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하얀 거짓말 에피소드 1. (부제; 별당 아씨와 머슴의 동거)
2005.04
*별당 아씨와 머슴의 동거*
"엄마아아아아아아~"
"시끄럽다."
"응? 응? 허락해줘. 엄마아아아아~"
"길거리에서 이게 무슨 짓이야? 말로 할 때 놔라."
매몰찬 최여사의 말이건만 현수는 여전히 최여사의 팔을 잡고 어디도 못 가게 잡고 있었다.
그것도 사람들 많은 서울역 광장 앞에서.
"너 이럴려고 마중나온다고 했어?"
"히히히.."
"싫으면 관두래도. 누가 뭐라고 그래?"
"많이..기다렸잖아.."
"허이고, 많이? 그래, 어지간히도 많이 기다렸다. 꼴랑 이 개월 버티지도 못하고 이렇게 조를 거면 다 물러라. 난 하나도 안 아쉽다."
"엄마, 진짜 이러기야???"
"너는. 내가 오늘 점심 약속 있다고 했어? 안 했어? 이 찢어진 청바지는 또 뭐고!! 니가 엄마 체면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입고 올 수 있어?"
"선 보는 거 싫다고 했잖아. 엄마가 마음대로 약속 잡아놓고선..치.."
"선이라....허긴..선 본다는 말이 맞기는 하지만, 하여튼 늦었다. 앞장서."
여지간해서는 꿈쩍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최여사의 단호함에 현수는 고개를 숙이며 앞장섰다.
지금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재준을 생각해서 엄마 만나서 출발한다는 문자를 넣으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쓸 수가 없었다.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주말에 대구 내려갔을 때 나란히 들어오는 두 사람을 앉히고서는 최여사가 했는 말이란 35살까지는
같이 지내지도 못할뿐더러 현수는 여전히 선을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재준은 담담하게 알았다 했지만 현수는 버럭 고함을 지르며 거부했다. 하지만 현수의 그런 작은(?) 반항에 꿈쩍일 최여사가 아니었다.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조용한 한정식집에 도착하고서야 최여사는 퉁퉁 부은 얼굴로 앉아 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은 엄연히 다른 거다. 너희가 동거한다는 게 그냥 같은 집에 사는걸 의미하는 거니?
아니잖아. 그건 너희 둘이 결혼한다는 것과 다름이 없어. 신중해야지."
"신중히 생각한 거라고. ....떨어지기 싫어."
"보통의 커플도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하물며 남자끼리라니.. 평범하지 못한 것은 시선을 끌게 마련이고
시선을 끌면 자연스레 잡음이 생기기 마련이야. 내가 평생을 허락하지 않은 것도 아니잖아. 겨우 4년도
못 참을 관계라면 평생은 택도 없다. 재준이가 그 정도도 못 기다리겠대?"
"재준이가 그런 말 하지 않는다는 거 잘 알면서!!!! 내가 떨어지기 싫다고!!"
"오늘이 시작이다."
"응?"
"내가 너 선본다고 이렇게 차려입고 서울까지 올라온 적 있었어? 하여간 널 데리고 살 재준이도 참 안쓰럽다. 쯧쯧.."
"그럼 선 아니야??"
"너 딴에는 반항한답시고 그렇게 입고 온 모양인데.. 오늘 선을 보는 게 아니라 선을 뵈어야 해. 쉽지 않은 길임을 오늘 깨닫게 될 거다."
"누..누구 만나는데??"
"재준이네 외할아버지."
"헉..엄마!!!!!!!!! 진작에 말을 했어야지!!!!!!"
쭉 찢어진 청바지에 커다란 용이 등판에 전사된 희한한 셔츠까지 입은 아들의 옷차림을 보니 속이 쓰라렸다.
깔끔하게 입어도 책 잡힐 녀석이다. 재준이네 외할아버지는 명동의 부호라 들었다. 재준에게 사업을 물려준
분의 전화가 뜬금없이 걸려온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대구로 내려가 얼굴을 뵙고 싶다는 말에 일흔 살의 노친네를 대구까지 오게 할 수 없어 서울로 왔다.
