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 각자의 길 -- > * 21화 *
바츠는 버니에투와를 위해 용기를 냈다. 그 전에 있었던 무관심에 대한, 뒤늦은 책임감으로 동정심을 느낀 건 아니다. 물론 그와의 관계가 전보다는 나아졌다. 교실에는 더 이상 그의 괴롭힘이 없었고, 그에 대한 눈초리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교실에서 겉돌았다. 그때 사건 이후로 잠시 동안은 다들 친해진 것처럼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나 그뿐이었다. 그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버니에투와가 처음으로 돌아간 것처럼 분위기 역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 자리를 어색함이 대신했다. 지난 시간들로 인한 그와의 거리감이 생각보다 넓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책임이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조심스러워 했다. 그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절대로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이롤로의 말대로 소심한 성격이었다. 그전에 아이들을 괴롭히며 보여주었던 모습이 정녕 그였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이 맞물리자, 오히려 친구들의 배려가 상황을 악화시키는 우스운 결과를 낳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혼자였다.
바츠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실을 빠져나가는 그를 쫓았다. 앞서 언급된 이야기들이 부담감을 느끼게 만들기는 했지만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항상 같이 다니던 테라치가 말도 없이 사라진 것에 대해 서운해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충분히 사정을 이야기하면 이해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바츠가 버니에투와를 급히 쫓아간 건 이롤로 때문이었다. 지금은 너무나 익숙하게 변해버린 그의 빈자리지만 그리움이 여전했다. 테라치는 지난번 시험 때 만점을 받지 못한 것이 억울했는지, 전보다 더 학업에 힘을 쏟았다. 이미 그의 성적은 충분히 대단했지만 그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는 완벽해지려고 했다. 아델리나는 검술 연습으로 바빴다. 의지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대단했다. 이롤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바츠는 이제는 애써 떠올리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않는, 그런 기억이 되어버린 이롤로를 위해 버니에투와를 쫓았다. 그라면 다를 것 같았다. 자신만큼 이롤로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롤로에 대해 편안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어디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거야?”
바츠는 그의 뒤에서 왼편으로 쓱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나란히 섰다. 그는 전혀 놀라지 않고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바츠는 자신을 무뚝뚝하게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서 경계심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 그런데 말이야 지난 번 시험 봤을 때, 검은 개가 다음 학년으로 진학할 수 있는 것이 총 몇 명이라고 했지? 9명인가? 10명이었나? 기억나?”
“...10명.”
“그래? 그럼 지금 우리 학년에 총 21명이 있으니까, 나머지 11명은 군인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게 되겠네?”
“그렇겠지. 그런데 그걸 왜 물어보는 거야?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버니에투와의 눈초리가 이제는 수상하게 변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넌 몇 등 했는지 궁금해서. 너도 헌터가 되려고 이곳에 온 거잖아.”
“네가 10등 안에 들었다고, 지금 자랑하려는 거야? 날 놀리려고?”
바츠는 손과 머리를 동시에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고. 난 그냥 궁금해서...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그런데 정말 궁금해서 그래.”
버니에투와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덩달아 걸음을 멈추는 바츠를 한참동안 쳐다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난 16등 했어. 이대로라면 헌터가 될 수 없겠지. 그놈의 수업시험 때문에 그래. 왜 헌터가 되는데 그런 문제들을 풀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헌터면 검을 잘 쓰면 되는 거 아니야? 난 이해할 수가 없어. 게다가 수업시간에 그런 걸 배운 적도 없잖아?”
바츠는 이미 그가 검술은 합격점을 받았지만 수업시험에서는 형편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에서 그보다 수업성적이 낮은 건 3명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른 척, 그가 가슴 속에 쌓아두었던 것으로 보이는 불만들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그는 시험에 대한 불만이 굉장했다. 특히나 판단력 부문의 문제들에 불평을 했는데, 대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들이었다. 예로 암흑기의 아르크에 헤러티커들이 출연했고, 동시에 전진기지로 아이기스가 약탈을 왔다면 어느 곳으로 먼저 향할 것인가에 대한 주관식 문제다. 단, 전진기지에는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이 머물고 있다라는 전제가 있었다. 버니에투와는 전진기지로 향해서 가족이 무사히 숨었는지 확인 후에 아르크로 달려가 헤러티커와 싸울 것이라고 답했다고 했다. 물론 이 답은 0점을 받았다. 버니에투와는 이것에 대해 굉장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아르크를 외면한 게 아니라고. 난 단지 내 가족이 무사한지 확인했을 뿐이야. 고작 확인만 하고 아르크로 간 거라고. 그런데 이게 0점이라고?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희생정신이 부족했어? 참으로 웃기는 소리 아냐?”
“맞아. 네 말대로 그건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바츠는 자신은 비록 아르크로 달려가 헤러티커를 무찌르고 전진기지로 향할 것이라는 답변을 해서 만점을 받았지만 버니에투와를 옹호했다.
“이뿐만이 아니야, 북쪽에서 아이기스의 표식이 있는 부랑자를 발견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도 기가 막혀. 난 분명 검은 개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상대는 공격하지 않는다고 배웠어. 똑똑히 기억한다고. 그래서 난 그들을 그냥 지나쳐 간다고 했어. 하지만 난 또 0점을 받았어. 대체 뭘 어쩌라는 거지?”
바츠와 버니에투와는 어느새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불만은 끝날 줄 몰랐다. 감점을 받은 문제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조목조목 따지더니, 결국에는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험자체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나는 헌터가 될 거라고. 아이기스 녀석들을 무찌르고 헤러티커와 당당하게 싸울 자신이 있다고. 하지만 이대로라면 나는 헌터가 되지 못하겠지. 그놈의 수업시험 때문에 말이야. 어설픈 검술을 사용하지만 수업성적이 좋은 녀석은 헌터가 되겠지.”
버니에투와가 신음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바츠는 지금까지 적당히 호응을 해주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만 주다가, 그의 입이 멈춘 걸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럴 때 이롤로가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우리랑 나란히 앉아서 함께 욕하고 있을까?”
버니에투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바닥을 멍하니 응시하며 시간을 보내더니, 자신의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거칠게 긁적였다. 소리까지 질렀다면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는 않을 걸...아마 나한테 함께 공부해보지 않겠냐고 했을 거야. 물론 난 괜찮다고 하겠지. 그리고 이롤로는 그런 날 억지로 끌고 갈 테고.”
“그럼 나랑 같이 공부해볼래?”
바츠의 제안에 버니에투와가 고개를 번개처럼 돌렸다. 갑자기 뒤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도 놀라지 않던 그가 이번에는 정말 크게 놀랐는지, 두 눈이 다 동그랗게 변해 있었다.
“왜? 나 이래봬도 수업시험 반에서 세 번째라고! 물론 테라치가 많이 도와줬기 때문에 가능했지만...어쨌든! 같이하면 좋지 않을까? 내가 부탁하면 테라치도 같이 해줄 거라고.”
암흑기를 보낸 다음날이면 통로에 등을 차례로 켰다가 동시에 끄는 것을 몇 번 반복한다. 그 테스트를 통해 동력이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버니에투와의 표정이 딱 그것을 닮아 있었다. 바츠의 이야기를 듣고는 테스트하는 통로의 불빛처럼 차츰 밝아졌다가 일순간 어둡게 변했다.
바츠는 급변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정말 나 때문에 이롤로가 쫓겨난 것이라고 생각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