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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42화 (42/268)

< --   3. 만남   -- >         * 42화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케일리는 무려 3일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간단한 물음에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식수가 떨어져 배급표를 몇 개나 바꾸는 것이 좋겠느냐는 질문도 외면했다. 마치 그녀가 침묵으로 사과를 하라며 시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바츠는 끝끝내 그녀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 잘못이 없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과를 하기에는 조금 억울했기 때문이다. 대신 지난 3일을 집에 오면 그녀의 눈치를 보며 지냈다. 차라리 그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녀에게 미안하기는 했다. 최소한 그녀의 상처를 아프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건 불공평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바츠의 그런 마음을 결국 받아들였는지 먼저 말을 걸었다. 3일 동안 마음을 추스른 것일 수도 있다. 별 건 아니었다. 그냥 전에 스타드에게 받았던 헤러티커의 엄지를 찾는 것으로 침묵의 시위가 끝났다고 알려왔다.

테라치도 예전의 전혀 이질감이 없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케일리와는 다르게 바로 다음날부터 본래의 모습을 찾은 그였는데, 전날은 아마 그때까지도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은 마음에 혼란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자신의 속마음을 쉽게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그였다. 다른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한결 기분이 나아질 수 있을 텐데, 항상 혼자서 속으로만 삭혀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쉽게 이겨낼 수 없는 아픔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역할을 바츠가 해줄 수 있었다.

바츠는 자신이 테라치에게 도움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괜히 기분이 좋았다. 뿌듯했다.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물론 그가 그 아픔을 전부 이겨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한결 여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름 잘 견뎌낼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가 조금 이상했던 건 그 순간뿐이었다. 아마 약간의 시간이 좀 더 주어졌다면 혼자서도 충분히 이겨냈을 것이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감정 조절이 뛰어나고 기계처럼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니 말이다.

“오늘 그러면 토끼를 볼 수 있는 건가?”

이제 점심시간이 끝나고 있을 무렵, 벌써부터 집으로 돌아갈 것처럼 짐을 싸던 아델리나가 신이 나서 물었다.

바츠는 아델리나 혼자서 들 떠 있었다면 당장에 뜯어 말리며 자리에 다시 앉히려고 했겠지만, 모두가 그녀처럼 약간 흥분된 상태로 자신의 짐을 정리하고 있어서 반갑게 대꾸했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일반학교에서도 그랬으니까.”

바츠가 이 독특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어울릴 수 있는 이유는, 오늘이 다름 아닌 종업식을 앞두고 이루어지는 레벨5로의 견학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틀 뒤면 다음 학년으로 가게 되는 승급인원이 발표가 된다. 그때까지는 시험 성적이 나오는 것보다도 더욱 긴장된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옛날에는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아이가 하수처리장에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한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승급의 스트레스는 상상이상이었다. 안정권에 있는 바츠조차도 초조함을 느낄 정도다. 종업식을 얼마 앞두고 이루어지는 견학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한다. 정신이 심란한 아이들에게 기분전환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학생들을 위해 계획적으로 편성된 것이다. 겨우 하루지만 다들 잠시나마 진학에 대한 초조함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내 통제에 따르지 않는 녀석은 승급 발표 여부와 상관없이 퇴학 조치를 하겠다.”

교실을 떠나기 직전 마티프의 당부가 이어졌다. 협박에 가까운 말투였다. 그는 프레이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건 모두의 바람이었다. 그런 끔찍한 사고를 원하는 바보는 없다.

