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20화 (20/268)

< --   2. 각자의 길   -- >         * 20화 *

“왜 바츠를 못 살게 구는 거야? 너 일반학교에서도 아이들을 많이 괴롭혔던 걸로 유명하더라. 네가 ‘거인’ 버니에투와 맞지? 나한테 한 번 혼나볼래?”

버니에투와는 팔짱을 끼고 자신을 향해 으름장을 늘어놓는 벨리타를 잠깐 동안 멍하니 쳐다보더니, 이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츠는 벨리타의 어깨를 잡아채,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선 그녀를 그에게서 멀리 떨어뜨렸고, 그 앞을 자신이 가로막았다. 벨리타가 고집을 피며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조금 애를 먹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그가 무슨 짓을 하기 전에 둘 사이로 끼어들 수 있었다. 그런데 버니에투와가 이쪽으로 다가오지 않고, 바로 옆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바츠는 예상과 전혀 다른 뜻밖의 상황에 당황스러웠지만, 그는 바츠는 물론이고 벨리타에게도 딱히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저 바닥에 흩어진 자신의 음식을 주워 담을 뿐이었다.

“이 아까운 걸 왜...우리 엄마가 힘들게 싸주신 거란 말이야. 그리고 나 거인 아니야.”

버니에투와가 힘없는 목소리로 꽁알거렸다.

바츠는 지금 이 상황이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마치 아델리나가 자신이 잘못하고도 괜히 때를 쓰며 우는 바람에, 오히려 바츠나 다른 친구들을 곤란하게 할 때와 닮아 있었다. 물론 그는 아델리나처럼 의도적으로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 슬퍼보였다. 바츠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자신이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충분히 있는 일들이었다. 혹시 내가 나쁜 쪽으로 특별한 것은 아닌지, 그것으로 인해 주변으로부터 경계를 받지는 않을지 따위로 걱정을 하는 것이다. 또한 창피를 당하지 않기 위해 다른 아이들을 관찰하고, 그들과 다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틀림이 아닌 고작 다름일 뿐인데도 그게 그렇게 불안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독특하지 않다고 증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가끔씩 필사적이다. 어쩌다 실수라도 할 적이면 매우 초조해진다. 그것이 아니라고 온 몸으로 말한다. 너와 내가 같다고 하고 싶은 것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동화되지 못하면 상실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상실감을 다수의 의식적인 외면으로부터 받게 된다면 어떨까? 거주지가 다르다는 이유로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만으로도 속상하고 가슴이 아프다.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본인이 어떻게 한다고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남자가 남자로 태어나고 여자가 여자로 태어난 것과 같은 것이었다. 하다못해 이런 것으로 배척을 받아도 견디기가 힘든데, 개인적인 문제로 철저하게 외면을 받는다면 어떨까? 그것은 분명 상당한 박탈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겨우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사자에게는 지옥이 따로 없을 정도로 끔찍할 것이다. 그들이 원망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그런 녀석들 중 하나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와 가깝게 지낸다면? 그로 인해서 자신이 밀려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의도적인 일은 아니지만 분명 또 한 번 버려지는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거리는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분명 먼 거리다. 어쩌면 고작 한 발짝이겠지만, 영원히 좁힐 수 없는 그런 거리이기도 하다.

바츠는 몸을 던져 버니에투와를 마주보고 똑같은 자세로 앉았다. 그가 턱이 쪼글쪼글할 정도로 굳게 다문 입으로 바라보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를 도와 바닥을 어지른 음식들을 함께 치울 뿐이다.

“바츠, 뭐하는 거야? 이 녀석은 못된 녀석이야. 당해도 싼 녀석이라고.”

벨리타가 바로 옆으로 다가와 바츠를 말렸다. 하지만 바츠는 자신의 어깨에 올려 진 그녀의 손을, 뺨을 사용해 슬쩍 밀어냈다. 그녀를 처음으로 거부한 것이다. 그녀가 상처를 받지 않을까 염려스러웠지만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 그럼 내 잘못이야. 그렇지? 내가 잘못한 거지? 미안해.”

바츠는 벨리타의 손을 밀어내고 버니에투와를 향해 사과했다. 한심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이나 다름없었다. 이롤로가 그를 만나고 있을 때, 멀리서 지켜볼 것이 아니라 함께 갔더라면 어땠을까? 이롤로가 아니더라도 혼자서 그에게 한 번 인사를 해봤더라면 어땠을까? 이런 의문들로 자신이 바보 같다고 느껴졌다.

“이런다고 달라질 것 같아?”

“상관없어. 네가 계속해서 괴롭힌다고 하더라도 난 널 미워하지 않을 거야, 이제는 말이야. 그리고 우리가, 내가 한 일이잖아.”

