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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37화 (37/268)

< --   3. 만남   -- >         * 37화 *

며칠 뒤, 바츠는 대청소를 하겠다며 일찍 오라는 케일리의 당부로 수업이 끝나자마자 일찌감치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돌아오는 1월1일을 위한 것이었다. 그때가 되면 빅애스가 다시 열리게 되고, 2년 전 지상으로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게 된다. 케일리는 아버지를 위해 집안을 깔끔하게 만들어두고 싶은 모양이었다.

바츠 역시 긍정적이었다. 먼저 담요를 가까운 환기구로 가져가 먼지를 털어낼 것이다. 특히 2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아버지 방의 담요는 각별히 더 신경 써야 한다. 오븐의 묵은 때도 제거할 것이다. 이제 내년이면 20살이 되는 케일리는 여전히 오븐의 사용법을 모른다. 버튼만 누르며 알아서 작동하는 기계를 아직까지 어려워한다. 그렇다고 별도로 요리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잘하는 것이라고는 남자들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뿐이었다. 적어도 바츠의 눈에는 그랬다. 그녀는 철이 없었다.

그 외에도 할 일은 많다. 배급표를 무려 10개나 지불해야 하는 빌리캄을 대신해서 집안 곳곳을 물걸레질로 닦아야 했다. 또 욕실 청소도 해야 했다. 오늘 하루 동안 전부하기에는 벅찬 일이지만, 둘이라면 자정을 조금 넘길 정도면 충분히 끝낼 수 있는 일이었다.

바츠는 늦은 밤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 같은 대청소가 귀찮았지만, 곧 오게 될 아버지를 떠올리면 기꺼이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2년을 아버지와 함께 하게 된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바츠!”

바츠가 벌써부터 들뜬 기분으로 막 레벨3에서 레벨2로 연결된 통로에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반학교를 다니던 작년만 하더라도 자주 만났던 소녀의 목소리였다.

바츠는 몸을 돌려세웠다. 그러자 자신을 향해 다가오며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고 있는 벨리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올해 초만 해도 그녀를 만나는 건 심심치 않게 있었다. 비록 애써 찾아보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몇 번이나 마주쳤었다. 작년에 비하면 그 빈도가 한참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서운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만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지나며 마주치는 일도 사라졌다. 고작 1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사이에 이뤄진 일이었다. 아마도 바츠가 자신의 패거리와 자주 어울리며 바쁘게 지냈기 때문이겠지만, 그녀 역시 나름대로 바쁜 듯 했다. 그나마 쉽게 마주칠 수 있었던 검술 훈련장에서조차 그녀를 본 지 굉장히 오래되었다.

“너무 오랜만이다. 나 보고 싶지 않았어? 가끔이라도 찾아와주면 좋을 텐데.”

벨리타의 목소리는 바츠만큼 서운함으로 가득했다. 말끝을 흐리는 걸 보면 토라져서 입술을 삐죽거려도 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아델리나였다면 불만을 토로하며 마구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먼저 찾아와 투덜거렸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이렇게 만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쁜지 얼굴에 서운한 기색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미안, 잘 지냈어?”

“흥, 궁금하기는 했어? 마지막 시험은 잘 봤고?”

바츠가 머쓱함에 쭈뼛거리자, 벨리타가 콧방귀를 뀌며 곁눈질하듯 고개를 옆으로 돌려 쳐다보았다. 꼭 화난 사람처럼 굴었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고 말투에도 적의는 없었다. 오히려 애정 어린 목소리로 걱정하고 있었다.

“응. 내년에 다음 학년으로 진학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 같아. 내년부터는 더 어려워질 텐데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너는? 너는 어땠어?”

“내년부터는 반이 하나가 되지? 진학하지 못한 절반은 군인학교로 보내지겠네? 넌 그 경쟁을 이겨낸 것이잖아? 내년에도 잘해낼 수 있을 거야. 난 그렇게 믿어. 나도 잘하고 있어. 아직까지는 말이야. 마지막 시험도 1등을 했다고! 물론 테라치가 있었다면 달랐겠지만 지금 다시 오게 된다면 조금 긴장해야 할 걸?”

벨리타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턱이 치켜 올라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당당했다. 자신감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치켜세우면 자존심이 조금은 상할 법도 한데, 그런 기색이 전혀 없을 정도로 여유도 있었다.

“왜 둘이 저쪽에 가서 뽀뽀라도 하지 그래?”

