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제국기담
고래로부터 제류국에 속해 있다가 왕이 실정을 펴자 그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강국의 지배를 벗어버렸던
난경국. 1543년 예례국의 창왕이 통일전쟁에 승자가 되어 16국의 대부분을 통합한 뒤에도 이 산속에 위
치한 학문의 나라는 그 무해함 한가지를 인정받아 중립국으로 남을 수 있었다. 바다의 서쪽에 위치한
이 대륙은 수십만의 피와 열정이 침식해 쌓여진 대지였으나 1500년경 이후 대부분의 분쟁은 종식 '되어
졌다'. 한 시대가 낳을 수 있었던 최고의 인격에 의해 평화는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정한 평화는 희서(창왕의 연호)32년이 끝나고 10년이 지나기 전에 산산히 흩어졌다.
창왕은 비 혜왕을 통일전쟁중 은국의 살수에 의해 잃음으로써 그녀를 기리려 32년간의 치세가 끝날 때
까지 비를 들이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녀에게는 후사가 나지 않았다.
역서로 전해지는 16국 시대에 버금갈 만큼 -예례국의 사체를 파먹으며 수많은 나라가 태어났고, 또한
몇 년을 넘기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 격류 속에서 힘을 잡은 것은 우습게도 백년전에는 제류국의 식민
지였던 해민국 이었다. 지방관이, 파견된 중앙관리를 참수하고 권력을 잡았던 조그마한 항구도시는 예례
국이 제류국을 때맞춰 멸망시켜 줌으로서 살아 남을 수 있었고. 또한 우연처럼 발견된 바다 넘어의 유
구국과의 교역로 중 최고의 교두보가 되므로써 누구도 돌아보지 않던 대륙 끝의 나라는 엄청난 부와 힘
을 쌓을 수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모든 분쟁을 피해 대륙이 끝나고 산맥이 휘돌아 나가는 험난한 곳에 터를 잡았던
난경국은 해민국과 가장 '인접한' 나라로 나날이 그 존속에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가 바로 1차 보호조약이며, 난경국은 해마다 수십의 학자를 해민국 으로 보내고, 조약의 증거물
로 12왕자를 친선차-즉 볼모로 보내게 되었다.
"미안하다"
흡사 어둠처럼 서서히 침강하는 굵은 저음은 발치를 돌아 나가며 울림을 늘어뜨렸다.
나의 아버지는 그후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돌아 보지조차 않았지만
나는 그가 굳은 어께 안쪽으로 처참한 절망과 시대의 흐름에 대항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조소를 품고
있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에 역시 나 또한 돌아보지 않고 대전을 걸어나왔다.
울며 매달리기에 나는 지나치게 영민 했고, 처음부터 나의 조국에 지대한 애정을 품고 있는 것 또한 아
니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대륙을 집어삼킨 분쟁은 시작되어 있었다. 그것은 개인의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고, 더군다나 그 분쟁에서 세력을 잡은 해 민은 날이 갈수록 세력이 커져가고
있었다. 그것 뿐이라면 모르겠으나... 누구도 이 나라의 존속은 원하지 않았다. 시대의 흐름이란 그런 것,
만약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무너져 내린 왕가보단 영웅이 태어난 나라에게 다스려 지는
것을 백성은 택할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있는 나는 우습게도 열다섯이 갓 넘은 어린애였
다.
대전을 나오자 석조 테라스 밖으로 펼쳐진 경사가 보였다.
평지조차 없고, 과거 학문의 수도였던 오래되 도시의 그림자만을 껴안은채 문(文)이 천시되는 전시엔,
간신히 그 연구와 서적발행 만으로 명맥을 이어나가는 나라. 종이에 핀 곰팡내만이 침잠하는 이곳 어디
에 가치를 두고 그들은 종속 시키고 싶어 하는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12왕자란 전쟁터의 장기말 외엔 쓸모가 없으니까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편이 이로울 것이다.
입가로 엷은 웃음이 배어나왔다. 진심으로-슬픈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아직도 사물에 흐릿하게 감긴 엷은 어둠이 대전의 창틀을 기어 넘어오는 빛에의해 잔인하게 유린당하
고 있었다. 발치까지 뻗어온 빛에 의해 대전이 백색의 점령지가 되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으며, 그 시간
이 오기 전에 나는 이나라를 '마지막'으로 돌아보게 될 것이다. 전쟁터의 볼모가 조국에 돌아오는 것은
시체가 되서도 요원한 일. 대전의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마차의 준비가 끝났다는 떨리
는 목소리였다-
1612년의 어느 아침에 난경국에서 출발한 호화로운 마차는 짧은 여정을 시작했다.
'들었어요? 난경국에서 도착한 그 ...'
'아아, 12왕잔가 하는.'
'어휴, 예쁘긴 엄청 예쁘던데요, 뭐가 그렇게 무표정한지'
'그래도 불쌍하지 않아요? 그 어린 나이에'
난경국 에서 도착한 15살의 12왕자는, 궁녀들 사이에 끊임없이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바다에 면한 해서국 에선 볼 수 없는 하얗고 가녀린 유약한 외모와 외모에 걸맞지 않는, 그리고 나이에
걸맞지 않는 예의와 박식함. 그 얼마나 재미있는 주제인가.
정작, 나는 불쌍하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해서국의 왕립 도서관엔 전 대륙을 뒤져도 볼 수 없을 수많은
책들이 있었다. 물론 그들에게 있어서 희귀한 책이란 곧 전리품일 뿐이기에 그것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또한 난경 에서도 첩에게서 난 12왕자는 본국에서부터 그닥 대우받거나 우러러지는 존재가 아
니었으므로. 거기 있는 듯 없는 듯 가끔 늙은 학자들이나 내가 아닌 나의 '지식'에 감탄하며 청하는 일
이 있었을 뿐 어디 있어도 혼자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툭-
붉은 옷자락 위로 금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있었다. 마치 태양이 하나 더 떠올라 발치의 그림자가 갈
라질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빛나고 있었다, 그토록 눈부시게.
눈을 땔 수 없는 그 모습에, 감탄하고 있는 동안 부딪힌 상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
"미안합니다. 저의 불찰이었습니다"
"아,..아니 너 누구?"
큰 키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럽게 처지는 눈매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아플만큼 붉은색의 정복은 그가 왕족이라는 사실을 대변하고 있었지만
나이는 고작해야 20세 전후.
이 나라에 홍복착용이 허용될만한 고위 왕족중 저정도로 어린 사람이 있었던가.
멋대로 시종장이 주입시켰던 해민국 왕실의 계보도를 머릿속으로 뒤져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어차피 실권의 대부분은 대신에게 넘어가있는 나라였다. 잠시 고민하고 있는 동안 그가 손을들
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옷깃 사이로 작은 장식이 보였다.
적옥(赤玉) 이었다.
시화라는 백금색의 꽃은 '왕권'을 상징하며, 시화적옥은 캐낼 때 부터 그 아름다운 백금의 선이 붉은 보
석 속을 가로지르는 귀물이다. 이제는 사라진 성주(晟州:예례 유왕때 지진으로 지각이 바뀌고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됨)지방 공금지 에서만 나던 물건으로 이전 예례국의 왕위 계승권을 상징했으나 금후 창
왕에 의해 사라졌던 풍습이었다.
알 것 같았다.
부드러움을 가장한 맹금의 눈동자. 흐트러진 듯 흐트러지지 않는 독의 향기. 절대적 기품을 가진 몸놀
림.
"정말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서의 난경에서 귀국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한시간 머무르게된 아나
한 아나룻다 체 알로리카 자는 중경이라 하옵니다. 미천한 소자에게 부를말을 물어주신 일황자께 일배
올리겠나이다"
이 나라의 법도에 따라 최고의 존경을 나타내는 인사를 했다.
한걸음 물러서서 두손을 기묘하게 맞잡고, 허리를 숙이자 내리깐 눈 아래로 매끄러운 바닥에 머리카락
이 닿는 것이 보였다. 부담스러운 인사지만 겨우 약관의 나이에 창왕 체백 에게까지 비견되고 있는 해
민의 황세자에겐 과하지 않은 겉치례일 것이다. 게다가대신들에게서 왕권을 지켜내는 최후 또는 최초의
수호자에겐 더더욱. 겨우 두 번째로 해보는 일이었지만 (아무리 천시 받던 12왕자라 해도 자기의 머리카
락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여본 적은 없는 것이다. )-어차피 볼모란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야만
하는 존재. 자괴감은 들지 않았고 그닥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
어린애답지 않군.
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의 표정은 알 수 있었다.
"일어나,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조용히 일어나 다시 한번 작게 고개를 숙이곤 옷자락이 닿지 않게 외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늦으면
그 율련이 조금은 걱정을 해주겠지.
그냥 지나치려는 그의 어께를 일황자의 손이 붙들었다.
예상대로, 가늘어 보이는 선과 달리 굉장한 악력이었다.
"어디를 그리 급히 가는건가, 아니 그전에 어떻게 알았지?"
고개를 들어올려서야 시선을 맞출 수 있었다.
"황공하오나, 이 나라에 시화적옥을 지니고 계실 분이 또 있습니까.그리고 귀국에는 화려한 장서관이 있
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는 나를 껴안아 올렸다. 웃음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알로리카, 애들은 노는게 더 좋아"
나는 그날 외궁의 장서관에 갈 수 없었다.
2
3년이 흘렀다.(1615)
아직까지 난세라 부르기에 각 나라의 움직임은 너무나 고요했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화로운 시
절이라기에 시대의 숨소리는 지나치게 격렬했다. 이미 명도국 최후의 여왕은 숨을 거두었고 강대한 군
사력을 가진 사하국-알려진바 없는 열사의 나라조차 스스로를 개방해 교역을 시작했다. 예례국의 부흥
운동은 성과를 맺지 못한채 흐지부지 되었고 이리저리 얽힌 정세 속에서 다만 해민만이 번창 일로를 걷
고 있었다. 미묘한 난세에의 예감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얇게 가라앉아 걸음을 옮기려는 사람들에게 들
러붙어 이상흥분을 초래했다.
때아닌 호기에 해민국은 번창일로를 걷고 있었다.
"에, 바쁘신데 잘도 발걸음을 옮기셨군요 전,하"
"어이어이, 아무리 그래도 그 꼬인 말투는 도대체"
늦은 저녁에 찾아든 손님덕에 외궁의 한적한 방에선 작은 소요가 일었다
"어머나, 저는 소녀따윈 잊으시고 님을 찾아 가버리신줄만 알았지 무어에요,흑"
고서적을 읽고있던 탁자에서 일어서며 농담을 거는 가느다란 인영.
"미안하군"
"칫, 늦은 당신 잘못이라구요"
"그간 바빳던 것은 네가 더 잘 알지않나"
"네에 네에~일황자님께 '사과'까지 받게되니 황송하기 그지없군요"
"...그만해라, 그보다 전에 말했던.."
금발의 남자는 피곤한 듯 쿠션이 여러개 깔린 긴 의자에 쓰러졌다.
한참을 편한 자세를 찾아 움직이는 모습을 친근하게 쳐다보던 방의 주인은 그가 자세를 잡자, 가볍게
입을 열었다.
"그럼 일이야길 할까요,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해 사하국에 은이 매장되었다는 사실은 확실해 졌습니
다. 하지만 정제기술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저희로선 위협될만한 것이 없지요. 뭐라고 해도 저
희 난경의 '이론'만은 제일이니까요."
"그럼 관건은 정제기술이 흘러나가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라는 건가?"
"그것도 있지만 사하의 만다고린도 조심해야 합니다. 열락을 일으키는 독초라는 것에 인간은 약하니까요
-뭐, 만다고린의 국내재배도 고려해 볼 문제입니다. 암살하고싶은 분이라도 있다면 말이죠. 애석히도 그
물건을 재배하고 정제해 상품으로까지 만들 기후가 못됩니다. 이나라는"
"그렇군. 막도록 하지-그러나 눈에 보이는 규제를 가하면 사하쪽에서 조약을 들어 반발할텐데?"
"눈에 보이지 않게 규제하면 됩니다. 보이지 않는 곳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불매라..."
"어씨쪽의 상인들과 담판을 하십시오. 일단은 그쪽을 키우고 시장에 은의 유입을 막는 대신 뒤쪽으로 그
은을 전부 넘겨받도록 합시다. 그리고 빛을 보지 못하게 하는편이 좋겠군요"
"은이 유입되면 오히려 낫지 않겠나?"