레벨5에는 놀라운 것투성이이다. 각종 연구시설이 모여 있는 5-1구역에는 갈 수 없었지만 5-2구역을 견학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초록빛 수풀들과 형형색색의 꽃들, 게다가 3미터가 넘는 나무도 있다. 다른 곳과는 왠지 공기자체가 다르다고 느껴지는 곳이다. 그 차이를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폐기물 처리장에 있다가 밖으로 나왔을 때처럼, 다른 곳에 있다가 이곳에 들어서면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든다. 게다가 어디선가부터 불어오는 실바람은 괜히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견학은 마티프를 선두로 2열로 대열을 갖춰 움직였다. 절대로 대열을 이탈하지 말아야 하고, 승인 없이는 그 어느 것도 손을 댈 수 없었다. 마티프는 교실에서 한 번, 레벨5에 도착해서 한 번, 5-2구역에 들어설 때 한 번, 총 이렇게 3번이나 당부했다.

바츠는 뒤에서 두 번째 줄에 테라치와 함께 섰다.

“저기 있다!”

막 초원이 있는 구역을 지나 열매가 열리는 나무들이 잔뜩 재배되고 있는 구역에 들어설 때였다. 달콤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 곳이라 스위트룸(Sweet room)이라고 불리는 구역이었는데, 아델리나의 목소리가 달콤한 향기처럼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선두에 있던 마티프를 비롯 모두의 시선이 그녀가 가리키는 손끝을 향해 움직였다. 그녀의 손끝에는 붉은 눈으로 대열을 바라보고 있는, 하얀 털 뭉치처럼 생긴 네 발 짐승이 우두커니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한 시간 동안 운 사람처럼 붉은 두 눈에 뿔처럼 위를 향해 삐죽하게 솟아있는 두 귀가 동그란 몸통과 잘 어우러져 있었다. 얼핏 보면 프레이와 닮아 있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짐승이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처럼 매우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토끼. 이 짐승의 이름이었다. 이름도 귀엽다. 부르는 것만으로도 기분을 경쾌하게 만들었다. 아마 아델리나에게 토끼가 프레이를 닮았다고 하면 한 대 얻어맞고 말 것이다. 고통을 이겨내며 상처를 부여잡고 반복해서 계속 말하면 결국 울음을 터뜨릴 지도 모른다. 그녀의 별명이 프레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녀에게도 그렇게 나쁜 말은 아닌데 말이다. 그녀로서는 그래도 싫은 모양이었다. 하긴 자신의 별명을 모르고 있으니 그럴지도 모른다.

아델리나는 토끼를 만지기 위해 안달이 나 있었다. 하지만 절대 대열을 이탈하지 말라는 마티프의 으름장 때문에 눈치만 보며 애를 태웠다. 일반학교에 다닐 때 만질 수 있었던 그때의 기분을 잊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바츠 역시도 그때의 기억이 매우 흐뭇했기 때문에 그런 그녀가 충분히 이해가 됐다. 하지만 마티프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토끼에 대해 기분 좋은 추억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델리나의 애원하는 눈빛을 차갑게 무시하고는 두 눈을 부릅뜨더니, 그녀를 향해 검지를 뽑아들어 주의를 줄 뿐이었다.

“알았다! 알았어! 대신 잠깐 동안이다! 오래는 안돼! 너희들은 그대로 모두 대기해!”

하지만 마티프는 자신의 검지를 서둘러 다시 거둬들여야 했다. 아델리나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 일찌감치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테라치도 마찬가지였다. 아델리나는 제자리에 서서 정말 서럽게 울었다. 마티프가 당황한 얼굴로 달려와 한참을 달래고, 결국 토끼를 만질 수 있도록 허락했을 때 비로소 그쳤다. 마티프가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는 모습은 정말 최고였다. 아델리나는 정말 대단했다. 물론 그녀는 마티프의 생소한 모습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토끼처럼 변한 눈으로 훌쩍이며, 조심스럽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토끼를 안고는 바보처럼 웃을 뿐이었다.

“너희들 생각해 봤어? 왜 지금까지 바이러스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았는지 말이야.”

