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39화 (39/268)

< --   3. 만남   -- >         * 39화 *

그녀의 이름은 로리나였다. 자신의 어머니에 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이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를 만큼 강한 여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이 매우 만족스럽다고 덧붙였다. 어머니를 닮을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바츠가 보기에는 로리나가 그녀의 어머니를 닮는 건 결코 쉬어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의 어머니가 정말 단단한 심장을 가진 여인이라면, 다정하고 친절한 그녀 자신하고는 완전히 정반대의 성향일 것이기 때문이다. 로리나는 사랑스럽고 고마움을 느끼게 만드는 여자이지, 믿고 따를 수 있을 만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여자가 아니었다.

바츠는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로리나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작은 상처도 입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상처를 입어야 할 사람들은 다른 레벨의 거주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사람의 됨됨이보다, 입고 있는 옷과 그 위에 페인팅이 상대를 평가하는 기준이니 말이다. 그것은 정말 바보 같다. 물론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벨리타처럼 그곳에도 좋은 사람은 있다. 마티프? 마티프는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이쪽은 애니야. 자랑스런 내 딸이지. 그리고 이쪽은 에슬란. 우리 집의 행복 바이러스란다. 우리를 언제나 웃음으로 감염시켜주거든. 크루엘라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강하단다.”

로리나가 자신의 소개가 끝나자,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애니와 작은 소년을 차례로 소개해주었다.

애니는 바츠를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로리나가 웃는 얼굴로 눈치를 주자, 자신에 대해 늘어놓는데 바빴다. 그녀는 이번에 일반학교 4학년에 입학하였고 연구원이 꿈이라고 말했다. 성적이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다고 말했으나 크루엘라의 백신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는 강해보였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테트라사이클린(Tetracycline)에 퀴놀론(Quinolones)계 항생제에서 추출한 성분을 결합시키면 크루엘라의 전염력을 억제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바츠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로리나가 옆에서 자꾸만 바츠에게 설명해주라고 채근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로리나의 재촉이 없었다면 그저 간단한 인사를 하는 것으로 그쳤을 것이다. 말하는 내내 자꾸만 어깨를 움츠릴 정도로 부끄러워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가끔씩 머뭇거린 것치고는 훌륭한 마무리였다. 옆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에슬란이 이상한 소리를 하며, 오른쪽 뺨에 흉터를 꾹꾹 찔러 귀찮게 하는 방해도 이겨냈다.

“자유를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바츠는 에슬란에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무서운 괴물을 쫓아내기 위해 할머니와 함께 외치던 주문이라고 했다.

“신경 쓰지 말거라. 바츠도 어렸을 때 그랬을 거야. 침대 밑에 귀신을 쫓아내고 싶고, 어두운 방 안에 혼자 있으면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고 말이야. 에슬란의 세계에는 아직 존재하고 있단다.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해야 돼. 그래야 주문이 효과가 있으니 말이야.”

로리나가 바츠의 이해를 돕기 위해 대신 설명을 더하며 에슬란에게로 손짓했다. 그러자 에슬란은 테이블을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올라타 반대쪽으로 넘어가더니 로리나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바츠는 고개를 끄덕여 그녀와 약속했다. 그 주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도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다 말고 아버지를 부르거나, 불을 켜놓고 자고는 했으니 말이다. 그때마다 망설임도 없이 달려와 주고 걱정해주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지금까지도 힘이 된다. 에슬란에게는 아마도 주문이 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에슬란은 지상에서 태어났고 지상에서 살아왔다. 항상 갖은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을 테고, 그 중에서도 헤러티커의 위협은 매우 심각한 문제 중 하나였을 것이다. 어른들은 그에게 늘 그 위험에 대해 강조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주 환기시키며 세뇌에 가까운 주의로 에슬란를 옥죄었을 것이다. 모두 그의 안전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 훈육은 에슬란으로 하여금 나중에 어른으로 성장하고 나서도 헤러티커에 대한 트라우마로 작용을 할 수 있었다. 주문은 그 트라우마로부터 에슬란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일종의 촉매제였다.

