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짓말[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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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마치 하늘에 큰 구멍이라도 난 듯 눈이 펑펑 내렸다. 뉴스는 연신 집중폭설로 어느 가구의 지붕이 내려앉았고
또 산간의 어떤 도로가 결빙이 되었다고 격앙된 목소리로 폭설의 위험성을 호소했다.
재준은 얼마만큼 걸었는지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없이 걷고 또 걸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슬퍼할 일은 없어야 했다. 거추장스럽기만 했던 존재가 자신이 평소에
바라던 대로 두 손을 놓아 자유를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눈물을 쏟아낼 만큼 슬픈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가슴을 막아주던 살과 옷들이
사라진 것처럼 여과 없이 들어오는 찬바람에 온 몸이 시려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어 걷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밤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리가 저절로 꼬여 길가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하얀 솜뭉치와 같이
큰 눈송이가 공중에서 춤을 추며 내려왔다. 그제야 눈이 오고 있음을 알았는 양 재준은 자신의 손바닥 위로 낙하하는 눈송이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어머니는 매우 예민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아버지와 같은 사람과 사랑하고 결혼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가는 신경 줄을 지닌 사람이었다. 잠을 자다가도 작은 소리에
잠을 깨기 일쑤였고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호들갑을 떨었고 잘 놀래고 겁도 많은 사람이었다.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해오던 이가 재준이 열네 살 되던 해 납치를 당하고 말았다.
이틀 만에 멀쩡한 몸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녀의 정신은 이미 저 세계로 넘어가 버린 후였다.
바가지를 긁어댈 때마다 신경쓰는 기색도 없이 웃어대던 남편도 아버지와 닮지 않아 이뻐했던 과묵한
아들도 그녀를 이 세계로 끌어당기는 촉매 구실을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타인의 접촉을 기피하던 그녀였지만 재준의 보호만은 받고 싶어했다.
그 이유가 재준이 어려서 남자로서의 위협을 느끼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희미한 기억의
잔재 속에 혈연을 알 수 있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보호라는 것의 수준은 상당히 재준에게 피해가 가는 것이었다.
재준의 일상적인 생활을 못할 정도로 재준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재준은 어머니의
상태가 안 좋아지면 학교를 빼먹기 일쑤였고 어떨 땐 화장실도 못 갈 정도로 하루종일 그녀의 곁을 지켜주어야만 했다.
혼자 있는 것에 극도의 공포를 느꼈던 어머니에게 재준이 바로 생명줄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곁을 머물러 주면서 하는 것은 없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어머니가 손을 뻗으면 손을 잡아
주었고 물을 원하면 물을 가져다주는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지만 같은 방 안에 머물러야만 했다.
재준은 재준대로 책을 보면서 어머니는 그녀대로 창가에 앉아 자신의 생각 안에서 헤엄쳤다.
그렇게 무던하게 있던 어머니지만 재준이 자리를 비우면 괴성을 지르며 혼돈에 빠지곤 했다.
아버지가 안아도 오래된 그녀의 유모가 안아도 어머니의 발작은 진정되지 않았고 재준이 안
아주면 그제야 물가에 나온 물고기처럼 파득거리던 몸을 진정시켰다.
'청솔'씩이나 되는 조직을 끄는 보스가 자신의 안사람이 납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손
한번 제대로 못 쓰고 속속 무책으로 있더니 돌아오는 정신을 잃어버린 사람을 보고도 복수도 하지 않았다.
복수는커녕 그 일 이후로 차차 조직을 정리까지 하는 아버지를 보며 재준은 아버지를 자신의 마음에서 지워버렸다.
어린 마음이 불 같은 분노와 사명감으로 타올랐다.
자신은 절대 아버지처럼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행여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를 지옥까지 쫓아 상응하는 대가를 반드시 받아 낼 거라 다짐하면서 무책임한 아버지를 대신하는 마음으로 어머니를 보살폈다.
어릴 때부터 다정하게 안아주는 어머니는 아니었다. 하지만 차가움 대신에 자리 잡은 공포로 얼룩진 어머니의 떨리는
손을 잡으며 재준은 자신의 각오의 첫 발자국으로 어머니를 지키자는 결심을 했다.
제정신이 안 돌아와도 상관없다. 다시는 이렇게 두려움에 떨지 않도록 지켜주고 싶었다. 자퇴할 각오까지 했었다.
그런 다짐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어머니는 추운 겨울날 재준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차를 몰고 나가 버렸다.
뒤쫓는 아버지를 비롯한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어머니는 커다란 트레일러와 정면충돌을 하였고 그리고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딱딱한 땅에 어머니를 묻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버릇처럼 주인을 잃어버린 빈방으로 갔다.
