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2화 (12/268)

< --   2. 각자의 길   -- >         * 12화 *

바츠는 남은 수업이 너무 길고 따분하게 느껴졌다. 마티프의 말에 다잡았던 마음도 어느새 풀렸다. 그의 목소리가 지루할 정도였다.

그는 수업시간 내내 과장된 몸동작과 거친 억양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수업에 집중하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빳빳하게 세운 허리의 긴장감을 좀처럼 풀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그의 끔찍한 얼굴을 바로 코앞에서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츠는 시간이 지날수록 어깨가 쳐지고 몸이 늘어졌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시간이 지나가길 바랐다.

“헌터는 전진기지를 떠나면 완전히 자유가 된다.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지. 물론 기본적인 지침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침일 뿐, 따를지 말지는 모두 본인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 책임에 대한 것 역시 본인이 모두 짊어져야 한다. 그것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예리한 칼날뿐이지. 모두들 명심해라. 헌터는 자신의 죽음도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을 말이다. 그 누구에게도 전가하지 않는다. 전진기지는 그저 쉘터(Shelter)일 뿐이다. 절대 잊지 마라. 오늘은 여기까지다! 집으로 돌아가, 자신에게 헌터가 되어야 할 이유가 정말로 합당한지 생각해보도록 해라!”

바츠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이롤로의 집으로 달려가 볼 셈이었다. 그리고 테라치가 그런 바츠를 붙잡으며 이롤로에게 가보지 않겠느냐며 먼저 제안을 해왔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혼자보다는 둘이 가는 편이 훨씬 편했고, 그것이 테라치라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바츠는 테라치와 함께 걸음을 옮기자 절로 든든해졌다. 이롤로를 향한 걱정이 조금 덜어질 정도였다. 게다가 통로에서 마주친 벨리타가 함께 가겠다며 나서는 바람에,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집안일을 도와야 했지만, 사정을 듣고는 흔쾌히 나섰다. 덕분에 레벨1로 돌아가는 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이롤로의 집에 놀러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 맞지?”

테라치가 어느 낡은 양철 문 앞에 멈춰서며 물었다.

양철 문은 본래 빛깔이 아름답고 세련된 은색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전체가 황갈색으로 변색된 채 상당부분이 부식되어있었다.

바츠는 굳게 닫혀 있는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 그 옆에서 테라치가 기다리지 못하고 이롤로를 열심히 불러댔다. 하지만 안에서는 그 어떤 대답도 없었다. 심지어 작은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 봐.”

벨리타가 문고리의 위쪽과 아래쪽을 차례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녹슨 자물쇠가 무려 두 개씩 매달려있었는데, 문을 다시는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굳게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롤로의 집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옆집은 물론이고 주변의 10여 가구가 전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바츠는 기분이 이상했다. 골목 전체가 조용했다. 사람의 인기척은 저 멀리 코너를 돌아야만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구역처럼 느껴졌다. 부식으로 생긴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너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구역으로 이사했거나 다른 레벨로 갔을지도 몰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자.”

결국 바츠는 이롤로를 만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테라치가 애써 위로해주었지만, 그런 그의 표정에 심려스러운 마음이 너무도 뚜렷했던 터라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바츠는 오로지 테라치를 위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집안에서 방금 전 테라치의 얼굴보다도 더욱더 어두운 표정의 케일리를 발견해야 했다.

케일리는 테이블에 앉아서 마치 바츠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바츠를 발견하더니 아무런 말없이 손짓으로만 불렀다.

바츠는 그녀가 거의 이틀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에 크게 상심한 나머지, 이제라도 사과를 하려는 줄 알았다.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지만, 만약 정말로 사과를 해온다면 시원하게 받아줄 마음이 있었다. 여전히 케일리가 미웠지만, 더 이상 그녀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롤로의 일로 너무도 힘들었다. 케일리와 신경전을 이어갈 만한 여유가 없었다.

“무슨 일 있어?”

바츠는 모른 척 퉁명스럽게 물었다.

“...바츠, 놀라지 말고 들어.”

케일리가 생각보다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작년 남자친구와 데이트 비용으로 배급표를 낭비하는 바람에, 식료품이 모자라게 되었을 때 이후로 가장 진지한 얼굴이었다.

“엊그제 외부 엔지니어들이 돌아왔잖아. 그런데...그게...이롤로의 아버지가 돌아오지 못하셨대.”

바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연 케일리의 말이 단 번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중간에 머뭇거렸기 때문이 틀림없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정말이야?”

바츠는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녀는 가끔 말을 어렵게 하고는 한다. 그녀 말로는 자신이 감수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바츠의 눈에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 같았다. 그러나 케일리는 바츠의 신경질적인 태도에도 평소처럼 맞대응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과하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도 부족할 판인데, 오히려 처음 모습 그대로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유도 묻지 않고 울지 말라는 바츠의 말에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바츠는 몸을 돌렸다. 다시 이롤로의 집에 가볼 작정이었다. 이번에는 그냥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발로 걷어차서라도 들어갈 볼 셈이다.

“어디 가니? 이롤로의 집에 가는 거야? 가지 않는 게 좋아.”

케일리가 바츠를 말려 세웠다.

바츠는 케일리가 자신을 붙잡고 매달린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리가 고장 난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서더니, 제멋대로 몸을 돌려세웠다.

“왜?”

“이롤로의 집에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

“그게 무슨 말이야?”

바츠는 바보가 아니었다. 케일리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것도 아니었다. 이롤로가 학교에 오지 않은 이유까지 전부 말이다. 그런데도 혀는 제멋대로 굴었다. 시키지도 않은 질문을 마구해 댔다. 온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이롤로의 어머니가 몸이 불편하신 건 알지? 몇 년 전에 모자란 배급표를 벌기 위해서 플랫폼 청소를 하시다가 다리를 다치셨잖아.”

바츠는 그녀에 대해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친절이 몸에 밴 여자였다. 이롤로는 그녀를 닮아 착했던 것이 분명하다. 놀러 가면 언제나 환영해주었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걸음으로 항상 많은 것을 챙겨주려고 노력했었다. 그리고 입버릇처럼 자신의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그때마다 이롤로가 질투하며 반발했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이롤로를 놀리며 둘이서 많이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이롤로네는 아버지가 없으면 아무도 경제활동을 하지 못해. 그럼 어떻게 되는지 알지?”

바츠는 한참동안 생각해야 했다. 케일리가 한 말의 의미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변해버려서 사고가 정지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의미를 떠올리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어려운 수학 문제를 한 시간 동안 붙들고 있었을 때보다도 수십 배 더 끔찍한 두통이 일었다.

“그래...이롤로는 어제 저녁에 어머니와 함께 아르크에서 쫓겨났어...”

케일리가 바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았는지, 대신해서 입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는 시험을 망쳤을 때처럼 테이블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서럽게 울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그때만큼 엉엉 울었다.

바츠는 자신도 눈시울이 뜨거운 것이 느꼈다. 하지만 눈물이 흘러내리기도 전에 얼른 소매로 두 눈을 훔쳤다. 눈물이 아니라 눈을 닦아내려는 것처럼 거칠게 문질렀다. 그러자 불에 덴 것처럼 눈가가 전부 따끔거렸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눈물은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 케일리가 통곡을 하며 우는 것보다 더 많은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소매에 쓸린 눈이 고통스럽기 때문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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