그때였다. 어느 틈에 벨리타 뒤에 나타난 눈이 작은 소녀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아니꼽게 바라보며 빈정거렸다. 그녀의 눈은 정말 작아서 미처 신경 쓰지 않으면 눈을 제대로 뜨고 있는 것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지훈과 가이즈카보다도 더 작았다.

“아유, 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 맞다. 바츠는 모르지? 이쪽은 선영이고 나랑 가장 친한 친구야. 다른 의미로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벨리타가 그녀의 빈정거림에 민망한지 싫은 소리를 냈지만, 슬쩍 바츠의 눈치를 살피는 얼굴은 마냥 밝았다. 양쪽 볼이 조금 붉어진 것도 같았다. 특히 마지막에 다른 의미라는 말을 강조하며 굳이 대답을 확인하기 위해 물을 때는, 바츠를 바라보는 눈빛이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사람처럼 의미심장했다.

“안녕? 우리 처음 보는 거 아니지?”

선영이 바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츠는 그 손을 잡으니 그녀를 마주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검술 훈련장에서는 항상 벨리타와 함께 있었고, 애니를 만나러 갔을 때에도 벨리타와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특히 검술 훈련장에서 버니에투와에게 얻어맞던 날은 잊을 수 없었다. 그날은 ‘라파엘’ 스타드를 보았던 날이었고, 이롤로가 이곳에서 추방 된 것을 알게 된 다음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날 테라치에게 자신의 연습용 검을 건네주었었다.

“둘이 뭐하는 거야?”

바츠가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악수가 길어지자, 벨리타가 냉큼 다가와 둘을 떨어뜨려놓았다. 선영이 치를 떨며 앓는 소리를 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옷에 묻은 양념을 닦아내는 것처럼 자신의 손으로 그녀와 악수한 바츠의 손을 문지를 뿐이었다.

바츠는 벨리타의 부드러운 손이 닿자 기분이 좋아졌다. 슬쩍 손가락을 오므려 그녀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본인이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바보처럼 실없는 표정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좋다. 끔찍한 두통도 쫓아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녀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보며 반짝이고 있었다.

선영이 벨리타를 잡아 뜯어내듯 끌어냈다. 불평을 늘어놓지는 않았지만, 눈 꼬리가 치켜 올라 간 걸 보면 단단히 빈정상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 앞에서 애정표현을 하는 둘이 언짢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벨리타가 혀끝을 살짝 내밀며 미안한 표정을 짓자 헛웃음을 터뜨리며 기분을 풀었다. 어지간하면 짜증을 낼 법도 한데 그녀는 생각보다 친절했다.

“벨리타랑 우리 집에 가서 작은 돌 구경할 건데, 너도 같이 갈래? 애니라고 알지? 올해에 전학 온 2살 어린 여자애 말이야. 아, 바츠보다는 1살 어리겠구나? 어쨌든 그 애가 빌려준 건데 정말 예쁘다고. 지상에 있을 때 모아두었던 거래. 같이 가자. 오늘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곧 돌려줘야 하니까 말이야.”

“그래! 바츠 너도 같이 가자. 같이 가서 구경하자. 바츠는 모르지? 선영도 원래는 미사에 다녔었어. 작년이었지?”

선영의 갑작스런 제안에 벨리타가 맞장구쳤다. 기회가 된다면 당장이라고 끌고 가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다. 선영의 손길을 뿌리치고 다시 바츠에게로 다가오더니 한쪽에 팔짱을 끼며 매달렸다.

“근데 수업시간에 졸다가 퇴학당했어.”

벨리타가 선영의 눈치를 살피며 말하고는 바츠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자 선영이 눈동자가 보일 정도로 두 눈을 크게 뜨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던 그녀였는데, 이번만큼은 참기 어려울 정도로 억울한 모양이었다. 흥분해서 벨리타를 향해 달려들었다.

“난 졸지 않았다고! 눈이 작아서 그래! 그걸 그 검은 개가 오해한 거야! 검은 개는 또라이라고!”

바츠는 벨리타를 잡으려고 쫓아오는 그녀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터졌지만, 서둘러 자신의 입을 남은 손으로 가리며 미소를 감춰야 했다. 바로 앞까지 달려온 그녀가 바츠의 얼굴을 발견하더니, 제자리에 우뚝 서 무섭게 노려보았기 때문이었다. 작은 눈으로 째려보는 그녀의 눈빛은 마티프의 부릅뜬 눈만큼 공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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