가끔 제정신이 돌아오면 당신의 아들이 아직 열네 살인 줄 알았는지 커버린 덩치에 놀라 우리
아들 장군이 다 되어버렸다면서 낮게 웃곤 하던 사람이 이 년 만에 단 하나 잡고 있던 아들의 손마저 놓아버린 것이다.
울컥 치밀어오르는 열기를 참을 수 없어 집을 뛰쳐나온 게 재준은 아득하게만 여겨졌다.
가로등에 힘을 잃어버린 몸을 기댄채 앞을 바라보니 실내가 훤히 내다보이는 빵가게가 보였다.
가게의 안을 보고서야 재준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날임을 깨달았다.
화려한 구슬과 빨간색 옷을 입은 작은 산타들이 커다란 트리에 주렁주렁 매달려 밝은 불빛 아래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어린 남자 종업원은 오는 손님마다 방긋방긋 잘도 웃으며 접대하였고
나가는 손님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과 동시에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신나게 외쳐대었다.
나서던 손님도 뒤돌아보면서 웃는 얼굴로 소년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화답을 한다.
마치 잘 아는 사람인 양 소년은 화답을 해준 손님에게 손을 번쩍 들어 흔든다.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문득 성냥팔이 소녀가 생각이 났다. 행복한 웃음이 울려 퍼지는
집의 창가에 앉아 성냥불로 따뜻함을 훔치던 그 소녀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재준은 허허롭게 웃었다.
아아..그래서 그 성냥팔이 소녀는 죽었던가?
모든 이에게 축복을 외치는 크리스마스에 춥고 배고파서 죽는 소녀의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널리 알려진 동화가 돼버린 것은 그것이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여서일까. 문득 그 성냥팔이소녀처럼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재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의 곁으로 가고 싶다 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이 세상에 미련이 많은 것도 아니다.
아버지와 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종종 빠졌던 학교생활에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죽으면 진심으로 슬퍼할 사람이라고 해본들 자신이 삼촌이라고 부르는 이의 동갑내기 아들인 형준과 청솔에 기거하는 동생들 정도.
형준도 친하게 지내긴 하지만 뜨거운 우정을 나누는 사이도 아니고 그저 붙어다니는 사이다.
하고 싶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다 귀찮은 일 뿐이다.
자신에게 목메여 잡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자유임과 동시에 악마의 유혹과도 같았다.
열여섯 나이에 심각하게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던 재준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신발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빵집에서 메리크리스마스를 외쳐대던 소년이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아니 서 있는 것은 잠시 곧 소년은 재준의 눈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안 추워? 눈이 이만큼이나 쌓였어."
소년의 손이 재준의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내자 재준은 그제야 땅바닥을 짚고 있는 한쪽 손바닥이 차가워진 것을 느끼며 손을 회수하였다.
그리고 맞은 편에 보이는 동그란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짙은 검은색의 눈은 갓 태어난 아기의 눈처럼 맑고 깨끗하였다.
짧은 머리칼은 요즘 젊은 학생이라면 통과의례처럼 다 하는 갈색 톤의 염색조차 하지 않은 짙은 검은색이었다.
답답해 보일 것 같았던 색이 오히려 소년의 검은 눈과 잘 어울려 존재감이 더 짙어 보였다.
동화 속 사람이 아니었나? 라는 뜬금없는 생각을 알기라도 하는 듯 소년의 뜨거운 숨이 차가운 재준의 얼굴에 확 뿜어졌다.
재준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누군가를 바라본 것은 어머니 외엔 처음이었다.
"우와~ 차갑다. 안 추워?"
소년의 손이 재준의 뺨에 닿자 얼었던 뺨이 녹았는 양 갑자기 뺨에 뜨거운 열이 솟구쳤다.
거울을 안 봐도 얼굴이 붉어졌을 게 틀림이 없다. 이런 기분은 난생처음이었다. 몸이 추운 건
분명하지만 얼굴이 뜨거워서 차가운 얼음찜질이라도 하고싶을 정도였다.
"이리와. 추운데 이러고 있으면 너 진짜 죽는다. 알아? 더 추워지면 추운지 모른대."
쫑알쫑알 거리며 소년이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눈앞에 보이는 하얀 손은 마치 산타클로스가 주는 선물과도 같이 느껴졌다.
재촉하듯 하얀 손이 까닥거린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는데 이 손만 잡으면 훨훨 날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통로와도 같은 느낌이다. 잡은 손은 따뜻하고 솜사탕처럼 부드러웠다.
문득 오늘 하루종일 씻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의 손 때문에 이 하얀 손이 더러워질 것 같아 빼려고 했지만 소년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차갑다고 말을 하면서도 손을 놓지 않던 소년이 빵 가게의 문만 열어 주인인 듯한 이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빵 가게의 옆에 있는 이층계단을 올랐다. 좁은 계단이어서 나란히 가지도 못하는데 소년은 재준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이층 위에는 원룸형식의 방이 있었고 침대가 있는 방이건만 발을 들이 밀은 방바닥은 온돌방처럼 뜨거웠다.
