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 각자의 길 -- > * 18화 *
마티프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킨 후에 대답했다.
“이번에 온 전학생 때문에 그러는 구나. 매년 있는 일인데도 올해 역시 시끄럽더군. 외부인이 아르크로 이주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전진기지에 상주하는 아르크 관계자들에게 신뢰를 얻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관계자란 외부 엔지니어나 헌터를 말하는 것인데, 이들로부터 신뢰를 얻는다면 집사를 통해 추천을 받을 수 있다. 그 추천이 필요하지.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사령관의 승인이다. 집사의 추천을 통해 외부인들의 명단이 내부로 전해지면 관리자들에 의해 선별이 되고, 그 중 일부를 부사령관이 최종적으로 선출을 하게 된다. 그 조건이 충족된다면 기회가 생겼을 때 언제든지 아르크로 이주를 할 수가 있는 것이지. 그리고 그 기회를 다들 잘 알다시피 ‘스티그마타’라고 부른다.”
“전진기지에 상주한다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엔지니어들이 그곳에 머무는 것은 알고 있지만 헌터나 집사 역시 그곳에 머문다는 것입니까?”
“음, 그것은 지금 말해줄 수 없다. 너희들이 내년에 정식으로 헌터 수업을 시작하게 된다면 그때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전진기지의 의미가 하나만 뜻하는 게 아니라고만 해두겠다.”
마티프가 조금 곤란한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지훈의 궁금증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부사령관은 어떻게 해야 될 수 있는 겁니까?”
마티프는 지훈이 엉뚱한 질문을 집요할 정도로 이어가는 이유가 궁금했는지, 대답하기 전에 그것이 궁금한 이유가 무엇인지 침착하게 물었다. 그러자 지훈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고는 그냥 궁금한 것일 뿐이라고만 했다.
교실의 아이들이 마티프를 대신해서 외마디 탄식을 내뱉었다. 당사자인 마티프뿐만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는 아이들의 눈에도 그 모습이 괴팍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마티프는 불만어린 탄성을 내뱉으며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아이들과 다르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지훈은 그런 마티프를 상대로 공방을 벌이듯 계속해서 말을 주고받았다.
“음, 수업과는 크게 상관은 없지만 좋은 질문이다. 부사령관은 아주 공정한 방법으로 선출된다. 아르크 거주민들 중 투표권이 있는 사람들의 투표로 결정이 되는데, 공신력이 있는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선출된 후보 중에 한명을 뽑게 되지.”
“사령관도 마찬가지입니까?”
“물론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사령관이 사망하게 된다면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사령관의 나이가 250살 가까이 되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인간은 100년도 살지 못하지 않습니까.”
“100년도 살지 못하지. 현재는 말이다. 하지만 크루엘라가 발병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은 150년까지도 살 수 있었다.”
“그럼 사령관께서는 어떻게 오래살 수 있는 겁니까?”
“헤러티커의 엄지손가락에는 오래전 인간이 150년까지 살 수 있게 해주었던 특별한 약과 유사한 효능이 있다고 한다. 헌터들이 지상에서 그것을 수집하고 아르크로 가져오지 않느냐. 레벨1의 상업 지구에서도 매우 비싼 가격으로 판매가 되고 있지. 그것으로 인해서 지금까지 수명을 연장하고 있다고 들었다.”
“투표권은 어떻게 해야 생깁니까?”
계속되는 지훈의 질문은 결국 마티프의 얼굴을 굳어지게 만들었다. 쉴 틈 없이 연속되는 질문이 싫증을 나게 만들었는지, 마티프가 잠시 지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사이 버니에투와가 지훈을 향해 머저리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참다못해 신음소리를 내는 아이들도 몇몇 있었다. 다들 수업이 자꾸만 길어지는 것이 불만이었다.
“슬슬 귀찮아지는구나. 수업을 진행할 수가 없군. 레벨4에 거주하면 된다. 더 이상의 질문은 받지 않겠다.”
“레벨1에 사는 사람들은 그럼 투표권이 없는 겁니까? 그리고 레벨1에 사는 사람들은 헤러티커의 엄지를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너무 불합리한 것 같습니다.”
지훈이 다급하게 질문을 마구 쏟아냈다.
“질문은 그만 받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건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사령관이 없다면 아르크 역시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 놈들 목숨보다 사령관의 목숨이 더 중요한 이유다. 또한 레벨1 거주자들에게 헤러티커의 엄지를 살 수 있는 기회는 열려있다. 노력만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그건...”
“그만! 더 이상은 아니야.”
결국 마티프가 자신의 검은 얼굴을 지훈의 코앞에 바짝 가져다댔다. 그럼에도 지훈은 여전히 궁금한 것이 많은지 아쉬운 기색이었지만, 괴물 같은 마티프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마주한 이상 입을 열 수는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혼자서 투덜거렸을 뿐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짐을 정리하는 아이들의 원망어린 눈초리를 오히려 의아해했다.
