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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32화 (32/268)

< --   3. 만남   -- >         * 32화 *

“오늘은 여기까지다.”

테라치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마티프는 그의 자리가 여전히 비어있는데도 불구하고 수업을 마쳤다. 그의 책상 위에 교재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바츠는 마티프의 행동이 실망스러웠다. 그라면 최소한 테라치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일 없던 것처럼 평소대로 교실을 빠져나갔고, 오히려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뭉그적거리는 바츠에게 빨리 돌아가라고 한소리까지 했다. 정확히는 짐을 챙기는 아이들 모두를 향해 말한 것이었지만, 바츠는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다고 그 말에 신경 쓸 바츠가 아니었다. 게다가 아델리나의 고집은 남달랐고, 버니에투와의 감성은 누구보다 풍부했다. 셋은 거짓말처럼 동시에 교실을 떠나는 듯 하다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대로 빈 교실에 남아 테라치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버니에투와가 이번 시험 만점 받은 것에 대해 상을 받으러 간 것일 거라고 계속 중얼거렸다. 하지만 긴장된 표정으로 불안해하는 걸 보면,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마음만은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델리나가 다독이며 옆으로 와서 앉으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신의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초조해보였다. 바츠 역시 그를 향해 몇 번이나 별 일 아닐 거라고 안심시켜야만 했다. 물론 그의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관리자가 레벨1의 아이를 따로 부르는 일은 오직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결코 레벨1 거주자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레벨2의 거주자들이 조롱을 한다면, 그들은 아예 무시를 해버린다. 어찌 보면 그들의 태도가 레벨2의 거주자들보다도 더욱 잔인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레벨1에 사는 아이를 찾는다면 그건 절대 유쾌한 일일 리가 없다. 그래서 레벨1의 거주자들에게 그들의 방문은 전혀 환영받지 못한다. 부모 없이 홀로 아르크에 남게 된 아이. 그들이 레벨1에 사는 아이를 찾는 이유는 바로 그때뿐이기 때문이다. 아르크 주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 관리자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사령관이었다. 그가 직접 찾아와 테라치를 지목해서 데려갔다. 틀림없었다. 바츠의 머릿속은 아마도 성적이 출중한 테라치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 차원으로 그가 직접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아델리나와 버니에투와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미리 졸업시키려는 건 아닐까? 테라치라면 충분히 가능하잖아. 굳이 부사령관이 찾아올 이유가 뭐가 있겠어?”

버니에투와가 아델리나 옆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테라치가 잃어버렸다는 코피카를 대신 찾기라도 한 것처럼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환호성을 질렀다면 영락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아르크의 법을 절대적이었다. 예외의 경우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해야만 했다. 올해 초 ‘라파엘’ 스타드가 돌아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 정도의 일이 아니라면 테라치가 조기에 졸업할 일은 결코 없었다.

자리에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바츠와 아델리나는 굳이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집에 가자. 내가 테라치의 집에 가서 기다려볼게. 우리 바로 옆집이잖아.”

바츠는 테라치의 짐을 챙겼다. 이곳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그를 계속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돌아오더라도 집에 한 번은 들릴 테니 차라리 그곳에 있는 게 더 나았다. 게다가 이롤로 때를 생각하면 반드시 집으로 가봐야만 했다.

“그래, 그러자. 분명 별 일 아닐 거야. 바츠한테 맡기고 우린 그만 가자.”

아델리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버니에투와의 팔을 끌었다. 버니에투와가 그럴 수 없다며 같이 가겠다고 떼를 썼지만, 아델리나의 고집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그녀의 손에 이끌려 자리를 떠나야 했다.

“그럼 부탁할게. 우리도 걱정하고 있다고 전해줘. 가능하면 목을 졸라주라고!”

레벨1 주거지역 입구에서 아델리나가 테라치의 목을 대신해서 버니에투와의 팔을 자신의 팔로 조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바츠는 테라치에 대한 걱정으로 무거웠던 마음이, 그녀의 장난으로 조금은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특히 헤어지기 바로 직전, 환하게 웃는 얼굴로 윙크를 해줄 때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집 앞에 도착하기 전까지 자신의 목적을 순간적으로 잊을 만큼 가슴이 설렜다.

