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 각자의 길 -- > * 14화 *
벨리타는 바츠에게 자신이 쓰던 연습용 검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 것은 테라치에게 주고, 자리까지 양보해주었다. 덕분에 바츠는 단상 위에서 제대로 된 연습을 하게 되었다.
바츠는 자신으로 인해서 벨리타가 불편하게 된 것 같아 미안했지만, 굳이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은 충분히 연습했다며 서둘러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녀가 정말 고마웠다.
“저기 아델리나 아니야?”
막 연습을 시작하려는 찰나, 테라치가 한 쪽 구석을 가리켰다.
바츠는 그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구석에서 어깨까지 기른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홀로 허공에 검을 휘두르고 있는 여자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매섭게 노려보다가 마구 검을 휘두르고는 했다.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아델리나, 혼자서 뭐하고 있는 거야?”
바츠는 단상을 내려가 그녀를 데리러 갔다. 단상은 어른 다섯이 자리 잡고 서기에도 충분했다. 바츠보다도 체격이 작은 그녀가 올라온다고 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계기판을 조작해 연습용 허수아비가 솟아오르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셋이 나란히 서서 각자 연습도 가능했다. 게다가 테라치가 부족하거나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 기꺼이 가르쳐 줄 수도 있었다. 함께 하면 그녀에게 더욱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단호한 말로 거절했다. 어찌 보면 조금 무서워 보일 정도로 딱딱하게 대꾸하고는 다시 연습에 몰두했다.
“연습하는 거 안 보여? 난 꼭 헌터가 될 거야. 우리 어머니도 이롤로의 어머니처럼 별다른 기술이 없으시거든. 상업 지구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계셔.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이롤로처럼 내쫓겨질 거야. 하지만 내가 헌터가 되면 이야기는 달라. 오히려 나를 위해서 우리 어머니를 지켜주겠지. 난 가족을 지켜야 해. 너도 가족이 있잖아.”
바츠는 아델리나에게 함께 연습하자는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그녀가 너무 진지하게 열중하고 있어서 말을 거는 것 자체가 방해 같았다. 그래서 결국 혼자서 돌아와야 했다.
바츠는 돌아오며 케일리를 떠올렸다. 지난번 다퉜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테라치에게 양해를 구하고, 중간에 먼저 훈련장을 빠져나왔다.
케일리는 아버지가 없는 동안 유일한 가족이었다. 아델리나 말대로 지켜야 할 그런 가족.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먼저 사과하고 다시 친하게 지내고 싶어졌다. 그런데 훈련장을 막 빠져 나가려는 찰나, 바츠는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조급한 마음으로 걸음을 서두른 탓이었다. 물론 상대가 때마침 코너를 돌아 나오는 바람에 발견하기 힘들기는 했지만, 케일리 생각으로 미처 앞을 살피지 못하고 부주의했다.
바츠는 눈앞이 번쩍여 자신과 부딪힌 상대가 누구였는지, 확인도 하지 못하고 사과부터 했다. 얼핏 덩치가 큰 것을 보면 어른임이 틀림없었다.
“죄송해요.”
“잘못을 했으면 제대로 사과를 하라고.”
그러나 돌아온 것은 불쾌한 목소리로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바츠는 고개를 털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후 눈앞의 상대를 확인했다. 그는 바츠보다 두 배는 클 정도로 덩치가 좋았고, 정말 어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동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버니?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리고 너도 갑자기 튀어나왔으니 잘못이 있다고.”
“뭐라고!”
버니에트와가 두 눈에 불을 켜며 바츠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는 앞뒤로 몇 번 흔들더니 바츠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바츠는 그의 엄청난 힘에 깜짝 놀랐다. 꼭 아르크 전체가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을 채 느끼기도 전에 바닥에 주저앉아야 했다. 놀란 가슴과 몽롱한 정신으로 얼굴을 얻어맞으니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방금 전 그와 부딪혔을 때와는 전혀 다른 충격이었다. 머리가 심하게 흔들려 중간에 잠을 깬 것처럼 얼떨떨했다. 온 몸에 힘이 없었다.
“쪼그만 놈이 어디서 까불어!”
바츠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버니에트와가 거인처럼 보였다. 만약 이 모습을 발견하고 달려온 테라치가 아니었더라면 그의 발길질에 죽을 것만 같았다.
