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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34화 (34/268)

< --   3. 만남   -- >         * 34화 *

“넌 왜 쓸데없는 일을 벌이고 다녀? 그런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점심시간, 갑자기 버니에투와가 도시락을 먹다 말고 일반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는 지훈에게 괜히 한마디 했다. 그가 그런 언행을 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인데다, 오늘일은 이미 지나도 한참 지난 시점에서 이제와 핀잔을 주는 것은 조금 생뚱맞은 것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가 느닷없이 그런 행동을 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모두 테라치 때문이었다.

바츠는 여느 때처럼 테라치, 아델리나, 버니에투와와 함께 자신의 자리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아델리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테라치에게 어제 일에 대해 물었는데, 테라치는 도시락이 맛있다는 둥, 오늘은 공부하기 싫다는 둥 괜히 딴소리로 얼버무리기만 했던 것이다. 아델리나는 테라치의 행동이 못마땅했는지, 그를 향해 소리를 지르면서까지 주의를 끌고 진지해달라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테라치는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데 아델리나는 계속해서 테라치를 졸랐고 버니에투와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테라치가 그녀를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벌컥 화를 내고 말았다. 하지만 그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니, 엉뚱한 대상을 찾은 것인데 그것이 바로 막 옆을 지나던 지훈이었다. 최소한 바츠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지금 상황에 지훈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가만히 지켜보던 버니에투와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지다가 테라치가 아델리나를 향해 능글맞게 손사래를 칠 때 두 눈에 불꽃이 튀었던 것을 보면 확실했다.

“너 뭐하는 거야?”

테라치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델리나를 향해 웃으며 비비적대던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는 버니에투와의 얼굴만큼 긴장감이 흐르는 얼굴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바츠는 테라치가 화내는 것을 난생 처음 보았다. 가끔 검술 훈련이나 공부를 같이 하며 답답한 마음에 성화를 낸 적은 있었어도, 지금처럼 두 눈에 힘을 주고 누군가를 무섭게 노려보는 것은 본적이 없었다. 그의 분노는 마티프의 호통만큼이나 숨이 막혔다.

버니에투와도 크게 놀란 듯 보였다. 잠시 멍한 얼굴로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가 가까스로 돌아왔다. 자신의 덩치가 테라치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겨우 생각해낸 모양이었다.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뭘?”

“전부터 그랬지만, 내가 너보다 멍청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내가 모를 것 같아?”

테라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버니에투와를 향해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굴었다. 그러자 버니에투와가 잠시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런 테라치를 내려다보았다. 아델리나가 급히 따라 일어나 둘 사이를 말리려고 노력했으나 헛수고였다.

“너희들 왜 그래! 내가 잘못했어! 그냥 걱정돼서 물어본 거잖아! 테라치,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리고 너도! 넌 대체 왜 그래! 내가 고집부린 거잖아! 그만해!”

아델리나가 울먹이며 자신의 양 손으로 둘을 각각 반대쪽으로 밀어내려고 애썼다.

“아델리나, 놔둬! 아직 저 녀석 버릇을 못 고친 거라고. 괴물 같은 녀석이 오랫동안 남을 괴롭히지 않고 있는데, 몸이 근질근질했겠지! 테라치에게 제대로 혼쭐이 나봐야 한다고!”

지훈이 옆으로 바짝 다가와 테라치와 버니에투와를 더욱더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동시에 여기저기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버니에투와를 향한 원성이었다. 그의 편을 드는 건 가이즈카가 유일했다.

“그래, 맞아! 한 번 혼나봐야 한다고! 지금까지 착한 척 하는 걸 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저럴 줄 알았어! 언젠가 다시 못되게 굴 줄 알았다고!”

“그렇지 않아! 버니는 그런 애가 아니라고!”

교실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목소리를 높이는 아이들이 하나 둘 바츠의 자리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테라치는 언제든지 그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에 반해 버니에투와는 잔뜩 겁에 질린 것이 얼굴에 드러나고 있었지만, 애써 그 감정을 숨긴 채 버티고 서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결국 울음을 터뜨린 아델리나만 고생이었다.

“그만!”

그때였다. 바츠가 소리를 크게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찌나 큰 소리였는지, 바로 옆에서 눈물을 흘리던 아델리나가 자기도 모르게 양쪽 귀를 틀어막아야 할 정도였다.

바츠는 자신이 소리를 지르고도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자신의 목소리에 교실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것을 보자 용기가 생겼다.

“우리...이러지 말고 레벨5에 가보자.”

바츠는 자신의 용기가 정말 바보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고작 한다는 말이 레벨5에 가보자라니! 바츠는 지금이라도 자신의 말을 취소하고 다시 말하고 싶었다. ‘야이, 멍청이들아 그만해! 친구끼리 왜 싸우는 거야!’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말은 이미 교실에 있는 모두에게 전해졌고, 그들을 전부 얼어붙은 것처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머저리라고 놀림을 받아도 충분했다.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 기억이 통째로 사라졌으면 했다. 테라치가 표정을 풀고 대꾸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좋은 생각인데? 우리가 직접 가서 사령관에게 왜 레벨1에서만 살아야 하는지 물어보면 될 것 아니야?”

침묵으로 재갈이 물려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 다시 입을 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전부 테라치의 말이 옳다는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심지어 지훈 역시도 공감했다.

“그러게. 직접 우리가 물어보면 내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겠지. 너는 어떻게 생각해?”

지훈이 버니에투와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 특별한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아마도 자신의 생각이라기보다 분위기에 휩쓸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갈 건데? 우린 거기에 갈 수가 없어.”

아델리나가 울음을 멈추고 눈물을 닦아내며 물었다. 바츠는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정면으로 돌려 마티프의 책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위에는 잠시 자리를 비운 마티프의 PMP가 있었다.

손바닥 크기의 검은색 기계. 화면을 켜면 각종 정보가 기록된 것을 살펴볼 수 있고, 다른 사람과 통신도 가능하다. 또한 자료를 전송하고 수신할 수도 있으며, 영상도 확인할 수가 있다. 게다가 필요하다면 손목에 착용할 수도 있는데, 양끝을 문질러 열을 가하면 종이처럼 돌돌 말 수 있게 되어서 휴대성도 간편했다.

바츠는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마티프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아이들은 그 모습을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 바츠가 그의 PMP를 들어 올렸을 때는 외마디 감탄사가 터졌다. 바츠는 그 환호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전원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기계가 약간의 진동과 함께 화면이 밝아졌는데, 사용하기 위해서는 비밀번호를 먼저 입력하게 되어있었다. 실망스러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포기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화면 왼쪽 구석 노란색 원 안에 교차된 두 자루의 검이 말발굽을 관통하고 있는 모양이 그려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바로 출입증이었다!

바츠는 그의 책상 한 켠에 놓인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점심시간이 끝나려면 20분도 넘게 남아있었다. 통로를 따라 이동하면 레벨5에 닿기도 전에 20분이 지나버릴 테지만, 각 층마다 연결되어 있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출입증이 필요했으나, 이미 그건 손 안에 있었다. 이제 정말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바츠는 테라치를 향해 바라보았다.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가고 싶지 않아. 솔직히 궁금하지도 않아.”

테라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아델리나와 버니에투와 그리고 지훈은 생각이 달랐다. 그들은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사정없이 끄덕였다. 그 사이에는 가이즈카도 있었다. 바츠는 다시 한 번 테라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그의 고개는 가로저어졌지만, 긴 한숨과 내두른 고개는 분명 긍정적인 대답을 하고 있었다. 준비는 끝났다. 바츠는 마티프의 PMP를 자신의 손목에 두르고 교실 밖으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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