진 얼굴을 한 채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모양새가 마치 첫 키스를 도둑맞은 여고생처럼 보여 심술을 불끈 솟아올랐다.
"아, 물론 뭐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지만......"
정히 기분 나쁘면 네가 다시 나한테 뽀뽀해서 복수해라, 고 말하려고 할 때 재준의 손이 다가왔다.
윽,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만큼 강하게 재준이 현수를 끌어 안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얇은 천을 통해 그대로 전달이 되었다.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은 떨림을 감출 이성을 찾지 못하고 있었고 언제나 완급을 조절하던 악력은 수위를 벗어나
현수가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할 정도로 현수의 등을 당기고 있었다.
"너..... 현수 맞어?"
"엉."
"이.... 현수, 맞어? 너, 정말 현수야?"
"맞어."
"너...너 정말... 현수야? 내.... 내 현수야??"
"훗, 그래. 나 네 현수 맞어."
"하느님, 맙소사. 이런...일이..."
품에 안긴 이 사랑스러운 몸이 현수가 분명한데, 이런 감칠맛 나는 음성은 분명 현수의 음성인데,
코가 저절로 벌름거릴 정도로 좋은 향내는 현수의 체향이 분명한데, 믿을 수 없어 재준은 확인에 또 확인을 하고서도 믿을 수 없었다.
어깨를 떼어내 얼굴을 꼼꼼히 뜯어 보았다. 이리 봐도 현수, 저리 봐도 현수다. 씩 웃으며 자신의
양볼을 늘어뜨리는 장난을 치는 것 역시 현수가 종종 하는 장난이다. 그럼에도 이 눈앞에 있는 사람이 현수임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현수가 한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 농담 아니야."
마치 자신의 고민을 아는지 대뜸 바라보며 하는 달콤한 말. 재준은 떨리는 손을 감추지 않고 현수의 뺨을 쓰다듬어 보았다.
진짜, 이 사람이 현실의 사람인걸까? 너무 피곤한 나머지 착시현상이라도 일으킨 걸까?
꿈이라면 어쩌지?
"다시 볼을 꼬집어 줘? 왜 못 믿는 거야? 아님 믿기 싫은 거야?"
"현수야, 나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그 훨씬 보다 더 훨씬 성격 안 좋거든. 그러니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똑바로 말해줘.
나 지금 진짜 너라도 해도 농담 못 받아준다."
"아까 한 말의 진실 여부를 묻는 거라면, 진짜야. 나도 진짜 이 현수고 여기에 들어와서 한 말 다 거짓 없어."
"현수야...너..."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어. 너를 처음 본 그 옥상에서부터 였는지 아니면 은영씨를 소개받았을 때부터였는지 아니면
네가 일주일 동안 폐인이 되어 있던 네 아파트부터였는지 나도 모르겠어. 처음에는 그저 빼앗긴다는 불쾌감뿐이었던
감정들이 점점 커져서 이제는 네 털끝 하나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기 싫은 감정까지 왔어.
그날 대해에서 봤다면 나 네게 오늘과 같은 고백을 하려고 했어. 우정인지 사랑인지 처음에는 혼돈이 되었는데 이제는 확실히 알겠어.
사랑인걸. 널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완벽한 내 것으로 하고 싶어. 도 재준."
"너....너...."
"감격은 그만하고 이쯤에서 다시 한 번 안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
싱긋 웃는 입 모양이 흐트러지기도 전에 재준의 품에 안긴 현수는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안도감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물론 자신을 안고 있는 사람은 안 그런 듯 여전히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있는 것 같지만. 이 심장이 자신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너도 날 사랑하니? 라는 질문에
"넌 언제부터였어?"
"뭐..뭘?"
"날 사랑하는 거 말이야."
"혀..현수야.."
"알아, 오면서 짐작은 했지만 이제 나 확실히 알겠어. 네가 날 사랑하는 걸 말이야. 내가 착각한 거 아니지? 너도 .. 너도 날 사랑하는 거지?"
