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7화 (17/268)

< --   2. 각자의 길   -- >         * 17화 *

테라치와 아델리나가 바츠의 말을 믿게 된 건 수업을 마치고, 그 전학생의 얼굴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였다.

바츠는 전학생을 보러가기 전, 둘에게 그날 보았던 아이들의 얼굴을 최대한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특히 그 중 여자아이를 정확히 묘사했다. 남자 아이는 당시 기억으로 가늠해보았을 때 아직 학업을 시작하기에 어린나이로 보였지만, 여자 아이는 충분히 학교에 다닐 만한 또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이번에 일반학교로 전학을 오게 된 아이는 여자 아이였다. 한 학년 아래의 소녀로 오른쪽 뺨에 그 상처가 뚜렷하게 있었다.

수업이 끝난 것은 이미 한참 전이었지만 학교는 여전히 아이들로 북적였다. 그로인해 그 아이를 찾아보는 것이 매우 힘들었지만, 반대로 그 덕분에 애써 찾아 헤맬 필요도 없었다.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지금까지도 교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기심 때문에 몰려든 아이들 때문이었다. 심지어 나이는 물론이고 거주지가 다른 아이들까지 관심을 보였다. 아르크의 모든 학생들이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덕분에 엄청난 혼잡으로 서로 밀고 밀치며 여기저기서 사소한 다툼도 일었다.

“전학생을 보러 온 거야?”

벨리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항상 같이 다니던 그녀의 친구와 함께 있었다.

바츠는 테라치와 아델리나에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러 왔다는 말을 하려다가, 그랬다가는 설명해야 할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질 것 같아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름이 애니래. 예쁜 이름이지? 이름만큼 얼굴도 예쁘더라. 헤러티커 같은 괴물도 있고 위험한 바이러스도 있는데, 저렇게 어린 여자애가 무사히 살아가고 있었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어. 부랑자들의 약탈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대. 그들 말고도 지상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나 봐. 가끔 오랫동안 먹을 것이 없게 되면 서로를 잡아먹기도 한다는데, 끔찍해. 저 아이도 그랬을까?”

벨리타는 이미 아이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지, 혼란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르크에서는 재미있는 이야기꺼리나 즐거운 놀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놀이라고는 기껏해야 헌터 놀이가 있을 뿐이었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역사서를 통해 인간이 지상에서 풍요롭게 살 때를 회상해 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바깥세상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나마 외부 엔지니어나 군인을 가족으로 둔 아이라면 조금 덜 할 테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는 마땅히 그 갈증을 해소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레벨2 이상 거주지의 아이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바츠는 작년 이맘때가 떠올랐다. 전부 8가구가 새로 이주를 왔고, 전학생은 모두 11명이었다. 그때도 그들의 인기는 어마어마했다. 수업이 끝난 학교가 일주일동안이나 북적였다. 그때마다 선생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올해는 그보다 더 할 것이다. 올해 전학생은 애니 단 한명이니 말이다.

바츠가 마지막으로 지상에 대해, 들은 이야기는 작년 케일리로부터였다. 당시 전학생이었던 아이 중 케일리와 동급생이 있었는데, 그녀가 그로부터 듣고 온 이야기였다.

낮에는 아르크보다 어둡고, 밤에는 아르크만큼 어둡다고 했다. 3년 전 아버지가 외부에서 돌아왔을 때 해주었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무엇을 하며 사는지에 대해서 듣는 건 정말 새로웠다.

낮에도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빛을 모을 수 있는 특정 건물이 있는데, 그곳에서 재배되는 작물을 통해 생계를 잇는다고 했다. 운 좋게 프레이를 잡는 날이면 고기를 맛볼 수 있는 기회였지만, 그런 기회는 흔치 않기 때문에 고기를 먹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한 번은 우연히 발견한 헤러티커의 시체를 불에 구워 먹은 적이 있다고 했는데, 너무 질기고 냄새도 고약해서 인간이 먹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

다행히도 애니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끼리 서로 잡아먹기도 한다는 말은 없었다. 가끔 그해 빛이 너무도 부족하게 되면 작물이 거의 자라지 않아 일주일씩 굶기도 하는데, 그때면 아르크에서 군인들이 먹을 것을 가져다준다고 했었다.