소년이 재준의 외투를 벗기고 양말도 벗기고 다시 손을 잡고 침대로 이끌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인형처럼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아니, 내버려둔 게 아니라 재준은 소년의 손이 좋아서 거절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 어떠한 핑계를 대서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구원과도 같은, 생명줄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꼭 껴안고 자고만 싶은 손이었다.
욕심 나는 손인데 소년이 슬금 빼자 손에서 힘이 빠졌다. 마치 의식 없는 마리오네뜨 인형이라도 돼버린 것만 같았다.
소년의 의지대로 몸이 움직여졌다. 그러나 눈과 심장은 소년의 뒤만 쫓아다녔다.
소년은 쿠션 좋은 베개를 등에 받치고는 주방 쪽으로 가서 데운 수프를 쟁반에 가져다주었다.
재준이 멀뚱하니 바라보자 소년은 오케~라고 말하며 맑은 웃음을 보여주었다.
"좋아. 오늘 내가 써비스 해주지. 이왕이면 이쁜 여자가 해주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이런 써비스 해준 적 없으니 감사히 받으라구"
소년이 선심 쓰듯 말하고는 한 숟가락 떠서 아 라고 말했다. 저절로 벌여지는 입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수프는 독한 위액에서도 오래 살아남는 듯했다.
한 모금의 수프가 목구멍을 넘어 식도를 내려가 위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목과 뱃속은 식을 줄 모르고 계속 뜨거웠다.
그 뜨거움이 밑에서 치고 올라와 목울대를 떨리게 하고 눈가를 젖게 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이 수프 한 숟가락으로 현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하관할 때도 실감나지 않던 감각이,
텅 빈방을 보고도 느낄 수 없던 감정이 이제야 살아 숨 쉬며 눈물을 자아내었다.
하지만 눈물이 나오기도 전에 소년이 다시 건네주는 수프 한 모금으로 진정이 되었다.
소년의 목소리가, 사심 없이 웃는 모습이 축축히 젖어들던 가슴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며 건조 시켜주는 것만 같았다.
소년의 목소리는 밝고 경쾌했다. 저 가슴 밑바닥에 숨겨둔 근심걱정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그의 목소리는 통통 튀면서 맑았다.
들으면 덩달아 품고 있던 고민을 훨훨 날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사내 녀석이 잘도 방긋방긋 웃어댄다.
눈꼬리가 작게 접히면서 웃는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어 재준은 소년이 주는 수프를 입으로 먹는지 코로 먹는지 모를 만큼 무의식중으로 받아먹었다.
접시의 수프가 다 비워지자 소년은 중환자를 대하듯 재준의 등에 손을 넣어 눕혀주자 재준 역시 거절하지 않고 소년의 손이 하는 대로 따랐다.
그리고 소년의 손이 목까지 이불을 덮어주고는 침대에 걸터앉아 토닥토닥 거린다.
눈도 말똥말똥하였고 잠이 한 푼도 안 왔는데 마법의 힘을 가진 소년의 손길에 재준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잠결에 그 하얀 손을 찾아 허공을 허우적대자 어떻게 알았는지 소년의 손이 다가와 손을 잡아주었다.
그제야 살풋 깨려는 잠을 다시 들 수 있었던 재준은 며칠 못 이룬 잠에 편안히 빠져들었다.
재준이 잠에서 깨었을 때는 추웠던 밤이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날이었다. 주방을 분주하게 오가던 소년이 재준이 깬 것을 보고는 웃으며 다가왔다.
"어? 시끄러워서 깼지? 미안. 어디 보자, 열은 없네. 잘 잤어?"
"아..응."
소년의 손이 스쳐 지나간 이마가 뜨거워졌다. 방긋방긋 웃는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벌써 한낮인지 햇살이 방구석까지 침투했고 그 햇살 가운데 소년은 하얗게 웃으며 서 있었다.
이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소년의 존재는 투명했다.
"먹을 거라고는 수프밖에 없는데 그래도 괜찮겠어? 아침에 끓여놓았으니깐 먹으면 돼. 그리고 열쇠는..
카드에 다 써놓은 거 말하려니 그렇네. 히히. 어째 좀 부끄럽다? 그러니깐 나 나가고 난 다음에 봐라. 응? 그럼 좀 더 쉬다가 집에 가. 오늘 반가웠어."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소년은 어제 가게 밖에서 본 것처럼 맑은 목소리로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문밖으로 사라져버렸다. 빵을 사갔던 손님처럼 화답도 해주지 못한 채 멍하니 소년이 눈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따뜻했던 온몸이 싸늘하게 식은 듯 오한이 들어 이불을 끌어당겨 어깨를 감쌌다. 그래도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다가 식탁으로 가니 크리스마스 카드가 한 장 놓여있었다.
