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 각자의 길 -- > * 29화 *
“아델리나...”
바츠는 뜻밖의 상황에 아델리나를 쳐다보았다. 버니에투와가 그녀의 말에 자극을 받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길 바랐는데, 눈앞에는 완전 반대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나마 아델리나가 멋지게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했던 생각이 무안할 지경이었다. 아델리나도 그걸 노리고 선뜻 나섰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말에 발끈하며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길 바라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그런 둘의 기대를 저버리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오히려 더 나빠진 것처럼 보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아델리나는 자신을 부르는 바츠에게 잠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바츠가 주의를 끌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저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은 버니에투와의 모습을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는 몸을 돌렸다.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냉정한 태도였다.
바츠는 돌아서는 아델리나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간 버니에투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애만 태웠다. 밥을 먹으면서, 동시에 씻고 옷을 입는 것처럼 누구를 먼저 붙잡아야 하는지 정신이 없었다. 테라치가 옆에서 도와주면 좋았을 테지만, 그 역시 포기했는지 긴 한숨과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바츠는 그런 둘이 버니에투와를 포기하고 떠나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둘이 없다면 그가 다시 스스로의 힘으로 고개를 들도록 만들 자신이 없었다. 그 정도로 그의 상태는 심각해보였다. 테라치와 아델리나를 반드시 붙잡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 둘을 붙잡은 건 바츠가 아니었다. 잠에서 막 깬 것처럼 꽉 잠긴 목소리.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처럼 무엇인가에 가로막혀 탁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우리 형은 헌터야.”
바츠는 테라치와 아델리나가 몸을 돌려세우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목소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시선에는 여전히 고개를 파묻고 미동조차 없는 버니에투와만 보였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목소리가 그의 품안에서부터 들려오는 것을 보면 그의 목소리임이 틀림없었다. 확실했다. 그곳에는 오로지 그 혼자였다.
“1년 전에 미사를 졸업했어. 19살에 말이야. 그리고 지난번에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왔어. 옆집에 사는 샤오밍 씨가 가져다주더라. 너희도 알지? 그 아저씨 군인이잖아. 전진기지로 물자수송을 하러 갔다가 전진기지에 있던 헌터에게 받았대. 형이 내 소식을 들었나봐. 꼭 헌터가 되어서 밖에서 만나자고 써 보냈어. 그리고 언제나 자신감 있고 용감하게 행동하면 해낼 거라고 적혀있고 말이야. 그런데 지금 나를 봐. 나는 완전히 머저리야. 가이즈카에게 한 짓을 보라고. 난 헌터가 될 자격이 없어. 겁쟁이에 바보야.”
샤오밍 씨라면 분명 지훈이 점심시간 마다 일반학교로 만나러 가는 챠오웨이의 아버지가 틀림없다. 그는 헌터가 되기 위해 미사훈련소로 진학을 했지만, 2학년이 되기에는 성적이 부족해서 결국 군인이 되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군인학교로 가게 된 그는 그곳에서 남다른 사격솜씨를 자랑하며 재능을 찾았고, 지금은 아르크 내에서 손에 꼽히는 사수 중에 하나라고 지훈이 챠오웨이를 대신해서 의기양양하게 자랑하던 것이 떠올랐다. 특히 움직이는 목표물을 맞히는 솜씨가 일품이라고 했다.
“아직은 아니야.”
아델리나가 말했다.
“아직은 겁쟁이에 바보 아니야. 하지만 계속 그렇게 있다면 진짜 겁쟁이에 바보가 되고 말 걸?”
그녀의 말투는 버니에투와를 조롱하듯 비아냥거렸지만 실제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에게 아직은 충분한 기회가 있으니 끝까지 해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버니에투와가 그녀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아델리나를 비롯해서 바츠와 테라치의 얼굴을 차례로 살피더니, 촉촉해지기 시작하는 시선을 바닥에 고정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차오를 것 같은 눈이 침대 밑으로 굴러 간 구슬을 찾는 것처럼 어느 한 곳을 집중했지만 그런 눈동자에 초점은 없었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 맞아. 네가 예전에 내게 했던 말 기억나? 내 실력으로 들어온 게 아니라고 했잖아.”
“그건 그냥 화가 나서 한 말이었어.
바츠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서둘러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버니에투와가 여전히 시선은 그대로 유지한 채 무심하게 대꾸했다. 마치 그의 모습이 잠꼬대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네 말대로야. 나야 말로 자격이 없지. 테라치가 아니었다면 난 아마 지금도 일반학교를 다니고 있을 걸? 하지만 지금 나를 봐. 이제는 너보다도 내가 성적이 좋다고.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너도 알잖아? 그래서 우리 함께하기로 했던 거 아냐? 같이 강해지기로 했잖아.”
바츠는 아델리나의 말투를 따라 슬그머니 으스대며 그를 자극하고는, 가장 뒤쪽에 서있던 테라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테라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가자. 우리 함께 가자. 함께 가서 다시 하자. 가이즈카도 네가 없으면 섭섭해 할 거라고. 아마 녀석도 며칠 뒤에는 다시 학교에 오게 될 걸? 그때 네가 없으면 당한 빚을 갚아주지 못해서 억울해할 지도 몰라. 그리고...”
