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 각자의 길 -- > * 23화 *
“언제 온 거야? 바로 달려온 우리보다도 훨씬 빨리 왔네?”
아델리나는 바츠가 말을 걸기 전까지 가까이 다가온 줄도 모르고 연습에 몰두해 있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이미 놀라운 게 아니었다. 벌써 한참 된 일이었다. 정확히는 이롤로가 아르크를 떠나갔던 연초부터 계속 이어진 일이었다. 홀로 훈련장에 자리하기만 하면, 주변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접었다. 덕분에 입고 있는 옷에 거주지를 표시하는 페인팅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거주지 아이들의 야유나 조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들의 목소리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바츠와는 전혀 달랐다. 바츠가 테라치나 버니에투와와 같은 친구들과 함께 그 부담감을 이겨냈다면, 그녀는 혼자서도 충분히 감당해내고 있었다.
바츠는 아델리나가 변하기 시작했을 무렵 그녀가 했던 말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케일리와 심하게 다퉜던 그때, 가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였다.
‘난 가족을 지켜야 해. 너도 가족이 있잖아.’
아델리나는 가족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보였다. 짧은 찰나였지만 희생을 넘어서, 모든 것을 헌신해 가족을 지켜내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 어떤 위협으로부터라도 말이다.
“너랑 테라치가 버니랑 잠시 꾸물대는 틈에 얼른 달려왔지.”
아델리나가 벌써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그녀의 이마에는 이미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리고 머리카락도 어느 정도 젖어있었고, 작은 가슴이 부풀기를 반복했다.
“그러고 보니 너희들 부쩍 버니랑 친하게 지내더라. 이롤로가 서운해 할지도 몰라. 벨리타하고는 언제부터 헌터 놀이를 한 거야? 걔는 그런 거 안 좋아하잖아. 공주님이잖아. 얌전하고 조용하지 않아?”
아델리나가 코끝을 찡긋하며 장난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네가 우리랑 안 놀아주니까 그렇지. 그리고 지난 번 못 봤어? 벨리타가 버니를 완전히 핀치로 몰아붙였었다고.”
“아, 맞아. 정말 깜짝 놀랐었지. 걔 원래 그런 애였어? 놀랍더라. 그런데도 넌 걔가 좋지?”
아델리나가 한쪽 입 꼬리가 묘하게 올라가는 미소로 물었다.
바츠는 잠시 벨리타를 떠올려보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긴 머리칼의 중간부분을, 살며시 한 움큼 손에 쥐고만 있어도 가슴이 벅차오를 것만 같았다. 또, 동그란 검은 눈동자로 그런 자신을 향해 눈웃음치면 그보다 행복한 순간은 없을 것 같았다.
“다른 애들하고 다르잖아. 레벨2에 살고 있다고 우리를 무시하지도 않고, 누구한테나 친절해.”
“맞아. 그 애는 항상 웃는 얼굴로 다니면서 모두에게 친절하게 굴지. 그리고 얼굴도 예쁘고, 그렇지?
아델리나가 땀에 젖은 자신의 머리칼을 한쪽으로 정리하며 물었다. 이제는 어깨를 넘어서기 시작한 머리칼이 불편한지, 조금 귀찮은 기색이 보였다.
“너도 예뻐. 지금처럼 기른 머리도 잘 어울리는데?”
“정말? 마음에 들어?”
그녀가 한쪽으로 정리한 머리칼을 자랑스럽게 앞으로 내놓았다.
아델리나의 머리카락은 벨리타처럼 짙은 검은색이었지만, 차분하게 정리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여느 사내아이들의 머리카락처럼 삐죽거리고, 서로 엉겨있었다.
“레벨2에 사는 애들은 빗이라는 걸 쓴데. 이렇게 머리카락을 쓸어내는 건데, 그걸 하면 머리카락이 훨씬 예뻐진데. 신기하지?”
아델리나가 바츠의 시선을 읽었는지 자신의 머리카락을 슬픈 눈으로 쳐다보며, 헤러티커처럼 손가락을 앞으로 구부려 자신의 머리카락을 할퀴듯 쓸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은 어설퍼 보이기까지 하는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녀의 투박한 손길은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만들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아델리나도 그것을 느꼈는지, 멋쩍은 미소를 그리고는 결국 머리카락을 어깨너머로 전부 넘겨버렸다.
“나 성형이라도 해볼까? 요즘 새끼손가락을 뭉툭하게 만드는 게 유행이라던데. 남자들이 귀엽다고 엄청 좋아한데.”