바츠는 둘 중 어느 쪽이 맞는 말인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르크에서는 최소한 그 정도까지 궁핍해지는 일은 없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가끔씩 평소와는 다르게 같은 양의 배급표로 보다 적은 양을 받을 때도 있지만, 며칠씩 굶주리지는 않으니 이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었다. 모든 것이 아르크 내부에 있는 인공태양 덕분일 것이다.

케이스타(K-Star)라고 불리는 이 인공태양은 아르크를 통 털어 가장 넓은 구역인 레벨5에 위치해 있는데, 이로부터 얻은 동력으로 5-2구역에서 각종 채소와 과일 등 다양한 작물들을 재배하고, 소나 돼지 같은 가축들을 사육할 수 있었다. 또한 3구역의 식수시설의 정화시스템을 가동시켜 영구적으로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었고, 각종 설비와 기기들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모든 동력의 근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공태양은 초전도 핵융합연구 장치를 통해 핵융합에너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수백 년 전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그들의 기술로 특수 제작한 토카막으로 완성해낸 것으로, 10억℃가 넘는 초고온으로 플라즈마를 가열해서 수소 이온과 전자를 진동시켜 에너지를 얻어내는 방식인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난류현상을 오히려 유도함으로서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 핵심이라고 했다.

플라즈마는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힘에 의해서 내부와 외부의 온도차가 생기고, 이로 인해 불안정한 난류를 생성하게 된다. 그럼 그 난류에 의해 에너지가 외부로 빠져나가게 되지만, 일정량 이상의 열을 가해주기 시작하면 외부로 빠져나가는 에너지의 양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그 한계치에 다다라 일정한 손실량을 기록하게 된다. 그럼 그 때의 온도가 11억℃에 육박하게 되는데, 그 온도를 처음 단 한 번 가해주기만 하면 가능한 일이었다. 용기에 가득 찬 물을 손으로 휘젓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용기에 가득 찬 물을 같은 힘으로 마구 휘저으면 물이 넘쳐서 용기 밖으로 흘러버린다. 그러나 일정량의 물이 쏟아지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손실 없이 물이 용기 안에서 회전만 하기 시작하는데, 이와 같은 원리인 것이다.

열이 가해진 플라즈마에 일부로 강한 난류를 만들어 오히려 불안정을 극대화시키면, 반대로 그 상태자체로 안정을 유지하게 되며 통제가 가능해지는 데, 카오스 이론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금속이 필요했다. 한국인들이 토카막 내부에 설치한 금속이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금속이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현재 연구원들에 의해 알려진 바로는 이 금속이 유도된 난류현상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해준 장본인으로, 외부로부터 가해진 힘으로 인해 멋대로 진동을 하는 수소 이온과 전자가 내벽에 부딪히게 되면, 반작용을 통해 동일한 힘으로 다시 밀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로 인해 생기는 반발력이 수소 이온과 전자를 단 한 번의 자극으로도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불안정한 움직임을 반복적이게 만들어 균형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당시 이 인공태양을 제작했던 과학자들이 현재는 모두 사망한데다가, 그들의 연구 자료마저 지상에 남겨졌거나 소실돼 버리는 바람에 이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유일한 길은 해체를 해보는 것이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인공태양의 가동을 중단해야만 하는데 그 후에 다시 가동시킬만한 열을 만들어낼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한동안 학교는 그 전학생들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지만 그때마다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오늘도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벌써 열흘이 넘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여전히 애니의 바깥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헌터는 그들의 이름대로 아이기스를 사냥한다. 모두 아르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위협이 되지 않는 상대를 향해 칼을 뽑아들지는 않는다. 오직 그들에 대해서만 적극적인 방어를 하는 것이다. 또한 헤러티커들의 접근을 견제, 방해 그리고 방어를 하는데, 백신이 개발되기 전까지 헌터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숙제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상에 남겨진 각종 연구 자료들을 수집하는 일도 해야 한다. 지상에는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이룩한 각종 위대한 연구 유산들이 남아 있다. 그중 일부는 물에 잠기거나 불에 타 소실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수가 폐허나 잔해 속에 잠들어 있다. 그것들을 아르크로 가져와 인류가 더 빠르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마티프가 슬슬 수업을 끝내기 위해 마무리하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지훈이 손을 번쩍 들었다.

“아르크에 올 수 있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마티프는 갑작스런 상황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게 웃었다. 아이들이 수업이 끝날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의 질문에 야유를 보내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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