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바츠의 친구들 -- > * 9화 *
다음날, 바츠는 아침식사를 하는 내내 케일리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주앉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아침식사까지 따로 먹는다면 케일리와 정말 멀어질 것 같아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대신 먼저 집을 나서는 케일리가 슬쩍 건네는 인사에 대꾸를 하지 않는 것으로 자존심을 지켰다. 먼저 사과를 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덕분에 테라치가 데리러 올 때까지 마음이 무거웠다.
“상대 공격을 보고 피하는 건 크게 의미가 없어. 그 전에 움직여야 돼. 그러면 오히려 상대가 공격하기 어려워지거든.”
테라치는 미사훈련소로 가는 동안 어제 가르쳐주려 했던 검술의 요점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가 되는 말들은 아니었지만, 뭔가 대단한 것임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생겨난 의문들을 묻지 않고 그냥 전부 기억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숟가락으로 스프를 떠먹어야 하고, 포크로 고기를 찍어야 하는 것처럼 그냥 외웠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왠지 강해진 것 같아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테라치는 정말 친절했다. 하지만 교실에 도착하고 먼저 와 있던 이롤로를 발견했을 때는 그 좋아진 기분을 전부 잊어야 했다.
“무슨 일 있어?”
이롤로는 언제나처럼 바츠보다 먼저 와 있었다. 일반학교에 다닐 때도 결코 늦는 법이 없었다. 가장 먼저 등교를 해서, 나중에 오는 바츠를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고는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롤로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도착한 바츠를 맞아주기는커녕, 자리에 앉아 팔을 포개고 누워있었다.
“너 얼굴이 정말 안 좋아.”
“바츠, 나 좀 그냥 내버려 둘래?”
이롤로는 바츠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피곤한지 귀찮아했다.
바츠는 이롤로가 오랜만에 돌아온 아버지와 즐거운 시간을 늦게까지 보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을 했으나, 걱정스런 마음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역시나 먼저 와 있던 아델리나에게로 갔다.
아델리나의 자리는 왼쪽 줄 두 번째 자리였다.
“아델리나?”
바츠는 아델리나를 바로 뒤에 서서 조심스럽게 불렀다.
아델리나는 배우려면 아직 이른 교본의 뒤페이지를 혼자서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한참 뒤에야 배우게 될 검술의 심화과정이었다. 얼핏 봐도 동작이 어려워보였다.
“응?”
아델리나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긴 머리칼이 얼굴을 가리자, 조금 짜증스럽게 옆으로 쓸어 넘겼지만 기분이 좋아보였다. 어제 일은 모두 잊은 듯 보였다.
“혹시 이롤로가 왜 저런지 알아?”
“이롤로? 글쎄, 엄마한테 혼났나?”
아델리나가 고개를 옆으로 빼더니, 자리에 누워있는 이롤로를 한 차례 살폈다.
“근처에 살잖아. 정말 아는 것 없어?”
바츠의 집은 레벨1의 2구역이었지만 아델리나와 이롤로의 집은 레벨1의 1구역에 있었다.
“정말 없어. 이롤로의 집은 우리 집에서 코너를 두 번이나 돌아야 한다고. 근데 고작 그거 물어보러 온 거야?”
“응? 응...아니, 혹시 이따 끝나고 검술 훈련장에 같이 가지 않을래? 테라치랑 연습하는데 너도 도움이 될 거야.”
아델리나가 자신의 머리칼이 자꾸만 방해되는지 다시 한 번 짜증스럽게 정리하며 대답했다.
“음, 난 별로야. 아우, 정말 귀찮아죽겠네.”
“머리카락을 자르는 건 어때?”
바츠는 아델리나가 피곤해하는 모습을 보다 못해 물었다.
“이 머리카락을 전부 자르라고?”
“응. 너 예전에는 단발머리로 다녔었잖아. 그게 편하다고.”
“싫어. 그건 예전이라고. 머리를 기르는 편이 좀 더 여성스럽지 않아?”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왜? 바츠는 이런 머리 싫어? 벨리타는 나보다도 머리가 더 길다고.”
