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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10화 (10/268)

< --   1. 바츠의 친구들   -- >         * 10화 *

바츠는 그때 배운 언어에 대해서 비록 많은 것을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매우 흥미로웠던 경험이었다. 모든 언어의 소리를 글로 쓸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눈앞에서 보여주었다. 다른 아이들이 공용어인 영어뿐만 아니라, 이제는 고대어라고 불리는 라틴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각기 다른 전통 언어들을 말할 때마다 그 자리에서 한글이라는 것을 통해 적어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확실히 놀라운 일이었다. 아니, 그래 보였다. 그때 그는 분명 막힘없이 멋스러운 글자를 적어냈었다.

“모두 왔나!”

테라치가 그 둘을 진정시켰을 찰나, 때마침 마티프가 교실로 들어섰다. 그 특유의 큰 목소리가 고막을 자극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이롤로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 정면을 바라보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차라리 그냥 누워있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불안한 얼굴이었다.

“그래, 내가 오늘 무엇을 물어볼 것이라고 했지?”

“카니지 블레이드요!”

자리에 서자마자 이어지는 마티프의 물음에 아이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좋아! 가이즈카, 네가 한 번 대답해보아라. 카니지 블레이드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지?”

마티프가 조금 전 그가 들어오기 직전까지 다투고 있던 아이 중, 키가 작은 아이를 지목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공용어로 자신 있게 대답했다.

“10만 광년 이상 떨어진 곳에서부터 날아온 운석에는 피니움이라는 금속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만들어집니다. 3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술이 부족해 가공은커녕 확인조차 할 수 없던 금속이었지만, 250여 년 전 사령관께서 개발하신 멘다치오룸이라는 기술을 통해 확인, 가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징으로는 가공된 표면의 색이 주인에 따라 변한다는 것인데, 아직까지 그 원인은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가이즈카가 대답을 끝내고 자리에 앉자, 마티프가 매우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자한 태도로 몇 번이나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바츠는 배웠던 기억이 전혀 없는 새로운 사실에 조금 당황스러웠으나, 헌터가 되기 위해서 이런 것들이 굳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번에는 쉬운 문제다. 카니지 블레이드의 색은 어떻게 변하지? 이번에는 지훈 네가 대답해보아라.”

마티프가 가이즈카의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던 아이를 지목했다. 가이즈카와 멱살잡이를 했던 아이였다.

지훈은 여자처럼 마른 몸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이즈카와 다르게 느긋한 움직임으로 몸을 일으켰다. 답답하게 느껴질 만큼 매우 게을러 보이는 모습이었다.

바츠는 지훈의 태도가 결국에는 마티프의 호통을 부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어제 깜빡 졸았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마티프는 그 모습을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었다. 팔짱을 끼고 차분하게 기다렸는데, 그렇다고 바츠의 기대를 저버린 것은 아니었다. 엉뚱하게도 그의 심드렁한 태도가 아닌 내뱉은 말에 대한 간단한 주의였으나 바츠를 흐뭇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영어로 대답하여라. 여기에는 너 말고 그 고대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말이야.”

지훈이 평소에 그렇게도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하던, 한국어라는 언어로 대답을 했기 때문이었다.

마티프가 조금 당황한 눈치였지만 침착하게 지훈을 다독였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교실에 아이들은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어리둥절했다. 한쪽에서는 지훈을 향해 멍청이라고 부르는 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지훈은 마티프의 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시 또 한국어로 대답을 했다.

“다시 말하지만 영어로 대답해라.”

마티프의 목소리가 좀 더 단호하게 변했다. 당장이라도 그 검은 얼굴을 지훈의 코앞에 가져다댈 기세였다. 한 눈에도 기분이 언짢아보였다. 무시당한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화가 난 모양이었다.

바츠는 자신의 일도 아닌데, 괜히 몸서리가 쳐졌다. 그에게 당했던 어제가 선명하게 기억났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아찔한 기억이었다. 그때가 떠오르자 시선이 저절로 이롤로에게 향했다.

이롤로는 지금 교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이제는 조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꾹 다물고 있는 입술이 울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 지훈은 결국 마티프에게 호되게 혼나고 말았다. 아르크 내부의 온도를 조절해주는 증기가 관을 타고 지나는 것 같은 마티프의 그르릉거리는 호통이 교실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분을 참기 위해 노력했던 삭힌 목소리로 지훈을 교실 밖으로 내쫓았다. 다음 오후수업에나 들어오라는 명령이 자리를 떠나는 지훈의 뒤통수에 꽂혔다.

바츠는 뚱한 표정으로 교실을 빠져나가는 지훈을 바라보며 한숨이 절로 났다. 테라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바츠가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리자, 눈이 마주친 테라치가 어깨를 한 차례 으쓱했다.

