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거짓말 에피소드 3. (28/28)

제 목 ; 하얀 거짓말 에피소드 3. (부제; 별당 아씨와 머슴의 결혼)

*별당 아씨와 머슴의 결혼*

"오늘 일찍 와~"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말투로 당부를 하는 재준의 말에 책상달력을 보니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일주일 전쯤엔가 재준이 다음주 목요일에 약속하지 말고 꼭 일찍 들어오라고 말을 했었다.

이유를 물어도 말을 안 해주더니 오늘 아침에 물으니 대답을 해주었는데 그 대답이라는 것이 정말 뜻밖이었다.

그 옥상에서 처음 만난 날이란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 둘이서 결혼하자고 했다.

결혼?? 무슨 결혼.

결혼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무슨 절차를 거쳐 결혼을 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는 모양이지만 일단 쉬운 일은 아니다. 설마 동성의 결혼이 

가능한 외국에 가서 라던가 이런저런 절차를 거쳐 하자는 건가, 아니면 엽기적으로 생각해서 우리끼리라도 '

결혼식'을 하자는 건가? 문득 떠오른 자신이 입은 하얀 웨딩드레스를 떠올렸다가 머리를 붕붕 저으며 끔찍한 상상을 지웠다.

일찍 왔건만 집은 텅 비어있었다. 하지만 식탁에는 푸짐한 만찬이 이미 준비가 돼있었다.

가운데 놓인 커다란 케잌은 주문이라도 했는지 이름까지 새겨져 있다.

'축 결혼' '도 재준과 이 현수' 이런 글귀가 말이다. 커다란 붉은색의 초가 덩그러니 꼽혀 있기까지 한 만반의 준비지만 정작 당사자는 없다.

생긴 거나 말하는 건 최 민수이면서 하는 짓은 로맨스의 환상만을 품은 여고생과 다를 바가 없다.

처음에는 시켰다, 라고 생각한 음식들이 가만히 보면 다 재준의 손을 거쳐서 태어난 정성어린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보면 직접 했을 것이다. 오늘 아예 결근을 한 모양이다.

하루종일 이걸 준비했을 재준을 떠올리며 현수는 자신의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고맙고, 또 미안했다.

작은 꽃다발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재준이 오기 전에 잠깐 나가서 꽃이라도 사들고 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재준이 들어섰다.

두 손으로 가득 안고 있기도 버거워 보이는 커다란  꽃 뭉치를 들고서.

"어? 벌써 왔네."

"준아..."

"이런..완벽하게 준비하고 불까지 끄고 기다리려고 했는데 이거, 실패인걸?"

"너...'

"내가 꽃을 사놓는다는 걸 잊었지 뭐야. 많이 기다리지는 않았지?"

"으응.. 이런 계획이 있었으면 말하지 그랬어. 나도 결근하고 도와주었을 텐데. 같이..하면 되는데..."

"나 여기로 이사 올 때 다짐했거든."

꽃과 함께 사들고 온 꽃병에 물을 받고 꽃을 꼽으며 재준이 현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다시는 눈밖에 두지 않겠다는 단호함과 함께 서린 것은 아껴주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이제는 이 눈만 보고도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현수가 먼저 재준에게 다가갔다. 

꽃병을 식탁 중앙에 놓기가 무섭게 재준이 현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우리 아씨..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한다고 말이야."

"준아.."

"곱고 귀하게 자란 아씨, 험한 인생 살아온 머슴에게 마음도 주고 몸도 주고 이렇게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인생까지

 다 던져주었는데 손에 물까지 묻히게 할 수 없잖아. 안 그래? 아씨?"

"준아.."

현수가 재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자 재준이 꼭 안아주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렸었다.

하루가 일 년처럼 느껴질 만큼 고통스러운 적도 있었고 질투로 숨조차 못 쉴 것 같은 적도 있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자 스스로 무수히 세뇌를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불쑥 솟던 붉은 욕망을 다스릴

수 없어 다른 사람은 안고 난 뒤 젖은 침대를 보며 자신에게 환멸을 퍼붓기도 했었다.

사랑을 보답 받는다는 것은 꿈꾸지도 않았다. 어떻게 하면 그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친구로 남아 곁에 머무를 수 있을까, 그것만 고민했었다. 사랑의 욕심은 꿈도 꾸지

 못한 주제에 불같이 치솟던 질투는 곱게 갈무리하지 못해 그의 여자들에게 뒷공작을 폈을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올 줄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그가 또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다. 