자신이 아들 교육 잘못 시켰다는 욕을 먹는 건 차라리 쉬웠다. 오랜 시간을 같이하고 이제는 그 깊은 마음이
친구가 아닌 서로에게 반려임을 깨달은 아들 녀석이 웃는 얼굴을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모진 말을 듣게 하나, 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오히려 잘 되었다 싶다. 앞으로 가야 할 가시밭길이다. 가시밭길을 헤치면 산이 나올 테고 산을 넘으면
물살이 드센 강을 만날 것이다. 남자끼리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건만 아들은 당장의 들뜬 가슴이 좋아 동거를 허락해달라 이렇게 조른다.
그 모양이 철없어 속상하고 또 애틋했다.
"어,어떻게 해. 엄마..나 어떻게 해.응?"
"촐싹대지 말고 앉아."
"하이고, 오늘 나 죽었다."
털썩 주저앉으며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낙담하고 마는 녀석의 단순함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안..좋은 소리 들으면 어떻게 할거야?"
"음.. 일번. 돈을 한.. 일억쯤 주면서 헤어지라고 한다! 그러면 돈을 정중히 드리면서 저 모은 돈도 일억 되거든요? 해야지."
"너한테 일억이 어디 있어?"
"지금부터 열심히 모으면 오 년 뒤쯤이면 일억 되지 않을까?"
"어른께 장난칠 생각하지 마"
"장난이 아닌걸. 음...그런데 눈물을 흘리시면서 헤어지라고 하신다. 아..그럼 어쩌지?"
"태평이구나."
"아냐. 내 가슴이 지금 얼마나 콩닥콩닥 거리고 있는데.."
"한 번도 안 뵈었지?"
"응, 말로만 들었는데....아..무서워 엄마. 이럴 때 재준이 있으면 딱 좋은데, 엄마, 재준이 부르면 안 돼?"
"언제까지 그럴 거야?"
"응?"
"언제까지 재준이 등 뒤에 있을 거냐고. 네 일이야. 너 혼자 짊어져야 할 일이라고."
어떤 일이 있어도 두 사람이 헤어지는 일은 없을 거라는 확고한 믿음이 현수에게 있었다. 그래서 말로만 듣던 재준의
외할아버지를 뵙는 것이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조심스러웠다.
젊은 사람들도 쑥덕대는 동성애가 일흔 살의 노인이 곱게 봐주실 리가 없다. 재준이 가끔 안부인사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자신 때문에 재준이 유일하게 잘 지내는 가족과 껄끄러운 감정이 생길까 봐 신경이 쓰였다.
아직 뵙지는 않았지만 대구의 어머니까지 불러와 대면을 하는 그 노인의 마음은 이미 단단하게 굳어버린 것만 같아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현수의 조바심과는 달리 늦었다 하시며 방으로 들어오는 일흔 살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은 젊은 노인의 웃는 얼굴에 현수는 얼이 빠졌다.
내 귀한 손주 꼬여낸 나쁜 호모녀석!!! 이라는 호통이 아닌 현수를 바라보며 말을 꺼낸 노인의 첫 마디는 ..
"현수라고 불러도 되겠나?"
였다.
그리고는 최여사에게 늦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에...."
이 쪽은 어떻게 불러야 하나, 라고 고민하는 노인의 얼굴을 보며 최여사는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호감 어린 얼굴을 하고 있으나 이 어른이 칠십 평생을 얼굴과 마음을 같이하면서 살지는 않았을 테다.
복잡한 마음에 숙였던 고개가 번뜩 들린 것은 노인의 생각지도 못한 단어 때문이었다.
"안사돈, 이라고 해도 되겠습니까?"
"어, 어르신.."
"꼭 인사를 한 번 드리고 싶었습니다. 현수의 얼굴도 볼 겸 겸사겸사 해서 대구 내려가려고 했는데 먼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 아닙니다. 그런데..하실 말씀이라는 게.."
"하하. 뭐 급한 거 있습니까? 천천히 식사하시면서 말을 나누지요."
"재준이가 제 사업 물려받은 이야기 하던가요?"
"못 들었습니다."
"노인네가 주책 맞다 생각마시고 이야기 좀 들어주십시요."
"네."
"저 지금은 이 모양으로 늙어버렸지만 한때 명동에 박 영재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깨에 힘깨나 주는 양반이나 나랏일 한다고 떵떵거리는 양반들 제 손 안 잡아본 사람 없습니다.