"백년전의 명도국이 그랬습니다. 은이 급속도로 유입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합니다. 만다고린이 문제가
될 경우 자본력이 없다면 오히려 퍼지는 것이 느리겠지만 자본력이 있을 경우 사람들을 잠식해 들어가
는 속도도 빨라지며 종래에 중독자가 나올경우 급속도로 원래의 자본까지 끌고 나갈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지나친 호경기는 주변국의 쓸데없는 견제를 사게 되어 주변세력의 규합을 불러올 가능성도 있습
니다."
"도대체 네 생각은 어디서 나오는지 알수가없어. 어쩌면 재무대신보다도 사정에 더 밝은 듯 하군.."
"이 몸에서 머리를 빼고나면 쓸곳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누누히 말했지만 저는 움직이는 것이 싫
습니다. 그러니까 머리 쓰는 일이라도 잘해야지요"
"오오, 그러시군 그런 사람이 내가 보내준 하인들을 거절해?"
"저는 잠자리 상대는 아직 필요 없습니다. 아직 순진하야..., 차라리 공주로 태어날 것을, 그러면 당신을
유혹해 비 자리에 오르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 너라면 언제든 괜찮은데."
믿을 수 없게도.
풀어진 자세로 드러누워 있는 사람은 해민국의 제1황위 계승자였다.
농지거리를 하는 모습에서, 신랄한 술책과 지휘력으로 현 상황에서 대륙을 한손에 휘두르는 인간의 모
습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그 곁에 선 소년. 키는 꽤나 컷지만 가늘고 위태로운 선이 그가 소년이란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칠흑의 머리카락이 허리를 넘어 허벅지 가까이에 닿아있었고. 핏기없는
흰 얼굴엔 병적인 섬세함과 기질적으로 보이는 연약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긴 눈꼬리
아래 예지와 어둠을 함께 담은 눈동자가 만들어내는 처연한 아름다움을 깎아 내릴 수는 없었다.15살이
라고는 믿기 어려운 범접할 수 없는 기품. 부드러운 외면 아래에서 잘 갈려진 칼처럼 그 등을 꼿꼿이
세운채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는 다. -난경국의 12왕자. 아나한 아나룻다 체 알로리카 그가 볼모가 된
조약으로 인해 난경국 또한 모든 분쟁에서 보호받는 채로 안온하게 남을 수 있었다.
"그리 말씀하시면 약혼녀가 슬퍼합니다"
"참 이제 곧 약혼녀가 아니게 되겠군, 황자비가 될테니까"
흘러가듯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여진말.
놀란 듯 비스듬히 서있던 몸을 반회전시키며 돌아보는 12왕자에게, 일황자는 피곤한 듯 눈을 감으며 중
얼거렸다.
"아 물론, 당장은 아니고 두어달쯤 뒤지. 일단 사하국건을 처리하고 나서..."
"진작 말씀하셔야지요!, 그런 경사가."
차가워 보이는 얼굴에 미소가 퍼지자, 더할 바 없는 극상의 아름다움이 되었다. 언제나 웃음기 띈 얼굴
이지만 비웃는듯한 냉소와 진심의 미소란 수억의 거리가 있는것이다.
"남앞에서도 좀 그렇게 웃어보지 그러나, 그러면 얼음 왕자님이니 하는 소리 듣지는 않을 터인데... 게다
가 뭐가 그렇게 기쁜건가?"
"옛 말씀에 결혼을 하면 인간이 된다합니다, 드디어 일황자가 사람의 껍질을 쓰고 제자리를 찾는다는데
소인 기쁘지 않겠습니까"
"못하는 말이 없군"
"이럴 때조차 기뻐하지 말라니 어릴 때 배우신 여산의 군주론이 울겠습니다."
"무슨 말도 않되는 비약을 하는지. 네쪽이야 말로 어릴때부터 읽어온 서책이 아깝지 않은가-"
알지 못한다.
눈앞의 사람은. 이것이 당신에게만 보일수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작은 철사줄기가 심장을 관통해 뒤돌
아 나오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져서 더욱 웃음소리를 높였다.
외궁의 높은 천장은 은의 날개로 날아오르는 웃음의 반향이 하늘을 향하는 것을 막았다.
3년전 아직은 열정을 제지할 줄 모르던 일황자는 무표정한 어린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자신만만한 말
과 달리 아이의 놀이 따윈 그 또한 할 줄 몰랐지만. 세월의 무게를 껴안은 책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혼
자' 관조하는 것보다는 함께 있는 것이 나았다.
친절과 동정을 가장한 조소보다는 웃음을 가장한 맹금의 발톱쪽이 아프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알로리
카는 현실과 유리된 유희였고 스스로 감정을 가르쳐준, 생명체였을 따름이었다.그리고 알로리카에게 있
어서 그는 빛이었으며, 구원이었다. 다만 한가지의 불행은 소년이 지나치게 머리가 좋았던 것뿐.
함께 왕궁을 빠져나가 장시를 돌아다녀도, 묘한 물건을 사들여 버린 것 도, 장서관 구석에 함께 숨어버
려도 어떤 밀접한 시간을 공유하더라도 상대는 제왕이었고, 맹금이었고, 권력을 사랑하는 남자였다.
그가 전쟁터의 장기말을 곁에 두는 것은, 그것의 무력함을 알기 때문이며. 스스로의 소유임을 알기 때문
이며 언제든 가차없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란 것을-영민했던 소년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계속해서
눌러온 마음속에서 부르짖는 혁명도 저 손길을 벗어나 조국을 이전과 같이 자유와 평등이 가치를 지닌
언어의 나라로 돌리고 싶은 욕구도 희석시켰다.
비록 언젠가 나의 나라를 그 발톱으로 침공해올 인간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내쳐져 저 바닥에서 꺼져 가는 스스로의 숨결에 절망하더라 해도-
그것이 예상이 아닌 진실이며 얼마후의 현실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곁에 머물렀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라면 곁에 있을 수 있다.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아
직은 내치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조금 시건방지고, 머리를 쓸 줄 아는 어린아이로 남아있으면 된다.
"아아, 엄청나게 피곤하군. 자 밤시중 들것이 아니라면 너도 자는게 어떻겠나"
"한밤중에 찾아와 잠을 못 자게 만든 건 누구신지 우매한 소인은 모르겠나이다"
"내, 남색가로 호사가들에게 소문이 퍼진다면 다 너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오호라, 무려 일황자께서 조그만 나라의 볼품없는 12왕자를 능욕한다는 걸 누가 믿겠습니까"
"신랄한데,하지만 사실로 만드는것도 나쁜일이 아니겠지"
"하지만 말입니다-"
"... ...그만 하도록..하지"
이내 피곤에 지친 남자는 언제나 그래왔듯 침상을 차지하고 잠들어 버렸다.
...사랑하고 있다.
처음부터 사랑하고 있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비록 그것이 나의 나라를 저버리는 일이 되더
라도 역시 사랑하고 있다. 처음의 이유따윈 잊었지만 여전히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최후까지 절대로 입에 담아지지 않을 문장을 생각하며
잠에 빠져든 준수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3
왕립 도서관-또는 장서관이라 쓰고 수없는 약탈과 공물을 빙자한 지식인력 착취의 결과-라 읽는 그곳
은 작게는 인사예절부터 은의 제련법과 고대의 연금술까지. 수만의 문자와 언어를 삼키곤, 다시는 드러
내지 않는 지식의 종말이며 늪이었고, 학자라면 죽을때까지 한번이라도 들어가보길 소원해 보는 곳이었
으나. 외면은 어울리지 않게 흐린 대리석 벽에 늙은 담쟁이가 얽힌 건물이었다.
알로리카는 익숙한 동선을 타고 조용히 젊은 사서가 앉아있는 앞으로 지나간다. 난경국에서 조약 사절
단을 따라 이 나라에 온 사서는 처음엔 난경국의 왕궁에서 11왕자를 보좌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저
장대한 장서관의 관리를 맡을만한 인물이 교역과 상업으로 성장한 나라에 있을 턱이 없었고 해민국의
왕은 조약 시 장서관의 관리를 맡을 학자를 요구했다. 장서관의 관리란 고도의 능력이었으며 그정도 규
모의 장서관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재능과 학식을 가진자가 난경국-학문의 나라라 해도 많을 턱이 없었
다. 그런 연유로 해민국에 정착할 수 밖에 없었던 그는 11왕자와 어머니가 같은 12왕자를 어릴 때부터
보필해 왔었다. 왕자를 제지하려던 사서는 익숙한 모습에 다시 고개를 숙이곤 독서에 열중했다. 짧은 시
간동안 허공에서 눈빛이 얽혔다.
'오늘은 혼자시네요'
'그렇게 되었어. 일황자는 바쁘니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언제나가 그랬듯이.
한 공간안에 확실히 존재하고 있지만 서로의 존재가 정적을 깨고 스며드는 빛줄기를 거슬러 가까워지
는 일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 누구보다 가까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눴던 말의 수가 많았
다고 그들의 정신이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듯이(알로리카와 일황자처럼), 그 몇십분의 일만을
말로 했을 뿐이지만 공감할 수 있는 인간 또한 있는 것이다.
오랜 침묵 속에 책장을 넘기는 사락거림과 흰 소매끝이 탁자에 끌리는 소리와 사다리를 내리는 작은
소란 외에 몇시간 동안이나 그들의 사이는 무음의 지역이었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하룻 동안 한마디
도 않고 지나갈 때 도 많았기 때문이다. 정오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야 사서가 입을 열었다.
"그 자리엔 햇빛이 듭니다"
"괜찮아"
"눈 나빠진답니다, 그늘에서 읽으세요"
그제서야 고개를 든 사람의 얼굴엔 작은 미소가 띄워져 있었으나 극히 드물게 일어나는 우연으로 사서
는 눈빛에 스치는 가는 슬픔과 조소를 들여다보았다.
"자기학대를 한다고 해서 슬픔은 엷어지지 않는답니다. 분명 어제도 주무시지 않았군요"
"당신이란 사람은.."
조금 놀란 듯 눈꼬리를 치켜올린 12왕자에게 사서는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돌렸다.
"오랜 시간 남의 눈치를 살피며 왕궁 밑바닥에서 살아남은 덕이라고 해두지요"
그대로 읽던책을 들고일어나던 알로리카의 걸음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긴 머리카락을 흩뜨러 트리며 쓰러지려는 왕자의 팔을 사서가 잡아 일으켰다.(일으키려고 했다)-라고 해
도 왕자와 비슷한 체구의 아니 오히려 더 가늘듯한 희고 가는팔을 가진 그는 왕자의 몸에 걸린 관성을
이기지 못한 채 같이 쓰러지고 말았다.
털썩-
길디긴 흑발이 바닥에 넓게 흘러내렸다. 빛살을 받아 더욱더 검어 보이는 흑의 극을 인지하려던 사서
는 넘어진 아픔에 사고의 방향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당신이야말로, 미안하게 되었군"
"사람을 부르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그냥 있어줘"
상체만을 일으켜 차가운 대리석 탁자 쪽으로 고개를 가눈 왕자 곁으로 사서가 걸터 앉았다.
"일황자의 혼인식이 눈앞에 다가온것이, 그렇게 충격이었습니까 언젠가 이루어질 일이라는 것은 왕자님
이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아니 이렇게 묻는건 무의미하군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사서는 왕자를 올려다보며 빙긋이 웃었다.
고양이 같은 눈동자라고 생각했다.
하늘과는 다른 갈래에서 나온, 땅이 낳은 청색이 스민 눈동자.
눈동자 색을 닮아 청금석을 물에 푼다면 나올 빛의 머리카락이 불규칙한 궤적을 그리며 나풀거렸다.
"그것으로 괜찮습니까? 진심으로?"
"무슨 소리인지 주어 동사 목적어를 갖추어 말해주었으면 감사하겠군"
"하긴, 왕자님이라면 그사람이 비록 최애의 인간이라고 해도 그사람의 혼인을 진심으로 축복할 수 있다
는 걸 잊었습니다."
"괜찮아. 당신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야."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서 율련은 가는 손가락을 들어 고개 숙인 왕자의 흘러내린 머릿결을 부
드럽게 쓸어 올렸다.
"머리카락이 표정을 가리게 됩니다. 모친의 말씀을 잊으셨습니까. 어디에 가더라도 당신은 왕자입니다
당당하게 오만한 표정으로 남아주세요"
"그래. 당당하고 오만하게 ..웃기는군"
"약소국의 왕실에서 사내로 태어난 당신의 업인 것이지요.
차라리 천비의 소생인 여인이었더라면 한번이라도 매달려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비꼬는 것으로 들리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무례하지만 저는 왕자님을 동생 같고 자식 같은 분으로 여겨왔습니다."
