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 각자의 길 -- > * 25화 *
바츠는 버니에투와가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며 그가 너무 자책하지 않길 바랐다. 그리고 무관심했던 자신을 속으로 자책했다. 자신으로 인해서 사고가 난 것 같다는 죄책감에, 조금만 신경을 기울였다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불의의 사고가 아니라 자신이 만든 일 같았다.
버니에투와는 한참 뒤에나 실습장을 빠져나왔다. 엔지니어들이 자리를 정리하기 위해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는데, 그들의 등장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대로 동상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턱을 쇄골사이에 붙이고 시선은 바닥에 완전히 고정한 채 걸어 나오는 그의 모습이 한 눈에도 우울해보일 정도로 기운이 없었다.
바츠는 그 옆으로 따라붙으며 위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단순한 사고였을 뿐이라고, 일부로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그의 짐을 덜어주려 노력했다. 심지어 자신도 테라치와 함께 몰래 똑같은 행동을 하려고 했다는 거짓말까지 더했다.
하지만 그의 기분은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벨리타에게 호되게 당할 때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침울했다. 당장에 울음을 터뜨리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중간에 레벨5를 순찰하던 군인에게서 여기에 어떻게 왔냐며 꾸지람까지 듣는 바람에 분위기는 정말 최악이 되었다.
그는 미사훈련소의 학생임을 밝히고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침착하게 설명하는 바츠와 다르게 완전히 풀이 죽어 있는 버니에투와를 수상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그리고는 묘한 표정으로 레벨3까지 안내해주겠다며 직접 나섰는데,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말로 위하는 것처럼 굴었지만 정작 그의 태도는 범죄자를 감시, 연행하는 것처럼 강압적이었다.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더라도 정면을 응시하라며 윽박질렀고, 걸음속도를 바꾸기라도 하면 지니고 있던 소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바츠는 분통이 터졌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레벨5에 오기 위해서는 관계자임을 나타내는 노란색 출입카드나 전 구역 어디든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검은색 출입카드가 필요했지만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과 버니에투와의 옷에는 거주지가 레벨1이라는 것이 선명하게 표시가 되어있었고, 버니에투와는 도둑질을 한 것처럼 어두운 얼굴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괜히 억울한 마음에 발끈했다가는 더 오해를 사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까 마티프와 함께 돌아가지 않은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가 바츠와 버니에투와를 놓아준 건 레벨4와 레벨3을 잇는 통로에 도착하고 나서였다. 그는 그 앞에 서서 학교로 돌아가라고 단단히 일렀다. ‘꼭’이라는 말에 힘을 실어 강조하기도 했는데, 그 말이 허투루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바츠와 버니에투와가 저쪽 코너를 돌 때까지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의심스런 눈초리로 지켜보았다.
바츠는 코너를 도는 순간 불만을 입 밖으로 꺼냈다. 슬쩍 버니에투와의 눈치를 살피며 욕설까지 섞어 필요이상으로 격하게 표현했다. 방금 전 군인에게 분풀이를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버니에투와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가이즈카의 붉은 피를 보게 된 것이 제법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그는 정처 없는 걸음으로 학교주변을 배회할 뿐이었다.
바츠는 그런 버니에투와를 슬며시 잡아당겼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내딛는 걸음을 레벨1로 향하게 해주었다. 어차피 수업은 실습장에서 끝났기 때문에 학교에는 아무도 없었고, 집으로 돌아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정확히는 이미 한참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버니에투와가 입을 연건 레벨2와 레벨1을 잇는 통로에서였다. 그는 혼자 있고 싶다는 말로 바츠에게 작별을 고했다.
바츠는 그가 집까지 무사히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싶었지만, 조용히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말대꾸를 하지 않고 그냥 보내주었다. 대신 그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몰래 쫓아가 끝까지 지켜봐주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서 견디기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이런 친구가 하나쯤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물론 그는 전혀 깨닫지 못할 테지만 말이다. 상관없었다. 그가 모른다고 진실이 거짓으로 바뀌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츠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츠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다.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봐 준 것은 아니었지만, 집 앞에서 조용히 기다려주고 있었다. 오히려 바츠의 행동보다도 더 값진 모습이었다.
“늦었네? 버니는 좀 어때?”
일반학교에서부터 쭉 친하게 지내왔던 사이였지만, 서로의 집에는 찾아가본 적이 없는 그런 친구였다. 친구냐고 묻는 질문에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지만, 생각해보면 서로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는 않았다.
“아델리나!”
바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라면 오늘도 어김없이 혼자서 훈련장에 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집 앞까지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집이 어느 구역에 있는지는 알아도 정확한 위치는 모르고 있던 바츠로서는 이렇게 정확히 찾아와 있는 그녀의 모습은 놀라우면서도 왠지 미안한 감정이 들게 만들었다.
“테라치가 그러더라, 넌 친구가 아프면 혼자서 힘들어하고 있는 다고. 그러니 위로 좀 해주라고 말이야. 표정을 보니까 정말인 모양이네?”
“가이즈카는 어때? 심각한 상처야?”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아델리나가 시치미 떼듯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정말 궁금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가에 슬며시 보이는 미소를 보면 장난임이 틀림없었지만 껌뻑이는 눈을 보면 또 아닌 것도 같았다.
“응급실에 함께 갔던 것 아니었어?”
“응급실? 검은 개랑 다른 애들이 함께 가기는 했지.”
바츠는 아델리나가 테라치의 부탁으로 와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테라치와는 함께 있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럼 넌? 넌 어떻게 온 건데?”
바츠는 자꾸만 뜸들이듯 짧은 대답으로 일관하는 그녀의 태도가 답답해서 조금씩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마치 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애써 초조한 기색을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글쎄, 레벨1이 그렇게 넓은 곳도 아니잖아? 게다가 난 여기서 15년이나 살았다고, 마음만 먹으면 길을 찾는 건 일도 아니야.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을 걸? 물론 너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렇지?”
바츠는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레벨1은 분명 레벨5나 레벨3에 비하면 매우 작은 구역이었지만, 앞서 말한 두 구역에 이어 세 번째로 넓은 곳이기 때문이다. 레벨2와 레벨4를 제대로 둘러본 적이 없어 장담할 수는 없지만 세 거주지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는 곳이니 적어도 더 작지는 않을 것이라는 건 5살 아이도 충분히 예측해볼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두 구역과 다르게 작은 양철집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어 길도 생각보다 복잡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길을 잘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헌터 놀이를 할 때만 봐도 그렇다. 헤러티커들이 숨으면 고작 1지구 내에서도 제대로 찾지 못하고 헤매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인지 바츠는 이상하게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정말 이상했다. 그냥 외마디 야유로 무시하면 그만이었는데,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아마도 앞서 벌어진 일들로 마음이 무거웠기 때문인 것 같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조용한 데로 갈까?”
아델리나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바츠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바츠는 그녀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손을 잡아채 이끄는 그녀를 조용히 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