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바츠의 친구들 -- > * 8화 *
연구원이 되는 건 내부 엔지니어가 되는 일보다 훨씬 어려웠다. 성적이 최소한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가 되어야 했다. 케일리의 성적은 기껏해야 보통이다. 게다가 레벨1의 거주자들에게는 그 자격이 없다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특별한 사례가 있기는 했지만, 그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비슷한 성적이라도 차라리 레벨2의 거주자들에게로 기회가 주어졌다. 웬만큼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불가능했다.
연구원들은 대부분 레벨4의 거주자들이었다. 연구원이 되어서 레벨4에서 살게 된 것인지, 레벨4의 거주자들 중에서만 연구원을 뽑았던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레벨1 거주자 중에 연구원이 된 사람은 1명밖에 없다고 들었다. 레벨2의 거주자들은 그나마 형편이 좀 나았다. 테라치나 벨리타 정도의 성적이라면 곧장 연구원이 될 수도 있었고, 우선 내부 엔지니어를 거쳐 나중에 연구원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그래서 벨리타는 테라치보다 조금 성적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더 높았다.
어쨌든 케일리는 전혀 가망 없는 자신의 미래를 신나게 늘어놓았다. 이미 마음만은 식물 연구실에서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거나 과거의 품종을 재현하고 있는 듯 보였다. 바츠는 그런 케일리에게 꿈 깨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상처받고 못 되게 굴 것 같아서 무시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바츠는 케일리가 혼자서 계속 떠들게 내버려두고는 침대 밑에서 주먹크기의 양철통을 꺼냈다. 여기저기 홈이 많았지만 딱히 거칠게 다룬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항상 열고 닫고 침대 밑에만 두었었는데, 왜 이렇게 짓눌려 우그러져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바츠는 양철통을 소매로 한 번 쓰윽 문질렀다. 이런다고 움푹 팬 홈이 다시 본래대로 돌아 올리는 없었지만, 그 위에 얇게 내려앉은 먼지가 사라지고, 광택이 좀 더 윤기 나게 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새것처럼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우울했던 기분이 한층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양철통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는 다시 본래의 기분으로 돌아와야 했다. 정확히는 분노가 치밀었다.
“뭐야!”
바츠는 놀라움과 동시에 경악스러움이 묻어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때까지도 문 앞에서 떠들고 있던 케일리를 바라보았다.
“네가 가져갔지? 다 어디에 있어!”
바츠는 양철통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행히도 곤두박질친 양철통이 텅 비어있어 바닥을 어지르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홈을 만들며 전보다 좀 더 구겨졌다. 바츠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케일리를 향해 무섭게 다가갔다. 전혀 신경 쓰지 못하는 눈치였다.
케일리는 잔뜩 화가 난 바츠의 모습에 당황한 얼굴로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주절거리며 혼잣말을 늘어놓던 모습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누나가 내 저금통에 손댄 거 맞지!”
“아, 아니야! 나 아니야!”
케일리가 황급히 주방으로 달아났다.
바츠는 그 뒤를 바짝 쫓으며 계속해서 케일리를 향해 윽박질렀다. 케일리가 낚아챈 손을 몇 번이나 뿌리쳤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기어이 주방 구석까지 몰아넣었다.
“8장이나 있었다고! 그거 전부 다 어쨌어!”
“몰라! 모른다고!”
“모른다는 게 말이 돼! 집에 나랑 누나 밖에 없는데, 도둑이라도 들었다는 거야?”
“그럴 지도 모르지!”
케일리가 억울한지 필사적으로 반발했다. 하지만 그때, 바츠의 눈에 케일리의 왼쪽 새끼손가락이 들어왔다. 아주 오래 전 뭉뚝하게 생긴 분필이라고 불리던 것과 닮아보였는데, 손톱이 있어야할 마디가 사라져 가뜩이나 짧은 손가락이 오늘따라 묘하게 훨씬 더 짧아보였다.
바츠의 시선을 느낀 케일리가 황급히 자신의 왼손을 뒤로 숨겼다. 바츠가 화를 내기 시작했을 때보다 훨씬 더 당황한 모습이었다. 두 눈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뭐야, 손가락 왜 그래?”
“응? 뭐가? 무슨 말이야?”
케일리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설마 성형한 거야?”
바츠의 물음에 케일리의 고개가 조심스럽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장난하는 거 아니지?”
“...응.”
케일리가 슬그머니 자신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나란히 놓인 그녀의 양손은 손가락이 가늘고 피부가 하얘서 충분히 예뻤지만, 서로 대칭이 되지 않는 모습으로 인해서 그 아름다움이 반감되고 있었다.
“귀엽지 않아?”
