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24화 (24/268)

< --   2. 각자의 길   -- >         * 24화 *

버니에투와는 바츠의 이야기를 듣고는 화들짝 놀란 사람처럼 굴었다. 처음에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고, 다음에는 화가 난 사람처럼 흥분하며 아델리나를 향해 못됐다고 비난했다. 바츠의 진심이 상처받을까봐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바츠의 편에서 호응해주었다. 이런 상황의 감정에 대해 잘 아는 듯 했다. 하지만 테라치는 심각한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하느라, 특별한 반응을 하지 못했다. 테라치가 입을 연건 버니에투와의 방정맞다고 느껴질 만큼 과한 호들갑이 전부 끝나고 나서였다.

“음, 흥분하지 말고 진정해. 나중에 기회가 되면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바츠는 아델리나에게 서운한 감정을 거두는 일이 쉽지 않았다. 버니에투와가 옆에서 힘을 실어주니 감정이 더욱더 격해졌다. 골탕 먹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분했는데, 진심어린 마음이 별 볼일 없어진 것 같아 화가 났다. 이어지는 테라치의 침착한 설명이 아니었다면, 집중하지 못해서 오늘 훈련을 공치고 돌아갈 뻔 했다.

“너 아델리나가 저러는 것 본 적 있어? 한 번도 없을 걸? 수업이 끝나면 항상 우리랑 어울리려고 애쓰던 녀석이잖아. 빼놓고 우리끼리 놀기라도 하면 소리 질러대며 우리를 곤란하게 한다고. 그런데 우리가 먼저 함께 하자고 하는데 거절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일주일 전에 우리가 거짓말로 벨리타와 헌터 놀이할 거라고 했을 때 빼고는 우리랑 어울린 적 한 번도 없잖아.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거라고.”

바츠는 테라치에게 이롤로 사건 이후부터 변한 것이라고, 그때부터 지금처럼 혼자가 된 것이라고 말해주려 했으나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 하나가 입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롤로가 떠나고 난 후, 바츠는 상당히 우울했다. 검술은 물론이고 수업에조차 집중하지 못할 정도였다. 테라치와 벨리타의 위로가 아니었다면, 헌터가 되는 것을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그들 덕분에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아델리나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바츠는 아델리나로부터도 위로를 받은 셈이었지만, 정작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했다. 그렇게 보였다.

바츠는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말 필요할 때 힘이 되어주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이 느껴졌다. 연습을 끝내고 돌아가는 동안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꼭 이롤로를 잃은 것처럼 아델리나 역시 잃은 기분이었다. 특히 그녀가 앞서 훈련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눈물이 날 뻔했다. 달려가고 싶은 마음에 기분이 싱숭생숭했지만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독 작아 보이는 그 어깨를 바라보기만 했다. 미안했다.

다음날, 아델리나는 다시 평소로 돌아와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다시 어두운 얼굴을 하겠지만, 학교에 있는 동안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바츠와 장난도 쳤다. 언제나처럼 점심도 같이 먹었다. 그런데 어제 깨달은 것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이 학교에 있을 때에도 그렇게 밝아 보이지 않았다. 분명 기분 탓이겠지만 묘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기분을 헤아려보기도 전에 큰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더 이상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사고를 친 건 다름 아닌 버니에투와였다.

어제 마티프가 공헌한 대로 오늘은 프레이를 상대로 진검을 휘둘러보는 날이었다. 마티프가 입학 초기에 했던 말이 이제야 실현된 것이다. 다소 늦은 감이 있었지만, 그만큼 위험한 실습이기 때문인 듯 했다. 실습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였다.

실습장은 레벨5에 위치해 있었다. 5-1 구역의 연구시설들이 있는 곳에서 이루어졌는데, 50명이 들어가도 충분할 넓이의 사각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보다 작은 유리벽으로 만들어진 사각공간이 다시 있었다.

“자, 이 녀석들이 바로 프레이다.”

마티프가 실습장으로 들어서며 벽면을 가리켜 한 번씩 둘러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벽면은 사람 몸통 크기로 나뉜 공간들로 빼곡했다. 그리고 그 입구는 창살로 막아져있었고, 너머에는 커다란 쥐들로 꽉 차 있었다. 대부분 크기에 거의 딱 맞게 제작되어 있었다. 특이한 건 모두 같은 종으로 보이는 쥐들의 피부색이, 비슷하면서도 제각각이라는 것이었는데 주변 환경에 따라 몸통의 색을 바꾸는 프레이의 특징이었다. 보호색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보호색을 띄고 가만히 있는 프레이를 발견하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다행인 줄 알아라. 적당히 밥을 먹여 놓은 녀석들이다. 생명체에게 진검을 휘두르는 것은 다들 처음이겠지?”

마티프가 실습에 앞서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어울리지 않는 농담을 했다. 물론 틈날 때마다 위험에 대한 주의를 계속해서 인지시킴으로서 사고를 방지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적당한 긴장감과 적당한 여유를 조절하려는 듯 보였다.

“저는 가장 크고 사나운 녀석을 상대하고 싶습니다!”