바츠는 버니에투와가 표독스럽게 굴었지만 전혀 겁나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더 빠르게 놀렸다. 그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너 바보구나? 왜 이렇게 착하니.”

벨리타가 바츠 옆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자신의 이마를 바츠의 머리에 가져다대며 말했다. 귓속으로 파고드는 그녀의 목소리가 갓난아이를 어르는 할머니 같았다. 그리고는 가져다댄 이마로 손을 대신해 바츠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에 고민도 없이 팔을 걷어붙였다.

바츠는 그런 그녀를 서둘러 말려 세웠지만,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방긋 웃었다.

“이건 내가 한 일이잖아. 그럼 내가 치워야지.”

벨리타가 몸을 사리지 않고, 그 고운 손으로 쏟아진 음식물들을 싹싹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테라치가 슬그머니 끼어들었고, 아델리나는 새로운 놀이라도 찾은 것처럼 해맑은 얼굴로 엉덩이부터 들이밀었다. 벨리타만큼 기뻐보였다. 이렇게 순식간에 사람이 다섯으로 늘어나자 일은 너무도 손쉬웠다. 처음에는 엄청난 사건처럼 보였던 일이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게다가 바닥을 닦기 위한 걸레질을 반 아이들 전부가 나서서 도와주는 바람에, 바닥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깔끔하게 변했다.

“내가 이런다고 봐줄 것 같아?”

버니에투와가 평소처럼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태도에 겁을 먹거나 자리를 피하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깨끗해진 바닥에 고정된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덩치가 괴물 같은 그가 울상으로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꼭 다 큰 어른이 볼썽사납게 구는 것처럼 보였다. 웃음이 절로 났다.

바츠는 그 웃음을 참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테라치도 웃었고, 벨리타도, 아델리나도 모두가 엉엉 울기 시작하는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하지만 그 손가락에는 그 어떤 비난도 없었다. 가시 돋친 비난 대신 따뜻한 관심이 발현되며 그를 위로하기 위해 다독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헌터는 희생정신이 없다면 자격이 없는 것인가요?”

그 일이 있고 두 달이 지났다. 마티프의 지루하고도 무서운 수업시간이 이제는 많이 적응이 되었다. 질문도 척척 한다. 아델리나가 헌터의 자격에 대해 이야기하던 마티프를 향해 거리낌 없이 손을 들고 물었다. 그러자 마티프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아델리나를 검지로 지목하며 대답했다.

“훌륭하다. 헌터에게는 위대한 자유가 주어지지만, 아르크를 위한 의무만을 가진다. 위대한 자유는 희생에 대한 대가인 것이다.”

중간에 미사에서의 첫 시험도 있었다. 수업 내용이 주가 된 문제들로 판단력을 테스트하는 시험과 일반학교에서 배운 기초를 토대로 발전 가능성을 확인하고, 미사에서 보다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익힌 검술의 숙련도를 확인하는 시험이 있었다.

1등은 당연하게도 테라치였다. 학년 두 반을 통 털어 테라치는 최고점을 받았다. 특히 검술 부분에서는 만점을 받았다. 그전까지 만점은 ‘라파엘’ 스타드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테라치는 이롤로가 없어서 싱거웠다고 소감을 밝혔다. 2등은 지훈이었다. 그러나 검술 성적이 부족해서 학년 전체에서는 6등이었다. 전체에서 2등을 차지한 건 2반에 있는 포르쿠얀이라는 아이였는데, 입학 성적은 지훈보다 모자랐지만 이번 시험에서는 그를 가볍게 따돌렸다. 테라치의 말을 빌리면 이롤로가 있었다면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3등이나 해야 했을 것이라고 했다. 아델리나는 수업 성적은 6등이었지만 검술 때문에 전체에서 5등을 했다. 그녀는 매일 수업이 끝나고 혼자서 연습했던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으로 보였다. 그녀의 검술 성적은 전체에서 4등이었다. 버니에투와는 수업 성적은 8등이었지만 검술 시험에서는 반에서 4등을 했다. 그리고 바츠는 수업 성적은 3등이었지만 검술 시험에서 2등을 했다. 전체에서 4등에 해당했다. 놀라운 결과였다. 입학 초 검술 성적이 전체에서 10등 밖에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괄목할만한 발전이었다. 모두 테라치 덕분이었다. 바츠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버니에투와가 완전히 변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더 이상 교실에서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조용하게 변했다. 오직 수업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조용히 자리를 떠났는데, 아델리나가 혼자서 매일 훈련장으로 가는 것처럼 홀로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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