“뭐하는 짓이야!”
“뭐야, 네가 대신 싸우기라도 할 거야?”
“아니, 너와 싸울 생각 없어. 하지만 바츠를 계속 괴롭힌다면 어쩔 수 없겠지!”
테라치가 앞을 가로막으며 버니에트와를 당당하게 올려다보았다. 그는 바츠의 꿈속에서 헤러티커들과 맞서는 ‘라파엘’같았다. 전혀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용감하게 압박했다. 바츠와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버니에트와는 헤러티커가 된 것처럼 그의 눈치를 살피며 달아나듯 자리를 떠났다. 걸음을 옮기며 그때까지도 주저앉아 있던 바츠를 향해 한 차례 입술을 씰룩이며 아쉬운 기색을 보였지만, 테라치가 옆에 있는 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괜찮아?”
버니에트와가 멀리 가버리자, 테라치가 바츠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바츠는 얼얼한 왼쪽 볼을 문지르느라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내일이면 크게 부어오를 것 같았다. 하지만 당장의 고통보다도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다른 아이들의 킥킥거리는 비웃음소리가 더 신경 쓰였다. 그래서 테라치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달렸다. 너무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창피했다. 자신이 약하다는 것이 너무도 속상했다. 케일리를 지키기는커녕 자신도 보호하지 못하는 것이 한심했다.
바츠는 달리고 또 뛰었다. 이롤로를 위해 달리려고 했던 것을 지금 모두 토해냈다. 차라리 이롤로를 대신해 자신이 지상으로 쫓겨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렇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될 테니까 말이다. 다행인 건 벨리타가 그 전에 먼저 훈련장을 떠나,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함께 있었다면 정말 아르크를 떠나야 했을 지도 모른다.
바츠가 정신을 차리고 달리던 것을 멈춘 건 플랫폼 근처까지 왔을 때였다. 어느새 레벨1로 돌아온 것으로도 모자라 한참을 달렸던 모양이었다. 한숨이 절로 났다. 내일을 생각하면 정말 끔찍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오로지 걱정뿐이었다. 집으로 가기도 싫었다. 그래서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플랫폼 대기실을 찾아가 보았다.
바츠는 대기실에 7번이나 가봤었다. 그 중 2번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거의 기억이 나질 않았고, 1번은 정말 희미했다. 하지만 나머지 4번의 기억으로도 충분했다. 길을 잃지 않았다.
대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이틀 전 모두 다녀갔을 것이다. 그리고 어제는 부상당한 헌터 한둘이 왔다갔을 것이다.
바츠는 강화유리에 바짝 붙어 밖을 내려다보았다.
플랫폼에는 십 수 명의 내부 엔지니어들과 소총을 든 군인들이 있었다. 내부 엔지니어들은 군인들의 보호 하에 주변을 살피고 있었는데, 무릎 높이까지 차올라 있는 수증기들을 헤집고 있는 걸 보니 수증기의 성분을 분석하는 모양이었다.
바츠는 일반학교에서 배웠던 것이 떠올랐다. 내부 엔지니어들은 아르크 내부의 유지보수가 주된 업무이지만, 가끔씩 이렇게 지상의 대기 상태를 조사한다고 했었다. 물론 외부 엔지니어들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도 있지만 빅애스가 닫히면 외부와의 송수신이 완전히 차단될 뿐만 아니라, 외부 엔지니어들의 업무는 전진기지의 유지보수이기 때문에 그들의 정보는 전문적인 것이 아니라고 했었다. 그래서 지상의 대기 상태를 조사하기에는 지금 이맘때가 가장 좋은 기회라고 했다. 1년 중 가장 오랫동안 빅애스가 열리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바츠는 가끔씩 들리는 증기소리와 기계음 말고는 고요하기만 한 플랫폼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 가슴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특히나 물결처럼 출렁이는 자욱한 수증기들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몸을 던지면 푹신한 침대처럼 도로 튀어오를 것처럼 보였다. 매우 신기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었다. 엔지니어들과 수증기에 정신이 팔려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다. 바츠는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미 어제 부상을 회복하고 돌아갔을 헌터들을 마지막으로, 폐쇄되었어야 할 문이 반쯤 열린 채로 지금까지 개방되어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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