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바츠의 친구들 -- > * 11화 *
“뭐라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분명 크게 놀랐던 마티프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에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한쪽 눈가를 씰룩이는 모습을 보면 단단히 화가 난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빠르게 마음을 추스르고 상황을 신중하게 판단하려는 듯 보였다. 겉으로만 보면 당장이라도 바츠를 향해 일갈을 날려도 시원찮아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바츠는 마티프의 눈매가 번뜩이자 그의 검은 얼굴이 더욱 공포스럽게 보였다. 어릴 적, 잠자리에 들 때면 항상 침대 밑에 숨어 있던 그 괴물의 모습이 지금의 마티프를 꼭 닮아있을 것 같았다.
“그, 그러니까...이롤로가요...”
바츠는 그 괴물 앞에 서서 한마디도 할 자신이 없었다. 그가 분명 지옥으로 잡아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숨을 죽이고 그가 발견하지 못하기만을 기도해야 했다. 그를 물리치려면 용기를 내, 침대에서 뛰어내려와 불을 켜거나 아버지가 달려와야만 했다. 하지만 교실은 이미 충분히 밝았고, 아버지는 올 수가 없었다.
“이롤로? 그 빨간 머리 녀석?”
바츠는 마티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이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조용하기는 하더구나. 그 녀석 원래 말썽쟁이라지?”
마티프가 미묘한 미소로 물으며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작은 기기를 집어 올렸다. 그의 얼굴보다 더욱 까만색의 단말기였는데, ‘아르크의 눈’이라고 불리는 PMP(Portable-Multimedia-Player)였다.
바츠는 아르크의 눈을 한손으로도 능숙하게 다루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티프의 간단한 손놀림이 지나자 아르크의 눈이 홀로그램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학생들의 성적은 물론 각종 기록들을 모아둔 정보였는데, 각각의 사진과 함께 한눈으로도 쉽게 살펴볼 수 있도록 잘 정리되어 있었다.
마티프는 이롤로의 사진이 있는 기록에서 손을 멈췄다.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살펴보더니, 굳은 얼굴로 바츠를 바라보았다. 도둑질을 들킨 케일리의 얼굴처럼 매우 심각했다.
“너하고 많이 친한 모양이구나.”
바츠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네 친구를 괴롭히기라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냐? 확실하게 말하마. 그건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도 아니야. 돌아가거라. 정말 소중한 친구라면 지금 여기서 나와 있을 것이 아니라 그 친구 옆에 있어줘야 할 것이 아니냐? 1분이라도 더 그 친구와 함께 하여라.”
바츠는 마티프의 말에 이제라도 이롤로를 쫓아가기 위해 허겁지겁 달렸다. 지금쯤이면 이미 집으로 돌아갔을 테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조급함이 서두르게 만들었다. 이렇게 빠르게 달려본 적은 없었다. 재작년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에도 이렇게 서두르지는 않았다.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달렸다. 하지만 레벨3을 막 빠져나가기 직전, 황급히 멈춰서며 돌아보아야 했다. 레벨2로 향하는 통로로 진입하려는 찰나, 저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바츠!”
테라치의 목소리였다. 바츠는 정신없이 달리는 와중에도 그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감지했다.
“어디 갔다가 이제야 오는 거야?”
테라치는 통로 근처에서 여자아이 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때마침 그 앞을 지나는 바츠를 발견하고 불러 세운 듯 보였다.
바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테라치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테라치가 가까워진 바츠가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여자아이 중 한 명에게 자신감 있는 태도로 무엇인가를 재촉했다.
“한 번 물어봐. 내 말이 거짓말인지.”
테라치의 재촉에 떠밀린 여자아이는 레벨2의 거주자라는 표식이 있는 옷을 입고 검은 머리칼을 허리까지 기르고 있었는데, 빙그레 웃는 얼굴로 테라치를 한 번 흘기고는 바츠를 향해 물었다.
“바츠, 너 요즘 정말 공부를 또 안 하는 거야?”
바츠는 여자아이의 물음에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누가 그런 말을 해?”
“테라치가 그러던 걸. 네가 요즘 게을러졌다고. 어제 검술 연습 같이 했다며. 그런데 네가 하기 싫어했다고 했어. 정말이야? 그리고 날 보았다면서? 왜 아는 척하지 않았어?”
바츠는 어제 있었던 일을 멋대로 늘어놓은 테라치가 원망스러웠다. 사실대로 말했더라면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벨리타, 아니야. 정말 아니야. 하기 싫어서 그랬던 게 아니야. 그냥 기분이 우울했어.”
바츠는 별안간 그녀에게 해명하기 위한 변명을 해야 했다. 모두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워서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왜?”
벨리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그녀의 검은색 긴 머리칼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바츠는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며 가슴이 뛰기 시작해, 그녀에게 모두 털어놓을 뻔했다. 만약 가쁜 숨이 아니었다면 절로 튀어나와,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창피할 뻔 했다.
“누나와 다퉜거든. 그래서 기분이 별로였어.”
바츠는 거짓말을 했다. 동시에 테라치가 의아한 얼굴로 어제 있었던 일을 되뇌는 모습을 보자, 긴장감에 입술이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테라치가 눈치 채기 전에 무엇이든 해야 했다. 그가 더 이상 어제를 떠올리지 못하게 해야 했다.