“지훈, 너 왜 그러는 거야? 공용어를 쓰라고.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바츠는 오전수업이 끝나고 마티프가 자리를 비운 사이, 다시 자리로 돌아오는 지훈을 불러 세워 물었다. 그러자 지훈은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로 억울함을 토로했다. 정확히는 항상 그래왔던 자부심을 또 내세웠다.

“이건 한국어라는 거야. 아주 오래된 언어라고. 공용어인 영어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거야.”

“나도 그게 한국어라는 건 알아. 고대어잖아. 그런데 아르크에서 그걸 쓰는 사람은 정말 적다고.”

바츠는 지훈의 가족 말고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훈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내기에서 진 사람처럼 분한 듯 악을 쓰다시피 소리를 지르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서 문제라는 거야! 이 완벽한 언어를 공용어로 해야 한다고!”

바츠는 그런 지훈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이번 미사훈련소의 입학생 중 성적이 2등이라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척척 풀어내는 모습은 놀랍다 못해 경악스러울 정도였으나, 이처럼 전혀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면 조금 이상하게 보였다. 케일리가 머리가 너무 좋으면 정신이 어떻게 된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지훈은 아마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인 것 같았다.

“그냥 내버려둬. 저 녀석 예전부터 저랬어. 역사에 집착하지. 한국 핏줄은 다 그런 것 같아. 일본 핏줄하고는 항상 앙숙이야. 그런데 이롤로는 무슨일이라도 있는 거야?”

쉬는 시간을 이용해 화장실을 갔던 테라치가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바츠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자리로 돌아간 지훈과 어느새 다시 팔을 포개고 누워있는 이롤로를 차례로 가리키며 말했다.

바츠는 테라치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젓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자신도 그것이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두운 모습의 이롤로는 본 적이 없었다. 테라치가 그런 이롤로의 등에 슬쩍 손을 올려보았지만 피곤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을 뿐이다.

“아무래도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인 모양이야. 기분이 좀 풀릴 때까지 그냥 혼자 있게 두자.”

테라치가 바츠만 들을 수 있도록 속삭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바츠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했지만 심란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다시 시작된 오후 수업 내내 이롤로에게로 자꾸만 눈길이 갔다.

“곧 있으면 검술 훈련을 정식으로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일반학교에서 배웠던 것을 떠올리면 오산이야. 일반학교에서 배운 것이 포크를 집는 법이었다면, 여기서 배우는 검술은 포크로 음식을 찍고 입으로 넣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훈련을 무사히 수료하게 될 쯤에는 실전훈련도 하게 될 텐데, 혹시 프레이가 뭔지 아는 녀석 없나?”

오후 수업이 막바지에 이르자, 마티프가 교실 전체를 향해 물었다.

바츠는 프레이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교실 한 쪽에서 누군가가 자신 있게 목소리를 높였다.

“크루엘라가 지상에 퍼진 이후로 인간을 제외하고 지상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동물로, 최대 1미터까지 자라는 설치류입니다. 잡식성이고요.”

“그래. 바로 맞췄다. 한 가지 이야기를 해주자면, 녀석들은 헤러티커들에게 아주 좋은 먹잇감이다. 우리를 대신해서 잡아먹힌다는 말이야. 그래서 이름도 프레이(Prey)다. 감사해야 하지.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녀석들도 굶주리게 되면 너희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전훈련에 쓰일 프레이들은 당연히 굶주려 있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다들 각별히 조심해야 할 거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사령관께서 아르크를 세우시고, 아이기스로부터 지켜내셨다!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아르크를 지키고, 나와 가족 그리고 사령관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마티프가 수업종료를 알리자 아이들이 일제히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바츠는 서둘러 짐을 정리하고는 이롤로를 돌아보았다.

이롤로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기운이 없어 보였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걸음이 평상시보다 배는 더 빨랐다.

바츠는 그 뒤를 따라가려다가 문득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마티프가 자신을 향해 무섭게 굴고 난 이후, 이롤로에게 으름장을 놓았던 일이었다. 틀림없었다. 마티프가 이롤로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 분명했다. 바츠는 걸음을 멈추고, 아직까지 자리에서 짐을 챙기고 있는 마티프를 향해 돌아보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크게 한 후에, 이를 악물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이지?”

마티프는 바츠가 도착하기도 전에 바츠의 움직임을 미리 알아차렸다.

바츠는 그의 묻는 말에 마른 침이 절로 삼켜졌다. 테라치와 아델리나의 자리를 돌아보았지만 그들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 교실에는 마티프와 바츠 뿐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마티프가 앞에서 머뭇거리는 바츠를 팔짱을 끼고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이롤로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바츠는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위장이 입으로 튀어나고 정신을 잃고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이 눈앞이 아찔했다. 그러자 마티프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하고, 입이 스르르 열렸다.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늘 거만해 보이는 그를 평생 놀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바츠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당장 아버지가 보고 싶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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