바츠는 로리나의 당부를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본인이 왠지 대견하고 의젓해진 것 같았다. 어깨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마저도 들었다. 지켜보던 로리나 역시 같은 것을 느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바츠를 향해 두 눈을 진하게 깜빡이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기분이 좋았다. 할 수 있을 거라며 응원해주는 벨리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자신감이 샘솟았다.

“그럼 또 놀러오려무나. 애니에게는 아직 친구가 많지 않거든. 애니에게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구나. 너희 둘 모두 말이야.”

바츠가 애니의 집을 빠져나온 건 그로부터 2시간 정도가 더 흐른 뒤였다. 이곳에 올 때는 분명 혼자였는데, 돌아갈 때에는 둘이 되어있었다.

애니의 이야기가 끝나고 에슬란이 정식으로 인사하려던 찰나였다. 손님이 찾아왔다. 이미 예견되어 있던 손님이었는지, 애니가 신이 나서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로리나와 에슬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얼굴 가득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며 그를 맞이했다. 바츠와 마주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손님이 안으로 안내되었을 때에는 바츠 역시 그들처럼 반가운 얼굴을 해야만 했다. 그 손님이 다른 아닌 테라치였기 때문이다.

“참 좋은 사람들이지?”

돌아오는 길에 테라치가 물었다.

테라치는 처음 바츠를 발견했을 당시 잠깐 놀란 표정을 했었다. 아마도 바츠처럼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거짓말이 되어 버린, 대청소를 위해 일찍 집으로 가야한다는 말이 한 몫 거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테라치는 그 자리에서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금방 표정을 환하게 바꿨다. 로리나가 새로운 친구라며 바츠를 소개해주려 할 때에 자신이랑 가장 친구라며 먼저 자랑을 했을 정도였다. 애니는 그제야 비로소 바츠를 알아보았다.

어쨌든 바츠는 그렇게 찾아온 테라치와 함께 애니의 집에 좀 더 머물렀다. 2시간이나 머물 생각은 없었지만, 친절한 로리나와 상냥한 애니 그리고 유쾌한 에슬란과 함께 하다 보니 그렇게 되고 말았다. 특히 에슬란과 놀아주는 일은 너무도 즐거웠다. 애니의 뺨에 있는 흉터를 자꾸만 건들며 괴롭히는 이상 행동에 맞서 그녀와 함께 응징하기도 하였고, 지상에서 가져온 카드를 가지고 게임도 했다.

카드는 50여장 쯤 되는 종이에 각각에 다른 그림과 그에 맞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또한 가장 밑에는 노란 색 별로서 그 카드의 값어치를 결정하고 있었는데 1개부터 10개까지 다양했다. 그런 카드를 서로 공평하게 나눠가지고는, 패를 감춘 상태에서 동시에 한 장씩 내밀어 별이 가장 높은 사람이 다른 카드를 전부 가져가는 게임이었다.

바츠는 검은 갑옷을 입고, 검은 말을 타고 있는 어둠의 기사라는 카드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별도 무려 8개나 될 정도로 가치가 높았고 무엇보다 이름이 멋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높은 값어치를 가진 카드들이 5장이나 있었기 때문에 게임에서 이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카드를 자신의 의지대로 손에 넣을 수도 없었다. 그냥 그 카드가 패 안에 있으면 괜히 기쁠 뿐이었다.

“응! 정말 좋은 사람들이야!”

바츠는 테라치의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정말 오래간만에 느낄 수 있었던 즐거움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던 것과는 또 다른 재미였다. 특히 에슬란과 노는 건 너무도 좋았다. 그가 가진 카드를 가지고 노는 것도 신기했고, 관절이 있는 인형을 구경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중요한 순간마다 에슬란이 버릇처럼 외치는 ‘자유를 위하여!’라는 말이었다. 그는 그것을 마치 기합처럼 내지르고는 했는데, 그 엉뚱함이 너무 우스꽝스러웠다.

“그런데 말이야...어떻게 오게 된 거야?”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테라치가 물었다. 바츠는 그의 물음이 없었다면 또 한 번 까맣게 있고 있었을 그 이유가 이제야 다시금 떠올랐다.

“그게 말이야...”

“혹시 애니가 우리 엄마에 대해서 이야기 했어?”

바츠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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