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33화 (33/268)

< --   3. 만남   -- >         * 33화 *

금발의 소년. 갸름한 턱과 마른 체격을 보면 계집애 같아 얕잡아 보고 업신여기기에 안성맞춤이지만, 그를 조롱할 수 있는 아이를 이곳에서 찾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가 레벨4에 사는 부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고작해야 레벨1 구석진 곳에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혼자일 때가 훨씬 많다. 레벨1의 다른 아이들처럼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런데도 다른 아이들이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태도 때문이다.

그는 어느 상황에서도 주눅 드는 법이 없다. 평소에도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모든 일을 척척해낸다. 어려운 문제도 막힘없이 풀어내는 뛰어난 머리와 일가견이 있는 검술이 그를 그렇게 만드는 것 같다. 지난번 실습장에서 프레이 사고 때만 봐도 알 수 있다. 다들 겁에 질려 당황한 나머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마티프를 도와 사고를 마무리 지었던 것이 그였다. 그는 어려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바츠의 눈에는 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부자라는 단어를 빼고 말이다.

바츠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그를 친형제처럼 따랐고 언젠가 부터는 그처럼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상적인 대상에 대해서 선망하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동경에 이르게 되는 일종의 순리였다. 비단 바츠뿐만이 아니다. 그를 아는 아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그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치 미사훈련소의 아이들이 ‘라파엘’ 스타드가 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레벨1에 사는 아이가 아니더라도 그러했다.

바츠는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테라치.”

애니의 시선을 따라 몸을 돌린 바츠는 그곳에서 뜻밖의 상황에 놀랐는지, 의아한 얼굴로 멈춰 서 있는 테라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갸웃하며 도리어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다. 바츠는 자신이 물어야 할 질문을 그가 대신하고 있어서 말문이 막혔다. 옆에 있던 애니가 아니었다면, 벙어리가 된 것처럼 이상한 소리나 냈어야 할지도 몰랐다.

“오늘 우리 집에 온다고 해놓고 오지 않았잖아.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리가 없는데...걱정이 되더라고.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잖아.”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야? 약속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내일은 꼭 갈게.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아니야. 그렇게 멀지도 않은 걸. 그럼 내일 보자.”

애니는 테라치의 위로를 받고 돌아갔다. 자리를 떠나는 그녀의 어두웠던 얼굴이 환하게 변한 것을 보면, 걱정을 완전히 떨친 모양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아니었다. 바츠는 테라치에게 그의 짐을 건네며 물었다.

“정말 별 일 없는 거야?”

“...그래. 내게 큰 변화가 없다는 건 별 일이 없는 것 맞지? 그럼 별 일 없는 것이 맞아.”

“그런데 조금 이상해 보여.”

바츠는 그가 천연덕스럽게 양팔을 펼쳐 보이며 자신의 몸을 훑는 시늉을 했지만, 대답하기 직전 잠시 머뭇거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왜? 내 얼굴이 좀 달라?”

“모르겠어. 하지만 교실에서 보았던 표정은 분명 달랐어. 나는 네가 오늘 같은 표정을 한 걸 본 적이 없어. 이롤로가 떠났을 때도 그런 표정을 한 적 없잖아. 게다가 언젠가부터 우리보다도 애니하고 더 많이 지내고. 네 말대로 큰 변화는 아니겠지만, 분명 변한 것은 맞는 것 같아.”

“...아무래도 친구보다도 더 가까운 사람 때문인가 보다.”

테라치는 마치 다른 사람이야기를 하듯 대답했다.

바츠는 그가 그 자신에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단 번에 눈치 챘다. 조금 전처럼 이번에도 대답을 하기 바로 직전 잠시 머뭇거렸기 때문이다. 매우 짧은 찰나였지만, 워낙 그에게 집중하고 있던 터라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의 말을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를 이상하게 만든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다. 그리고 부사령관이 그의 아버지 일로 호출을 한 것이라면 단 한 가지 경우뿐이다. 입에도 담기 힘든 바로 그 일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의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가 지금처럼 태연하게 돌아올 수는 없었다. 물론 조금 이상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런 상황을 마주한 사람치고는 너무도 침착했다. 게다가 그는 이제라도 짐을 싸기 시작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는 짐을 싸기는커녕 그 어떤 것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피곤한 듯한 얼굴로 집에 들어가고 쉬고 싶은 기색만 보일 뿐이다.

