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22화 (22/268)

< --   2. 각자의 길   -- >         * 22화 *

버니에투와가 당혹스러움과 의아함이 동시에 묻어나는 얼굴로 말했다. 마티프의 전날 있었던 수업에 대한 질문에, 답이 떠오르지 않을 때나 나올 법한 표정이었다. 자세히 보면 억울함도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희들도 나를 따돌릴 때 그랬잖아. 그저 내가 덩치가 크다는 게 이유였잖아. 그래서 그런 말을 했던 것뿐이야. 그냥...그냥 둘러댄 거라고. 너희들이 내가 덩치가 커서 싫었던 것이 아니라, 싫은데 덩치가 크다는 이유를 찾은 것처럼 말이야.”

“그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지? 지금 우리처럼 말이야.”

“...물론이야.”

버니에투와는 약간의 틈을 두고 대답했다. 그렇게 시원하지 않았지만, 바츠가 한시름 놓기에는 충분했다.

“그런데 방금 전에 왜 그런 표정을 했어? 방금 전에 내가 같이 공부하자고 했을 때, 조금 심각한 얼굴 했잖아.”

“네가 날 놀리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어. 그리고 과연 테라치가 날 좋아할 지 걱정됐고. 난 너도 그렇지만 테라치하고도 전혀 친하지 않거든.”

바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 최대한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우리 친하게 지내자. 너도 이롤로가 보고 싶잖아. 그렇지? 나도 그래. 우리 꼭 헌터가 돼서 이롤로를 찾아보자. 알았지? 분명 테라치도 도와줄 거야.”

버니에투와는 바츠를 한참동안 올려다보다가 큰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굳은 의지가 엿보이는 얼굴로,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당차게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는 것과 다르게 눈시울을 슬쩍 붉혔는데, 굳이 미소를 짓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더라도 입가에 절로 미소를 걸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아니야, 네 대답이 틀린 건 아니지만 이건 시험이라고. 네 생각을 묻는 것이 아니야. 물론 네 생각을 적으라고 되어있지만, 답은 정해져 있어. 그 대답을 해야 하는 거라고.”

그 날 이후 바츠는 수업이 끝나면 버니에투와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갔다. 그가 매일같이 수업이 끝나면 서둘러 교실을 빠져나간 이유였다. 그는 집으로 달려가 부족한 공부를 혼자서 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테라치는 바츠에게서 그런 사정을 듣고는 흔쾌히 함께 해주었다. 지금은 셋이 훈련장에서 검술 훈련을 하기도 하고, 이렇게 버니에투와의 집에서 부족한 공부를 함께 하기도 한다.

테라치는 또 다시 답을 틀리는 버니에투와에게 차분하게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었다. 마치 예전 바츠를 대하는 것과 닮아있었다.

“문제 자체가 속임수나 다름이 없는 거야. 말 그대로 이건 시험이라고. 널 시험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내일부터는 검술 연습도 같이 하자.”

학교 수업은 시간이 지날수록 교실에서 벗어나, 조금씩 훈련장에서 실습 위주의 시간으로 변해갔다. 마티프의 통제 아래 보통 둘씩 짝을 지어 연습용 검으로 대련을 했고,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는 팔과 다리 그리고 몸통을 제외하고는 타격이 금지였다. 아직은 위험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가끔 진검을 나눠 줄때도 있었지만, 그저 검에 대한 감을 익히기 위한 것으로 대련은 금지였고, 허수아비를 내리쳐 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진검은 생각보다 무거웠고, 똑바로 세우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마티프가 검을 세우고 자세를 유지하게 하는 날이면 신음소리가 절로 났다. 양손으로 붙잡고 있는데도 엄청난 근력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허수아비를 향해 휘두르는 것이 쉬운 것도 아니었다. 마티프가 시범을 보여줄 때만 하더라도 간단하게 잘려나갈 것 같은 것이, 칼날이 그대로 허수아비에 박혀버리는 건 예사고, 악력이 반발력을 이기지 못해서 손에서 검을 떨어뜨리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마티프의 불호령은 고막을 찢을 듯 했다. 그러나 그 불호령보다도 두려운 건 그가 검은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읊조리듯 속삭이는 것이다.

바츠도 예외는 아니었다. 허수아비의 어깨를 내리치는 순간 손잡이에 기름이라도 발려 있는지, 쑥 빠져나가듯 튕겨나갔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마티프가 성큼성큼 훈련장 안으로 들어왔다.

“네가 휘두른 검에 스스로 죽고 싶은 것이냐? 그게 아니라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혼신을 다해라. 그렇지 않으면, 넌 시체나 마찬가지다.”

그의 으름장은 언제나 진짜로 이루어질 것 같은 착각이 일게 한다. 부리부리한 눈과 큰 흉터가 검은 얼굴 위에서 꿈틀대면, 그의 말이 진리처럼 느껴졌다.