"무례하지 않아"
왕자가 자신보다 작은 율련의 몸을 껴안았다. 결코 성욕을 담은 것이 아닌 어린 짐승이 본능적으로 온
기를 찾듯 매달리는 -평소에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약한 모습을 가려주는 것처럼 두 팔을 들어 머리를
감싸안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가려진 눈동자는 원래의 불손한 빛이 아니었다. 검은 눈동자. 그곳에서 눈
물은 흐르지 않았다.
다만 눈물따위의 무게로는 잴 수 없는 결정이 가라앉아 있었을뿐.
"명치가 아파"
"황자의 약혼식 직후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보 같군"
"아닙니다. 당신은 가장 현명한 처사를 하고 있는 겁니다. 나이에 맞지 않게 말입니다. 울 줄도 모르는
16살(만 십육세를 말합니다.)이란 건 서글프군요"
"당신 16살 때는 이미 학자 칭호를 받았었잖아, 만만치 않아"
"난경국에서 받은 대학자 칭호가 여기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겨우 일개 왕궁의 하인일 뿐인 걸요"
"투정 부리지 않을 수가 없었어. ..나는 아직 심장을 가진 인간이라서."
"당신은 나쁘지 않습니다"
율련은 왕자의 하얗고 반듯한 이마를 두 손으로 끌어당겨 입술을 대고는 작은 소리로 전래되어 오는
노래를 읇조렸다. 어머니가 아직 걸을 수 없는 아이에게 해주는 행동이었지만 그것은 위로의 의미를 담
은 슬픈 것임에 차이가 있었다.
익숙한 손에 거칠게 일으켜 세워졌다.
"남색을 하는줄은 몰랐다"
4.
"남색을 하는줄은 몰랐다."
"단순히 남녀를 가리지 않을 뿐입니다. 이 정도는 허락해 주셔야죠 혈기왕성한 나이에 금욕을 하는건 승
려뿐이지 않습니까"
어느새 조건 반사처럼 평소와 같은 웃음이 떠올랐다.
"음, 얌전해 보이는 건 역시 겉모습 뿐인가 한다, 언제는 밤시중이 필요 없다더니"
"제 취향은 까다로와서 말입니다"
"오호- 그럼 그 미인들이 취향이 나쁘다고 하는건가? 꽤나 엄청난 기준인데"
"일황자님도 만만치 않습니다, 율련 물러가라."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색바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는 그의 하늘색 머리카락이 시계의 끝에서 사라
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묘한 것을 오해받아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오해를 풀고싶은 마음은 없
었다. 절대로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전연 마음에 두지 않고 있음을 알고있지만-그렇지만...
"누구지?"
말 끝에 가시가 돋혀있다. 손안에서 공들여 기른 고양이가 자신이 알 수 없는 곳에서, 정해준 적 없는
상대와 교미를 하는 것은 저 남자의 자존심과 오만에는 기분 나쁜 상처가 될 것이다.
"난경 출신의 사서입니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는데 보시다 시피, 꽤나 미인입니다만 손대는 것은 삼
가 주세요. 마음에 드신다면 드릴 수밖에 없지만 이미 약혼녀가 있는 몸에 더 이상 첩이 늘어선 곤란하
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하나"
"그나이에...그렇다면 왕실의 안위에 문제가 있군요"
"네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무어, 그렇긴 합니다만..."
특유의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일 없는 듯 지나쳐 버리는 검은색 머리카락에 화가났다. 확실히 이
손으로 사육해 냈지만, 저 인간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진심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렇기 때
문에 버리지 않았다. 한번이라도 그 눈동자에 표정을 드러내 준다면 자신은 그것에 흥미를 잃을 것이기
때문에. 아아 물론 예상외로 쓸모있는 머리에는 감탄했다. 물론 자신의 손안이 아니었더라면 진작 죽여
버렸을 것이지만. 그러나 아쉽게도 앞으로 평생을 본다해도 자신은 저 생물의 진심을 볼 수 없을 것이
다. 손안에 들어있지만 오히려 마음대로 되지 않던 창왕의 신수 시서처럼-그렇게 생각하니 참을 수 없
을 만큼 즐거워 졌다.
..즐거워 졌다.
그것뿐인가?
물어오는 목소리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수 없었다.
신부가 될 소녀는 아름다웠다.
명도국 마지막 여왕의 딸. 먼발치로 본 것 뿐 이지만 그 처연한 기품은 모친의 것과 다름이 없었고, 백
화의 왕이라고 까지 불리 웠던 미모 또한 흐려지지 않은 색으로 유전되었다. 다만 그녀와 여왕의 다른
점은 흰색의 베일로 감싸도 감싸지지 않는 오만함과 패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 뿐. 해민의 비가 된다는
것은 - 겉으로는 그럴 듯 하게 보여도 전쟁터의 장기말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자유의지 따위 완벽히 무시된 채 인형처럼 끄덕거리고 남자의 팔에 안겨서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노
력해야 하는 것이다. 단지 조국을 위해. 수천만 동포들을 위하여 나의 인생은 어찌되어도 상관없어야 하
는 것이 '공주님' 의 운명.
저 공주가 그러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리 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 눈동자는 공주 라기 보다는
차라리 시대의 흐름을 뒤엎길 소원하는 혁명가의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일년 전 난경의 사절 자격으로 약혼식 직후 그녀와 의례적 인사를 나누었을 때의 인상이다.
이대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의 목숨을 산화시켜서라도 그녀는 격렬하게 운명을 거부 할 것이
다. 어떠한 예감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그것이 실재화 된다면 좋은 구실로 삼아 아마도
스스로의 목숨 또한 위험해질 것이고 그것은 자신의 나라의 운명에 관여된다는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
이다. 하지만 아무리 몸을 도사린다 한들 그는 곧 행동을 시작할 것이다. 창왕 체백과 비견되는 남자.
그러나 창왕과 그는 달랐다. 군사낭만주의자 이면서 흔히 말하는 최고의 '영웅'적 자질을 가졌던 이와
달리 그는 철저하게 현실을 사는 인간이었고 그것은 태어나면서부터 권세를 약속받은 이들에게선 흔한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저 남자는 이 대륙을 통일하고 말 것이다. 얼마 않있어 저 공주의 인생도 나의
목숨도 버려지고 이 작은 나라들은 귀속되어 역사와 주권을 잃고 다시 세월이 지나면 그곳에선 해민의
백성만이 태어날 것이다. 그전에 존재했던 작은 나라를 옛 이야기로만 기억하는 백성들이.
차라리 앞을 내다볼 만한 머리가 없었더라면
차라리 아둔한 낙천주의자 였더라면
차라리 백성이 바라는 것은 횡포한 조국의 왕이 아니라, 안온한 작은 평화를 깨지 않을 군주라는 것을
몰랐더라면.
차라리 알지 못했더라면 자신은 열여섯의 나이로 노회한 노인처럼 체념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이 나
라에 발디디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저 공주와 같은 눈빛을 한 채 해민의 멸망을 외치며 일어섰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일년이 지나도 그녀는 외궁의 침실을 떠나는 법이 없었다.
일년만에 다시 만난 공주의 얼굴에는 칼날 같은 기운이 사라져 있었다. 그전에도 누구에게나 보일만큼
날카롭게 눈빛을 퍼트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동류라면 알아 볼만큼은 되었던 것이 이제는 정말로
인형 같은 공주인가- 생각할 만큼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 외면은 믿을 수 없었다. 폭풍
이 일기 직전에 세계는 가장 고요한 침묵을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이라고 다를 바 가 없는 것이다.
계획대로 사하국의 은은 해민으로 수입되었지만 최대한의 자본력을 발휘한 어씨 일족과 일황자의 공작
으로 말미암아 왕실의 창고에 묶인 채 시장으로 흘러들 수 없었다. 그것은 장차 벌어질 전쟁에서 커다
란 변수가 될 것이다. 은은 보석으로서의 희소성은 떨어지지만 화폐로서의 가치를 함께 지니고 있기 때
문에 전란의 시대에서는 -소모와 소모가 거듭되고도 살아남는 자 가 이기는 시대에서는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결국 불타고 말 비단자락과 난경의 수도에서 올라오는 종이조각들을 소
비하는 것은 오히려 이익이라고 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대륙의 판도는 해민에 기울어 있다. 그러나 보
이지 않는 그림자 속까지 뻗은 것 역시 해민 이란 것을 아는 이는 흔치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대
에 여왕을 잃고도 이제껏 살아남은 머리를 가진 공주가 그 흐름을 읽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잠
자코 있는 것은 무언가의 계획이 끝을 맺을 때가 왔다는 것이겠지.
"나의 황비가 될 여인이지 구면이었던가"
"신이 내린 밝은 도리가 태어난 나라의 공주님 께서는 고작 일년이 지났을 뿐인데도 공주님을 비추고
있는 신의 축복이 외려 빛을 잃을 만큼 아름다워 지셨습니다"
"아니오 소녀는..."
"그에게는 치하의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 말에 공주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얼굴을 붉혔다. 나라의 불행보다는 하얀 레이스와 고운 비단에만
정신이 쏠린 십대 소녀라기에 손색이 없는 모습이었다.
...속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상이라고 볼 수 없는자들 뿐이겠지.
"너는 그런말을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을 수 있다니 조금만 크면 여화서(창왕 체백의 책사. 단정한
용모로 많은 계획을 성공함)를 넘어설 만한 인물이 되겠어."
"호오- 황자님이야 말로 과찬의 말씀을."
"틀린 말은 아니지 그 하늘색 머리의 사서라던가.."
"마음에 드신다고 질투를 하시면 안됩니다. 그것도 부인이 될 분 앞에서"
그의 곁에 붙어선 공주가 작고 하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렇지만 아나한 체 아나룻다(알로리카의 성) 12왕자 께서도 참으로 아름다우신 걸요."
공주는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자 다시 얼굴이 새빨게 져선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각국의 기이한 품종을 옮겨심은 중앙 정원의 신비스러운 화려함은 없었지만 외궁가에 자리한 키작은 나
무들의 정원은 아늑한 느낌이 있었다. 숨막힐 정도의 녹색이 스스로의 손끝을 땅으로 내치기 위해 생명
의 초록을 버려가며 그 죽음을 전제로 하는 아름다움이 자리잡은 계절의 끝에서 해의 기세가 수그러든
오후 차향기를 흘려보내는 그들의 모습은 전형적이고 도식적이란 느낌까지 들었다.
"그래 내일 혼례식의 준비는 이제 다 끝난 모양이지요"
"신부의 손에들 꽃까지 준비해 놨지"
"아아 기대되는 걸요. 일황자님을 사람으로 만드실 공주님의 아름다운 모습이란"
"네?"
"그말은 그만 하라고 했던걸로 기억한다!"
이를 드러내는 척 하며 공주의 어께를 끌어당긴다. 꾸며진 모습이지만 아름답다.
그녀는 저 웃는 얼굴 아래로 스스로의 운명을 저주하며 어께에 닿은 온기를 파멸시킬 방법을 강구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저주하는 운명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실이 아니더라도 닿을
수 있다면 진심을 숨기는 연기를 거듭하지 않고도 곁에 머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자신은 운명을 거슬
러 올라가는 것에 대해 오래 전에 체념해 버린걸 후회하지 않을텐데. -실로 덧없는 생각이라. 만약 자신
이 여성이었다 하더라도 먼저 다리를 벌리는 일을 할 리가 없었다. 아니 먼저 고백해 온다 하더라도 응
하지 않았겠지.
그 처절한 오만이 자신이 선 바닥이었고 잃지 않은 유일한 것이다.
잠들 수 없는 밤이 될 것이다.
닿을리 없는 이율배반의 감정이 갈곳을 잃고 어딘가로 흩어져 가는 것을 망연히 바라 보아야 할 것이
기에. 인생은 고해의 바다라던가-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장을 관통하는 아픔을 껴안은 채로 언제
고 조약이 깨질날을 기다리며 그 최후의 날까지 아픔이 주는 쾌감을 즐기고 있겠지.
미소를 지은채로.
5
아득히 높은 천장 아래서 울려나오는 낮은 기도문.
부딪히고 부딪혀서 흐려지며 다시 뒤따른 음에게 겹쳐져 사라지는 다성의 흐름 사이로 극채색을 소멸시
킨 정밀한 흰색이 스며들었다. 그림자의 교차를 길게 끌어내어 절제된 흑백의 선으로 바닥을 가른 빛의
칼날이 부서지며 순간의 잔영을 남겼다. 이 나라의 이름없는 건축공은 결벽한 백색의 아무것도 없는 공
간에 신성이 구현되길 원했던 모양이다. 누구도 신의 존재는 믿지 않지만 신의 손끝이 닿지 않는 것에
는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만의 모순이자 본성. 오랜 세월을 발끝으로 지나보냈기 때문
에 믿음과 신뢰와 지혜로움의 '상징'을 얼굴에 달게된 늙은 궁정 승려의 낮은 기침소리를 끝으로.
