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 만남 -- > * 43화 *
“일부로 우리가 여기에 와서 살게 만든 거라는 말이야?”
바츠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지훈만 겨우 들을 수 있을 만한 크기로 물었다. 다행히도 눈여겨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섭게 겁을 줄 만한 사람은 대열 맨 앞 쪽에 마티프와 이곳으로 들어왔던 입구 그리고 그 반대쪽 입구 양 끄트머리에 각각 둘씩 서서 현 구역을 감시하는 군인이 전부였다. 하지만 마티프는 이따금씩 돌아보기는 했으나 대부분 아델리나를 찾아보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소란 아닌 소란으로 굉장히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또, 입구 쪽 군인들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지 서로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밀치며 자신들의 대화만 이어가고 있었고, 반대쪽 입구의 군인들은 괜히 자신의 총기를 살펴보거나 하품을 하며 따분한 시간과 싸우느라 바빴다. 바츠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물음에 답한 것은 지훈이 아니었다.
“바보 같은 소리는 그만하자. 카니지 블레이드는 피니움으로 만든 것이라고 배운 거 벌써 잊었어? 쇠도 자를 수 있을 만큼 예리하다고. 헤러티커를 베기에 안성맞춤이지.”
가만히 지켜보던 테라치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지훈을 뒤로 밀어내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바츠는 테라치의 얼굴을 보자, 카니지 블레이드에 대해 배울 때 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정확히는 가이즈카에게서 들었던 것이다. 그때 분명 카니지 블레이드에 대해 묻는 마티프의 질문에 그가 대답하며 언급했었다. 또한 일반학교에 다닐 때 잠깐 배웠던 기억도 떠올랐는데 분명 역사 시간이었다. 지표면에 충돌한 10만 광년 밖에서부터 날아온 운석을 발견할 수 있는 확률이, 빌리캄이 레벨1 주거 지역을 전부 깨끗하게 만들게 되는 날이 오게 되는 확률과 비슷할 것이라고 했었다. 그게 정확히 어느 정도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쉽거나 간단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정도는 알고 있어! 하지만 생각해보라고. 카니지 블레이드를 휘두르기도 전에 총알에 당한다면? 그렇게 되면 아무리 날카로운 검이라도 다 무슨 소용이지? 아마 네가 카니지를 뽑아들기도 전에 200미터 밖에서 날아온 총알이 네 가슴에 박힐 걸?”
테라치의 손길에 떠밀린 지훈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발끈하며 다시 바츠와 테라치 사이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흥분한 상태로 억지로 애를 쓰기 시작하는 그가 차분한 테라치를 이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제법 머리가 비상하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한 상태라면 한 번 맞서볼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테라치에게 이성을 잃어가고 있는 지훈 정도는 너무도 손쉬운 상대였다.
테라치가 어린아이를 달래듯 지훈을 향해 나긋나긋하게 대꾸했다.
“헤러티커를 베기에 안성맞춤이라고 말했잖아. 헤러티커들은 몸놀림이 아주 민첩하다고. 총탄으로 놈들을 맞추는 건 매우 힘든 일이야. 녀석들을 맞추려면 100발은 넘게 쏴야 할 걸? 100발을 쏘고도 쓰러뜨릴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지. 게다가 중간에 탄약이 다 떨어지면 어떡하지? 그래서 카니지 블레이드를 만들고 헌터를 양성한 거라고. 헤러티커가 우리에게 총을 쏘던가? 총을 쏘는 건 아마 아이기스 밖에 없을 걸? 헌터는 사냥을 한다고. 아이기스 상대로 정면으로 달려들지 않아. 지훈, 너는 남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을 때가 있어. 그리고는 오로지 네 말에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똑똑한 머리를 이용해 이것저것 마구 늘어놓지. 그건 정말 좋지 못한 습관이야.”
테라치의 말투는 분명 친절했으나, 편안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특히 마지막에 지훈을 향해 직접적으로 지적을 했던 것은 약간 흥분한 지훈을 더욱 끓어오르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쾌한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또한 지훈에게 변명의 여지도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지훈이 트집을 잡으며 계속 늘어놓을 만한 이야기들까지 일목요연하게 미리 대답을 해버리며 그가 입을 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상대가 공격할 틈도 주지 않고 정신없이 몰아붙이는 그의 검술과 쏙 닮아있었다.