바츠의 의문은 부사령관이 그를 데려간 이유로 돌아갔다. 대체 왜 일까? 그를 데려가서 무슨 말을 했을까? 테라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쉬고 싶다는 말을 할 뿐이었다. 그런 그를 더 이상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롤로처럼 갑자기 떠나야 하는 그런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바츠는 그가 먼저 이야기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부터 교실이 공연(空然)한 궤변으로 소란스러웠다. 자신의 자리에 의자가 아닌 책상에, 교단을 등지고 앉아있는 지훈이 주인공이었다. 가이즈카는 그런 그를 자신의 자리에서 올려다보고 있었고, 버니에투와가 그 옆에 서 있었다. 또, 아델리나는 자신의 자리에서 삐딱한 자세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반 아이들 모두가 그를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바츠는 지금의 상황에 판단이 서지 않아, 자리로 선뜻 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섰다.

“지훈, 그만 좀 해. 지겹지도 않냐?”

함께 온 테라치가 지훈을 향해 소리쳤다. 그는 바츠를 내버려두고 먼저 교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어리둥절한 바츠를 위해 입 꼬리에 미소를 걸어 바라봐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바츠는 그의 능청스런 미소에 안심하며 뒤를 따랐다. 그리고 자리를 찾아가 앉았고, 테라치 역시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 앞에 있던 버니에투와를 옆으로 살짝 밀쳐야 하긴 했지만, 테라치에게서 어제와 같이 눈에 띌 만 한 이상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괴상한 이야기를 또 늘어놓고 있는 지훈만 괴팍해 보일뿐이었다.

그가 수업이 시작하기 전 지금처럼 묘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평소에도 가끔 이상한 고집을 부리며 괴상한 행동을 하지만 이때만큼 괴상해보일 때가 없다. 지난번 마티프의 질문에 고대어로 대답한 일만 해도 그렇다. 그는 간혹 묘한 고집을 부리며 주변에 분란을 만들고는 한다. 그리고 지금 하는 행동도 그 중 하나이다.

그는 정말 기괴한 이야기를 잘 늘어놓는다. 가장 최근에는 관리자가 없는 폐기물 처리장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곳은 더럽고 냄새나고 시끄러운 곳이지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곳으로, 복잡한 기계들로 인해 매우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통제를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그쳤다면 아이들에게 제법 호응을 얻었을 것이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바츠 역시 직접 확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쳤다면 그에게 궤변을 늘어놓는 눈이 작은 싸이코(psycho)라는 소문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거기에 한마디 더 보탰다. 사령관이 레벨4 거주자들을 위해 레벨1 거주자들의 수를 줄여 부족한 식량을 충당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일부로 그곳에서 자연스런 사고가 나길 바란다는 뜻이다. 정말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그럴 거면 차라리 그들의 입장에서는 레벨1 거주자들에게 추방을 통보하는 편이 보다 편리했고, 굳이 밖에서 생존자를 새로 들여올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폐기물 처리장에는 분명 통제관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밑으로 추락하거나 다치지 않도록 난간과 최소한의 조명도 갖춰져 있었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노력이 있다는 뜻이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던 터라 확실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은 어떻게 해도 설득력을 얻기 힘들었다. 그저 약간의 가능성을 가지고 확인하기 어렵거나 증명하기 힘든 특정 조건에 끼어 맞추는 천박하고 값이 싼 헛소리였다.

이번에는 거주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레벨1 거주자들은 왜 레벨1에만 살아야 하는 가로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왜 우리는 레벨1에만 살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레벨2와 레벨4에 사는 아이들하고 우리의 차이가 뭔데? 그들은 우리와 다르게 팔이 세 개고 다리가 네 개인가? 관리자들은 어떻게 해서 관리자가 된 거지? 처음부터 관리자였던 건가? 우리들 중에 그런 기회를 받은 사람이 있어? 대체 그런 것들은 누가 정하는 거지? 사령관이 정하는 건가? 사령관을 직접 본 사람 있어? 그가 아르크를 지켜주었기 때문에 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건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그가 멋대로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지정해줄 권리는 없는 것 아냐? 우리는 아르크의 주민이 아니라 노예들인가?”

지훈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아이들의 반응은 점점 시큰둥하게 변해갔다. 일부는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생각할 바에는 차라리 검술 훈련을 한 번 더 하는 게 나았다. 하지만 거기에 주눅들 지훈이 아니다. 그는 아이들의 반응이 좋지 않으면 않을수록 오히려 더 확고한 목소리로 주장을 펼쳤다. 야유를 보내는 아이들에게 머저리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만약 마티프가 제때 오지 않았더라면 그와 일부 아이들이 큰 싸움을 벌였을지도 모를 만큼 위태위태한 상황을 연출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