예식은 끝났다.
명목상의 각국 사신-을 위장한 내일의 적군 또는 뜨락에 심겨진 잡초(밀정)-들은 새 황자비의 탄생에
환호했으나 그 각각에는 이 결혼이 정세에 미칠 파급을 계산하느라 지혜열이 날 지경일 것이다. 그 위
의 단에 서있는 황태자 부부는 가장된 기쁨과 환희의 시선을 받으며 미소짓고 있었다. 수많은 참석자가
있었지만 식장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극소수. 그들을 굽어보며 옛날 이야기의 끝처럼 그리하여 왕자님
과 공주님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어울릴 모습으로 그들은 답례의 말을 나직히 건내고
있었다. 나또한 '최고'의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지 못했지만 머릿속은 명료했고 난경
식의 흰색 예복도 익숙한 것이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나의 나라를 떠나올때와 마찬가지로 아픔이나 슬
픈 기분은 들지 않았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던 것이 현재가 되었을 뿐으로 처음부터 예정된 고통에는
일절의 감흥도 괴로움도 없었다. 어차피 나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같다.
그녀가 그의 곁에 서 있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귀하의 나라에 영원의 평화와 안녕이깃들기를-오늘을 위하여 저희 명도국에서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사하국 에서만 난다는 만다고린의 해로운 것을 없앤 뒤 정제해 담근 증류주를 이 자리의 귀하신 분들께
한잔씩 올리고자 합니다"
식장 안의 사람들은 잠시 아연해 했지만 귀한 것을 맛보게 된 기쁨에 금새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것은
일황자도 예외가 아니라서 계획에 없었던 작은 소요에 사랑스럽다는 듯 황자비를 돌아보았다. 곧이어
그녀의 들러리를 섰던 뺨에 홍조를 띈 예쁘장한 시녀 둘이 신전의 장식 뒤에서 화려한 상자를 꺼내왔
다. 상자 안에는 보기에도 귀해 보이는 희석된 진홍의 액체가 병에 담겨 있었다.
"나아가는 곳이 빛이 있기를!"
전통적인 축사와 함께 잔을 들어올리는 가운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그의 곁은 당연하게
그녀의 자리가 될 것이다. 그의 곁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려던 때
-명료하나 명료함 외엔 담겨있지 않던 머리에 사고가 돌아왔다.
어째서 잊고있었던가.
그녀에게는 다시 일년전의 표정이 돌아와 있었다. 시대의 흐름을 뒤엎고 타의로 정해진 운명따윈 내팽
겨 친 채 돌아봐 주지 않는 신은 목을 베어서라도 돌아보게 만들 철의 혁명가의 눈빛이. 서 있는 사람
은 없었다. 입에 머금었던 액체는 몇방울 삼키지도 않고 뱉어냈지만 물체와 물체를 가르는 경계가 희미
해 졌다 색을 잃어가는 시계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것은 공주가 치맛자락 아래서 꺼내든 단검이 반사하
는 찬연한 색뿐이었다. 그 칼끝이 향하는 곳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놓으세요. 당신은 부끄러움도 없습니까 12왕자. 그렇게 엎드린 개가되어 이 나라의 발끝만 핥고 있을
텝니까? 그런 노예와같은 의지 상실의 자유도 자유라 말하신다면 당신과 말하는 것이 부끄럽군요"
"이렇게 한다고 당신의 혁명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힘이 있는 곳에 기울고 정당성이 있는 곳으
로 기웁니다. 사람은 정의나 진실이나 의지보다는 정의와 진실의 명분을 더 좋아하는 까닭입니다. 공주
님 아니 황자비님"
"명분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는 분이면서 이 손을 놓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쓸데없는 피는 흘리고
싶지 않습니다. 칼날이 내장에 닿으면 당신이 죽어요! 당신 나라의 원수를 뭣하러 살리려는 겝니까. 당
신은 누구보다 의식이 있습니다. 놓으세요, 제발 당신을 일황자 보다 아래의 목숨이라고 생각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소국이라 하나 저는 왕자입니다. 한번도 그 허망한 오만을 버린
적 없기에.."
말을 잇지 못한 것은 할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목까지 올라온 핏물이 입안으로 넘쳐흘러서이다. 급소를
찔린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칼날을 삼킨채로 있는 것은 상당한 고통이었다. 한차례 피를 뱉
어내고는 태연한 웃음을 지으려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혁명가라기엔 지나친 이상주의자 로군요. 쓸데없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란은 없습니다. 하지만
적에겐 냉철하고 약한 이에게는 또한 자애로워 지는 여왕이라면..당신이라면 당신의 이상을 저버리지 않
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시간을 끈다고 되는일은 아니다. '신성한' 식이 거행되는 곳을 무단으로 침입할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
이다. 게다가 현왕 부처조차 이 자리에 남아있지 않다. 사람들이 이상을 느끼기까지엔 많은 시간이 소요
될 것이다. 지금의 행동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마비된 이성대신 눌러 죽여왔던 마음쪽의 움직임이 빨랐다. 자신의 행동에 아낌없는 비웃음을 보내는
도중 아까보다 깊숙히 밀어 넣어지는 칼끝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아픔이 느껴졌다. 더욱 흐려져 가는 시
야와 달리 의식의 끈은 굳건히 당겨져 갔다.
"쓸모없는 희생은 하지 않는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공주의 입술은 엷게 웃음을 띄고 있었다.
"당신은 장차 나의 나라에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스스로의 나라를 판 인간에게 줄 미래란 없습니다. 게
다가 당신은 지나치게 머리가 좋습니다. 술을 마시곤 바로 제쪽으로 돌아본 사람은 당신 ..뿐이었습니다"
"...그렇군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아까운 공주였다. 망설임 없이 박혀지던 칼날의 끝은 깊이 깊이 들어와 나에게
마지막 숨을 내쉬도록 종용하고 있었다. 버림받기 전에 나의 세계는 끝나는 것인가. 칼날을 빼내 그를
해치지 못하도록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원래부터 악력이 세지 않은 나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
가는 것이 느껴졌다. 허물어지려는 정신을 일으켜 세우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런 마지막이라면 나쁘
지 않다. 그래 최후의 순간에 당신과 함께라니 이 얼마나 가당찮은 행운인가..돌아본 곳에서 그는 미간
을 찌푸린 얼굴로 의식을 잃고 있었다. 다시 눈을떠 당신을 볼 수 있는 일은 없겠지. 인생은 그런 것 세
상은 그런 것.
나에게 잡힌채 칼날을 밀어넣던 손이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것..입니까"
갑작스레 떠오른 영감을 감당하지 못해 말을 잇지 못하는 예술가. 그것이 이때 공주의 목소리를 묘사
할 최상의 표현이라 생각된다. 칼날을 잡고있던 흰 손이 떨어져 나갔다.
"당신, ...아니오 긴말 하지 않겠습니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은 자신이 가장 잘 알터이니. 저따위 인간에게
당신은 아깝습니다. 사랑할 존재는 좀더 생각한 뒤에 골라 주십시오...아니 지금 당신이 죽게 된 것이 다
행인지도 모르겠군요"
주체할수 없는 연민과 혐오와 분노가 섞여 압축된 떨리는 목소리였다.
여성이란 무서운 존재로군.
아니 지금 나의 오만과 웃음의 장벽은 부서져 버려 모든 진심이 그대로 드러나 있을지도 모른다. 부끄
러움보다는 체념의 크기가 더 컷다.
"하아, 여성의 직관이란 굉장한 것이군요"
"당신이 죽는 편이 나을 겁니다. 타인의 선택에 대해 할말은 없지만 저 남자는-반드시 나의 손으로 지
옥속에 밀어 넣을 것이기에. 당신에게 감정이 존재한다면 차마 볼 수 없는 만신창이로 만들고 말겁니다.
나의 어머니를 말려 죽인 자, 나의 나라를 속국으로 만들어버린 자를 말입니다. 저에게 생살여탈권은 없
지만 살아 있는 것보다 죽는 편이 나을 때가 인간에겐 있는 것 정도는 아시겠지요"
"고맙군요"
"...당신의 의연함에 감탄했습니다. 이정도의 아픔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전 대륙에
서도 당신뿐일 겁니다. 어째서 당신만한 사람이..저런 남자를..."
"공주님 서둘러 주세요!"
"어차피 저남자는 당신이 그리 보호하지 않는다 해도 곧 죽음을 면치 못할텐데도... 만다고린의 독을 먹
었으니까요"
"제가 하고싶어서 했던 일일 뿐입니다, 아름다운 공주님"
".. ..."
말을 잇지 않고 그녀는 재촉하는 시녀들의 손길에 이끌리듯 바닥재를 드러내고 생긴 작은 구멍 속으로
몸을 돌렸다. 다시 생각하건데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아까우나 그것에 개의치 않는 여성이었다. 나에게
는 없는 열정의 온기에 상처가 쓰라렸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단검을 뽑아냈다. 이미 아픔은 인식의 정도를 넘어서 더 이상 느껴지
지 않았다. 무너져 내리는 다리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진홍의 액체가 넘쳐흘러 옷깃을 적셔오는 것이 느
껴 졌지만 그것이 정말 진홍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시계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끝인가.
습관적으로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멀리서 긴 회랑을 달려오는 수많은 발자국 소리가 겹쳐졌다.
6
1615년 해민의 일황자는 혼인식 날 비가 될 소녀에 의해 암습 받게 된다. 명도국 최후의 여왕이 남긴
여식의 이름은 니시 나이카라 하여 자신의 혼인식 날 술수를 부려 하객을 잠들게 한 뒤 일황자를 암살
하려 했으나, 난경의 사절로 참석했던 난경 12왕자 아나한 아나룻다 체 알로리카가 요녀의 간계를 알아
채 목숨을 던져 막아낸 덕에 암살은 실패로 돌아갔다. 일황자는 그의 충심을 치하한 뒤 크게 기뻐하며
곁에 두었다.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 나이카는 군사를 일으켜 사욕을 채우려 했다. 분연히 일어나 왕위를
받은 일황자는 항왕의 이름으로 명도국 으로 진군하여 그녀의 목을 베었다. 그것은 전쟁의 시작을 알리
며 전 대륙을 본격적인 전란의 시대로 밀어 넣었다. 숨죽이던 세력들이 일시에 깨어나 난세의 소용돌이
를 확장시켰다. 그 와중 난경의 8대 충왕으로 등극한 아나한 아나룻다 체 류이히사 는...--해민주서 9권
원평실록중 명도편.
죽지 않았군.
깨어났을 때 보이는 것은 외궁의 높은 천장이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걸까. 침상에서 내려오려고 했지만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오랬동안 활동을 멈추었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울려오는 아픔을 무시한 채 간신히 바닥에 발을 내리자 맨발에 닿는 차가운 돌
의 냉기가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계절의 끝이 보여준 환상은 사라졌다. 이제 돌아온 것은 그 스스로를 낙오시켜 살아남은 것들의 계절.
창밖에 보이는 습기찬 하늘은 지상의 붉은 빛이 번져 올라가 본래의 색을 잃고 가는 사선의 손길 사이
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부드럽고 농밀하고 뜨거운 열정의 손길이 아니었다. 녹의 향연을 쓰다듬
던 습기와 달리 차갑게 흩어져 내리는 겨울비는 어디에도 소용되지 않고 모든 것을 얼려 버릴 것이다.
-'나' 인가.
하지만, 빛의 경계를 넘은 벽의 안쪽은 검은색. 힘과 부정 우아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죽음을 내포한 어
둠. 그것만은 나의 곁을 지켜주었다
-우습지도 않은 착각이다. 그를 닮은 어둠은 내 곁이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 있었을 뿐 거기에 위로를
받든 절망을 느끼던 그 자신은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을 것이다.
구름은 작은 빛도 끌고와 밤을 사라지게 만든다.
비는 검은색에-가장 넓고도 불완전한 색에 결코 닿을 수 없다.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있지만 스스로의
존속을 위한다면 닿을 수 없다. 구름이 사라지면 비도 사라지기에. 차라리 그릇에 담긴 작은 물이었다
면, 대지따윈 돌아보지 않는 작은 물방울이었다면 거리낌없이 어둠속에, 달을 삼키고도 태연한 새카만
수면속에 자신을 더할 수 있었을 텐데. 이뤄지지 않는 꿈이기에 아름답다.
