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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3화 (3/268)

< --   1. 바츠의 친구들   -- >         * 3화 *

“바츠! 바츠!”

바츠는 낡은 이동식화이트보드 앞에서, 자신을 반복해서 부르는 사내의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는 단단히 화가 났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아직 얼떨떨한 바츠가 빤히 바라보자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불쌍한 녀석, 하필이면 검은 개에게 걸리다니...”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붉은 머리 소년이 바츠를 향해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바츠를 그렇게 바라보는 건, 비단 붉은 머리 소년뿐만이 아니었다. 교실에 있는 10여명의 아이 중 대부분이 똑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개중에는 오히려 반대로 즐거워하는 아이도 있었는데, 가장 뒷줄 구석에 앉아있는 소년과 그 소년을 중심으로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아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특히 구석에 앉아있던 바츠보다 덩치가 두 배는 더 큰 소년은 생일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굉장히 기뻐보였다.

“바츠! 내가 뭐라고 했지?”

어느새 바츠의 바로 옆까지 다가온 사내가 자신의 얼굴을 바츠의 코앞으로 들이밀며 물었다.

바츠는 그의 호통보다도, 그의 검은 얼굴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상처 때문에 덜컥 겁이 났다. 동시에 그는 ‘헌터’였는데, 심각한 부상을 입는 바람에 지금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바츠의 시선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흔들리는 그의 오른쪽 소매를 향했다.

“내가 뭐라고 했냐고 물었지, 내가 어떠냐고 하지 않았어!”

그가 유일한 손으로 바츠의 턱을 잡아채더니, 코끝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바츠는 목이 빳빳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가슴은 터질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머릿속은 온 통 그의 검은 얼굴로 가득 찼다. 마치 그의 손끝에 의해 허공으로 몸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 손발은 저리고, 귓가에는 버튼이 잘못 눌린 기계의 경고음이 들리는 듯 했다.

“네, 네! 마티프 선생님!”

바츠는 쥐어짜듯이 소리를 질러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정신을 붙들고 있기 힘들었다. 그러자 마티프의 표정이 바로 꿈틀거렸다. 이마 한쪽에 기름진 땅 속을 헤집고 다니는 지렁이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그럼 내가 조금 전에 뭐라고 했지?”

마티프는 방금 전처럼 다시 윽박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바츠는 그의 목소리가 올가미처럼 목을 조여 오는 듯 했다. 그래서 머리는 완전히 하얘졌고, 입술은 벌벌 떨리기만 할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첫 날부터 나를 화나게 하는 군. 이번 신입들은 형편없다더니 정말인 모양이야. 감히 내 수업시간에 졸아? 이 게으른 녀석 같으니, 이곳에 왔다고 전부 헌터나 집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라. 나는 언제든지 너를 일반 교실로 보낼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러니 당장 대답하는 것이 좋을 거야. 내가 조금 전에 뭐라고 했지?”

그때였다. 바츠는 자신의 턱을 움켜쥐고 있는 마티프의 왼쪽 어깨너머로, 자신을 향해 안쓰럽게 말하던 소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몸을 몇 번이나 반복적으로 솟구치며 거칠게 숨을 쉬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전혀 시끄럽지 않고 오히려 2년 전 견학했던 레벨5의 연구실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바츠는 그런 그에게 집중했다. 특히 그가 벙긋거리는 입을 자세히 관찰했다.

“에, 에...그러니까...카니지, 아! ‘카니지 블레이드’는...‘헤러티커’! ‘헤러티커’를 쓰러뜨릴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고...하셨어요!”

바츠는 필사적으로 대답한 후, 마티프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양쪽 광대가 부르르 떨릴 정도로, 어색한 미소였다.

마티프의 눈동자가 한 차례 좌우를 오가더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츠를 쏘아보았다.

바츠는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으나, 입가에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양 볼이 마비될 것만 같았다. 만일 이대로 표정이 굳어진다면, 항상 웃기만 하는 바보처럼 보이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 꼴을 본 친구들이 머저리 같다고 놀리며 배를 잡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진짜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마티프가 그 전에 바츠의 턱을 놓아주며 한 발 물러섰기 때문이었다. 바츠의 노력이 가상한 모양이었다. 이마의 지렁이도 어느새 사라졌다.

“그렇다. ‘카니지 블레이드’는 ‘헤러티커’를 쓰러뜨릴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사람들은 소총으로 벌집을 만들면 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소총의 탄약은 구하기도 힘들뿐더러, 그 위력은 결코 ‘카니지 블레이드’에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아무에게나 주어지지도 않지. 오직 ‘헌터’만이 가질 수 있는 무기다. 또한! ‘헌터’의 역량에 따라 그 색이 변하는데, 가장 강한 색은 블랙이다. 알겠나?”

“넵!”