늙은이가 되어서 그런지 이름이 중요하더이다. 명동을 호랑이로 주름잡은 사람이 이제 종이호랑이
되었다는 소리 듣기 싫기도 하고 또 궂은소리 들으며 모은 재산을 돌릴 줄도 모르는 아들, 손주에게
맡겨 잿더미 만드는 것도 싫어 재준이게 맡겼습니다. 지 아비 밑에서 나왔다는 소리 듣고 마음 바뀔까
봐 바로 달려가 제 모든 것 받으라 하였더니 그 녀석, 떫은 감 씹은 표정이더군요. 허허. 우리 친손주
였다면 좋아서 입이 찢어졌을 텐데 그놈은 배포가 달라서 그런지 무거운 짐 하나 짊어진 표정이었습죠.
그러면서도 제가 부탁 씩이나 하니 거절은 못하고 결국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수락을 했습니다."
"아마 어르신의 마음을 이어받아 더 잘하고 싶어서 그랬나 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때 녀석이 내걸었던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요?"
"거참, 내가 못 줄 것을 준 것도 아닌데 당당하게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하나는 제 친혈육들 문제였는데
아마 나중에 친손주도 아닌 외손주에게 재산 넘겼다고 시끄러운 소리 날것 같았겠지요. 그래서 제 친혈육에게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재산을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유산상속의 내용에 만약 재준이를 보호하기 위해 몇 가지 조치를 취해주었습니다."
"네"
"그래야 그 녀석들 재준이놈 안 건드릴 테니깐 말입니다. 그리고 재준이가 하나 말한 조건이 있습니다."
최여사가 궁금해서 어른을 바라보았지만 어른의 시선은 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감정을 감추는데
능숙한 사람이라 보기에는 너무 자애로운 미소만이 입가에 맴돌았다.
"성역이라면서 건드리지 말라고 하더군요. 허허.. 그 녀석 뭔가에 그렇게 욕심내는 거 처음 봤습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얼굴 한 번 보자, 했더니 아직 고백도 못했다 하기에 더 어이가 없었지요. 그게 너였구나."
"송, 송구합니다."
"아니, 아니. 괜찮다. 그리고 재준이 녀석 제가 준 돈 탈탈 털어 빌딩 하나 짓더니 이제 사채업도
양지로 나와야 한다며 이름을 꼬부랑 말로 짓고 뭔 협회에도 가입하고 기부금도 내고 회사이름 홍보까지 하길래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지요.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게 흐르는 물인 것임을 말입니다. 건물 세우고 빈털터리와 마찬가지이던 녀석이 불과 이년 만에 빌딩 빼고도
제가 준 돈 보다 더 많은 자금 만들었습니다. 제 늙은 친구들이 호랑이가 용을 키웠다 시샘하더이다. 허허.
늙은이에게 더 빼갈 것 없다고 여긴 아들 손주 놈들 이제 용돈은커녕 찾아오지도 않습니다만 재준이놈만 말도
안 했는데 꼬박꼬박 용돈 붙여줍니다. 제게 그런 손주입니다. 안사돈."
"...........네."
"오늘 제가 뵙자고 한 것은 부탁하나 드리려고 그랬습니다.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제 체면 세워주고 제 살림 불려준 외손주에게, 그리고 그 외손주의 마음을 잡아준 이 녀석에게 이
늙은이 죽기 전에 선물 하나 해주고 싶습니다. 먼저 안사돈께 허락받고 싶어서 뵙자고 했습니다."
"애들에게 줄 선물을 제게 허락을 받으시다니요."
"아닙니다. 허락을 받아야 하고 말구요."
"어떤 선물이시길래.."
"둘이 살집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하, 하지만 전 좀 천천히.."
"제가 오래 살 자신이 없어서 그럽니다. 뭔가 이 녀석들에게 해줘야 죽을 때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어디 가서 머리를 조아려 본 적이 없을 노인네가 고개를 숙이며 부탁을 하자 최여사는 좋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방정맞게 오엣! 라고 쾌재를 부르는 현수의 옆구리를 쿡 찔렀지만 현수의 싱글벙글한 미소는 여전하고 그걸 바라보는 노인의 얼굴에도 웃음이 한 가득이다.
"너네는 어째된게..."
재준의 외할아버지와 헤어진 뒤 서울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최여사가 재준와 통화를 막 끝낸 현수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듯 말을 뱉었다.
"응?"
"내가 말은 안 했지만 한 달 전쯤에 재준이 모친이라는 양반이 대구집에 들렀다."