버니에투와가 본래 성격과 다르게 오늘따라 굉장히 의욕적이었다. 아이들을 괴롭힐 때처럼 자신감이 넘쳐보였다. 마티프의 노력이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막상 프레이를 마주보고서자 다리가 저릴 정도로 긴장됐다. 그의 농담 따위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옆에서 안심시키려고 무슨 말을 계속해서 해주었지만,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실습은 중앙에 세워진 유리벽 너머에서 시작됐다. 마티프가 벽면에 갇혀 있는 프레이 중 적당한 놈을 골라 유리벽 안쪽에 쇠사슬로 고정시켜 놓으면, 한 명씩 들어가서 그 앞에 놓인 검을 휘둘러 프레이의 숨통을 끊어놓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별 탈 없이 실습이 진행되는 듯 보였다. 테라치를 시작으로 지훈, 아델리나로 이어진 실습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잔뜩 긴장한 바츠 차례까지만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바츠는 시작 전에 겁을 먹은 것이 무안할 정도였다. 프레이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과 칼날에 상처를 입고 비명을 지르는 프레이의 울음소리는 생각보다 별 것 아니었다. 오히려 앞선 차례에서 숨통이 끊어진 프레이가 처리되는 과정이 더욱 눈길을 끌 정도였다.

테라치가 단 칼에 모가지를 베어냈을 때에는 프레이가 묶여있던 바닥이 덜컹 열리면서 사체가 그대로 어둠속으로 추락했다. 마티프 말로는 소각장으로 직행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델리나가 검을 난폭하게 휘둘러 프레이의 혈흔이 주변에 튀었을 때에는, 앞선 차례처럼 사체가 소각장으로 추락하는 것과 별도로 천장과 바닥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는 환기구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날개소리와 함께 눈 깜짝할 사이에 혈흔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마티프의 말로는 먼저 나온 액체는 알코올이라고 불리는 것이고 뒤이어 들린 소리는 초고온으로 급속 건조시킨 후 안쪽을 환기시킬 때 난 기계소리로 혈흔을 전부 기체로 날려버린 것이라고 했다. 정말 신기했다.

그런데 실습이 이처럼 무난하게 막바지로 흐르고 있을 때였다. 버니에투와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지 못하고 일을 벌였다.

버니에투와는 아이들이 실습을 무사히 마칠 때마다 괴성을 지르며 분위기를 조금씩 흥분되게 만들었다. 마티프가 그 분위기에 휩쓸린 가이즈카가 프레이의 숨통이 끊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난도질하는 것을 보고, 무섭게 주의를 주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둘은 마티프가 다른 아이들의 실습을 돕는 틈을 노려, 이상한 내기를 했다. 바츠는 그들 옆에 있었기 때문에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저기 보여? 저 녀석 굉장히 사나워 보이는데? 다른 녀석보다도 훨씬 커. 네가 저 녀석을 잡을 수 있을까? 네가 저 녀석을 잡지 못한다에 이번 달 용돈을 걸게.”

바츠는 가이즈카가 버니에투와를 도발할 때만 하더라도 사내아이들끼리 흔히 하는 과장된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경도 쓰지 않고, 프레이의 사체가 처리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에 몰두했다. 그런데 갑자기 저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가이즈카가 무릎을 잡고 쓰러져 있었고 붉은 피가 이미 바지를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버니에투와는 그 옆에 서 있었는데, 흥분한 프레이가 그 앞에서 그르릉거리고 있었다.

“어서 일어나 거라!”

마티프는 그 상황을 발견하자마자 그리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프레이는 주저앉아 있던 가이즈카의 얼굴을 물어뜯었고, 버니에투와는 자신만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얼어붙은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흥분한 프레이는 마티프에게도 달려들었다. 마티프는 자신의 오른 소매를 프레이에게 물려주고는 날렵하게 그 위로 올라타며 온몸으로 프레이를 짓눌렀다. 프레이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발악했지만, 빠져나오는 것이 쉽지는 않은 듯 보였다.

“검을 이리 던져! 이리 던지고 모두 물러나!”

마티프가 실습을 하던 곳에 있던 검을 쳐다보며 외쳤다. 그러자 테라치가 서둘러 검을 가져오더니, 막 마티프의 품에서 빠져나오려는 프레이의 목덜미에 직각으로 검을 꽂아 넣었다.

프레이는 칼날이 목을 관통했는데도, 한동안 계속 몸부림쳤다. 마티프가 다시 자세를 추슬러 제대로 압박하지 않았더라면 주변을 충분히 헤집고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움직임 조금 둔해졌을 때, 마티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프레이의 몸통에 박힌 검을 뽑아 크게 휘둘렀다. 프레이의 몸통이 단 번에 두 동강이 났다.

“뭘 쳐다만 보고 있는 거야! 어서 응급실로 내려가!”

마티프가 그 모습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던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이번에도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테라치였다. 테라치는 마티프가 자신의 소매를 찢어 가이즈카의 상처를 지혈하자, 그를 등에 업었다. 그리고는 지훈과 함께 응급실을 향해 달렸다.

“이러려던 것이 아니었어요. 정말 빨랐다고요.”

버니에투와가 테라치와 가이즈카가 이곳을 빠져나가자,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미티프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망설임도 없이 버니에투와의 뺨을 후려쳤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봐라, 네가 벌인 꼴을. 하마터면 네 덕분에 가이즈카가 죽을 뻔 했어. 헌터는 자신이 희생할지라도 동료의 희생을 지켜보지 않는다. 넌 헌터가 될 자격이 없어.”

마티프는 당장이라도 버니에투와의 목을 비틀고 싶은 눈치였지만, 애써 참아내며 여기서 수업을 끝냈다.

버니에투와는 마티프와 다른 아이들이 자리를 모두 떠났을 때에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가이즈카의 붉은 피로 얼룩진 바닥에 정신이 팔려 그곳을 한참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