“이런 상태면 헌터가 된다는 꿈은 모두 접어라! 네 놈들의 그 어리숙한 실력에 당해줄 멍청이는 지상 어디에도 없으니까! 하긴 지상에 발을 내딛는 순간 겁에 질려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겠지. 이곳을 떠나자마자 시체가 되고 싶지 않다면, 더욱더 단련해라!”

그런데 오늘따라 그의 무서운 훈계가 다른 때에 비해 훨씬 강도가 높았다. 대게는 그 자리에서 따끔하게 혼내는 것으로 끝났었는데, 오늘만큼은 수업을 마치기 직전 모두가 모인자리에서 다시 한 번 이루어졌다.

바츠는 그의 꾸지람을 들을 때마다 오기와 함게 의기소침해 지는 것을 동시에 느끼고는 했는데, 오늘은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 의아함이 일어 느낄 수 없었다. 가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걱정하던 것만큼 이질적이었다.

“내일은 프레이를 상대로 실전연습이 계획되어 있다. 직접 생명체를 칼날로 베고 찌르는 그 감촉을 익히고, 자신의 무기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도록 하는 훈련이다. 허수아비를 칠 때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 될 테니, 결코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연습용 검으로 대련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 게다가 프레이에게는 너희들의 살갗을 찢을 수 있는 날카로운 앞니가 있다. 팔을 통째로 씹어 먹을 수도 있지. 너희 앞에 놓이는 위협이 실체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오늘은 물론이고 여태까지 보여주었던 모습을 똑같이 보여주면 절대 안 될 것이야.”

바츠는 수업이 끝나고 곧바로 테라치와 버니에투와와 함께 다시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의 걱정이 기우가 아닐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허튼 소리를 하는 법이 없다. 가끔 과장되게 말하기는 하지만 거짓을 말하지는 않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내일 만나게 될 프레이들은 안전을 위해 앞니를 뭉툭하게 깎아놓았을 테지만 상처를 입히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또한 팔을 통째로 씹어 먹지는 못하지만 살을 갉아먹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위험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소리임이 틀림없으니, 내일을 위해서 단단히 준비해야 했다. 검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악력을 더 단련해야 했고, 단칼에 숨통을 끊을 수 있도록 검을 휘두를 때 힘을 응집시키는 기술을 더 향상시켜야 했다.

훈련장으로 돌아오자 오늘은 미사에서 훈련장을 쓰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인지, 다행히도 빈자리가 많이 있었다. 평소 수업이 끝나자마자 달려와도 자리를 잡기 어려웠기 때문에 허겁지겁 온 것이 다 무안할 정도였다. 용케 자리를 차지한 레벨2 아이들이 있었지만, 조롱이 들려오지도 않았다.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인지는 몰라도 기쁜 일이었다.

바츠는 그 이유를 버니에투와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아무리 그들에게 조롱의 대상이라지만 그의 엄청난 덩치를 보고 함부로 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조차도 그 앞에서는 매번 위축되고는 했는데, 저들이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일반학교에서 그의 악명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벨리타처럼 단단히 화가 나서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 아니라면, 그에게 맞선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물론 버니에투와가 사실은 여리고 착한 아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억울해할 수도 있지만, 그 전까지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아델리나는 또 혼자서 와 있네.”

훈련장에 가장 먼저 들어선 테라치가 한쪽 단상 위에서 홀로 허수아비를 내리치고 있는 아델리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달려온 바츠 일행보다도 더 빠르게 와있었는데, 연습용 검으로 허수아비를 힘껏 후려치며 기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녀의 기합소리는 훈련장 곳곳으로 앙칼지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아델리나가 혼자서 저러는 거 꽤 오래되었지? 우리랑 같이하면 더 좋을 것 같은데.”

테라치가 바츠에게 은근슬쩍 눈치를 주었다.

바츠는 테라치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아들었지만, 다가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몇 번이나 시도를 해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테라치도 바츠에게 기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주일 전만 해도 그랬다. 바츠는 테라치와 작당해서 혼자서 훈련장으로 향하는 그녀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그녀가 좋아하는 헌터 놀이를 하자고 했는데, 그녀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거절했다.

“너 없이 우리끼리 무슨 재미로 하냐? 오늘도 그럼 벨리타를 끼어서 해야겠네.”

테라치가 엄살을 부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그보다 며칠 전 벨리타를 대신 끼어서 할 거라는 이야기에 마지못해 한 번 같이 어울려주었을 뿐이었다. 이제는 그마저도 소용이 없었다. 아쉬운 기색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단호했다.

“바츠, 네가 잘 이야기해봐. 걱정된다. 네가 아델리나랑 가장 친하잖아. 점심도 같이 먹고, 교실에서는 우리랑 잘 어울리다가 수업만 끝나면 다른 사람처럼 구네.”

바츠는 테라치의 성화가 아니었더라도 결국 한 번 말을 걸어봤겠지만, 그에게 떠밀려 가는 편이 더 좋았다. 그녀가 혹시라도 왜 그러냐고 물으면 마땅히 떠올릴 변명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버니에투와가 옆에서 자꾸만 거들어서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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