“테라치, 어떻게 된 거야? 바츠는 아니라는데? 왜 바츠를 괴롭히고 그래, 혼나 볼래?”
때마침 벨리타가 그런 테라치를 장난스럽게 쏘아보며 바츠를 구해주었다. 그리고 테라치는 벨리타의 성화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한 눈에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것이 보였다.
바츠는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바츠, 그럼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는 거지?”
벨리타가 다시 고개를 돌려 바츠에게 물었다.
바츠는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찰랑이는 그녀에 검은 머리칼의 달콤한 향기를 느꼈다. 정확히 무슨 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느껴졌다. 기분을 좋게 만드는 묘한 기운이 있었다. 그리고 구부러진 눈꼬리로 바라보는 동그랗고 검은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덥석 안고 싶게 만들었다.
“물론이지. 난 꼭 헌터가 될 거니까.”
“그래. 나도 열심히 해서 연구원이 꼭 될 테니까, 너도 헌터가 돼서 아르크를 지켜줘. 그러면 내가 반드시 크루엘라를 치료할 수 있는 백신을 만들게. 그러면 그때 함께 바다에 가보자.”
바츠는 그녀에게 힘차게 대답하고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저절로 웃음이 쏟아졌다. 침대 위로 몸을 던져, 몇 번이나 좌우로 굴러도 멈출 줄 몰랐다. 평생 웃다가 죽을 것만 같았다. 지금의 기분이라면 케일리에게 먼저 말을 걸 수도 있었다. 마치 미사훈련소로 진학이 결정되던 그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하지만 케일리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자신이 잘못하고도 먼저 사과를 하지 않는 것이 너무도 괘씸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참 뒤에야 이롤로를 찾아가려고 했던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 중요한 일을 잊었다는 것이 정말 바보 같았다. 지금도 혼자서 힘들어하고 있을 이롤로를 생각하니 가슴이 다 아팠다. 모두 케일리 탓이었다. 이제라도 찾아가봐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지만, 내일이면 모든 것이 좋아져 있을 것이라고 위로하며 뜻을 접었다. 자고 일어나면 다 잊고 전으로 돌아와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아델리나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바츠의 기대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튿날 이롤로는 아예 학교에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롤로가 아직 안 왔네?”
함께 등교한 테라치도 그것이 이상한지, 이롤로의 빈자리를 보며 의아해했다.
바츠는 테라치의 그런 모습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일반학교를 다닐 때부터 줄곧 친하게 지내서 잘 알고 있었는데, 이롤로는 절대 지각을 할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적도 나름 준수했고 무엇보다도 학교에 다니는 걸 좋아했다. 특히 바츠처럼 헌터가 꿈이었는데, 그렇게 그리던 미사훈련소에 드디어 입학했는데 지각을 한다는 건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롤로라면 미사훈련소에서 매일 잘 수도 있었다.
“우리보다 늦은 적은 처음이지?”
“응. 한 번도 우리보다 늦은 적 없는데.”
바츠는 테라치의 물음에 답하며 불안한 기분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지각을 하게 된 건지, 결석을 하게 되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했다. 어제 늦게라도 가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테라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어제와 다르게 심각한 얼굴이었다. 한 번 더 말을 걸어보지 않은 걸 후회하는 눈치였다.
바츠는 테라치마저 불안해하는 걸 보니 정신이 멍했다. 그리고 이롤로는 수업이 시작할 때까지도 오지 않았다. 이롤로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보는 그의 결석이었다. 덕분에 바츠는 수업 시간 내내 몇 번이나 이롤로의 빈자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의 현실이 믿기지 않은 탓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마티프에게 계속해서 주의를 들었다. 무려 세 번이나 됐다.
“바츠, 마지막 경고다. 또 다시 한 눈을 판다면 그때는 용서 없어.”
마티프의 인내가 한계에 달했다. 어제의 지훈처럼 언제든지 교실 밖으로 내쫓길 수 있었다. 지금까지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하지만 바츠는 결국 마티프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마티프는 바츠의 고개가 다시 한 번 이롤로의 자리를 향해 돌아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마치 목소리로 뺨을 때리는 것 같았다.
“바츠!”
마티프의 불호령에 넋 놓고 있던 바츠는 온 몸으로 움찔했다. 케일리의 징그러운 새끼손가락이 목덜미에 닿았던 것보다 더욱 소름이 돋았다.
“자꾸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구나.”
마티프가 자신의 검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다가왔다.
“이롤로가 오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바츠는 그런 마티프를 향해 필사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그가 다가오던 걸음을 멈추고는 이롤로의 자리를 잠시 응시했다.
바츠는 마티프의 저런 눈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를 처음 본 것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라면 절대 저런 눈을 할 리가 없었다. 그의 눈에 안타까움이 잔뜩 묻어났다.
“...네가 이 녀석을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네가 여기서 퇴학을 당한다면 너 역시도 언젠가는 같은 처지가 될 테니 말이야.”
바츠는 마티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 그 안쓰러움이 묻은 눈이 이롤로의 빈자리를 향한 것인지, 자신을 향한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의 말투는 상냥했다. 플랫폼에 가지 말라고 당부할 때만큼 부드러웠다. 헤러티커만큼 거칠어 보이는 그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하지만 바츠는 그가 한 말이 자신에게 결코 좋은 소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더 이상 이롤로의 빈자리를 쳐다보지 않았다. 마티프의 경고도 더 이상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