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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31화 (31/268)

< --   2. 각자의 길   -- >         * 31화 *

“미안한데, 난 따로 먹을 게.”

다음날, 테라치가 항상 같이 먹던 점심을 지훈을 따라 일반학교로 가서 먹겠다고 나섰다.

바츠는 갑작스런 일에 당황한 나머지 대답을 바로 하지 못했다. 테라치의 말투가 의사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확정을 지은 채 알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워낙 순식간에 교실을 빠져나간 터라 무엇을 하고 말고 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래도 바츠는 형편이 나은 편이다. 아델리나는 테라치에게서 어떤 말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뒤늦게 자신의 도시락을 가지고 온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 없는 그를 찾았다. 바츠는 어깨를 으쓱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 해야 했다. 버니에투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자리로 오자마자 테라치에 대해 물었지만, 바츠는 고개만 가로저었다.

테라치는 점심시간이 끝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돌아왔다. 그래서 그에 대한 소식은 혼자 먼저 돌아온 지훈에게서 들어야 했다. 그는 테라치가 올해 일반학교에 전학 온 애니를 만나러 갔다고 했다. 지상에 대한 관심이 많던 테라치였기 때문에, 애니를 만나러 간 건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이미 그녀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누그러진 것을 생각하면 조금 의아한 상황이었다.

애니가 전학 온지 벌써 수개월이 지났다. 그녀가 직접 아르크의 아이들 한명 한명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다 해주고도 충분히 남는 시간이다. 테라치 역시 그녀가 가진 지상에 대한 정보를 모두 들었을 것이다. 당시 그녀를 자주 찾아갔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그녀를 다시 찾아갔다는 건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수업시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버니에투와도 가늠해볼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도 그녀를 통해 지상에 대한 소식을 듣는 사람은 그 뿐이었다. 게다가 어제 그의 얼굴에 스쳤던 어두운 기색을 생각하면 걱정이 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바츠는 그가 자신보다 훨씬 현명하고 뛰어나다는 걸 잘 안다. 그를 걱정할 자격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를 염려하고 우려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다. 그를 걱정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도 우스웠지만, 시험문제에 잘못된 답을 적은 것처럼 불안한 마음에 가슴이 조마조마한 것을 억누르기가 매우 힘들었다. 돌아온 그가 웃는 얼굴로 별일 아니라고 위로했지만, 그때부터 애니에게 지나칠 정도로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츠, 테라치, 아델리나 그리고 버니에투와는 버니에투와가 다시 학교로 돌아온 그날부터 사이가 정말로 돈독해졌다. 점심을 같이 먹고, 수업이 끝나고 검술 훈련과 학업에 대한 공부를 이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사소한 일들까지 어지간하면 모두 넷이 함께 어울렸다. 심지어 아델리나가 수업 중 마티프의 기습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그날 홀로 청소 당번이 되었을 때까지도 함께 했다. 따로 이야기를 나눴던 것은 아니다. 모두 자발적으로 자리에 남았다. 누구라도 혼자 남겨지게 되는 상황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모두가 자연스러웠다. 최소한 둘이 함께 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 하는 바람이 보였다. 가끔 테라치가 한 번씩 빠지기는 했지만,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누구나 하루쯤은 사정이 생기는 법이니 말이다. 반 친구들이 부러워할 정도였다. 특히 지훈이 많이 부러워했는데,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조금 멀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수업이 끝나고 넷이 나란히 교실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발견한 그가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너희들 지겹지도 않냐? 어떻게 매일 같이 다니면서 그렇게 재밌어 하지?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아?”

신경질적으로 비아냥거리는 말투였지만, 그는 분명 자신도 끼고 싶은 눈치였다. 무사히 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가이즈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지훈과 다르게 직접 이야기까지 했다.

“나도 좀 껴줘.”