"에에? 정말?? 왜?"
"선물을 받은 건데 마침 집에 있고 누굴 줄까 하다가 내 생각이 났다며 김치 냉장고 들고 오셨더라."
"와... 엄마 김치냉장고 노래 부르더니 잘 되었네 뭐."
"이놈아!!"
꿀밤은 맞은 아들의 반항기서린 눈동자를 보면서 최여사는 한 대 더 쥐어박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결국은 참기로 했다. 한 대 더 때린들 정신 차릴 녀석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어떻게 되긴! 마냥 사양하는데 그럼 이걸 다시 들고 서울까지 가라고요? 라고 하는 양반 앞에서 뭐라고 그래.
아무런 말도 안 하고 그저 네가 이뻐서 뭔가 해주고 싶었는데 다행이라 하시더라. 그리고 어제는 내가 누구랑 통화했는 줄 알아?"
"누구랑 통화했는데?"
"은수랑 강서방한테 한 시간은 볶였다."
"누나랑 자형한테? 왜?"
"몰라. 이놈아!!! 어째 너네는 남자끼리 산다는 데 다들 말릴 생각은 안 하고 아무도 없어? 나만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원.."
"히히히.. 우리의 사랑이 그만큼 깊다는 걸.."
"못하는 소리가 없다. 쯧쯧.."
"그럼 엄마 허락한 거다? 그치? 응?"
"그 어른이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그럼 어떻게 해. 잘 살아 이놈아. 집안일 재준이한테 다 맡기지 말고. 이거 어디 딸년 시집보내는 것도 아니고 나원참.."
"히히히.."
"그만 좀 웃어!!!"
"좋은 걸~ 히히.."
아들의 호들갑스럽게 웃는 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최여사도 같이 웃어버렸다.
그렇게 된 두 사람의 동거 사흘째 밤.
현수와 재준은 사이좋게 나란히 엎드려 (현수의 강력한 요구사항이었다) 서로의 발로 장난을 치며 한 곳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니깐 이제 우리는 한 살림이다, 이거지."
"응응."
"야, 너 아까부터 응응만 하는데 좀 진지하게 들어!!!"
픽 웃으며 재준이 맨 바닥에 얼굴을 붙이고는 시선을 올려 현수를 올려다 보았다.
"좋아서.. 너무 좋아서.."
"싱겁긴, 그렇게 좋아?"
"응. 응. 현수야 우리 이거 내일 다시 이야기하고.."
다가오는 입술을 손으로 밀며 현수가 제법 단호하게 재준의 의지를 꺾었다.
"우리가 동거를 한다는 건 사랑하는 게 아니라 같이 살아가는 거라고. 현실이야."
"오오오~"
"뭐냐, 그 야유와 비슷한 감탄사는?"
"아.. 그냥.. 멋있어서.."
"음, 내가 좀 그렇기는 하지.하.하.하."
"..........."
"흠. 아무튼 앞으로 살림을 살아야 하는데, 너 산수 잘하니깐 네가 해라."
재준은 심각한 표정으로 눈앞의 가계부를 바라보았다. 현수가 낮에 꼭 들릴 때가 있다고 서점 앞에 잠깐 차를 세웠는데 이걸 샀는 모양이다.
하나의 표지에는 '현수와 재준의 가계부'라고 큰 매직펜으로 써져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재준의 가계부'라 적혀 있었다.
현수는 자기가 쓰던 게 있으니 그냥 그걸로 계속 쓴다고 한다.
"그런데.. 나 이런 거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는데.. 네가 하면 안 돼?"
"귀찮은데.."
"가계부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걸."
"뭐 좋아, 난 계속 쓰고 있었으니깐 뭐, 내가 할께."
"응, 고마워"
"너 월급이 얼마야? 그리고 카드 다 꺼내봐."
"그, 그건 왜?"
"당연하잖아. 수입이 있어야 지출이 있는 거잖아. 너 월급받는다며?"
"그렇긴 한데.."
"자, 난 수입이 이백, 카드는 음, 여기 이 카드는 내 개인카드로 하고 이걸 생활비카드로 할께. 야, 뭐해? 카드 꺼내봐."
엎드려 살림에 대해 의논하자 했을 때 지갑을 가져오라고 한 이유를 이제야 깨달은 재준이 엉거주춤 지갑을 내밀었다.