평생을 업고 다니라고 해도 업고 다닐 수 있는 그인데 자신이 해도 그만인 부엌일마저 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자신이 한 음식을 맛나게 먹어주고 칭찬만 해준다면 음식을 만든 고생은 고생도 아니다. 

그를 부리면서까지 칭찬받을 수 있는 '꺼리'의 요소를 자른다니, 재준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고마워.."

"이건 우리가 결혼하고 처음으로 먹을 저녁식사야. 너 나랑 결혼 안 하면 이 누룽지탕이며 네가 좋아하는 회, 후식 다 못 먹는다?"

음식으로 어린아이 회유하듯 현수의 양팔을 잡고 음식을 두고 협박을 하는 재준의 뺨에 현수는 입을 맞추었다.

"이런. 이러면 반칙이야. 우리 오늘 할 일이 많은데 이렇게 다가오면 우리 결혼하기도 전에 베드인부터 한단 말이야.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아씨."

"그런데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말이야, 결혼이라니 무슨 말이야?"

"해야지 결혼.오늘 우리 결혼하는 날이라니깐. 자, 거실로 가자."

거실의 탁자를 치우고는 재준이 방에서 가져나온 일호봉투를 옆에 두고 자신의 맞은 편 방석 위에 현수에게 앉으라 권했다. 

일호 봉투에서 재준이 꺼낸 것은 두 장의 종이였다. 뭔가 호기심으로 엿보려던 현수를 보며 재준이 씩 웃으며 한 장을 보여주었다.

"여기 도장 찍어줘."

"어? 이건.."

"혼인 신고서야. 우리가 비록 구청에 신고를 해서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부부는 될 수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너와 혼인을 하고 싶었어. 비록 이게 법적인 효력은 없겠지만 난 네가 이 서류를 법적인 효력을 지닌 

그런 서류로 봐주었으면 좋겠어. 자, 이 현수씨. 다시 한 번 묻겠어. 잘 생각해. 이건 '사랑'만으로 덜컥 해버릴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결혼은 인륜지대사니깐 말이야. 셋을 셀 동안 심사숙고해. 여기에 도장을 찍으면 다시 되돌리기 힘들다고.

 알지? 다들 쉽게 이혼한다 말들 하지만 실제로 이혼하는 일 상당히 어려운 일이니깐 말이야. 자, 카운트 다운한다."

뭐 하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재준의 마음을 알 것 같아 현수는 나름대로 심각하게 고민하는 척했다.

물론 고민할 것도 없다. 할 고민은 진작에 다 해서 이제는 그의 말대로 '결혼'하는 일만 남았다.

"일이삼"

제법 진지하던 현수가 풋 하는 소리와 함께 크게 웃어 버렸다.

큰 웃음소리가 거실에 한동안 울렸다. 화사하게 웃는 현수의 가늘어진 눈매를 보는 재준의 눈 역시 

느긋하게 풀어져 있었다. 배를 쥐면서 현수가 겨우 진정을 하며 재준에게 웃음보따리의 원인을 따졌다.

"크큭..뭐야? 그게 무슨 카운트 다운이야!!!! 언제부터 일 초가 그렇게 짧아진 거야? 일 초, 이 초, 삼 초 잖아!! 

일이삼이라니. 셋을 세는 동안 0.5초도 안 흘렀겠다."

"내가 언제 삼 초를 센다고 했어?"

"응?"

"난 분명 셋을 센다고 했지 삼 초를 센다고 안 했다."

"이 엉터리!!!"

"엉터리라서 싫어?"

"아니, 너무 좋아."

씩 웃으며 현수가 재준에게 다가가 허벅지 위에 앉으며 재준의 목에 팔을 감았다. 

한 입 베어 물면 사탕처럼 달콤할 것 같은 재준의 입술에 키스를 하려는 찰나에 재준이 슬쩍 피했다.

뭔 일인가 싶어 재준을 내려보자 난처한 듯한 재준의 목소리가 현수에게 부드러운 경고를 한다.

"아까 말했듯이 네가 이러면 나 아주 곤란하다고. 나 너한테 굶주린 거 몰라? 우리 결혼하고 저녁 먹고 그 다음에 진정한 부부로서의 첫날밤을 보내자고."

"아아..결혼.. 그거 여기에 도장 찍으면 끝나는 거지?"

"아직 끝난 게 아냐."

"뭐가 그리 복잡해?"