"그래, 현수야..나도..나도...."
꼭 껴안은 따뜻한 체온을 온몸으로 받으며 재준은 현수의 머리와 등을 계속 쓰다듬었다. 만지고 있지 않으면,
손으로 감촉을 느끼고 있지 않으면 이 신기루와 같은 사람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이 사랑스러운 사람이 사랑한다고 말을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도 재준을.
"언제부터였어? 응?"
"..........."
놀라버린 뇌가 정상적인 사고 흐름을 하지 못하고 쪼그라든 심장이 아직 정상적으로 커지지 못해 대답도 못하고
오랫동안 기다렸던 고백도 못한 채 버벅거리고 있을 때 등에서 느껴지는 한 줄기의 구원의 빛과도 같은 온기.
그 손이 말하고 있었다. 거짓이 아니라고. 오랫동안 기다리느라 고생 많았다고 위로하는 손길을 느끼고서야 온몸이 제 기능을 서서히 찾아가는 것 같았다.
"나 처음에 이 감정 깨닫고 얼마나 충격받았는지 알아? 진짜 이상하더라. 그러면서 가슴 떨리게 좋았어.
이런 감정, 처음이야. 아마 그래서 더 상처가 되었나 봐. 네게 인정을 받고 싶고 네게 관심을 받고 싶었는데
정작 너는 내게 중요한 모든 것들을 다 거짓으로 대했으니깐."
"현수야.."
"나, 오늘 어디서 오는 길인 줄 알아?"
"??"
"대구에서 오는 길이야"
"뭐??"
"오늘 너 봤어."
"어, 어떻게.."
"엄마가 부르더라. 그래서 집 맞은 편 카페 있잖아. 거기에 하루종일 앉아서 너랑 엄마랑 김장하는 거 훔쳐봤어.
엄마가 말해주더라. 너 대구 내려온 거 벌써 오 년이 넘었다고. 매주 토요일 온다고 말이야. 그 말에 확신을 하게 되었지.
기억나? 너 저번에 나한테 말했었잖아. 네가 사랑한다는 사람, 그 사람의 일로 매주 토요일 일이 있다고.
그 말만 떠올리며 여기까지 왔어.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해 돼?"
"아니.."
편하게 한 달을 보낸 것이 아닌 듯 여윈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이렇게 마주보며 얼굴을 쓰다듬게 되는 날이 올 줄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서로 눈을 피하지 않고 감정을 숨기지도 않고 거짓으로 포장하지도 않은 채 같이 바라보고 있다.
"너보다는 더할 거다. 너보다는 백 배 천 배 만 배.. 알아? 현수야, 넌 내게 있어 모든 것이야.
내 목숨보다 내 재산보다 내 이름보다 내 가치보다 내 인생보다... 네가 더 소중해."
"그럼 형준이는 뭐야?"
"뭐?"
"그때 그 보물 1호라는 거, 형준이가 준거지? 그렇지? 너 괜한 말로 사람 헷갈리게 했다고. 카드 준 사람 목숨처럼 사랑한다며?"
"아.. 어떻게 형준이 놈과 널 비교해? 네가 준 거야. 그 카드."
"내가?? 나 고등학교 때부터 크리스마스카드 단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는데?"
"보여줄게. 집으로 가자."
"좋아. 집에 뭐 먹을 거 있어? 나 오늘 하루종일 굶었다."
"뭐?? 왜!!!"
"왜긴 왜야. 너보고 정신이 있어야지. 그 주인이 점심이라고 소고기 라이스 주는데 목구멍에서 걸리더라. 배고파."
"어, 어쩌지? 집에 먹을 만한 게 없을 텐데. 가는 길에 24시간 하는 해장국이라고 먹을래?"
"아니, 차라리 집에 가서 라면 끓여 먹자. 끓여줄 거지?"
