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 만남 -- > * 38화 *
“미안...그런데 오늘 누나랑 대청소하기로 해서 일찍 가봐야 해.”
바츠는 입술이 마르고 마른침이 삼켜졌다. 자신의 코끝에 들이대진 선영의 얼굴로 겁이 났다. 하지만 의사를 밝히는 데에 망설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마티프가 아니었다. 그녀의 분노는 그저 흉내 내기에 불과 했다. 바츠의 대답을 들은 벨리타가 자신을 쫓는 선영을 피해 바츠를 사이에 두고 반대쪽으로 달아나다 말고 실망한 얼굴로 아쉬움을 토로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날카로운 눈빛과 화난 얼굴을 한 번에 거두는 것을 보면 적확했다.
그녀는 조금 전 잔뜩 흥분했던 자신을 순식간에 잊고는 벨리타처럼 아쉬운 기색을 드러냈다. 기껏 생각해서 제안을 한 것이었는데 거절당해 섭섭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말로 굳이 미련을 두지는 않았다. 벨리타와는 달랐다.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을 끝내 거두지 못했다. 은근히 지금이라도 같이 가겠다고 다시 대답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바츠는 벨리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팠지만 번복할 수는 없었다.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해야 했다.
벨리타와 헤어진 건 레벨1의 입구였다. 이곳까지 오게 되면 다시 한참을 돌아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벨리타가 바래다주겠다며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바츠로서는 벨리타의 고집을 꺾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에게 더 이상 실망감을 안겨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한몫했다. 그래서 괜찮다는 말로 사양은 했지만, 자신의 뜻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저 자신보다 앞서 걷기 시작한 벨리타를 흐뭇하게 바라보았을 뿐이다.
바츠는 벨리타가 입구에서 돌아설 때, 그녀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으로 애가 탔다. 꼭 다시 보자는 말을 하며 애써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도 안쓰러웠다. 하지만 이미 이곳까지 강제로 끌려와 뾰로통하게 변한 선영이, 이번에는 정말로 짜증을 낼 것 같아 그 마음을 접어야만 했다. 그래서 헤어지기 직전 맞잡은 벨리타의 손을, 서로의 팔이 최대한 펴져 더 이상 잡고 있을 수 없게 될 때까지 놓지 않는 것으로 대신했다. 선영은 그것만으로도 투덜거리며 신경질을 냈다. 바츠와 벨리타에게는 서로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꼴불견인 모양이었다.
바츠는 벨리타를 보내고 곧장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레벨2에서 레벨1로 연결된 통로를 나오자마자 왼쪽으로 난 큰 통로를 따라 가야한다. 옆으로 벗어나지 않고 오로지 쭉 따라가 주거지역에 우선 도착해야 하는데, 천장 왼쪽 구석에 은색 환기구와 그 바로 옆으로 보이는 수많은 케이블 중 검은색 가장 굵은 케이블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는 않다. 전력질주로 숨이 가빠올 때 쯤이면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멀지도 않다.
주거지역은 깨끗한 통로와 고온의 스팀을 뿜어내며, 이곳저곳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청소 로봇인 빌리캄이 더 이상 보이지 않기 시작하면 가까워졌다는 걸 알 수 있다. 빌리캄은 레벨1 주거지역에는 결코 가지 않으니 말이다. 그로인해 주거지역과 통로의 경계는 매우 뚜렷하다. 빌리캄의 스팀은 금속의 산화를 막고 소독의 기능을 가진 화학물질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빌리캄이 다녀가지 않는 주거지역은 통로와 정반대로 온통 붉은 녹에 뒤덮여, 한 눈에도 어둡고 지저분하다.
바츠는 주거지역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정면으로 난 길을 따라 안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야 하지만 다른 쪽 길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어느 쪽으로 가든 집으로 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소요되는 시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괜히 좀 더 걸어보고자 하는 감상에 젖은 탓도 아니었다. 레벨1의 주거지역은 그저 불그스레하고 퀴퀴한 곳일 뿐으로, 볼거리도 전혀 없었고 눅눅한 기분도 아니었다. 처음 오게 된 사람들이라면 신비하게 살펴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츠는 아니었다. 바츠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바꾼다는 건 정말 다른 쪽에 관심이 있을 때 빼고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바츠는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목적지가 가슴을 떨리게 만들었다. 1구역에서 가장 익숙한 곳이다. 그리고 가장 조용한 곳이고, 가장 친한 친구가 살았던 곳이다.