남편의 비상금을 뺏듯 재준의 지갑을 휙 가로챈 현수가 재준의 지갑에 있는 내용물을 다 꺼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카드라고는 단 한 개. 그 이유는 재준에게 카드지갑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재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어, 카드는 하나뿐이네? 너 의외다?"
"민이가 은행거래는 한군데만 하는 게 좋다고 해서..."
"그렇긴 해. 포인트도 쌓이고 말이야. 그럼 너 이 카드가 네 용돈카드가 되는 거다. 알았지? 자, 그럼 한 달 수입은?"
"어..그러니깐..음..한 사백??"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금액을 부르니 현수의 눈이 놀라 동그래졌다. 순간 금액을 너무 작게 불렀나 싶어
얼른 조정을 하려고 할 때 현수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내가 임자 하나 잘 물었네. 이야~ 사백이라니.. 이거 사장할만하네. 거기다가 보너스에 성과금에..흐흐흐.. 너 보너스는 몇 프로야?"
"팔백프로."
"오~ 그럼 내 월급으로 생활하고 네 월급이랑 보너스 그대로 저금하면 우리 이년에 일억은 모으겠다. 야~ 멋지다."
이런 저런 상상으로 기분 좋게 웃는 얼굴을 보며 재준은 현수의 그 웃는 얼굴 주름을 손을 쓸었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이쁜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말을 한다면 고맙다는 말이 아닌 주먹 쥔 손을 들어올릴 것을 알기에 조용히 속으로 되내였다.
"너 회사일로 접대할 때는 회사카드 써?"
"뭐, 그렇지."
"그럼 형준이나 다른 사람들 만나서 술 마시는 거 한 일주일에 한번쯤으로 계산하면 되겠어?'
사실 전혀 필요 없다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충격적인 현수의 발언에 마시던 커피가 사레 걸려 재준은 한참 동안 켁켁 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일주일에 삼만 원 잡고, 기름값으로 한 삼십 잡고, 기타 잡비 한 달에 오만원정도?
그러면.. 너 기름값 포함한 한 달 용돈이..사십칠만원.. 인심써서 오십 잡으면 되겠네. 나는 기름값이 안 들어가니깐.."
"자, 잠깐만. 그럼.. 기름값 빼고 용돈이.."
"이십만원."
"........."
"왜?"
"..........카드값 포함해서??"
"당연하지. 왜? 별로 쓸데없을 것 같아? 그럼 너도 다른 남자들처럼 비상금 만들어. 후후.. 그 비상금은 손 안 댈게."
"..........."
"왜?"
"현수야.."
"응?"
"가만히 생각해봤는데..."
"어"
"너 피곤할 것 같아. 가계부 쓰는 거 말이야."
"괜찮은데? 나 계속 가계부 써오던 거라서.."
"아니, 너 네 개인 가계부도 쓸 거 아니야. 그럼 두 개나 되는데.. 너 힘들잖아. 내가 할게. 응? 그렇게 하자."
"아까는 싫다고 하더니. 그래, 그럼 나야 편하지. 뭐. 그럼 어제 것부터 써. 알았지?"
그렇게 살림살이는 일단락이 나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열띤 몸 겹침을 하고 난 뒤 피곤한지 반쯤 눈이
감긴 현수를 품에 안고 잠을 재촉하듯 현수의 등을 조용히 쓸어주면서 재준은 현수를 불렀다.
"현수야.."
".............응..."
"나, 거짓말해도 돼?"
".............무슨 거짓말?"
반쯤 잠에 취한 현수의 느린 말에 재준이 현수의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며 마치 자장가를 부르듯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잠에 취한 현수가 자세히 듣지 않는다면 듣지 못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선의의 거짓말, 하얀 거짓말."
"...........................응."
"너 허락했다"
".............................응"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
".............알았다니깐. 자자 자."
그리고는 금세 잠들어 버린 현수의 이마에 입술로 도장을 찍고 재준은 그 문제의 '재준의 가계부'를 펼쳤다.
"어제부터라.."
어제 현수가 회식이 있는 바람에 혼자서 사랑의 메신저 노릇을 하였다고 자청하는 형준과 도영을 만나 가볍게 술을 한 잔 했었다.
'형준과 술값 = 30,000'
가계부에 금액을 적고서 여유로운 손놀림으로 볼펜을 휙휙 돌리는 재준의 얼굴에는 음흉한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