온갖 사고가 줄을이으며 날뛰는 머릿속은 복잡했다. 광대한 사고의 바닷속에 흘러가는데로 몸을 맡긴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살아있다는 실감이 들지 않았다. 손을 들어 옷자락을 슬쩍 걷
어보았다. 마치 수의와 같은 흰색의 천 이 어둠속에 부자연스레 떠올랐다. 상처를 쓰다듬어 보았다. 길
지도 짧지도 않게 매끄러운 피부와는 감촉이 다른 일부. 보이지 않았지만 아직도 완전히 낫지 않은 것
인지 얇은 피부 아래에선 고통의 잔재가 확연히 느껴졌다.
그녀의 얼굴과
그날의 풍경과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렇게 되어서 까지 그를 연상하는 자신에게 조소를.
이제 몇 년이 지나기 전에 명도의 이름은 지도에서 역사서로 자리를 옮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
가 제아무리 뛰어난 혁명가라 하더라도 그의 심기를 거슬르고 만 이상 예외란 없는 것이다. 아름다운
여왕은 금수의 이빨사이로 짖이겨질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감정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 얼마나 냉혹하고 무도한 인간인가.
모든 감정은 언젠가부터 단 한사람 절대로 변화하지 않을 인간에게 귀속되었다.
아아 감정조차 자신의 것으로 하지못한 주제에 살아있다고 하기엔 뻔뻔한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높은 침상에서 완전히 일어섰다. 무언가를 의지하지 않고는 단숨에 무너져 내
릴 듯 흔들리는 몸이지만 오랜시간의 습관으로 꼿꼿하게 등을 세웠다.
목까지 넘어오는 '무엇'에의해 인지하지 못하는 새에 창가를 돌아 비가 쏱아지는 난간으로 나는 내려섰
다.
"상관없어.."
차가운 비를 맞으며 생각했다.
"신이여 당신도 감복했나 봅니다. 좀더 곁에 있어도 좋다고 허락한 겁니까, 아니면 나는 당신의 명부에
서조차 받아들이지 못할 더러운 오만과 거짓의 덩어리였을 뿐입니까?"
연한 청금석 빛일 석조 바닥에서 맨발로 튀어오르는 차가운 물방울.
"...무어, 어떻든 상관 없습니다. 좀더 좀더- 당신이 나에게 준 아니아니 내가 선택한 고통을 즐기면서
그의 곁에 있을겁니다. 예, 좋지요"
신따위는 믿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에게 누군가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이렇게 되어서도 나는 돌아보지
않는 인간을 사랑하고 있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기에 지워지지 않는 미소를 띄운 채 비를 맞고 있었다. 고개를 꺽어 돌아본 본궁
에는 언제나 꺼지지 않는 빛이 어렴풋이 빛나고 있었다. 그는 조금도 상심하지 않은 채 평소와 같은 표
정으로 각료회의를 스스로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내고 있을 것이다. 나에 대한 대책은 확실하다. 죽어
버린다면 다시없을 형제로 말할것이고 -, 만일 살아난다면 다시없는 충성심..으로 처리할 것이다. 그러나
전시에 목숨을 부지하는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자리.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실망은 하지 않는다. 자
신을 위해 '겨우' 목숨을 던진 정도로 그는 진심을 주지 않을것이 자명하기에.
갑자기
어께에 얹어진 손을 무게는 언제나 닿고 싶어하던 그의 것. 그때의 장서관에서처럼 난폭하게 끌어올려
져 그렇지 않아도 휘청거리던 다리가 제자리를 찾기가 힘이들었다.
...당신인가.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짓자. 가장 태연한 표정으로 가장 신랄한 말투로 무장하고 오만을, 그를
거슬릴만한 최대의 오만을 두른채도 뒤돌아보자.
"뭐하고 있지"
"아아, 겨울비란건 참으로 아름다워서 말입니다. 도대체 얼마만에 뵙는지 모르겠습니다. 일황자님"
"...곧, 항왕이 될거다. 명도국을 정벌한 뒤에"
묘하게 굳은 목소리 또는 묘하게 굳은 표정과 힘이들어간 손. 그의 손끝은 알로리카의 어께에서 아직
도 떨어지지 않았다. 알아채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몇칠간이나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침
상위에 누워있던 인간이 일어나 걷는 것 만으로 기적은 끝난 것.
"아아- 경축 드리옵니다. 해민 5대 항왕 마마. 배알케 해 주시어 영광 이옵나이다."
"평소대로 해"
"아하하-어찌 그럴수 있는가요. 하늘아래 가장 지고하신 것이 주상 곧 주상의 자리에 오르실 분인데.."
본인은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하얗게 변한 가는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길게 늘어져 부드러운 등
의 곡선위로 미끄러진 결좋은 머리카락이 하얀 얼굴과 대비되었다. 그렇게 휘청이는 주제에 꼿꼿한 허
리를 굽힐 생각은 하지 않는다. 간신히 한손으로 난간을 짚고 선 가는 인영은 반쯤은 빈정거리는 어조
로 그러나 하나도 흠잡을 곳 없는 최고의 예법에 따라 나의 즉위를 축복하고 있었다.
"거짓 축복은 치우는게 어떻겠나"
"아아- 저따위 미천한 소국의 12왕자가 감히 이나라의 주상을 뵈온 것 만으로 그 영광됨에 눈뜨지 못
하여 그렇사옵니다."
고개를 숙인다. 절도있는 동작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것보단 가는 손목으로 눈이갔다. 꺽으면 부러
질듯한 그 손목을 잡아쥔채 억지로라도 끌어당기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광포한 생각을 잡아두는 동안
인사는 끝이 났다.
"앞날의 빛이 영원하기를."
"...헛소리따윈 집어쳐라"
굽혔던 허리를 펴는 움직임도 감당하지 못해 제대로 일어나지 것 조차 못하면서도 여전히 최상의 미소
를 지은채로 -차가운 빗속에 서있는 것을 억지로 끌어내었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 겨울비에 몸을 내미십니까"
조금 저항해 보았지만 힘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금새 깨달은 그는 싫은 내색도 없이 안으로 끌려들어
왔다.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창백한 얼굴에 눈가만이 붉어진채 작게 숨을 몰아쉬는 것은 지독히도 아름
다운 광기였고 절제에 절제를 거듭한 표정위로 흐르는 격렬한 눈빛에 잠시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
그럼에도 여전히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평소보다 신랄한 독설을 퍼부으려는 모습을 보자. 이대로 바닥
에 쓰러뜨린채 마음껏 범하고 싶어졌다. 어차피 나의것.
그래 나의것.
-젠장.
어느새,
흔들리던 걸음을 숨기고 태연하게 방 가장자리의 서랍장으로 간 그는 크고 흰 천을 꺼내어 나에게 돌아
왔다.
"어쨋든, 일황자도 주상도 춥기는 매한가지일 터이니"
***
확실하게 보였던 것은 공주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한번도 보지못했던 표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분하기 보다는 스스로의 우둔함을 책망했다. 어째서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는가 하고. 아니, 평생동안
누군가의 아래에 있어보지 못했기에 그녀의 행보를 짐작하지 못했던건 당연한 일이다. 이리하여 무수한
제왕은 타자의 손길에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는가. 내 앞을 막아서는 가는 등의 윤곽과 잠시 내쪽을 돌
아보며 짓던 알로리카의 의미없는 미소가 마지막 기억이었다.
깨어났을 때 어의가 말했다.
"황자님이 깨어나신 것은 이 나라를 위한 신의 배려이옵니다"
나 외에 살아남은 것은 알로리카 뿐이었고 공주는 자신의 나라로 도주한 뒤였다. 후세의 역사가들이라
면 나의 우둔함에 웃을것이고, 현세의 위선자들은 나의 자리를 빼앗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할 것이다. 통
찰력과 정치력의 부족-제왕에겐 가장 큰 모욕이 아닌가.
"하하하..하하"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시작되어 있던 전란은 형태를 갖추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외적인 요소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고 손아래 엎친 가신들 사이에서도 전운은 피어오르고 있었다. 평화로운 때에
났더라면 성군이 되었을 나의 아비. 그의 대代 에 해민은 최고의 번영을 구가 했지만 그 번영의 그림자
에서 왕권은 날로 쇠퇴해 가고 번영의 중심에는 재무대신과 외척세력이 있었다. 내가 왕위에 올라서 할
일이라고는 조용히 나의 권한을 그들에게 평화롭게 양도하는 일 밖에 없을 것 같이 보였다. 대륙의 실
세요 창왕 체백의 현신이라 추켜 세우는것도 일황자일 때 까지. 하지만 당신들의 손바닥에 놀아날줄 아
신다면 천만에 말씀. 자신들 끼리 잡아먹지 못해 안달을 하는 외척들이 연합할만한 계기는 아무것도 없
다. 발 밑바닥이, 황금의 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도 모른채로 기다려 주시길.
ㅡ일어서 주리라, 다시한번 당신들의 눈앞에서 창왕 체백과같이 대륙을 통일해 보이리라. 명도는 시작이
며 발화점일 뿐.
기회였다. 그래 그야말로 신이 내리신 기회였다. 언제나 견제책이요 또한 이쪽에선 걸림돌이 되던 소국
의 사신들은 모두 명도국의 손에 명을 달리했다. 그것이 명도국 전체의 의견이었든 공주의 독단이었든
상관치 않고 구실로 삼아 대 명도의 연합이 생길 것이다. 명도의 세력이 크거나 작거나 하는 것은 논의
대상이 아니다. 힘은 다수에 있고 정의는 힘의 곁에만 들러붙는다. 그리하여 다수를 위한 성스러운 희생
물이 되어 발바닥으로 밀려오는 핏속에 당신의 머리를 더하라고. 공주.
몸을 돌리자 품속에서 밀려나와 있는 끈에 꿰인 작은 돌조각이 보였다. 이런 상태라 하더라도 내가 아
니라면 떼어놓을 수 없는 붉은 옥. 돌조각이라 칭하기에는 사무치도록 아름답고 또한 근원을 잃은 과거
의 유물이 으레히 가지는 공기속에 슬픔과 기쁨과 기대가 수없는 이기와 바램을 삼켜 가볍디 가벼운 스
스로의 신체에 수천배의 무게를 더하는 붉은색 편린.
이 작은 것이 왕권인가.
내가 가지게될 나의 나라의 정표인가.
불현듯 태자 책봉식날 머리위로 얹히던 손끝의 무게가 떠올랐다. 이미 죽고없을 난경출신의 대학자이
자 대선사, 주름진 얼굴조차 이제는 기억나지 않지만 따듯했던 온기만이 남아 그 순간을 돌이키게 했다.
-'정표가 무거운 것은 거기에 담긴 피와 눈물의 무게 때문이오, 왕좌란 곧 천형을 사는 자리라 고독이
덮쳐오고 뜻되로 되는일은 아무것도 없을터이지만 그것이 왕이라 주상이라 하늘아래 가장 높은 인의라.'
이미 잊었소이다. 누구의 피이던 이기이던 바램이던 그것이 설사 역사의 요구라 해도 나는 부수고 지나
치리라.
그러나 깨어났을 때 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애써 잊고 넘어가려 했던 한가지 의문이 생각의 밑바닥을
박차고 올라와 외면하고 외면하며 닦은 사고의 창끝을 순간에 무디게 하였고. 쌓여 올라가던 모든 생
각이 사라진 자리에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미소가 채워졌다.
그녀의 손끝이 나를 향했을 때 스스로를 버려 나를 지켜낸 난경의 12왕자,
내 손으로 키워온 신수이나 진정으로 나를 따르지 않는 생물이, '나'를 위해 자신의 생을 저버릴 리가
없었다. 어째서지.....?
잊으려 했던 시간의 십분의 일도 사용하지 않아 답은 나왔다.
...그렇지, 그 남자는 지나치도록 머리가 좋은 남자였다.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군신의 조약보다는 인의
에 호소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목숨을 바쳐서 충성을 다했음에도 저버릴수는 없으므로. 그것으로 자신
의 나라를 전란에서 온전히 비켜서게 하려는 것이겠지.
결코, 나를 위해서가 아닌 행동인 것은 자명했다.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치달았다. 나는 이토록이나ㅡ
이토록이나....?
깨달았다.
그 애매한 듯 아름다운 최상의 미소를,
우아함과 아름다움속에 내재된 부러져 버릴 것 같은 말도 안되는 강함을.
처음부터 -집착하게 되었을때부터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7
접힌채로 손에들린 결벽한 백색의 천조각은 부연 어둠속에서 처연했다.