처음 받아보는 크리스마스 카드였다. 산타할아버지가 커다란 선물 상자를 두 손으로 내밀고 있다.
한 장 넘기니 확 튀어나오는 꽃다발. 놀랬지? 하면서 산타할아버지가 방정맞은 포즈로 웃고 있었다. 그 웃음 사이로 소년을 닮은 글씨가 동그라니 묻어나왔다.
[ 메리 크리스마스~!!!
아,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못 물어봤네? 잘 잤어?? 일부러 보일러 올려놓았었는데 안 추웠나 모르겠네.
다시는 어제같이 그렇게 눈이 많이 오는 날 길에 앉아있지 마.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잖아.
푹 쉬었다가 가. 열쇠는 잠그고 우유 투입구로 넣어두면 되고.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수프만 좀 더 끓였어. 먹고 가.
참, 그리고 집에 갈 차비로 만원 같이 넣었어. 크리스마스 선물이니깐 안 갚아도 돼. 그리고.. 메리 크리스마스~!!!!
from. 하느님이 바빠 대신 온 천사. ]
입가가 저절로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혼자 서늘했던 방 안의 공기가 이제야 조금 데워진 것 같았다.
카드를 소중히 외투 주머니 속에 넣고 말한 대로 열쇠로 문을 잠그고 우유 투입구에 넣은 후 계단을 내려왔다.
눈 온 뒤라서 그런지 하늘은 가을 하늘처럼 맑았고 공기는 시원한 청량음료를 마신 것처럼 시원했다.
빵 집을 스쳐 지나가며 잠시 걸음을 멈추었더니 천사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예쁜 미소를 입에
단 소년이 온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손을 흔들어대었다. 그리고 입을 벌리고 뭔가 말하는데 들리지 않지만
소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메리 크리스마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재준은 말할 수 있었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그리고 천사는 사라졌다.
그냥 크리스마스 날에 일어난 아주 특별한 일로 치부하기엔 가슴속이 너무 뜨거워 한 달 만에 다시 찾아온 거리엔 천사와도 같았던 소년도 빵 집도 없었다.
빵 집 대신 고급 숙녀복 매장이 되어버린 가로등이 내려다보는 거리에서 그때처럼 한참을 서서 천사의 강림을 기다렸지만 천사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카드가 아니라면 정말 자신이 정신이 흐릿해서 꿈을 꾸었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비록 사라진 천사지만 천사는 재준에게 살아갈 이유를 가져다주었다.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고,
그때 잡았던 하얀 손을 다시 꼭 잡고 싶다는 목표가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보고 싶지만 얼굴만
기억나는 사람을 찾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언제가 모를 때를 태연하고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느긋한 일상을 거듭하면서 그 소년과의 만남이 잊혀지기는 커녕 더 짙어지기만 했다.
싸움을 즐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걸려오는 싸움을 피하지도 않았다. 따르는 애들이 몇 생겼지만 떼는
게 귀찮아서 내버려두었더니 어느새 자신이 중심이 서 있는 것을 알았지만 재준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일 학년 주제에 선배들을 물리쳤다느니 인근 고등학교에서
가장 냉정한 일짱이니 뭐니 하는 말들이 귀에 들어왔다. 하지만 재준은 시시했다.
자신은 운동을 좋아해 형준과 도장에 들러 온몸이 땀에 푹 절여지는 것을 좋아할 뿐이었다.
학기 초 걸어오는 싸움 다 받아주었더니 이학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싸움을 걸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준도 어릴 적부터 쌓아온 발군의 실력이지만 형준이나 그 외 똘마니들 몇들도 같은 집안에서 자란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냥 동네에서 싸움질 좀 하던 애들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녀석들을 몇 데리고 있어 아무리 수적으로 불리한 싸움판이라 해도 져본 적이 없었다.
하교길의 운동장은 항상 시끌벅적했다. 다른 날 같으면 일찍 갔을 텐데 옥상에서 낮잠을 달콤하게
잔 탓에 하교하는 시간에 재준도 움직이게 된 것이다. 시끄러운 소음에 다시 학교로 들어가
한 삼십 분이라도 있다가 나올까 라는 고민을 심각하게 하고 있을 때 재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생각은 저 뒤로 물러났다. 몸이 저절로 움직여 친구와 장난을 치며 하교하고 있는 한 학생의 팔을 잡아채었다.
재준과 팔을 잡힌 남학생의 주위 인물들이 모두 놀라 굳었지만 정작 팔을 잡힌 남학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몽실몽실하던 얼굴은 홀쭉하니 여윈 뺨을 지니고 있었지만 짙은 검은색의 맑은 눈동자는 여전했다.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평정심을 잃어버린 뇌와 심장과 입때문에 재준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침만 꿀꺽 삼키며 잔뜩 긴장한 채 소년을 바라보았다.