아델리나의 말대로 벨리타의 머리는 그녀보다 훨씬 더 길었다. 머리를 기르기 시작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아델리나의 머리카락은 기껏해야 이제 어깨를 지나고 있었지만, 벨리타의 머리카락은 그녀의 허리까지 닿아있었다. 하지만 벨리타는 어릴 적부터 그랬던 것이고, 아델리나는 나중에 헤어스타일을 바꾼 것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아델리나는 검을 휘두를 때 방해가 된다며 단발머리를 선호했었다.
“머리가 너무 길면 검술을 할 때 불편하지 않아? 그런 거 싫어하잖아.”
“됐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나 보고 있던 것 마저 봐야 하니까 그만 가!”
아델리나가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바츠는 그녀의 기분이 변덕스럽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익숙하지는 않았다. 이롤로가 함께였다면 좀 나았을 테지만, 그는 여전히 책상 위에서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바츠는 쭈뼛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물론 아델리나에게 사과를 하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무엇이 미안한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화를 내도록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츠는 그렇게 제자리로 돌아오자 이롤로가 더욱 신경이 쓰였다. 그의 이런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평소대로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서로 장난치느라 바빴을 텐데, 이렇게 조용한 아침은 너무도 낯설었다. 그렇다고 별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기다려야만 했다.
“야, 야! 그만 싸워!”
그런데 그때, 저쪽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테라치의 목소리도 함께 있었다. 그의 바로 옆자리와 그 뒷자리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멱살을 잡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 모양이었다.
테라치의 옆자리에 있던 아이는 눈이 작고 인상이 날카로운 아이였다. 특히 눈매가 굉장히 무서웠는데, 늘 자신의 조상이 한국이라는 나라의 주인이었다며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하던 아이였다. 그리고 또 다른 아이는 눈뿐만 아니라 키도 작은 아이였는데, 앞서 말한 아이보다 상대적으로 인상은 서글서글했지만 눈매에 간사한 분위기가 묻어있었다. 앞서 말한 아이가 자신의 조상을 늘어놓으면 항상 지지 않고 자신의 조상들과 나라를 내세우며 맞서던 아이였다. 간혹 사람들이 앞서 말한 아이와 자신을 헷갈릴 때면 굉장히 불쾌해하며 자신은 일본 사람이라고 외치고는 했다.
바츠는 그 둘이 말하는 나라라는 것도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싸우는 이유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럴 필요가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바츠의 눈에는 둘 모두 그냥 바보 같아 보였다. 하지만 둘의 저런 모습은 일반학교에서부터 계속 된 것이라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때부터 이미 자주 다투는 것으로 유명했다. 아직까지도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지만, 과거 사람들이 지상에서 살 때 먼 조상들이 원수지간이었다고 들은 기억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싸우는 모습을 보면 그것 밖에 없었다. 평소에는 둘 모두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싫어할 정도로 조용한 성격들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둘은 테라치가 없었다면 결국 주먹다짐까지 벌였을 것이다. 테라치는 둘을 능숙하게 떼어놓았고, 진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서로를 향해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내뱉기는 했지만 더 이상 싸움이 커질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 역시도 저 둘의 특징이었다.
아르크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공용어가 있었다. 서로 먼 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모여든 터라 각자 다른 언어를 사용했었는데, 그것을 하나로 통일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영어라고 불렀는데, 저 둘은 그것에 개의치 않고 영어를 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조상이 쓰던 언어를 그대로 이어서 쓰고 있었다. 특히 조상이 한국이라는 나라에 살았다는 아이가 그랬다. 그 아이는 자신들의 언어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했다. 예전에 바츠에게도 그 언어에 대해 알려주었었는데, 대부분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기억나는 건 ‘안녕하세요’라는 말과 ‘감사합니다’라는 말뿐이었다. 공용어로 안녕(Hello)이라는 뜻과 고맙다(Thank you)라는 뜻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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