"그걸로 되겠어?"
현수가 먼저 손을 잡고 문쪽으로 이끌자 따라가며 재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라면이면 어때, 너랑 집에서 먹는 게 좋아
.라고 결론을 내리는 현수의 자유로운 한 손이 20층 문을 열었다. 좁은 틈으로 19층의 환한 조명이 숨어들어오기도
전에 재준의 손이 현수의 머리 위에서 문을 닫아 버렸다.
재준의 양팔 안에 갇힌 현수가 무슨 일인가 싶어 재준을 올려다보니 진지한 재준의 눈만 시야에 들어왔다.
"키..스 해도 돼?"
"훗, 준. 너 여태 여자들한테 일일이 다 허락받고 키스했냐?"
"아니, 너니깐. 넌 현수니깐.."
허락을 받는 주제에 입술 사이를 1밀리미터도 남겨두지 않고 허락을 요구하는 모양이 뻔뻔하기는 했지만 현수는 응, 이라고 대답해주었다.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뜨거운 입술 해일처럼 들이닥쳤다.
우는 아이 달래듯 입술부터 찾던 조심스러움이 순식간에 안까지 파고들었다. 마치 자신의 입안의 세포를
다 점검이라도 하는 듯 꼼꼼히 핥고 살피는 움직임이 너무 부드러워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사랑한다'라는
말 대신 '나도'라고만 들은 대답이었지만 이것은 사랑의 고백이었다.
사랑하는 감정 없이 이런 부드러움과 상냥함은 없을 것이다.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깊은 사랑의 확인에
현수의 가라앉은 심장이 또다시 격렬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혀가 입술을 쓰다듬고 이빨을 더듬고 혀와 엉키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율동이 격해지기 시작했다.
느슨하게 등을 쓸던 손길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강하게 몸을 끌어당겼다.
뜨거운 입술과 입술이, 격렬히 뛰는 심장을 품은 가슴과 가슴이,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다리와 다리가 부딪혔다.
이제는 사랑을 확인하는 키스가 아니라 입술을 통째로 잡아먹는 키스라 생각했다.
부드러운 혀로 자신의 입안으로 침투해 천장을 쓸고 이빨 사이사이까지 검색을 하더니 나중에는 혀를 무력으로 빼앗으려는 사람처럼 강하게 빨아 당겼다.
그 강한 집착에 아프다는 소리가 나오려던 것이 재준의 손에 의해 움찔거리며 쏙 들어가고 말았다.
머리의 뒤편을 당겨 뒤로 못 빠지게 하던 재준의 한 손이 현수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감춤없이 그대로 느껴지는 재준의 성난 그것.
민망하기도하고 기쁘기도 했다.
마치 실제로 삽입이라고 하는 것처럼 앞뒤를 왔다갔다 하는 허리의 움직임, 저 깊은 곳까지 탐험을 하는 뜨거운 혀,
여유있던 손놀림이 아닌 명백한 욕망을 품은 손이 허리와 엉덩이 위에서 거칠게 내뿜는 욕정.
여자를 리드하기만 했지 리드 당하는 것이 처음인 현수는 오래간만에 다가온 이 아찔한 욕망에 자신도 모르게 앗,
하는 신음성을 뱉어 내었고 그것에 더 자극을 받았는지 재준의 움직임이 더 격렬해졌다.
현수의 다리 사이에 굵은 허벅지를 넣어 추켜 세우며 욕망의 근원을 자극하자 처음에 낯설게 나오던 신음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연신 뱉어졌다.
여전히 입술을 겹쳐진 채로 현수의 뒤를 쓰다듬던 손이 느닷없이 현수의 앞 속옷 안을 침투하자 현수가 화들짝 놀라 재준의 손을 말리듯 잡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짙은 욕망이 잔뜩 배여든 재준의 '괜찮아' 라는 말에 현수의 이성은 말끔히 날아가 버렸다.