늘 혼자 있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조용한 그가 이런 말을 했다는 건, 어지간히 애를 태웠다는 증거였다. 이전에 지훈을 제외하고 그나마 가깝게 지내던 것이 버니에투와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둘은 그때 실습장에서의 사고 이후로 부쩍 친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아이들의 부러움과는 상관없이, 시간이 지날수록 넷 사이의 관계는 조금 소원해졌다. 정확히는 테라치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그가 남은 셋과 함께 하는 시간을 차츰 줄이고 애니를 좀 더 만나보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그녀에게 반하기라도 한 것처럼 집착하고 있었다.

“미안한데, 나 일반학교에 좀 갔다 올게. 너희들 먼저 버니 집에 가 있을래? 너무 늦지 않을게.”

“또, 또! 왜 자꾸 멋대로 혼자 빠지는 거야!”

비아냥거리는 지훈을 뒤로하고 교실을 막 빠져나오는 찰나, 아델리나가 오늘은 꼭 수업 끝나고 함께 검술 훈련장에 가자고 약속을 받아냈는데도 불구하고 테라치는 결국 홀로 일반학교로 향했다. 몇 번이나 미안해하며 사과를 했지만, 바츠를 비롯해서 아델리나와 버니에투와의 마음을 달래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혹시 테라치가 애니를 좋아하는 거 아냐?”

바츠는 버니에투와가 무심코 던지는 말에 왠지 믿음이 갔다. 테라치가 그녀에게 반한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그녀를 만나려고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테라치에게 특별해질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그뿐이었다. 그전에는 테라치가 외부 소식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자신처럼 막연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했었다. 특히 미사훈련소에 오고 나서부터 지상에 대한 소식을 알기 위해 적극적으로 변한 모습은, 헌터가 되어서 언젠가는 자신이 지상으로 나가게 될 것이라는 마음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애니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조금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그녀를 찾았다. 꼭 케일리가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과 닮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그녀처럼 즐겁고 상기된 얼굴은 아니었지만, 원래 얼굴에 감정을 많이 나타내지 않는 그였기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바츠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테라치가 이제는 서운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정도로 그를 아끼고 있었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기회가 되면 먼저 그 이유를 물어봐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교실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두 번째 시험을 치루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테라치는 이번 시험에서도 1등을 차지했다. 전에 비해 검술이나 학업에 집중하는 시간이 줄었는데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이번 시험에서 두 과목 모두 만점을 받았다. 미사훈련소가 세워진 이례 최초라고 했다. 아델리나는 수업 성적이 조금 올랐고 검술은 바츠를 제치고 2등을 차지했다. 버니에투와는 검술 성적은 그대로였지만, 수업 성적이 월등히 오르며 반에서 6등을 차지했다. 바츠가 큰 변화가 없었던 것에 비하면 다들 발전했다. 마티프가 버니에투와를 특별히 호명하며 칭찬했다.

“수고가 많으시오.”

뜻밖의 손님이 찾아온 건 바로 그때였다. 그는 아무런 기별도 없이 방문을 한 것인지 마티프를 놀라게 만들었다. 마티프가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마티프에게 그런 표정이 있다는 것이,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바츠는 그를 단 번에 알아봤다. 물론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교실의 아이들이 마티프에게 호통을 들을 때처럼 동시에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최대한 바른 자세를 했다.

그는 푸른 정장에 은테로 만든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가로로 긴 안경알이 가뜩이나 주름으로 쳐진 그의 두 눈을 더욱 날카롭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두 눈으로 아르크 이곳저곳을 전부 들여다보는 일을 한다. 대부분 사령관을 대신해서 하는 일들이었다. 그렇다. 그는 부사령관이었다.

그는 마티프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하고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오로지 마티프만 상대할 뿐이었다. 마티프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를 몇 번이나 주고받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테라치를 호명하더니, 그를 데리고 교실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의 손에 이끌려 나가는 테라치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바츠가 옆을 지날 때 슬쩍 손을 내밀었지만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넋이 나간 사람처럼 시선이 오로지 정면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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