“넌 누구야?”

바츠는 테라치의 집 앞에, 정확히는 자신과 테라치의 집 사이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 한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그녀는 작은 키에 동그란 얼굴로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는데, 오른쪽 뺨에 불에 덴 것 같은 자창이 있었다. 바츠에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특히 그 흉터는 쉽게 잊을 수 없는 상처였다.

“안녕? 여기 사니? 난 애니라고 해.”

그녀가 바츠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지만, 한차례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침착하게 말했다.

“아니, 난 이쪽에 살아. 거긴 내 친구의 집이야.”

바츠는 그녀가 서 있는 반대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테라치에 대해서 잘 알겠네? 걔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혹시 아는 것 없어?”

바츠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을 해야 할 지 망설여졌지만, 그녀의 표정이 걱정으로 가득한 것을 보고 오늘 있었던 일을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녀가 전보다 더 어두워진 표정으로, 혼잣말을 늘어놓듯 기운이 전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수업 끝나고 우리 집에 온다고 했는데 너무 늦는 것 같아서 와봤는데...약속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별 일 없는 거겠지? 그런데 집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왜 집에 아무도 없는 지 혹시 아니?”

바츠는 그녀의 질문에 가슴이 울컥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내며 대답했다. 하지만 꼭이라는 말에 힘을 싣는 순간 목이 메는 바람에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창피했지만 그녀는 다행히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보였다.

“테라치는 아빠와 단 둘이 살아. 그리고 아저씨는 지금 지상에 계시거든. 내년에 우리 아빠와 함께 꼭 돌아오실 거야.”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바츠가 강조해서 말한 것 역시 전혀 모르는 눈치 채지 못했다. 아마도 아르크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데나 바빴을 테니, 이곳 이야기에 대해 제대로 듣지 못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바츠는 그것을 이해했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굳이 시시콜콜하게 설명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한 번 시작하게 되면 어디까지 이야기를 하게 되어야 할지 모르고, 그렇게 된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될 테니 말이다. 그냥 자연스럽게 차차 알게 되는 것이 모두에게 좋았다. 게다가 아직 그에 대해 확실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섣부른 판단을 하게 만들어 오해를 사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테라치에게 묻고 싶었던 말이지만 그녀에게 대신했다.

“그런데 말이야...혹시 테라치하고 특별한 이야기 나눈 적 없어? 지상에 대한 것 말고 말이야. 예를 들어...그런 거 있잖아. 남자 여자관계라든지 하는 그런 진지한 것들 말이야.”

“그걸 어떻게 알았어? 테라치가 비밀로 해달라고해서 아무에게도 이야기한 적 없는데...”

바츠의 물음에 그녀가 곤란한 표정으로 몸을 반쯤 옆으로 돌렸다. 마치 케일리가 말다툼 중 자신이 불리해지자, 더 이상 말하기 싫다며 돌아설 때와 닮아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소극적이었고 조심스러웠다.

바츠는 그 모습을 보자 괜히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 이야기가 사실로 밝혀지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그동안 그에게 서운했던 감정을 전부 떨쳐낼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애니는 다를 것이다. 테라치를 찾아 이곳까지 왔다는 건 그녀 역시 테라치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인데, 만약 오늘 테라치에 대한 추측이 현실이 된다면 그녀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실을 빠져나가는 테라치의 멍한 모습을 볼 때보다도 훨씬 더 긴장됐다.

“그렇지? 무슨 이야기가 있던 거지? 내게 이야기해줄 수 있어?”

그녀는 대답을 재촉하자 잠시 생각하더니, 의심스런 눈초리로 테라치와 얼마나 친한지 부터 물었다. 그리고 뒤늦게 이름을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츠는 그녀에게 자신의 이름은 물론이고, 테라치와는 친형제와 다름없다는 말을 망설임 없이 했다. 그녀에게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편이 위로하기에 더 편했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길 바라지만 말이다.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는 않았지만, 주위를 살피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테라치가 그랬는데...”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바츠는 그녀에게서 그 이상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녀가 바츠의 등 뒤로 모습을 드러낸 한 사람을 발견하면서 두 눈을 동그랗게 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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