습기를 머금고 늘어진 천에서는 박제된 꽃향기가 풍겨왔다.
"그러면 명도에는 언제쯤 출전하시겠습니까?"
"네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가기로 미루어 두고 있었다"
"아프고 나서도 여전히 그 농치는 버릇은 버리지를 못하시는군요, 연관이 없는 제 핑계를 대시다니, 나
쁩니다. 게다가 그 나라는 당신이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동안 작게나마 '희망'따위를 가져버릴지도 모릅
니다. 그것을 일순에 깨버리는 것은 잔혹한 처사가 아닙니까-하긴 그것이 전략가로서의 당신이겠지만
좁은 소견은 깊게들으시지 마시.."
의식적으로 길게 늘어지던 말끝을 자른 것은 언제나의 책망하는듯한 웃음소리가 아니었다.
본래의 목적을 잃은 흰색의 천은 마치 정지한 듯 허공속으로 어둠을 빨아들이며 가라앉았고, 대신 닿
아온 것은 물방울을 떨구고 있는 백금색의 머리카락이었다. 지나 다니는 시녀들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아 축시(丑時:새벽2-4시)가 희끗 했나 할 깊은 밤에 고요를 틈타 물줄기에 뭍어 대전에서 예까지 흘러
온 희미한 빛을 반사시키며 그의 목덜미 위로 흘러내리는 가는 실타래가 아름다워서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가려 하였다.
그러나, 일견 가늘어 보이나 단련된 손에 잡힌채로 바닥에 고정된 손목은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 조금
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또 무슨 해괴한 장난질입니까, 이제는 피차간 아이도 아닌 것을"
"너는..."
젖은옷을 입은채 차가운 바닥에 등줄기가 닿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제껏 잊고있던 아픔이 되살아
나 작게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이자 더욱더 세게 눌러와 오히려 아픔이 가중되기만 하였다. 무어라
고 말을 꺼내 보기도 전에 -어둠을 거부한 지고의 눈동자와 맞닥뜨려졌다. 번들거리는 어둠을 밀어내며
한치의 떨림도 없이 유래깊은 파랑(波浪)을 담아내는 그것은 지독히도 빛나고 있어서 기괴한 느낌마저
들었다. 거칠어진 -마치 짐승같은 숨소리에 저도 모르게 흠칫하여 눈길을 빗겨내고 말았다.
그 손끝 하나에 존재하기를 그쳤던 시간을 되돌려 격렬하게 몰아치는 열정
저주받을.
"놓아 주겠습니까, 이리 보여도 자리에서 일어난지 한시각도 채 지나지 않아서 말입니다"
연유는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마음이 들어서 이시각에 찾아들었는지도 어째서 자신이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을 수 밖에 없는지도. 바라는 것은 상황의 종식 하나뿐이었다.
빠르게 살아나 머리끝까지 점령하려 드는 열정은 차마 주체하기 힘든 고통일뿐으로 스스로가 아직 살아
있다고 아직 나는 나의 의지로 살아가고 있다고-그러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무표정을 가장한채 스스
로의 열과 싸우고 있던 나는 거칠게 옷깃이 젓혀질때까지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바닥에 눕혀진 채로도 그는 조금의 동요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어째서 이토록이나 당신이라는 인간은.
바르작 거리는 손목을 세게 누르고는 옷깃을 벗겨갔다. 하얀색 가늘고 결벽한 곧은 어께가 드러났다.
천천히 그러나 주저함 없이 쓸어내리는 손길을 가볍게 저지했다.
"무얼 하실 노릇인지는 알겠으나, 저는 당신의 아이를 낳아줄 수 없습니다. 어릴적에야 농으로 하는 말
이었다 하나..."
"그만하지"
최초의 충격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지독한 침략에 의해 인지되었다. 허리아래는 강하게 눌러져 움
직일수도 없었고 고통스러울 정도의 폭력에 의해 입안에는 이내 피냄새가 퍼졌다. 젖은 옷은 허물처럼
떨어져서 어둠속에 바스라져 버렸고 차가운 얼음조각으로 이뤄진 냉기의 파편이 꽂혀들었다. 정신을 차
릴수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고통 고통을 상회하는 충격 충격을 상회하는 격정. 그리고 마침
내, 심장의 박동이 제어를 넘어섰다.
생을 이루던 하나의 축이 흔들리고 있었다.
거꾸로 뒤집힌 시계가 심연속에서 폭죽을 터뜨리며 그 소용돌이, 격랑의 와중에서 나의 세계가 멸망하
고 있었다. 이것이 현실인지 혹은 꿈인지 과거인지 현재인지 아무것도,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초조한
손끝이 닿았다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닿았다 떨어졌다. 제멋대로 달아오른 몸은 의지같은 것은 무시한
채 스스로 열을 내뿜기 시작했다. 괴로웠다- 그가 무어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
나 이것은 실로 원해왔던 일이라 생각하자 자괴감이 엄습해왔다. 이런게 아냐, 내가 원했던건...단지 돌
아봐 주길 원했을 뿐이다. 그리고 고통스러웠고 축이 쓰러져버린 나의 세계는 소리를 내며 붕괴했다.
일어났을 때 그는 곁에 누워있었다. 이러한 순간을 얼마나 바랬던가, 당신이 나에게 속삭이고 부드럽게
애무하고 그리고 일어났을 때 당신의 모습을 볼수 있는..그러한 것을.
단지 환상이었고 꿈이었다.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만 당신은 그러한 것따위 알지못한채 나를 안
았고 욕정했고 그것 뿐이었다. 어디가 그의 마음에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귀찮은 속국의 12왕
자에서 욕구를 해소할만한 사물이 되었을 따름이다. 그에게는 어차피 이것이나 저것이나 별반 다를 것
없는 존재로 느껴지겠지. 당신의 아무렇지도 않은 행동이 나에게는 .. ...
괜찮아.
아직은 살아있다. 당신은 나의 곁에 있고 세계는 멸망 따위와 무관하게 여전히 아름다웠다.
소리를 죽여 침상에서 일어섰다.
작은 소리였음에도 그는 눈을 떳다.
"어디를 가는거지"
"기침하셨습니까, 아침부터 이런 흉한꼴을 보일수가 없어 말입니다"
"..."
함께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착각이었을 뿐이었는가. 열락에 젖은 심연의 눈동자에게 몇번이나 사랑한
다고 호소했다. 그것이 입밖으로 내어진 언어의 형태였는지 혹은 공기로 전이되던 파동없는 전달이었는
지 그러한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끊임없이 호소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전연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세계는 인과율에 의해 돌아간다. 진심을 주지 않았기에 기대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의 아름다운 맹수는 진정으로 나의것이 되어주지 않았다. 너무나 늦은 것을......천천히, 기억속의 실루
엣이 눈앞을 빠져나갔다. 잠시 겹쳐졌던 시간은 다시 갈라져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이전처럼 흘러갈 것
이다.
그럴수는 없었다.
"알로리카!"
역시 기억속에 있는 익숙한 동작으로, 흔들림없이 돌아섰다.
정적이 흘러내려 식어 얼어붙어 깨어지고 그 파편이 햇빛을 반사해 부서져 내렸다. 입안이 마르는듯한
착각이 들었지만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제길, 이런적은 한번도 없었어.
"...사랑하고 있다."
"그것을 절더러 믿으라 하시는 겝니까?"
"알고있어, 믿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고. 하지만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
나도 모르게 뛰어내려 그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들어올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무심히 눈을 내리깐채 나의 절규를 듣고있을 따름이었다. 이정도로 절실했던 기억은 없다-나는 아이이
고 약했더라도 썩은 쓰레기들 따위, 권력과 황금의 벌레들 따위가 두려웠던적은 없었다. 지엄한 나의 아
비는 허수아비였고 이국의 사신들은 능력없는 껍데기였을 따름이다. ...호아의 여부를 막론하고 나를 쳐
다보지 않은적은 없었다.아무도
일황자의 생각과는 다르게 알로리카는 사고가 정지해 버린 것 뿐이었다. 환상이라고 생각했고 지나치
게 고통스러운 나머지 드디어 머리가 돌아버린것이라 생각했다. 현실일 리가 없었다-단지 하룻밤의 욕
구해소를 위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고 언젠가는 버려질 소모품일 뿐이었다. 그는 그러한 존재에게 진심
을 운운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 목소리는 진심으로 느껴질만큼 진지했다. 믿어도 되는걸까 이
러한 환상따위를.
"거짓이 아니야! 네가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렇더라도...돌아봐줘..."
쓴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호소하는 일황자는 그 답지 않았지만 여전히 자존심 드높은 그 특유의 분위
기를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환상은 생각보다 정교하지 못했던 모양이다-저런 모습을 끼워넣다니.
참으로 우스운 한편의 희곡같지 않은가..
"이제 더 이상 환상은 보고싶지 않아. 꿈이라면..깨고싶어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 ..."
"무슨소릴 하는거지?"
"당신이 나에게 그렇게 호소할 리가 없어."
일황자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알로리카를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어께를 끌어 당
겼다. 아플정도로 껴안았고 그런채로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 순간에서야 알로리카는 그 고통이 현
실임을 알게 되었고 눈에 보일정도로 몸이 굳어졌다.
"...믿어줘"
그가 작게 흠칫거렸다. 밤새도록 시달려 부어오른 눈꼬리로 다시 눈물이 넘쳐흘렀다.
"영원을 약속하겠다"
"그렇...습니까?"
이러한 기적을, 믿어도 되는것일까. 당신의 말 속에 담긴 진심을 진실이라고 생각해도 되는것일까. 영
원따위 당연히 믿지 않는다.
그러나 언젠가 끝나버릴 거짓된 찰나의 언약이라 해도 이 순간만은 진실.
모든 것이 끝나고 살아있었던 증거는 거대한 역사속에 뭍혀 그 흐름또한 낡은 활자 속에서 마모된 뒤라
하더라도-잊지 않을 것이다.
나의 일생에 있어 한번이지만.
비록 오래지 않아 깨어지고 사라져 나의 곁에 닿았다는 것조차 당신은 잊겠지만.
나의 영원은 당신의 것.
까칠한 입술이 이마에 작게 닿았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손가락이 쓰라린 눈가를 쓸어내렸다. 그것은 놀
랍게도 수줍음 또는 망설임이라 불릴수 있는 감정을 내포하고 있었다. 잊혀진 감촉 부드러운 감정이 물
결치듯 밀려나 흩어지는 순간, 이러한 순간. 영원을 이루는 요소.
한없이 짧은 생을 사는 인간으로서 그러나 영원의 요소를 간직한 작은 개체로서, 나역시 당신을 사랑하
고 있다...아마도, 무한히
해서제국기담 해민편 외전 서장
"이제야 오셨습니까?"
쇠락한 대전 안에는 스러져 가는 노을이 격자가 뜯어져 나간 창으로 흘러들었다. 지상의 불길이 하늘
로 옮아간 것인지 하늘이 땅에 불붙인 것인지 알수는 없지만 태우고 태워 모든 것을 없애려는 듯 싶었
다. 불분명한 지상와 하늘의 경계를 가르고 닿아오는 것은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종이가 산화하는 냄
새 뿐이었다. 예견되었던 지식의 몰락 과거형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게된 언어와 문자의 나라를 화장시
키는 불길은 멈출줄도 모르고 일어나 다시 하늘로 돌아가고 하늘에서 돌아와 검은재를 남기며 난경국의
최후에 애도를 표하고 있었다.
"영원을 약속하지 않았었나"
"그러므로 믿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
혼자서 걸어들어온 남자의 온몸에는 불꽃보다 짙은색의 선홍색이 흘러내려 발자국 마다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보고싶었다. 너는, 여전히 아름답군"
대전의 가운데 가장자리가 깨어져 나간 왕좌에는 애매한 미소를 띄운 젊은이가 앉아있었다. 조국의 최
후에도 동요하지 않은 채 흰색의 피부에 불길을 반사시키며 태연히 침략자의 방문을 받아들이는 이- 난
경의 12왕자 아나한 아나룻다 체 알로리카.
"왕은 어디에 있지?"
알로리카는 대답대신 일어나 흰 옷자락을 감아들고 해민의 왕 앞에 섰다. 크다고는 할 수 없는 키였지
만 그 기백에 있어서는 침략자라 해도 손댈 수 없을만한 예기가 칼날처럼 서 있어 외려 크디큰 그림자
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긴장된 공기의 수위가 한도를 넘어서기 직전-
"난경의 일세였던 소인, 해민의 주상께 간청하나니 부디 소인의 좁은 소견을 탓하거나 내치지 마시옵고
자비로우신 마음으로 그간의 무도함을 용서하시옵고, 주권을 지고한 해민에 바치겠사오니 부다 화를 거
두어 주시옵소서"
처음 보았을 때 처럼 무릎을 끓은채 더러운 발치에 입맞추는 사람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백기를 걸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옥새를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정도도 모를 네가
아닐텐데..."