어느새 벨트가 풀어져 바지가 바닥까지 내려가 버렸고 검은 허공 속에 현수의 욕망이 그대로 드러났지만
현수는 몇 달 만에 다가온 욕정을 참을 수 없었다. 재준의 손놀림에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재준의 팔이 현수를 받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받던 입술을 이제는 모이를 찾는 새끼 새처럼 재준의 입술이 떠나자 버둥거리며 금방 떠난 입술을 다시 찾아 입을 벌렸다.
그러자 그 고픈 마음을 알았다는 듯 금세 다가오는 뜨거운 입술을 흠뻑 받으며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명백한 의사를 담아 빨아 당겼다.
재준의 손놀림이 격렬해지면 질수록 현수의 신음성은 더 깊어만 갔고 몸은 더 깊은 욕망을 찾아 버둥거렸다.
더 깊은 것을, 더 진한 것을, 더 완벽한 결합을 원하고 있었다.
재준의 움직임이 더 빨라지면서 마찰음에 불과하던 소리가 물기를 품어 음란한 소리가 되었고 어둠
속에 더 민감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현수는 다시 없을 오르가즘을 느끼며 그 절정을 토해냈다.
정말, 기절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오르가즘이었다.
조심스럽게 바닥에 앉히고 세면장으로 추측되는 곳에서 젖은 수건으로 꼼꼼히 닦아주고 다시
새 속옷과 재준의 것이 틀림이 없을 바지를 한 벌 꺼내와 갈아 입혀줄 때까지 현수의 강렬한 오르가즘 후유증은 가시지 않았다.
"괜찮아?"
가쁜 숨을 내쉬는 현수에게 재준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화들짝 놀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생각난 듯 재준의 바지를 흘낏 바라보았다.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그의 욕망이 여실히 눈에 들어와 손을 뻗으려고 할 때 재준의 손에 의해 제지당했다.
"난 괜찮아. 일어설 수 있겠어?"
"준아?"
"좀 더 쉬었다 갈까?"
나른하게 몸이 풀어졌지만 남자의 풀지 못한 욕정을 모른 척 할 수 없어 현수가 다시 한 번 재준의 바지께로 손을 뻗자 재준이 또 그 손을 잡
았다.
"우리 진도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웃는 얼굴이지만 뚜렷한 거절의 의사가 담긴 말이었다.
하는 수 없이 현수가 손을 늘어뜨리자 재준이 현수를 꼭 보듬어 안았다.
"대신...."
이마에 닿는 따뜻한 온기에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니 왜 여태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사랑이 그대로 담긴 뜨겁고 다정한 눈동자를 현수는 볼 수 있었다.
"오늘 여기서 네게 더 받는 다면 나 체신머리 홀라당 까먹을지도 몰라. 네 고백으로 나 아직까지 숨을 제대로 못 쉴만큼 기뻐.
눈물이 날 것처럼 기쁘다. 현수야.. 너 오랫동안 기다렸어. 너만 바라보며.. 너만 생각하며.. 나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네가 날 돌아봐줬어. 거짓말만 하고 나를 숨기기만 했던 날 용서하고 또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어. 넌 내 인생에 구원이야. 내 천사..."
다시 조심스럽게 이마에 입을 맞추고 양 볼에 콧등에 볼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재준의 모습은 성스러운 의식을 행하는 사람처럼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영원히.............내 곁에 있어줄래?"
"응. 네가 질려 나를 버릴때도 너 안 놓아줄 거니깐 각오해."
"후후.. 날 네 곁에서 뗄수 없을 거야. 평생.."
먼저 일어서 손을 내미는 재준을 올려다보았다. 조만간 재준이 겪은 인내의 고통에 준하는 아니
그것보다 열 배는 더하는 만족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주리라 다짐하며 현수는 재준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문을 열었다.
눈이 부신 환한 밝음 속에서 현수는 재준에게 말했다.
"나, 배고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