"어? 왜?"
자신을 노려보기만 할 뿐 말이 없는 상대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소년이 잡힌 팔이 아픈지 인상을 쓰며 아파~라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자마자 재준이 화들짝 놀라 손을 떼었다. 사내 녀석의 팔뚝을 무의식중이라도 세게 잡아본 들 뭐가
그리 아팠겠냐만은 입에서는 저절로 사과의 말이 불쑥 나왔다.
"아, 미안."
"괜찮아. 그런데 나한테 뭐 할 말 있어?"
소년의 곁에 서 있는 친구가 작은 목소리로 '너 도 재준 알아?' 라고 속삭이자 소년이 고개를 가로 젖는다.
기억을 못 하는 것이다. 재준은 자신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소년의 앞에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소년의 이름표만 노려보았다. 일 학년 이 현수다.
다시 만나면 하고픈 말이 많았는데 막상 이렇게 만나지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이와 이름이라도 안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듯 싶었다.
조심스럽다. 평범한 친구들과 분명 따뜻한 가정도 있을 테다. 자신에게는 도무지 입에서 떨어지지 않던
어색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남발할 수 있을 정도로 밝게 자란 소년이다.
아르바이트를 한 이유는 집안이 어려워서 보다는 여자친구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재준은 자신의 몸이 저절로 움츠러드는 것을 느끼며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험험 기침까지 해가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보고 팠던 사람에게 말했다.
"아, 사람을 잘못 봤네.미안."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같은 일 학년임을 안 현수가 가볍게 대꾸를 하며 곁에 서 있는 친구와 사라져갔다. 점점 멀어지는 거리만큼 가슴이 아파 왔다.
잡고 싶지만 자신 때문에 그 소년이 털끝하나 다치는 꼴이 보기 싫어 재준은 찾았다는데만 만족하기로 했다.
하지만 '찾기만 한다면 된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온 지난 일 년의 시간을 비웃듯 찾은 다음의 마음은 웅성대며 더한 친밀감을 원했다.
"뭘 보고 있는 거야?"
옥상 난간에 팔을 걸치고 흔들거리고 있는 재준에게 다가온 형준이 난간 너머로 보이는 운동장을 훑어보며
알만하다는 듯 아하, 하고 재준의 마음을 아는 체 했다.
"그럼 그렇지."
옆에서 쫑알거려도 눈 한 번 돌리지 않은 재준의 귀에 조잘대며 심술궂게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2학년 2반 이 현수. 사는 곳은 한라아파트 103동 308호. 부모님은 2년 전에 이혼. 현재 중학교 교사인 어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음."
"어떻게 안 거야?"
역시나 그제야 반응이 있는 모습에 만족을 하는 형준은 평소의 날카로운 감각을 자랑하던 그의 무딘 신경에 다시 한 번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그럼 모를 줄 알았냐? 너 매주 수요일이면 옥상에서 사는 거 내가 모를 것 같았어? 생전 분식이라고는 안 먹던 녀석이 작년
가을부터 학교 앞 분식집 들락거리고 학원가만 배회하고 한라아파트 앞 오락실에서 사는 거 내가 몰라? 싸움 접고 매일매일 착실하게 수업 듣는 이유
. 다 이 현수 때문이잖아. 아니야?"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형준의 멱살은 재준에게 잡혀버렸다. 조여진 목에 인상을 그었지만 그걸로 조잘거림을 포기할 형준은 아니었다.
"조용히 해. 말 새어나가면 너라도 용서 안 해."
"젠장.놓고 이야기 해. 너 그렇게 그 녀석 앞에서 알랑방귀 뀌면서도 아는 척 안 하는 이유, 내가 몰라서 싼 입 씨부리겠냐? 이거 좀 놔라. 응? "
툭 하고 버려진 형준은 다시 재준의 곁에서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친구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뭐야?"
"뭐가."
"네 성격에 갑자기 우정놀이는 아닐 테고. "
"우정?"
"설마."
"친구?"
"그건 아니지?"
그래, 그건 아니다. 재준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친해지고 싶고 예전에 보았던 그의 그 맑던 웃음을 지켜주고 싶은 것이지
우정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친구라고 함은 형준이와 같은 느낌이 들어야 했다. 같이 있으면 편하고
좋기는 하지만 다른 일을 할 때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며칠 안 봐도 괜찮고 무엇보다 볼 때마다 심장이 뛰지는 않는다
. 하지만 현수는 그렇지 않았다. 항시 생각이 나고 보고 싶다. 그 웃음을 잃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웃음이, 그 하얗던 손이 자신에게 향해주기를 바란다.
"뭐냐, 거시기한 감정이야?"
"몰라."