바츠는 테라치의 밝은 얼굴에 용기를 얻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음 말을 잇기 직전, 한 번 숨을 고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숨이 가빠졌다. 쉴 틈 없이 말을 내뱉는 바람에 호흡을 조절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이 다음 말을 하려고 하자, 갑자기 먹먹해지는 가슴이 호흡을 방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다시는 이롤로처럼 아무 말도 없이 우리에게서 떠나지마. 우리 함께 하자.”
“그럼...내 옆에 계속 있어 줄 거야?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라도?”
버니에투와가 고개를 완전히 들었다. 허리를 펴고 뒤통수가 벽에 닿을 정도로 몸을 일으켰다. 시선은 으름장을 늘어놓는 벨리타를 마주한 것처럼 불안했고 목소리는 마티프의 호통 앞에 선 것처럼 심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오늘 그의 모습을 본 것 중 가장 자신감 있는 모습이었다.
바츠는 고민도 없이 얼른 그렇다고 대답해서 그가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만드는 영광을 차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술을 강제로 붙들며 그 영광을 아델리나에게로 돌렸다.
“...물론이야.”
버니에투와의 시선이 바츠 자신이 아니라, 아델리나를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뭔가 서운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델리나의 대답에 급격히 화색이 돌기 시작하는 그의 얼굴을 보자 너무 기뻤다. 그 서운한 감정이 이유를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완전히 날아가 버릴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그가 지쳤는지 조금 비틀거리며 벽에 의지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쁨을 충분히 누리기도 전에 또 다른 걱정에 직면해야 했다. 그것은 이제 막 용기를 얻기 시작한 버니에투와에게 잔인한 일이었지만,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눈앞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검은 개가 과연 가만히 둘까?
내내 잠자코 있던 테라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것은 들뜬 바츠의 산통을 깨는 말이었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토라진 아델리나가 하룻밤 만에 자연스럽게 풀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막연한 기대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맞아. 난 무단으로 결석을 했어. 내일이면 검은 개가 날 퇴학시키고 말거야. 내 얼굴에 대고 소리를 지르겠지. 너무 늦었어.”
버니에투와가 체념한 듯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바츠는 그 사이에서 일말의 기대와 희망을 찾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련이었다. 바츠는 그것을 정확히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멋대로 책임지기 힘든 허풍을 늘어놓았다.
“내가 함께 가줄게! 가서 대신 사정해 볼게! 나 검은 개랑 친하다고!”
바츠는 그와 있었던 일들이 마구 스쳐지나갔다. 입학 첫날부터 그의 무서운 호통을 들었던 것과 이롤로를 찾기 위해 그에게 대들었던 일, 플랫폼 입구에서 마주쳤던 일까지 그와는 놀랍도록 제법 많은 인연이 있었다. 게다가 그때마다 항상 그의 도움이 있었다. 특히 이롤로가 추방당하고 실의에 빠져있을 때는 그의 진심어린 조언이 있었다. 그것은 일종에 위로였고 그만의 방식이었다. 다소 거칠거나 불친절했지만 허투루 대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의 태도에는 분명 애정이 묻어있었다. 가끔 반 전체에 주의를 주거나 실습을 앞두고 당부를 할 때만 봐도 알 수 있다. 무섭게 말하지만 전부 학생들이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위한 것들이었다.
어쨌든 바츠는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야 그런 것들을 느끼는 자신이 조금 한심하기는 했지만, 플랫품의 수증기처럼 피어오르는 자신감이 그런 감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다. 배려는 뒤를 돌아봤을 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도와줄게. 네게 기회를 한 번 달라고 부탁해볼게. 아마 내가 부탁하면 검은 개도 어쩔 수 없을 걸.”
테라치가 바츠를 거들었다. 바츠보다도 훨씬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워낙 당당한 그였기 때문에 전혀 이상해보이지는 않았지만, 마티프도 어쩔 수 없을 거라는 말까지 보태며 장담할 수 있는 이유는 궁금했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쉬워 보이는 모양이었다.
“나도. 나도 옆에 있어 줄게. 약속했으니까.”
아델리나도 동참했다. 그녀는 주저앉아 있는 버니에투와에게 다가가 묘한 미소로 손을 내밀었다. 어제 폐기물 처리장에서 보았던 미소와는 다른 것이었다. 다정하고 상냥해 보이는 것이 비슷해 보이기는 했지만 뭔가 달랐다. 마치 지난번 플랫폼에서 보았던 스타드의 태도 같았다. 그는 부사령관과 마티프와 같은 악수를 나눴지만, 맞잡는 그 손에 주어지는 힘은 분명 달랐다. 그게 표정으로 들어날 정도로 확연히 차이가 났었다. 그녀의 미소는 그 정도로 뚜렷한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츠는 그 차이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버니에투와는 그런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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