"원래 결혼이란 복잡하고 성가신 일이라고. 그걸 다 감수하면서 결혼하는 이유가 바로 사랑이고 말이야. 자, 이번에는 이걸 봐."

재준이 현수를 맞은 편에 다시 앉히고는 봉투에서 꺼낸 또 다른 서류의 제목은 '이혼 신고서'였다.

"어..이건..."

"우리에겐 단 한 장의 혼인 신고서와 단 한 장의 이혼 신고서가 있어. 다른 종이는 다 쓰레기고 여기 이 두 장의 서류만이

 너와 나를 연결시켜주고 또 타인이 되게 하는 서류야."

현수는 바닥에 나란히 놓인 두 장의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여겼는데 재준은 심각한 

인륜지대사를 앞둔 사람처럼 진지하게 설명해 나갔다.

혼인 신고서를 가리키던 재준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이혼 신고서를 가리켰다.

손가락으로 방향을 제시했을 뿐인데 진짜로 이혼하는 것처럼 현수의 심장이 불안하게 떨려왔다.

"이건 이혼 신고서. 내가 허락을 해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와 헤어지고 싶다면 이 종이를 통해서 말하는 거야. 

다른 부부들처럼 이 종이를 통하지 않으면 우리 부부의 이혼이 성립이 되지 않아. "

혼인 신고서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혼 신고서까지 들고 와 설명을 하는 그에게 뭐라 반박을 하기도 전에 재준이 말이 먼저 떨어졌다.

"아까 말했듯이 다른 종이에 인쇄된 혼인 신고서, 이혼 신고서는 다 무효다. 알았지? 동의하지?"

"아..뭐 그래."

"동의한다고 말해줘."

"거참, 그래 알았어. 다른 종이에 있는 혼인 신고서, 이혼 신고서 다 무효야. 이것들만 유효해. 되었어?"

"어, 자, 네가 혼인 신고서에 서명을 하면 이 혼인 신고서를 코팅해서 액자에 넣어 우리 침대 머리맡 벽에 걸어 둘 거야."

"뭐?"

"이 집에 우리가 부부가 아닌 것을 모르는 사람을 초대할 생각도 없고 너도 그러길 바래. 

세상에서 우리 두 사람을 부부로 인정하는 유일한 혼인 신고서는 그렇게 보관하는 걸로 되었고 문제는 이 이혼 신고서인데..."

현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말이 나올까 긴장한 채 재준을 바라보니 씩- 웃어 보였다.

마치 일곱 살 난 개구쟁이 같은 모습이다. 재준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마..맙소사.....너어??"

재준이 꺼낸 것은 라이터였다. 불을 켜고 그 문제의 이혼 신고서에 갖다대니 연약한 종이 한 장이 금방 불에 타오르며 순식간에 검은 재로 변해버렸다.

 십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재가 되어 바닥에 처참하게 내려앉은 이혼 신고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준이 정말 애석하다는 듯 탄식을 했다.

"아아..이걸 어쩌지? 집 안에서 불장난을 하면 안 된다고 분명 배웠는데 실수로 태워버렸네?"

"야..너.."

"이게 없으면 우린 절.대.로 못 헤어지는데.. 초등학교를 뒷문으로 다녀서 그런가? 겨울에 불조심 해야하는 걸 잊어버렸어. 미안해서 어쩌지? 현수야?"

급기야 푸하하핫 하고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아까 너도 분명히 동의했지? 다른 종이는 효력이 없다는 걸로 말이야. 이제 우리 아씨 도망도 못 가게 생겼네. 

그런 식으로 보지 말라고. 난 정말 고의가 아니란 말이야."

"후훗..그럼 뭐야~"

"본.능."

"응?"

"생존을 위한 본능에 따랐을 뿐이라고. 자, 어서 도장을 찍으시지요. 여기, 여기에 친필로 서명하고 도장 찍어."

"좋아. 나도 바라던 바야. 이제 너도 도망 못 가고 나 섬겨야 해. 머슴씨. 손해 좀 볼 텐데."

"바라던 바입니다. 아씨.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서명하고 도장 찍으시지요?"

건네주는 펜을 받아 서명하고 치밀하게 준비된 인주를 손가락에 묻히고 지장까지 찍고서야 재준이 현수가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사양했던 적이 있었느냐는 듯 성급하게 현수의 입술을 탐하면서 재준이 결혼의 마지막을 선포했다.

"이로써, 이 현수와 도 재준이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 하얀 거짓말 외전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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