케일리가 바츠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제정신이야? 왜 한 거야? 남자친구 때문에 한 거야?”
“얼마나 좋아하는데.”
케일리가 활짝 웃으며 바츠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 짧은 새끼손가락으로 바츠의 목덜미를 살살 문질렀다.
“이 손가락으로 목을 이렇게 쓰다듬는 거야. 그러면 남자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하지 마! 누나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거겠지! 이런 걸 누가 좋아해!”
바츠는 케일리의 손길로 끔찍한 소름이 돋는 바람에 그녀를 있는 힘껏 뒤로 밀어냈다.
“왜? 기분 좋지 않아?”
케일리는 세 발짝이나 뒤로 밀려나며 조리대에 등을 부딪쳤는데, 전혀 아랑곳없이 자신의 왼손을 앞으로 내놓으며 자랑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한마디가 잘려나간 자신의 새끼손가락이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심지어 자신의 목덜미를 대신 문질러보기까지 했다.
“미친 거야? 말짱한 손가락을 왜 잘라?”
“성형은 다 그런 거야! 옛날에는 턱도 깎았다고. 그리고 그 보다 더 오래전에는 두개골에도 손을 댔고. 미사 훈련소에서는 역사를 안 배우니까 모르는 모양이구나?”
바츠는 이 와중에도 잘난 체하며 으스대는 케일리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케일리가 미친 것 같았다.
“남자친구가 이런 게 좋대? 그래서 내 배급표를 다 가져간 거야?”
“물론 좋아하지. 내년에 결혼도 할 거라고.”
바츠는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는 케일리가 정말 한심했다. 내년이면 벌써 일반학교를 졸업하고 20살이 된다는 것이 거짓말 같았다.
케일리의 남자친구는 24살로 레벨2의 거주자였다. 레벨3에서 우연히 만나 사귀게 되었다는데, 그는 내년이면 기술학교를 졸업하고 내부 엔지니어가 된다는 것이 이미 확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케일리를 좋아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됐다. 바츠는 이미 그를 몇 차례 보았다. 제법 얼굴도 잘 생겼고, 키도 컸다. 그에 반해 케일리는 조금 귀여운 얼굴이기는 했지만, 결코 미인은 아니었다. 또한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케일리에게는 미안하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케일리에게 지금의 남자친구는 좀 과분했다. 둘이 사귀고 있는 것 자체가 놀라운 사실이었다.
바츠는 이런 생각들을 케일리에게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지만, 말 한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그게 사랑이야’라고 대꾸하며 전혀 듣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정신 나간 소리를 들을 바에는 차라리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그래서 바로 옆 선반 위를 뒤지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곳에는 작은 은색 상자가 하나 있었는데, 사람의 손 떼가 많이 묻어 본래보다 훨씬 더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바츠는 그것을 꺼내 안을 들여다보았다.
“설마 다른 건? 다른 배급표에도 손댄 건 아니지?”
다행히도 그 안에는 아직까지 충분한 양의 배급표가 남아있었다. 내년에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는 조금 부족한 양이었지만, 매년 그랬던 것이라 특별한 문제는 아니었다.
바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야, 내가 바보인줄 알아? 설마 우리 생활비까지 손댔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넌 가끔 나를 무시하는 거 알아?”
케일리가 갑자기 양손을 허리에 얹으며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정말 뻔뻔한 모습이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그럼 대체 어떻게 수술을 한 거야!”
“내 용돈으로 한 거야! 조금 모자라서 네 걸 가져간 거고! 나 지금 기분 굉장히 불쾌하거든?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사과해!”
바츠는 오히려 화를 내기 시작하는 케일리를 보자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정말 따끔하게 혼내주고 싶었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전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버지처럼 무시무시한 호통으로 케일리가 불쌍한 표정을 한 채 고개 숙이게 만들 수도 없었고, 테라치처럼 논리정연한 말로 조근조근 따져 입을 닫게 할 수도 없었다. 그저 그러고 싶다는 마음만 간절했다. 그래서 차라리 몸을 돌려세웠다. 생활비가 담겨 있는 상자는 다시 선반 위에 올려놓았고, 계속해서 사과를 요구하는 케일리의 목소리는 완전히 무시했다.
“어디가! 사과하라고!”
바츠는 케일리가 끝까지 뒤에서 악을 쓰며 소리쳤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문을 있는 힘껏 세게 닫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러고 나자 테라치가 차라리 케일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테라치는 항상 자상하고, 친절했다. 케일리따위 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좋았다.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자 눈시울이 따끔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지금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와서 케일리를 향해 호통을 쳤으면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오는 것은 내년이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 사실이 너무 슬펐다.
결국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베개를 온 몸으로 덮치며 울음소리만은 어떻게든 막으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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