"야, 니가 모르면 누가 알아!!"
"나도 몰라."
"칫. 우리 두목님 아시면 난리 하시겠다. 아들 게이 되었다고 몽둥이 들고 뛰어오시는 거 아닌가 몰라."
재준은 게이라는 말에 어색하고 낯설어 고개를 돌리며 입을 닫으면서도 거부의 말을 하지 않았다.
게이라... 상대가 현수라면 나쁠 것도 없다는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아니, 긍정적인 정도가 아니다.
게이라는 단어가 물어다주는 또 다른 단어는 섹.스.
현수와의 섹스라니.. 생각만해도 아랫도리가 후끈 달아오는 듯했다. 그러나 역시 싫지는 않다. 오히려 너무 좋아서 탈이다. 역시... 그런 감정이었나.
재준은 스스로 정의내리지 못하는 감정을 형준을 통해서 확인하였다.
"그런데..."
"그런데?"
"왜..."
"왜??? 뭐가 궁금한 거야? 이 형준박사께서 다 해결해줄게."
"왜....체육은 일주일에 한 번만 할까?"
"에이~ 이 써글놈아~ 늦바람이 무섭다고 하더니 아예 춤을 춰요. 춤을 춰. 그렇게 좋냐? 말도 못 꺼내보는 소심쟁이 녀석이."
체육수업을 마쳤는지 우르르 교실로 들어가는 한 떼의 무리를 보며 안타까운 듯 재준이 중얼거렸다. 옥상에의 볼일이
끝났기에 다음 수업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던 재준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따뜻한 봄 기운이 나른하다. 수업에
들어가 본들 집중하기는 걸렀다 싶어 그냥 바닥에 누워버렸다.
곁에 있던 애들이 놀라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박스를 펴서 자리를 마련해주자 재준은 고개를 끄덕임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재준이 내려가지 않자 형준과 일 학년 애들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낮잠 자기 전에 담배 한 개피를 피우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였다.
옥상 입구 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애들이 올라오는 인물에게 태클을 걸려는 순간 형준이 올라오는 인물을
보며 말렸고 삼삼오오 모여있는 이른바 학교 불량배들을 보면서 전혀 주눅이 들지 않은 소년은 담번에 재준의 앞에 있는 박스에 털썩 앉았다.
재준의 손은 상의 호주머니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한 채 얼어버렸다. 고개를 들어 재준을 올려다보는 검은 눈동자의 주인공은 현수였다.
"야, 나 여기 누워도 되겠냐?"
"너......"
"나? 2반에 이 현수. 와.. 여기 자리 좋다. 나 무지하게 졸려서 말이야. 나 좀 잘게. 응? "
"그..그렇게 해."
"와..고마워. 대신 가는 길에 생크림 빵 하나 사줄게. 단지우유도."
멀리서 보던 미소가 눈앞에 보였다. 체육을 해서 그런지 땀에 젖은 머리칼이 얼굴에 흐트러져 있었다.
하지만 상당히 피곤한지 눈은 이미 반쯤 감긴 상태다. 재준은 그런 현수가 안타까워 얼른 박스 위에서 비켜났다.
박스 위에 벌렁 누워버린 현수가 바닥에 스프링이라도 달린 듯 다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불편한 것일까. 재준은 혹시 굴러다니는 돌이 박스 밑에 깔렸을까 봐 바닥을 눈으로 살펴보았다.
"나 부탁이 있는데, 망 좀 봐주면 안 되겠냐? 나 지금 자면 두어 시간은 잘 것 같은데 쌤이 오는지 안 오는지 망 좀 봐주라. 응?"
다들 어려워서 말도 제대로 못 붙이는 재준에게 황당한 부탁을 하는 현수를 보며 일 학년인 민이 나서는 것을 형준이 말렸다.
옥상의 살벌한 기운을 아는지 모르는지 본인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은 말만 하고서는 다시 누워버렸다.
뒤에서 일 학년 녀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려오는지 감긴 두 눈이 움찔거리자 재준은
일 학년을 노려보고 다시 한 번 형준을 바라보았다. 형준은 알았다는 듯한 모션을 취하며 아이들을 몰고 옥상을 빠져나갔다.
문을 닫기 전 형준은 따뜻한 봄 바람이건만 혹시나 추울까 봐 자신의 재킷을 벗어 현수에게 조심스럽게 덮어주는 재준을 볼 수 있었다.
재준의 눈이 현수의 얼굴에서 떼어지지가 않는다. 저렇게 편안하고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 재준을 형준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래, 게이면 어떻고 호모면 어때. 너만 마음을 잡는다면..
사는 것에 미련이 없는 녀석이었다. 큰어머니 그렇게 돌아가시고 제일 걱정이 되었던 것은 재준이었다.
망망대해에서 노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멍하니 장지를 지켰던 재준을 보면서 형준을 불안했었다.