스위트룸을 지나자 삐딱하게 검은색 차광막이 줄을 맞춰 늘어서 있는 작은 밭이 나왔다. 그 아래에는 인삼이라고 불리는 식물이 재배되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인간의 수명을 연장 시킬 수 있었다던 GCP라고 불리는 만능세포를 만들 수 있는 효소를 추출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특별한 가공법으로 홍삼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만들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했다. 지금은 그 가공법이 소실되어 불가능하지만, 계속되는 연구와 지상을 수색하는 헌터들에 의해서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름도 어려운 것이 가공도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밭을 지날 때 가장 뒤에서 따라오던 지훈이 오랜만에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바츠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그냥 대꾸해주었다.

“무슨 말이야?”

“보라고, 여긴 땅속 2킬로미터야. 책을 보면 옛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식물들은 반드시 햇빛이 필요하고 우리나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봐. 햇빛 없이도 다들 잘 살고 있잖아.”

“바보야, 케이스타(K-Star - 인공 태양)가 있으니까 그렇잖아. 물론 우리가 책에서 보았던 그런 진짜 햇빛은 아니지만 얼마든지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다고. 우리가 쓰는 전력도 모두 거기서 나온다는 걸 모르는 거야?"

바츠는 자신도 잘 알고 있는 것을 지훈이 모르는 것 같아, 신이 나서 지껄였다. 그가 자신보다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바로 그거야. 그런 기술력이 있는데 어째서 백신은 없는 걸까?”

“그게 무슨 상관인데?”

“상관이 있지. 카니지 블레이드는 또 어떻고. 그런 무기를 만들 수 있다면 소총을 대체 왜 만들고 있는 걸까? 그 기술력으로 차라리 카니지 블레이드를 더 만들든지, 그에 견줄만한 다른 화기를 만들면 될 텐데 말이야. 이상하지 않아?”

시큰둥하던 바츠가 적극적으로 변하자, 지훈이 바츠와 테라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며 더욱 열을 냈다.

“얘 미친 것 같아.”

바츠는 그가 눈을 반짝이며 달려들자, 괜히 겁이나 테라치를 향해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지훈은 테라치가 끼어들 틈도 없이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아니, 더 들어봐. 누군가 이렇게 되도록 일부로 만든 거라는 생각 안 해봤어? 누군가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이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자 계략을 꾸민 거라고.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면 누구나 의지할 대상을 찾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그들에게 탈출구를 제시했던 거지. 바로 아르크를 말이야. 그럼 사람들은 탈출구를 제시한 그를 믿고 따르게 되고, 그는 자신의 지위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어때 그럴싸하지 않아?”

“너 제정신이 아니구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바츠는 지훈이 정말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경비대에서 울먹이며 했던 말을 들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여전히 이런 걸 보면 그는 그냥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너희 레벨6에 가본 적 있어?”

“레벨6?”

바츠는 생소한 단어에 자신의 호기심이 자극받는 것을 느꼈다.

아르크에서 가장 경비가 삼엄한 곳. 그리고 가장 폐쇄적인 곳. 어쩌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아르크에 거주하는 사람 중 그곳에 갈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부사령관 밖에 없으니 말이다.

“거기에 대체 무엇이 있을까? 레벨1과 레벨2 그리고 레벨4는 주거지역이고 레벨3에는 교육시설들이 있지. 그리고 가장 넓은 레벨5에는 각종 연구시설과 생산 설비가 있잖아. 그럼 대체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것들 말고 더 필요한 것이 뭘까?”

바츠는 주문을 외는 것처럼 연속해서 질문을 쏟아내는 지훈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괜히 기분이 멍해졌다.

“...사령관이 있는 곳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저장 창고가 있을지도 모르고...”

“바로 그거야. 그런데 사령관만 있을까?”

지훈이 기분 나쁜 미소로 묻지 않았다면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난 저 곳에 분명 백신이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바이러스도 같이 말이야.”

바츠는 굉장한 소리를 진심으로 늘어놓고 있는 그의 대답을 듣고 나니,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마구 두리번거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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