아델리나가 왼손을 활짝 펴서 앞으로 내밀며 화제를 급히 돌렸다.
바츠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성형이라면 치가 떨릴 정도였다. 비록 케일리의 경우는 이미 지나버린 일이라서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있지만, 그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새끼손가락을 쇠톱으로 잘라낸다니!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츠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케일리를 언급하면서 그랬다가는 친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우리 누나는 정말 바보라고! 네가 직접 봐야 돼. 정말 철이 없어. 너하고는 비교도 안 된다고. 넌 우리 누나에 비하면 정말 멋있어.”
바츠는 진심이었다. 아델리나는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설계하고 선택할 줄 아는 아이였다. 그리고 목표를 세우고 노력한다. 그녀가 미사훈련소에 올 수 있었던 것도 지금처럼 혼자서 필사적으로 노력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케일리는 이제 20살이 되면 기술학교로 진학해서, 어엿한 성인으로서 몫을 하게 될 텐데 꿈도 미래도 없었다. 그저 지금 만나고 있는 그 잘생긴 남자친구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짜여진 틀에 맞춰 그대로 살기만 하는 삶이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이대로라면 케일리는 결국 기술학교로 진학하고 그곳을 졸업하는 동시에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본인의 의지와 노력만 있었다면 충분히 중간에 선택의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지만, 케일리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노력이 아닌 남자친구의 덕으로 거주지를 옮길 생각만 했다. 물론 이것도 어떻게 보면 그녀가 선택의 기회를 통해 얻은 결과일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츠는 그때마다 나중에는 자신 덕분에 더 나은 삶을 살게 되고, 아버지도 지상으로 나가지 않게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케일리가 전혀 탐탁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기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말고 우리랑 같이 연습하자. 이렇게 매일 연습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테라치가 그랬어. 충분한 휴식도 중요하대. 그러니까 우리랑 함께 연습하고 공부도 하고 같이 놀자. 예전처럼 말이야. 테라치가 네 걱정 엄청 한다고.”
아델리나가 고개를 돌려 반대쪽 단상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테라치와 버니에투와가 연습용 검으로 가볍게 대련을 하고 있었는데, 둘의 시선이 가끔씩 이쪽을 향했다. 둘 모두 바츠가 아델리나와 함께 오길 기대하는 눈치였다.
“너는? 너도 내 걱정했어?”
“응? 물론이지! 그러니까 이렇게 왔잖아. 몇 번이나 말이야.”
바츠는 아델리나가 혼자서 연습하는 걸 발견했을 때마다, 매번 함께하자고 권했었던 터라 자신 있게 대답했다. 하지만 아델리나의 검은 눈동자는 거친 호흡 때문인지 조금 흔들렸다.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벨리타가 나처럼 이러고 있었더라도 네가 그때처럼 똑같이 그냥 갔을까?”
“무슨 말이야?”
“그냥 내버려두라는 말에 바로 포기하고 돌아갔을 것이냐고.”
바츠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 아델리나의 두 눈에 자신도 모르게 그 상황을 떠올렸다. 물론 쉽게 상상이 가지는 않았다. 벨리타는 예쁘고 친절해서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친구가 굉장히 많았다. 그녀와 함께 하고 싶어서 안달 난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혼자서 어두운 얼굴로 있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만약 그녀가 그러고 있다면 어떻게든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화를 내며 저리 가버리라고 소리를 지르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바츠는 아델리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농담이야.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 장난이었어. 그리고 난 혼자 하는 게 편해. 나중에 내가 힘들거나 필요하게 되면 같이 하자고 내가 부탁할게. 그때까지는 그냥 나 혼자 할 수 있게 해줄래?”
아델리나가 갑자기 배를 잡고 웃었다. 눈물을 찔끔거릴 정도로 굉장히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바츠는 갑작스런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아델리나에게 속았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약이 바짝 올랐다. 항상 이렇다. 제멋대로다. 프레이가 자신의 피부색을 시시각각 변화시키는 것처럼, 멋대로 분위기를 변화시키며 엉망으로 만든다. 남의 진심도 모르고 자신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녀에 대해 심각하게 걱정했던 것이 다 억울할 정도였다. 그녀는 이런 것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서럽게 울어서 곤란하게 만들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할 것만 같았다.
바츠는 씩씩거리며 돌아왔다. 그리고는 테라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델리나는 그냥 내버려둬! 완전 바보라고!”
하지만 사정을 들은 테라치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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