어른들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하던 녀석의 정신은 이미 주인을 잃고 허공 속을 맴도는 것 같았다.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잃은 듯 연기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던 불안감이 내내 있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재준의 실종으로 이어졌다.
무슨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던 큰 눈이 내리던 날. 모든 애들이 서울 바닥을 뒤졌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없었다.
어머니외에는 딱히 사는 것에 재미를 못 느꼈던 재준임을 알기에 불안해서 형준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라졌던 재준이 하루 만에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온 재준에게는 불안감 따위는 없었다.
그때 재준이 얻은 목표가 현수일것이다. 비록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재준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준 것은 다름 아닌 현수일테다. 형준은 조용히 문을 닫으며 계단에 털썩 앉아버렸다. 아무도 올라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친구가 만난 사랑에 조금의 방해라도 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그리고 재준은 자신의 눈 아래에서 편안하게 잠을 청하는 현수를 보면서 확실하게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
**
잠이 서서히 물러나는지 손으로 눈을 비비며 힘겹게 눈꺼풀을 올리는 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기지개를 한껏 펴고 다시 몸을 웅크린다. 그러면서 가슴팍에 안겨든다. 마주 안아주자 가슴에
뜨거운 입김을 마구 쏟아붓는 녀석. 이 녀석은 아마 평생을 가도 자신의 무의식중인 행동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모를 테다.
매끈한 등을 손을 쓸어주었다. 만족스러운 듯 가슴에 뭔가를 중얼거리는 건 아마 '잠 와' 정도 일 것이다.
품 안을 내려다보니 알았는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는 녀석. 이뻐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언제 일어났냐?"
"좀 전에"
"아우.........."
찌그러드는 인상에 조심스럽게 그를 품 안에서 놓으며 눈으로 몸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왜? 어디 안 좋아?"
"배고파."
"후후후.."
"뭐 해줄 거야?"
"아씨가 원하시는 거라면 뭐든지."
"칫. 그러는 사람치고는 다 들어주는 사람 못 봤다. 만한전석이라도 해달라고 하면 진짜 해줄 수 있어?"
"못 할 것 같아?"
"............."
"적은 경우라도 64종 이라니깐 요리하는 시간은 염두에 두고.."
"됐네요. 됐어. 말을 못해요. 말을."
"해주고 싶은데.. 밥 하기 싫다."
"얼래? 웬일이래?"
"너, 안고 싶어서.."
재준이 현수를 다시 꼭 안자 현수 역시 재준의 가슴에 안겨 등으로 손을 돌려 그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꼭 안고 싶었는데..너 잠 깰까 봐 못 안았어."
"바보."
"후후, 현수야.."
"왜."
"다시 한 번 말해줄래?"
"너, 어제 내가 뭐라고 했어? 다시 한 번 더 보채면 다 물린다고 했어? 안 했어?"
"그랬나? 나 기억 안 나는데? 내가 달리 돌쇠겠냐? "
"우씨, 이럴 때만 돌쇠래!!!!"
"응? 다시 한번만... 거짓말 같아서.. 너 안고 있어도 자꾸만 꿈 같아서.."
"우는 소리해도 싫어.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잖아."
"뭘?"
"준이 너는 '나도' 라고 해놓고선 나한테만 말하라고 하잖아. 야, 잘 되었다. 너 한번 해봐라. 나도 네 마음 좀 들어보자. 너 나한테 마음 있기는 있는 거야?"
재준은 품 안에 현수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더 깊은 키스를 하고 싶기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이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아 립키스만 했다. 하지만 립키스도 조절이 안 되어 한 번만 하자, 했던 것이 두 번 세 번이 되어 버린다.
이 사람을 상대로 능숙하게 욕구를 조절할 수 있는 때가 오기는 할까, 라는 생각을 하며 현수의 정수리에 머리를 얹었다.
"처음 보는 순간 너, 사랑했어."
"조숙했다. 고등학교 때 남자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다니.."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어. 네게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지던걸. 다른 것은 전혀 안 보였어."
"자그마치 몇 년이야? 그 긴 시간 동안 모른 척 하다니, 너 무서운 사람이야."
"그만큼 절박했으니깐.. 너 무서웠으니깐.. 웃지마. 나 아직도 무서워. 네가 나에게 등을 돌릴까 봐."
현수가 재준의 볼을 양옆으로 죽 늘였다. 신음소리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아프다는 인상이라도 쓰면
손가락 운동의 보람이 있으련만 처음과 같은 얼굴이니 이것도 재미없어 손을 놓고 양 손바닥으로 두 볼을 소리 나게 탁탁 쳤다.
"나 못 믿는다는 말로 들린다? 다시 그런 소리 하면 확~쫓아낸다~"
"사랑해."
"선수치기는. 능구렁이."