바츠는 목적지 앞에서 가슴을 졸이며 서성였다. 이롤로의 집. 이롤로가 떠나고 고독한 침묵이 살던 집안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 어린 소녀의 웃음소리 그리고 작은 소년의 칭얼거림. 그것들이 어우러지며 고요한 침묵을 몰아내고 떠들썩한 화목을 채워놓고 있었다.
“누구세요?”
바츠가 결심을 한 건 작은 소년의 칭얼거림이 끝났을 때였다. 목소리를 들어보았을 때, 갓난아이는 아니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어린 아이들처럼 떼를 쓰며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바츠는 그 투정이 결국 두 여인의 웃음소리에 묻혔을 때 문을 두드렸다. 돌아온 것은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바츠는 자신이 노크하고도 얼떨떨한 기분에 입만 벙긋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손이 떨리고 정신이 없어, 곤히 잠들어 있다가 갑자기 깬 것처럼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어머, 누구니?”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문을 연 그녀는 매우 친절했다. 낯선 손님의 방문에 의아해 하고 있다는 것이 표정에 들어나고 있음에도, 바츠를 위해 허리를 구부려 눈높이를 맞춰주고 있었다.
“무슨 일이니? 애니의 친구니?”
얼굴에 미소를 그리며 묻는 그녀의 한쪽 겨드랑이 사이로 한 소녀가 파고들었다. 소녀는 바츠를 빤히 바라보고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좌우로 내둘렀다. 그래도 그녀는 바츠를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상냥한 태도로 대했다. 바츠를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듯 보였다.
바츠는 그녀의 배려에 겨우 말문을 열 수 있었다.
“친구가 살던 곳이에요.”
“세상에...”
그녀는 소녀를 옆으로 조심스럽게 떼어내더니, 한 발 내딛어 바츠를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부드러운 앙가슴이 바츠의 양 볼에 닿았다. 부드럽고 편안한 냄새가 났다. 이롤로를 떠올리기 위해 왔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기분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눈 밑 볼록 튀어나온 살점이 그녀의 가슴에 짓눌리며, 지금까지 그곳에 고여 있었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처음에는 애써 참아보려고 노력했지만, 흐느낌을 감출 수 없었고 뜰썩여지는 어깨를 말릴 수는 없었다. 그녀의 가슴은 너무도 포근했다.
“이제 좀 괜찮니?”
바츠는 그녀의 품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눈물이 다 떨어졌을 때, 그녀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바츠에게 따뜻한 우유를 내주었다. 바츠의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안성맞춤인 음료였다.
사실 바츠가 갑자기 이곳에 찾아오게 된 이유는 애니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처음 전학 온 날 이미 한 차례 보기는 했지만, 테라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다시 호기심이 생겼었다. 특히 테라치가 부사령관을 따라 나섰던 그날, 그의 집 앞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가 가장 절실했다. 테라치의 모든 관심을 가져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궁금했다. 그때 대답을 듣지 못한 것은 아직까지도 한(恨)이다. 다음날 경비대에 붙잡혔던 그 사건만이라도 아니었다면 지금쯤이면 들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기회를 놓치며 기억에서도 멀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조금 전 집으로 돌아오며 만났던 벨리타와 선영에 의해서 다시금 떠오른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찾아왔을 때는 바보처럼 눈물이나 흘려야 했다. 난데없이 눈물이 흘러내릴 정도로 가슴이 먹먹해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매우 부끄러운 것만은 사실이었다. 지금이라도 달아나고 싶었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과 애니의 눈빛이 너무도 부담스러웠다. 멀찌감치 떨어져 무서워하고만 있던 작은 소년이 슬금슬금 다가와 왜 울었냐고 물었을 때는 진심으로 창피했다.
“죄송해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
바츠는 자신의 부끄러운 감정보다도 혹시나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그녀를 생각해야 했다. 그녀가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면 그것만큼 최악은 없었다. 하지만 다행이었다. 그녀는 웃었다. 웃는 얼굴로 바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울고 싶을 때 언제든지 찾아와서 울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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