"어차피 왕이 백기를 걸기전에 저 수많은 가신이 당신에게 무릅끓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불길한 예조를 무시하고 물은 그 말에 응수하듯 그는 빙긋이 웃으며 소매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현왕 아나한 아나룻다 체 알로리카 자는 중경이라 하옵고 혜조 대선사의 주제로 난경의 9대 왕이 되었
습니다. 최후의 왕명으로 왕사의 총수권과 옥새와 초칙 3성 6부의 통솔권을 해민에 귀속시키겠나니 여
산(1300년경 태왕 시절의 교육감. 기초 교육서-여산전서의 집필자)의 군주론과 같이 행하여 주신다면 영
세토록 크신 은총을 잊지 않겠나이다"
내밀어진 손에 놓인 열려진 상자 안으로 백색의 돌과 몇장의 종이가 보였다. 그것으로-불길한 예조는
현실이 되었다. 그는 나라를 버린 왕조의 잔영을 지키기 위해 선택된 희생양이었다 전쟁터의 장기말은
죽을 때 까지 장기말인가. 도덕과 도리의 이상주의자가 들먹인 군주론이 먹혀들 것이라고는 그들도 생
각하지 않았으리라. 단순히 시간을 벌기위한 소모품일 뿐 아니 소모품치고는 지나치게 의식 있는 이 남
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민의 군대를 잡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까지 살고싶었던가. 먼
저 교전을 건 것은 8대 충왕이었다. 대 명도의 기치아래 모여든 나라들이 다시 희생양을 찾기 시작한
시기에 움직임을 보인, 시대의 흐름조차 느끼지 못했던 사내는 종래 자신의 피붙이까지 저버리고 말았
다. 전란의 시대ㅡ승리하지 못한자가 윤리를 저버리면 그것이 천인공노할 죄가 된다는 것을 잊었을 따
름이겠지.
"여산의 법도 따위가 지금에 와서 지켜질수 있을것이라 생각하나?"
숙여졌던 고개가 들린다. 위험한 빛깔을 깊이 갈무리 하고도 여전히 이종의 생물처럼 보이는 눈동자가
비치자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켜주실겁니다. 반드시"
만약-너의 겉모습만을 본다면 너는 아무런 흔들림도 가지지 않은채 내 눈앞에 언제나 같은 미소를 짓
고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은 일절의 파문도 일지 않은 호수구석의 엷은 파동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참으로 아름답고, 또한 참으로 슬픈.
모든 상처를 밑바닥에 가라앉힌 유현의 호수엔 파문이 머무르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을 잊은것처럼 무음의 평안을 가장한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
다.
"하하하...하하 어디서 그 믿음이 오는지 모르겠군, 그래 지켜주지 여산의 군주론은 외울정도로 들었으니
-나 해민의 항왕이 말하노니 여산의 도에 따라 금후 13일간 난경의 왕족을 쫒지 않을것이며 다시 일어
나 은혜를 저버리지 앟는 한 하늘이 내리신 명을 누리게 할것이며 현왕 아나한 아나룻다를 보호하고 그
아래에 난경의 유민을 받아들여 주겠노라"
"거듭하여 고하나니, 주상의 아량은 영세토록 회자될 것이메 의심이 없사옵니다"
원평원년 항왕이 명도를 정벌오랬동안 군신의 예를 맺었던 난경에서 8대의 충왕이 군사를 일으켜 조약을
파기하였다. 그리하여 1차 조약으로 해민에 체류하던 난경의 12왕자 아나한 아나룻다 체 알로리카는 그간의
소소한 공을 치하한 주상의 관대한 처사에도 군신의 예를 저버린채 고국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충왕의
책사가 된 12왕자는 다시없을 은혜를 원수로 갚아 수만의 장병을 땅속에 뭍히게 하고, 간사한 책략으로 하늘의
도리를 어지럽게 했더라. 종래에는 스스로 망국의 왕좌에 올라앉아 여산의 도를 들먹여 자신의 목숨 부지키만을
원했으니 어찌 졸렬한 자라 아니하겠는가. -해민주서 9권 원평실록중 난경편.
이년간의 전란에 휩쓸리고도 해민은 항왕이 모든 가신을 반대를 업고도 대신의 자리에 올렸던
유구출신 여성, 라이누 세이린카의 활약으로 유구와의 독점 교역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외려 난세의
기류를 타고 헤아릴 수 없는 부를 쌓은 상인들로 이 나라의 장안은 극명히 이질적인 기운을 띄고
있었다. 진보적인 거부들이 깬 수많은 전례와 원칙은 거리의 모습까지 바뀌게 한 것이다. 그러한
비정상적인 활력은 포화를 피해 유민이 되어 해 민으로 밀려온 과거에 한 나라의 백성이었던 이들의
초라한 입성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패전국의 왕에게는 모욕으로 느껴질만큼 장식한 호화스러운 마차, 정말로 여산의 도를 그대로 따라
타국의'왕'으로 대우한 것이 다분히 멸시와 조롱이 섞인 처사라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도 개의치 않고 태연히 상황을 견뎌내는 것이 난국의 현왕이었다.
국경을 넘어서까지 아무 소리도 흘리지 않던 마차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많이도 변했군요"
"전쟁으로 피폐해지기만 한다면 누가 전쟁을 시작하겠나"
"...외무대신을 바꾸셨더군요. 병권에 외교권까지 이제 당신의 손에 들어왔으니 남은 것은 대륙의
나머지를 손에 넣는 것 뿐입니까"
"그렇겠지"
"게다가 수완도 좋으십니다. 무엇보다 완고한 늙은이들이 들어찬 외무성에 새파란 여성을 최고의 자리에
올리다니.."
"때맞추어 멍청한 관리 하나가 밀정과 통정을 해주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아아- 산상 대원군의 그 유명한 연담의..."
"그래, 산상대원군이 민가의 여성과 낳은 아이였지 이름이 리야스라 했던가..참 그 상대였던 밀정이
누구였는지 들었나?"
"그것은 듣지 못했습니다만"
"율련이더군, 유구의 자유노예로 위장해 사신단에 끼어 난경으로 가려했었다."
잠시간 대화는 멈추었다.
또다시 대륙의 한 귀퉁이를 손아귀에 넣어 많은 보석 과 오래된 지식, 그리고 무엇보다 빛나는 승리를
전리품으로 가지고 돌아온 황에게 온 국민은 진심으로 환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환희와 소란의
한가운데는 외려 모든 음이 스쳐지나가 어떠한 음도 들어오지 못했다.
"율련은, 죽었겠지요.."
"슬픈가?"
"슬프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믿겠습니까?"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체념 혹은 달관 일종의 포기를 안은 목소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담고있지 않았다. 문득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 맞을 수 있는 가장 슬픔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러한 상념은 이내 사그라 들었다.
도성이었다.
그림자와 암습 축축한 곰팡이가 아름다운 금속에서 피어나는 나의 고향. 그러한 거짓된 눈부심의 왕궁.
드디어 가장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곁에는 간신히 붙들어둔 사람이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충분할 정도로 행운을 잡은 남자였다.
그러한 착각이 들었다.
*
외궁은 몇 달이 지났어도 전혀 변하지 않았고 알로리카는 녹아들 듯 그 분위기 사이로 사물처럼 스며들었다.
실용성이 배제된 흰색을 오래된 건물은 그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장소였다.
나도 모르게 물었다.
"그대의 발목을 부러트리지 않더라도 그 자리에 있어주겠나"
"설령 영원이 막는다 할지라도 한번 한 서약을 깰 수야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깨졌었기에, 네가 이 자리에 있는것이겠지 나로서는 행운이다만"
"...."
여전히 높은 외궁의 천장을 올려다 보며 알로리카는 말이 없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가는 목덜미를 무리하게 꺽은 모습이 처연했다.
그 후에도 때때로 항왕이 외궁에 찾아들면, 그는 웃었고 말했고 상냥한 어투로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차를
권하고 우아하게 움직였다. 아름다웠고 그는 나의 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륙에서 가장 높이 있는 지위에
올라서야 체념의 감정을 배우게 된 것이 인간의 모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잔영이나마 붙들어 맬 수
있었던것에 항왕은 안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 사이의 얼어 붙어버린 시간아래에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채로 삼년이 흘렀다.
그들 밖에서 흐른 시간안에서 해민의 항왕은 대륙의 왕들에게 공평히 주어지던 왕위들 위에 올라서 그들을 제후로
삼아 항황이 되었다. 이것은 전무 후무한 일로서 그 광오함에 여러 나라에서 반발을 일으켰지만 그것 뿐이었다.
천일을 채우지 못하는 시간동안 그는 두명의 비와 네명의 빈을 들였다. 그녀들은 모두 제후국 출신의
여인들이었으며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마치 정물처럼 그 자리를 지켯고 언젠가 그 자리에 섰었던 아름다운
소녀처럼 눈을 빛내며 자유의지를 가지려 하지 않았다.
정의는 명분이 있는곳에, 명분은 힘이 있는 자에게ㅡ지금에 와서 해민의 뜻을 거스를만한 나라는 이제 없었다.
*
잠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경의 왕궁보다 익숙한 외궁의 천장. 눈을 떳을 때 그것이 다시 보이지 않는다면.. ...
그때 나는 절망을 보았었다.
눈을 뜨자 머리에서 은은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곳은 내가 태어났던 나의 고향. 쇠락한 왕궁은 여전이 언젠가는
아름다웠을듯한 자태로 은은히 빛나고 있었고 그리고 이곳은 내가 있을곳이 아니었다.
멍한 머리로 어찌된 상황인지 유추해 보기도 전에 나와 핏줄을 공유했던 인간중 가장 고귀해야할-5대 충왕 아나한
아나룻다 체 류이히사가 시계에 들어섰다. 그는 다짜고짜 숨겨진 고대의 무기가 어디있는지 다급하게 물었다.
나의 동생아 나는 네가 무기가 있는곳이 어딘지 알고있다는 것을 들었단다. 누가 그런 소릴 하더랍디까. 아버지의
유고였다 그래도 잡아뗄테냐.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제가아 알기로는. 나는 네 피붙이이기 이전에 난경의 주상이다!
어찌 하늘아래 그러한 거짓을 말하느뇨. 너는 진정 해민의 수족이 된것이냐. 지금의 상태에서 저항은 무의미합니다.
차라리 외교...닥치거라,
기억하기에 그는 그러한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학자의 나라에서 태어난 왕자 답지않게 문에 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우매한 것은 아니었고 강하진 않았으나
휘둘릴만한 인종도 아니었다. 삼년의 세월이 무엇을 바꾸어 놓았는지는 알수 없었지만, 최소한 그는 기억속의
인물과 같은사람이 아니었다.
나의 친 형제는, 최소한-고대의 무기라는 불명확하고 불분명한 것에 기대어 무의미한 전쟁을 벌이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무모함에 대하여 멸망의 끝자락에서 태어난 이상주의자들은 충왕의 대쪽같은 절개와 힘에
굴하지 않는 용기에 찬사를 보냈다. ...나에게 붙여진 것은 해민의 개 라거나 조국도 잊은 변절자라는 흔한 수식어.
앞으로 보고 걷는다고 해서 그 길이 옳은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이미 이나라는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이 시대 자체가 그러한것일지도 모르는 일일지도...
그리고 고대의 유적지에 숨겨졌던 창고가 개방되었고, 그곳에는 바스러지기 직전의 죽간이 수백 발견되었다.
문화적 대 발견이었고, 그것은 무기임에 분명했지만 싸울수 없는것이었다. 난경의8대 충왕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현실을 살고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례대로 다섯 번의 칙서가 도착했고 그 서간 안에서 나는 이미 은의를 저버린 졸렬한 자였다. 이제 내가 있을곳은
어디에도 없었다-원래부터 그런것이기에 실망 같은 것은 들지 않았다. 조금 쓴 웃음이 입가를 스쳤을 뿐이다.
단지 더 이상 그의 뒷모습을, 금빛으로 빛나는 나의 유일한 태양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일말의 아쉬움이 들었을
뿐이었다. 아쉬움의 엷은 끈 끝에는 돌아보고싶지 않은 암흑이 무저갱 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누워있었다.
..보이지 않아 나는 괜찮아.... ...