"사랑해 현수야..."
"응."
어제 말하라고 할 때는 얼어서 제대로 말도 못하던 녀석이 넙죽넙죽 말만 잘하니 이제는 오히려 현수가 머쓱해졌다.
어제 재준네 집으로 와서 키스에 열중하느라 마음을 알리지 못했다 생각하는지 재준의 고백은 쉼 없이 흘러나왔다.
정신없이 키스하고 그 와중에 정신없이 자버렸다.
긴 출장에 지친 몸을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대구까지 내려갔다 온데다가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서서 그랬는지,
긴장이 풀어진 몸은 재준의 품에 안기자마자 잠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오죽할 말이 많고 오죽하고 싶은 행동이 많겠냐만은...
"현수야"
"응?"
"사랑해."
그리고 키스.
"나도, 나도 너 사랑해. 그만하자. 배 고파."
"너.... 내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해."
"응."
"현수야...사랑해..."
"거참, 알았다고요!"
좀 지나치지 않은가...
"사랑해."
"너 원래 안 그랬잖아. 왜 이렇게 변했냐?"
"내가 어떻게 변했는데?"
"무뚝뚝한 녀석이 왜 버터가 되버렸냐?"
"사랑하니깐."
"참내, 말을 못해요. 말을."
"너..사랑해."
"어제는 입 꾹 다물고 있다가 아침 댓바람부터 입만 열면 사랑한대. 그래. 나도 사랑한다고.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냐?"
"뭐가"
"너 삼분 동안 대화하면서 사랑한다는 말, 도대체 몇 번 했다고 생각해?"
"하지만 말하고 싶은걸. 내가 널 사랑한다는 것을."
"누가 그걸 몰라? 나도 안다고. 네가 날 사랑한다는 거..나도 그렇다고 말했잖아. 그걸 모르는 건 아닌데.."
"현수야.."
"또 사랑한다고 말 하기만 해. 나도 듣기 좋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지. 이건 아예 입에 달아놓았어요. 달아 놓았어."
"물을 가둔 댐이 터지면 뭐가 나올까?"
"무슨 말이야? 당연히 물을 가두었으면 물이 나오겠지."
"나도 그렇거든."
"응?"
"내가 꽁꽁 가두어두었던 댐이 터졌으니 감추어두었던 말만 나오는 거야. 사랑해. 우리 현수."
"범람하지 않고 어떻게 버텼냐?"
"사랑해. 이쁜 현수."
"이쁘다니!!! 잘 생겼다, 멋있다, 카리스마 있다, 많잖아!!!!"
"이쁜걸. 이뻐서 꽉 깨물고 싶은 만큼 이쁘고 사랑스러워.."
절로 으아아악 하는 비명과 함께 팔을 벅벅 긁었다. 비록 제 삼자의 입장에서 듣는 것이 아닌 본인의 일이고
그 내용이 기분이 좋기는 하지만.. 현수는 원래 다정하기는 했지만 재준이 이렇게 감정표현이 많다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적응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너어....여태 어떻게 참았냐? 어휴, 닭살이야......"
"후후..그러게. 입이 근질거려 죽겠다. 너는? 너도 날 사랑해? "
"내 말 귀로 듣긴 했어?"
"들었는데 자꾸 확인해보고 싶어서.. 네 입으로 네 가슴으로 말하는 거 들어도 또 듣고 싶고 또 느끼고 싶어."
느글거린다고 밀어낼 수 없을 애틋한 시선에 마음이 녹아들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랑했다고 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자신만 바라본 재준이 안타깝기도 하고 이제야 받아들인 자신이 멍청해 한심하기도 했다.
혹시 거부할까 두려운지 재준이 손가락이 현수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만지고 있었다.
그런 재준의 손가락을 잡아 입맞추었다. 당황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신 역시 질리지 않은 말을 했다.
"하아.. 믿을 수가 없어. 이 사람이... 날...날 사랑한다고?"
"아, 글씨 사랑한다고오.. 그럼 그 댐 공사한 게 몇 년이야? 십 년하고도...에...."
"십 사년"
"그쯤 되겠지? 십 사.....뭐?? 잠깐......십..이년도 아니고 십 사년?? 이게 계산이 어떻게 되는 거야?
참, 어제 말한 그 카드 보여준다며? 어디 있어? 한번 보자. 야, 이야기 좀 하자고!!!! 얼릉 비켜봐 봐."
"사랑해.. 이 현수"
"조..좀.. 비켜보라니깐.으윽..젠장 이 녀석 왜 이렇게 무거운 거야..너 안 비키...우읍...."
버럭 고함을 지르던 현수가 재준의 입술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채 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아침 햇살은 이른 시간부터 음란하게 얼켜드는 두 남자의 모습이 일상인 듯 태연하게 훔쳐보고 있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