바츠는 마티프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묻는 마지막 말에, 허리를 곧추 세우며 할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마티프가 바츠를 향해 빈정거리더니, 본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몸을 휙 돌렸다.

“네가 과연 그 검을 받을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 그리고...”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앞쪽이 아니었다.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빠르고 정확한 턴으로 몸을 돌린 그는 제자리에서 한차례 회전을 했을 뿐이다.

“다음에 또 내 대화에 끼어들면 그때는 용서 없다. 알겠나?”

몸을 돌린 마티프가 바츠를 향해 입을 벙긋거린 소년을 정면으로 내려다보며 무서운 목소리로 경고를 주었다. 특히 칼날처럼 보이는 그의 검지가 소년의 심장을 정확히 가리켰다. 붉은 머리의 소년은 깜짝 놀라 온 몸이 굳어졌는지, 조금 전 바츠처럼 고개만 빳빳하게 끄덕일 뿐 좀처럼 입술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마티프는 그 모습이 흡족한 모양이었다. 만족스런 미소를 하고는 더 이상 무섭게 말하지 않았다. 여전히 목소리는 아이들이 겁을 먹을 수 있을 만큼 교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지만,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간 그는 선생답게 가르치기 위해 노력했다.

“검은! 실버, 레드, 블랙을 거쳐 색이 변하게 된다! 네 놈들이 가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실버가 될 것이다! 알겠나! 물론 네 놈들 중에 그 검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녀석은 없다. 하지만 무사히 나와 함께 졸업을 하게 된다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알겠나?”

“블랙을 가진 헌터도 있나요?”

마티프가 제자리로 돌아가 다시 몸을 돌리며 묻자, 교실을 채우는 대답소리 사이로 오른쪽 마지막 줄 가장 앞에 앉아 있던 금발 머리 소년이 물었다.

“좋은 질문이다.”

마티프가 그 소년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조금 전 붉은 머리의 소년을 바라볼 때와는 전혀 다른 미소였다.

“ ‘미사(Missa)’훈련소가 세워진 이례로 수많은 헌터들이 배출되었다. 그 수가 무려 1백 명이나 되지. 하지만 좋아하지 마라. 300년 동안 이어온 숫자이니까 말이야. 그리고 그 중에서도 단 한 명만이 블랙의 레벨에 올랐다.”

“선생님은 직접 본 적 있나요?”

바츠가 얼른 손을 들며 묻자, 마티프의 시선이 빠르게 바츠에게로 옮겨졌다.

“물론이다! 직접 두 눈으로 봤지. 나와 나란히 있었다.”

“혹시 그가 ‘라파엘’인가요?”

“다행히 멍청하지는 않구나. 그래, 바로 그다. 그가 유일하게 블랙을 가졌다. ‘헤러티커’를 혼자서 살해할 수 있는 유일한 헌터다. 그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걸 영광으로 생각해라. 만약 네 놈들 중에 헌터나 집사가 돼서, 전선으로 나가게 되면 죽기 전에 한 번 쯤은 볼 수도 있다. 그때 그 모습을 보게 되면 마음을 단단히 먹도록 해라. 그의 ‘학살’이 네 놈들 눈앞에서 펼쳐지면, 자신도 모르게 정신 줄을 놓고 까무러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는 우리가 ‘아르크(Ark)’을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유일한 희망이다.”

마티프는 바츠의 물음에 대답을 끝내고는 자신이 헌터였던 과거를 늘어놓으며, 헌터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츠는 그의 장황한 설명에 집중하지 않고, 방금 전 꿈속에서 가장 늦게 플랫폼으로 들어온 사내나 떠올렸다.

검은 망토를 두른 사내.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후드를 벗었더라도 방독면 때문에 결국 확인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수백 년 동안 단 한 명도 가지지 못했던, 그 위대한 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랙 카니지. 사람들은 그 검을 그렇게 부른다. 헤러티커의 단단한 피부를 베고, 인간보다 훨씬 커다란 골격을 부술 수 있는 유일한 무기. 수많은 헌터들이 그 검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지만, 선택받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검이다.

바츠는 그 사내를 본 것이 오늘 내일이 아니었다. 비록 꿈이었지만, 이미 수십 번도 넘게 보았다. 어쩌면 바츠와 비슷한 또래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꿈속에서 결코 싸우지 않는다. 항상 헤러티커와 마주선 채, 우뚝 설 뿐이다. 바츠는 그런 사내를 보면 애간장이 탄다. 그 다음이 너무도 궁금했다. 그가 검을 휘둘러 괴물들을 쫓아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교재나 전시실에는 헌터의 복장과 검이 있을 뿐이지, 정작 그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츠는 상상한다. 자신이 대신 싸우는 것이다. 그에게서 검을 건네받아, 헤러티커들을 향해 달려든다. 그럼 헤러티커들은 휘두른 검이 도달하기도 전에 달아나기 바쁘다. 바츠는 그 모습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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