"드디어 항왕이 움직이기 시작한답니다, 주상! 대책을 세워 주십시오"
"나..나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고약한 것"
"투항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 백년을 이어온 이 왕조를 이렇게 끝내겠단 말입니까!"
공포에 질린 인간들의 무리. 제아무리 고귀한 핏줄이라도 공포가 주는 효과는 같았다. 눈에 핏대를 세운
저들사이에서 죽는가가 나올것이고 흙바닥에 머리를 조아릴 자도 나올 것이다.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어차피
결말이 나와있는 그러한 이야기. 이런 것으로 이뤄진 왕조는 스러지는쪽이 당연하지 않은가. 당신은 나의 나라를
짓밟을 것이고 대륙은 두 번째로 통일될 것이고 시간은 그렇게 흘러갈....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무언가가 깨져버렸다.
"저에게 책략이 있습니다, 혹여나 들어보지 않겠습니까"
굳은 공포의 상처에서 정적의 고름이 흘러나와 악취를 풍겼다.
"아직 항왕이 출전한 것은 아닙니다. 비세 계곡의 지형을 이용한다면 우리에게도 아직 승산은 있습니다"
어둠처럼 굳어들었던 공포가 탈출구를 찾았다. 그것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헛된 기대와 이상흥분이 자리잡았다.
"오오 그것이 무엇이냐, 역시 너는 총명한.."
동결시켜 두었던 열정의 인자가 비정상적으로 터져올랐다. 이미 반감같은것은 아니 처음부터 반감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무자비한 책략을 휘둘렀다. 아군의 눈이 찌푸려질만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나의나라는 머지않아 멸망할것이다 아쉬울것은 아무것도 없다. 업화의 불길을 몰고 나에게 와주기를.
당신을ㅡ기다리고있어.
"무슨 꿈을 꾸는거지?"
이미 해가 기웃할 시간이었다. 언제나처럼 조심스레 찾아든 외궁에서 그는 놀랍게도-잠들어 있었다. 그 오랜
만남에서도 단 한번도 그가 온전히 잠든 모습은 본적이 없었다. 가까이 가도 깨어나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는 작게 찌푸린채로 신음하고 있었다.
아아, 그는 이제 스물을 갓 넘은 새파란 아이였을 뿐이다. 애처로운 표정에 조심스럽게 이마에 손을얹자 힘들게
눈을떳다. 석양을 반사시켜 홍채의 모습까지 뚜렷히 비치는 고아한 암흑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아..?"
그가 원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잠에서 덜 깬 것을 틈타 손을 내밀어 슬그머니 끌어당겼다. 예상과 달리
그는 독설을 내뱉지도 미묘한 웃음을 짓지도 않은채 작게 떨며 나의 어께에 기대어 있었다. 따듯하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마치 아이같은- 가는 어께가 부서질 것 같아 손등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마른 손이 머뭇거리며
어께위에 얹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해는 사위어 사물의 윤곽은 희미했지만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있는지
예쁘게 정리된 손가락이 어떤 식으로 얹져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전히 가장 가까이 있지만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나의,..하지만 이러한 순간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행복했다.
*
전란은 종식되었다. 난경의 왕족들은 어디론가 숨어들어 더 이상 종적을 알수없었다. 필시 내분으로 흩어지고
말았겠지..난경의 유민은 필요 이상으로 충성적이었고 국경선은 더 이상 바뀌지 않았다. 복잡하던 국경선은 지도가
너덜너덜 해질 정도로 지워져 깨끗하리 만치 황량해졌다. 단 한줄로 그어진 서남의 국경선 안에는 해민의
5소경이라는 생경한 단어가 찍히게 된지 오래였고 이제 그 단어를 생경히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나의 나라는
계속해서 발전했고, 바쁘고 무료한 나날이 지나갔고 그날또한 여느 날들과 같은 어느 밤이었다.
그가-처음으로 나에게 찾아들었다.
"달이 없는 밤에는 안주없는 술을 해야지요."
"왠일이지?"
하얀색 옷깃은 슬쩍 흐트러져 있었고 손에는 오래된 술병이 들려있었다. 그답지 않아..무인으로서의 감각이
이상징후를 호소했지만 무시했다. 그가 먼저 찾아와 주었고 나는 무엇보다도 기뻣다.
"먼저 한잔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마치 꿈같군.."
술잔을 내려놓으며 미려한 웃음을 짓는 그의 뺨에 손을 대어보았다. 적당히 서늘하고 매끈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가 내 손을 끌어당겨 살짝 떨어뜨려 놓았다.
"혹시나 요망한 요귀가 변괴라도 부리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술잔에 술을 채우고 내쪽으로 밀어놓았다.
...붉은색의 액체는 어떠한 순간 보았던 독과 닮아있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달콤하고 뜨거웠다. 말도 없이 몇차례나 술잔이 돌아갔고 그의 볼이 연하게 달아올랐다.
정말로 그가 맞는것일까.
"술이 얼마 남지 않았군요"
"술보다는 네쪽에 취하는군, 별나게도 향이있는 연화인가"
"이름은 제가 택한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농을 거시는것이야 재미겠지만 불행히도 소인은 이름같이 살지
못하였나이다"
".. ..."
"게다가, 그런 것은 후궁에 계신 비 마마님들게 하셔야 될 말입니다"
그였다. 틀림없는 그였다 고유한 색깔 냄새 느낌-알로리카, 이국의 이름 그 뜻처럼 진흙속에서 피어난 연꽃과같은
사람이 또 있을리 없었다.
몇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그때로, 그 아름다웠던 순간들로 돌아간것만 같았다.
"그리해도 질시하지 않겠느냐"
"제가 그리할 자격이나 있는 사람이어야 말이지요"
엷게 웃으며 마지막 남은 한방울을 투박한 잔에 부었다.
"첫잔이 주상이었으니 마지막잔은 저여야 하겠습니다만 양보하도록 하지요. 이것은 드문 복화주라 제가 취하기엔
과분합니다"
"그렇다면 사양치 않도록 하지"
술잔에 손을 대려니 그가 아이처럼 웃으며 저지시켯다. 그리곤 소매에서 작은 병을 꺼내었고 거기에는 투명한
액체가 들어있었다.
"그게 무어지?"
"술맛을 내는 물건이지요"
"나를 암살이라도 하려고 하나"
"그렇습니다"
붉은 술에 섞여 투명한 액체는 자취조차 없었고. 여전히 그는 빙긋이 웃고있을 따름이었다.
...단숨에 들이킨 술은 아까보다 달콤하게 느껴졌다.
"정말로 국왕암살이라도 시도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너라면 독약이라도 상관 없지 않겠나"
"아하하 그런말씀을 대신들에게 다시한번 해보십시오. 이나라에 태어난 것을 한탄할겁니다"
"이미 한탄하다못해 그친 것이 대신들이다"
"물론 그것도 그렇습니다. 패국의 왕을 살려두질 않나 이시대에 와서 여산의 도를 지킨다지 않나"
"너였으니까 그랬을거라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나?"
"오오, 저는 '특별'인겝니까"
"당연히 '특별'이지."
"소인은 무척이나 기쁩니다."
서서히 시간이 보이지 않았고 그의 얼굴조차 흐려졌다.
"이것은 어디에서 난 독약이지?"
"제 눈물입니다"
"그렇군.."
그가 쓰게 웃었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리는 것이 들리다 말았고 내 머리를 스스로의 무릎위에 바르게 눕혀주었다.
"미인의 무릎위에서 눈감는건 모든 사내의 꿈이란걸 아는구나"
"소인의 욕심이었습니다. 비 마마들보다 못한 더러운 사내라 미안합니다만...이렇게, 하고싶었습니다"
"최후는 너와함께라면, 나쁘지 않지"
"... ..."
머뭇거리던-그렇게 보이던-그가 고개를 숙였다.
오래전, 아주 오래전 그랬던 것처럼 부드러운 입술이 열렸고 나에게 닿았다. 찰나에 지나지 않는 영원이 지날동안
그의 머리카락이 이마를 스쳤고 술보다도 달콤했던 입술이 떨어져 나갔을 때 이미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자의로 선택한 것.
손가락 끝조차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의식은 명료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지고 싶었고 또한
처음으로 가질수 없었던 유일한 최애의 인간은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진심으로, 너와
함께라면 나쁘지 않아. 이 나라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하아-이것이 수없는 기대를 저버리고 수없는 핏물을 발아래로 흘려보낸 자가 할 말인가.
의식이 끊어져 간다. 그러나 이것이 지상 최후의 광경이라 하더라도 나는 슬퍼하지 않으리라.
오랫동안 그렇게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내리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조금만 더 바라보았으면 하는 마음도 이길 수 없는 기운이 핏줄을 타고 퍼져나와 눈꺼풀을 내리누르고
사고를 정지할 것을 강요했다. 마지막-마지막 순간이었다.
"당신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내가 살아온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죽어버린다면 당신을 사랑할수 없겠지요.다시 볼 수 없게 되더라도-살아있는동안 나의 영원은 당신의것,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죽도록 평생을 다바쳐서 할 수 있는동안 당신을 사랑해"
"함께, 있어줄수는 없겠지"
"... 당신은 이나라의 왕이고, 나또한 한때 왕이었고 그것은 앞으로도 그럴것입니다"
"그렇겠지"
"그렇습니다"
천연덕 스럽게 미소짓는 그의 모습이 잠시 비쳐졌고.
그리고 시계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이 꿈이라면 나는 깨지 않겠다. 환영이거나 몽상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한 오만한 개체가, 모든
생을바쳐 유일하게 사랑할수 있었던 존재가 바램대로 되어주었다. 목숨따위는 아깝지 않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묘한 편안함이 온몸을 감싸안았고 태초의 어둠과 닮은 극채색의 어둠이 나락이 되어 흘러내렸다.
우미한 어둠, 어머니의 자궁과같은 회귀를 필요치 않는 정체의 공간에서 모든 것은 하나의 단어에 함축될수 있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잊지않으리라, 나의 아름다운 사람.
원평3년 시월 초하루에 난경의 패왕이 황제의 옥체를 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외궁에 유폐되어있던 난경의
패왕은 항황이 내리신 큰 은혜도 잊고 암습이 무산되자 여산의 도를 깨뜨린 채로 제 영달을 바래 도망하였으나
사흘 뒤 깨어나신 주상은 오래도록 깊이 숙고하시어 넓으신 도량으로 현왕 알로리카를 찾지 아니하였다. 난경의
유민들은 자신들을 버린 왕에 분하여 그를 참하길 상소하였으나 그들을 달래어 백성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대륙의
모든 인의있는이들이 앞다투어 황제를 칭송하는 시가를 지었다. 참으로 하늘아래 나기 힘든 성군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해민주서11권-원평실록 중 난경편 종장.
그렇게 해서 항황은 대륙을 통일해 금후의 역사에서도 나타나지 않을 최초이자 최후의 강력한 최고권력을
쥐게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신화였으며 시대와 시대를 이어 창왕에서 시작된 '영웅적 관념'의 완성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공포정치를 폈던 것만은 아니다. 필설로 형용키 힘든 잔혹한 일면을 가졌음에도 대단한 정치적 감각을
아낌없이 드러내어-난경의 왕에게 도량을 베푼것처럼-민중에게서 대단한 지지를 받았다. 또한 문화와 예술의
전성기를 불러왔다는 공로도 부정할 수 없다. 정치적 안정 아래에서 대륙의 문화는 개화하였으며 끊임없는
지원으로 그 꽃은 영원이라 할만한 자취를 남겼다. 그 자신또한 시가를 짓는등 다분히 문치적인 요소를
보여주었고-그것이 꾸민것인지 혹은 품성이 그리하였던 것인지는 알수없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아직도
세간에서 불려지는 항왕의 연시일 것이다. 아름답고도 간결한 문장에, 젊은시절 영원을 맹세했던 이름없는 여인에
대한 절망같은 사랑을 담은 그것은 대륙 중기의 시가에서 큰 위치를 차지할 만한 작품이다. 문화사Ⅱ-1항황의
치세중 문화의 발전/딜마레 미란다 지음.
해서제국기담(바다 서쪽 여러나라의 기묘한 이야기)-해민편 외전終
안녕하세요, 니지 니르기입니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홈페이지에 들러주신분들도 감사하구요^^
..음 덧붙여서 외궁의 보초가 왜그렇게 허술하고, 항황의 거처또한 왜그렇게 보초가 허술하냐고 묻는다면, 저사람들의 관계 자체가 그랬다-고 말하면 될까요(와하하;)
항황 하는짓을 보세요-_-독약이라고 주는데도 대뜸 마시질 않나.
게다가 알로리카에겐 원래 도주의사 자체가 없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