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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4화 (4/268)

< --   1. 바츠의 친구들   -- >         * 4화 *

바츠의 상상의 나래가 끝날 쯤, 마티프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교실에 울렸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오늘 배운 카니지 블레이드에 대해 내일 물어볼 테니, 꼭 숙지해서 올 수 있도록 해라!”

“넵!”

“멍청이들아, 그럼 외쳐라! 사령관께서 아르크를 세우시고, 아이기스로부터 지켜내셨다!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아르크를 지키고, 나와 가족 그리고 사령관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마티프가 자리에서 막 일어나던 아이들을 향해 외치자, 아이들은 전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몸을 반짝 세워 똑바로 서더니 마티프의 선창을 따라 외쳤다.

“그리고 오늘과 내일 아르크가 개방되니, 되도록 플랫폼에 가지 말도록 해라.”

아이들의 복창이 끝나자, 마티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수업시간 내내 보여주었던 행동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걸 믿기 힘들 정도로 상냥했다.

바츠는 아까 수업시간에 졸았던 자신을 무섭게 혼내던 그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의 목소리와 엄청난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그의 당부에 대답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작은 목소리를 내야 했다. 만약 교실 내에 다른 아이들이 함께 대답하지 않았더라면, 계집애라고 놀림 받기 딱 좋은 목소리였다. 어쩌면 그가 또 다시 턱을 잡고, 사내애답게 굴라고 으름장을 놓았을 지도 모른다.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자신의 짐을 챙기는데 여념이 없었다.

바츠는 그가 모른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자,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는 서둘러 움직였다. 그가 지금이라도 따로 불러, 또 다시 검은 얼굴을 들이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한 차례 좌우로 내둘렀다. 그때의 기억을 떨쳐내고 싶은 까닭이었다. 그렇다고 붉은 머리의 소년에 대한 고마움까지 잊지는 않았다.

바츠는 자신의 필기도구를 책상 밑에 정리하고, 역시나 자리를 떠나려는 그 소년을 향해 말했다.

“고맙다, 이롤로.”

“그럼 다음에 사과주스라도 사라고.”

이롤로가 자신의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의 붉은 머리칼이 파도처럼 찰랑였다.

“그래. 용돈 받은 것이 아직 남아있으니 내일 사줄게.”

바츠는 무심하게 내뱉는 이롤로의 말을 진심으로 받았다. 겨우 이런 일을 빚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4년 전 일반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짝처럼 지내온 친구에게 사과주스 한 잔 정도는 전혀 아깝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너도 참 대단하다. 어떻게 검은 개 시간에 잠을 잘 수가 있지? 다음에는 오늘처럼 끝나지 않을 걸? 못 들었어? 작년 신입생 중에도 너처럼 졸았다가, 찍혀서 결국 쫓겨났다고 하더라.”

“정말?”

바츠는 이롤로가 솔직한 친구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번만큼은 믿지 않고 의심했다. 기껏해야 일반학교처럼 며칠 정학이나 받는 것에 그쳐야 한다고 멋대로 생각한 탓이었다. 고작 졸았다는 이유로 퇴학의 사유가 된다면 그건 너무 불공평했다. 바츠는 아직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괜히 억울했다.

“그렇다니까. 우리보다 한 살 많은 여자아이인데, 아마 테라치도 알고 있을 걸?”

바츠는 믿고 싶지 않았지만 이롤로가 테라치까지 언급하며 자신 있는 모습을 보이자 왠지 불안해졌다. 그래서 그 일에 대해 더욱 궁금해졌다.

“또 나만 빼놓고 이야기하는 구나?”

바츠가 이롤로와 대화를 나누며 나란히 교실을 막 빠져나갈 때였다. 그 둘 사이로 한 소녀가 파고들었다. 덕분에 이롤로가 들고 있던 교본을 떨어뜨렸지만, 소녀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롤로의 불만스러운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봐, 조심하라고!”

이롤로가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교본을 집어 들며 불평했다. 그러자 소녀는 귀여운 콧소리와 함께 갑자기 균형을 잃은 것처럼 휘청이더니, 그대로 이롤로에게 가볍게 몸을 부딪쳤다. 덕분에 이롤로는 몸을 다시 세우다 옆으로 밀려났다.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놀라기 충분했다.

이롤로가 불쾌한 얼굴로 한마디 하려고 발끈했다. 하지만 배시시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입을 우물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스란히 속으로 삼킨 모양이었다. 대신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고는 긴 한숨을 쉬었다.

“아델리나, 사과정도는 하라고. 네가 잘못했잖아.”

바츠는 보다 못해 이롤로를 대신해 말했다. 그러자 아델리나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바츠는 순간 아델리나의 그 표정을 보고 이롤로처럼 한숨으로 그냥 넘길 뻔했지만, 항상 이런 식이었던 그녀에게 불만이 있던 터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소용없어! 어서 사과하라고.”

마음을 다잡으며 그 불만을 떠올리지 못했다면, 아델리나는 또 다시 사과를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아델리나가 결국 이롤로에게 사과를 했다. 비록 그런 그녀의 말투가 조금 전, 마티프의 당부에 대답하던 바츠의 목소리처럼 힘도 없고 진심이 없는 건성에 가까웠지만 바츠는 그것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항상 제멋대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롤로는 아닌 모양이었다.

“됐다, 그만 두자.”

체념한 듯, 못마땅한 얼굴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바츠는 아델리나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어느새 저만치 걸음을 옮긴 이롤로를 재빨리 쫓았다. 그런데 그건 아델리나도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둘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바로 뒤로 찰싹 붙었다. 그리고는 대답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둘을 마구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방금 전 일어났던 일에 대해 벌써 다 잊은 듯 보였다.

바츠와 이롤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신의 귀를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무슨 이야기하고 있었어? 응? 무슨 이야기하고 있었냐고. 플랫폼에라도 가기로 한 거야? 아니면? 아니면 헌터 놀이라도 하자고 한 거야? 응? 무슨 이야기 했어?”

“별 거 아냐.”

이롤로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러자 아델리나가 서운했는지 격앙된 목소리로 반발했는데,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바츠와 이롤로가 그녀에게 짓궂게 군 줄로 착각할 수 있을 만큼, 뻔뻔하다 못해 당당했다.

“또, 또! 또, 나만 빼고 네들끼리만 이야기하지! 왜 자꾸 나만 빼놓고 이야기 해!”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

이에 당황한 이롤로가 얼마나 다급했는지, 자신의 교본을 다시 떨어뜨리면서까지 양 팔을 앞으로 뻗어 손을 흔들어댔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입을 손으로 막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건 바츠도 마찬가지였다.

바츠는 얼른 주변을 살폈다. 막 교실을 빠져나가는 아이들과 다른 반 아이들의 시선이 몰렸지만, 다행히 어른은 보이지 않았다. 마티프가 옆을 지나고 있었다면 어떤 소리를 들었을 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오싹했다. 아마 밥을 굶는 것만큼 끔찍한 벌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남자 아이 둘의 말보다, 화를 내고 있는 여자 아이의 말을 더 믿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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