“신경 쓰지 말라고, 원래 바보들이잖아.”
지훈을 위로하는 건 그 바로 뒷자리에 앉는 가이즈카뿐이었다. 항상 티격태격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럴 때 보면 또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둘은 은근히 서로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번 버니에투와가 가이즈카를 괴롭힐 때만 봐도 그렇다.
버니에투와가 심술을 부리면 대부분 그 자리를 피하는데 급급한다. 녀석과 시비가 붙어봐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덩치가 가장 큰 그와 맞선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용기를 내봤자 곤혹스런 일만 생길뿐이다. 지난번 바츠처럼 말이다. 그와 맞서는 건, 반에서 테라치가 유일했다. 그런데 그때 지훈이 느닷없이 나선 것이다. 다들 눈치만 보며 가이즈카가 상처를 덜 받기만 바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행동이었다. 당황한 버니에투와가 오히려 더 큰소리를 쳐봤지만 소용없었다. 지훈의 논리정연한 말 앞에서 결국 꼬리를 내려야 했다. 분해서 지훈의 멱살을 부여잡았지만, 그는 한 대 얻어맞는 것쯤은 전혀 두렵지 않아보였다. 게다가 꼼짝없이 당하고 있던 가이즈카가 갑자기 용기가 생겼는지 발끈하며 대들기 시작했던 터라, 아무리 버니에투와라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둘의 외모를 가지고 조롱하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누가 봐도 지훈과 가이즈카의 승리였다.
바츠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통쾌했다. 버니에투와가 마지막에 어린애처럼 칭얼거리며 군소리를 늘어놓는 모습은 그를 치졸하고 초라하게 보이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찌나 우스운지 두고두고 놀림거리로 삼기 충분했다. 일부는 가끔씩 버니에투와가 교실에서 행패를 부릴 때면, 그때를 기억하고 조심스럽게 수군거린다. 그러면 창피함을 느끼고 헛기침을 한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지만 한 눈에도 의기소침해진 것이 보였다. 안쓰러울 정도다.
“또 다시 오늘처럼 멍청하게 굴면 그때 가만 안 둘 거야.”
오늘도 마찬가지다. 버니에투와가 교실을 빠져나가는 지훈을 붙잡고 으름장을 놓았다. 조금 전 지훈의 행동이 못마땅한 것은 사실이지만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싫은 소리를 할 수는 있지만, 지금처럼 무섭게 몰아 부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한쪽에서는 버니에투와를 향한 수군거림이 시작되었다.
바츠는 이런 버니에투와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못되게 구는 이유가 궁금했다. 수군거림에 눈치를 보면서도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특히나 자신에게는 더 심하게 굴고는 했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뭘 쳐다보는 거야! 계집애 같은 녀석이.”
바츠의 시선을 느낀 버니에투와가 언제나처럼 폭언을 쏟아냈다. 지난번처럼 얻어맞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언젠가는 꼭 그에게 왜 친구들을 못살게 구는지 그리고 자신을 왜 이토록 싫어하는지 묻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테라치가 벨리타와 함께 전학생을 만나러 가는 바람에 바츠는 혼자서 집으로 오게 되었다. 그런데 레벨2로 가는 통로에 버니에투와가 있던 것이다. 바츠는 그를 보자마자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왠지 겁이나 쉽게 말을 붙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옆을 슬쩍 지나가려는데, 그가 올가미 같은 목소리로 불러 세웠다.
“왜? 내게 볼 일이라도 있는 거야?”
그는 아무런 대답 없이 바츠의 뺨을 손바닥으로 후려갈겼다.
바츠는 갑작스런 버니에투와의 손찌검에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주먹으로 얻어맞았을 때보다 고통은 덜 했지만, 충격은 비슷했다. 눈앞이 흔들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감히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봐? 네 까짓 게 뭔데!”
바츠는 버니에투와에게 멱살을 잡힌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힘에 이끌려 일어나진 것이다.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다 네가 잘못한 거잖아. 그러게 왜 친구들을 아무 이유 없이 괴롭혀! 자꾸 이러면 결국 쫓겨나게 될 걸!”
지난번 가이즈카를 괴롭힐 때도 그 이유가 가이즈카의 눈매가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 이유였다.
“닥쳐! 이 도둑놈 같은 놈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아르크에서 쫓겨나야 하는 건 바로 너야! 넌 미사에 들어올 자격이 없어! 아마 이롤로가 아니었다면 네가 대신 쫓겨났을 거야. 넌 네 실력으로 미사에 들어온 게 아니잖아? 테라치가 아니었다면 아직까지 일반학교에 다니고 있겠지. 그리고 결국 엔지니어나 되었을 거야. 게다가 넌 검술도 형편없지. 결국 이곳에서도 군인이나 될 거야!”
바츠는 그의 손찌검에 또 다시 뺨을 얻어맞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동시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예전 이롤로가 버니에투와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기억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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