“그리고 인공 태양의 기술력과 바이러스 백신의 기술력은 완전히 다른 문제야. 탄약을 만드는 기술과 총기를 만드는 기술이 다른 것처럼 말이야. 옛날에 하늘을 날 수 있는 비행기라는 것이 있었다고 배운 것 기억나? 수백 킬로미터를 눈 깜짝할 사이에 갈 수 있었다고 했잖아.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기껏해야 시속 10킬로미터로 움직일 수 있는 비클레타 밖에 없다고. 그 기술들은 다 어디 있지? 기억 안 나? 아르크로 대피했다는 건 그만큼 시급했다는 것이야. 촌각을 다투던 때라 많은 기술력이 지상에 남겨졌다고 들었잖아. 물론 일부는 필요에 따라서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선택받지 못하는 기술도 있겠지. 하지만 상당수가 인류의 수천 년 역사 동안 이뤄진 기술들이야. 단 기간에 복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거기다 이곳은 모든 것이 제한적이지. 연구원들의 연구도 분명 그럴 거야. 헌터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 배웠잖아. 우리는 헤러티커를 무찌르고 아이기스로부터 아르크를 지키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야. 그 기술들을 다시 회수하는 목적도 있다고. 그래서 헌터들은 아주 오랫동안 아르크는 물론이고 전진기지로도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해...단 한 번도 돌아오지 않는 헌터도 있고...”
바츠는 테라치의 흐려진 말끝에 수많은 감정이 담겼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슬픔, 아쉬움, 서운함 같이 대부분 어둡고 습한 것들이었다. 그나마 긍정적인 감정이라면 기껏해야 그리움정도였다. 그의 머릿속에 순간 누가 스쳐 지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훈은 그 낌새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빈정거리며 스스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 너 잘 났다.”
그의 볼멘 목소리가 투정처럼 들렸다.
바츠는 그 모습을 보자 웃음이 났다. 매번 자신감 있게 애매모호한 말을 늘어놓던 그가 맥을 못 추고 물러나자, 꼭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단호하게 발뺌을 하다가 결국에는 눈치나 살피게 되는 케일리를 보는 듯 해서 너무도 통쾌했다. 테라치도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듯 했다. 조금 전 혼란스러웠던 기분을 떨쳐내더니, 바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마주보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저 녀석 원래 저렇잖아. 분명 머리가 좋지만 너무 좋아서 가끔 정신이 없게 되나봐.”
“정말?”
“아니.”
바츠는 테라치의 능글맞은 태도에 결국 소리 내 웃고 말았다. 앞서 걷던 마티프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며 눈치를 주는 바람에 황급히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 했지만 즐거운 기분을 감추기란 매우 어려웠다. 자꾸만 손가락 사이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뒤에서 지훈이 정색한 얼굴로 웃지 말라며 꾹꾹 찌르며 성화를 부리는 것조차도 신이 날 정도였다. 그는 마지막 테라치의 농담을 받아드리고 있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입장이라면 기분이 언짢을 만 했다. 이미 그 전에 테라치에게 호되게 당하며 잔소리 아닌 잔소리까지 들었던 터라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냥 조금 독특한 것일 뿐이다. 생각하는 방법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약간 다른 것 같았다. 만약 그가 너무 똑똑해서 미쳤기 때문에 저런 것이라면 테라치는 진즉에 괴짜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벨리타도 마찬가지일 테고 말이다.
어쨌든 지훈의 이상한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단단히 토라졌는지 견학이 끝날 때까지 내내 조용했다. 대열의 가장 끄트머리 줄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바츠가 자신이 대열의 마지막 열이라고 착각을 했을 정도였다. 그는 남은 시간동안 자신만의 생각에 완전히 빠져있었다. 조금 걱정이 되는 모습이었지만 굳이 말을 걸어보지는 않았다.
바츠는 견학이 끝나고 곧장 테라치와 함께 애니의 집으로 갔다. 아델리나가 버니에투와의 집에 가서 놀자고 제안했으나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 아델리나가 잔뜩 화가 나서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테라치와 함께 달아나는 기분은 요 근래 들어 최고였다. 내일 다시 만나게 되면 퉁명스런 잔소리를 듣겠지만 상관없었다. 그때 이후에 애니의 집에서 에슬란과 노는 것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델리나의 타박정도는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게다가 이제 종업식도 얼마 남지 않아 딱히 공부해야 할 것도 없었고, 검술 훈련도 며칠쯤은 쉬어도 크게 상관이 없었다. 새해까지 조금 남은 시간이 자유시간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학교에서도 수업보다는 대부분 마티프의 과거에 대해서 듣거나 간단한 영상물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럼 정말로 다른 사람을 잡아먹기도 하는 건가요?”
기억에 남는 건 마티프가 서쪽으로 갔을 때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아르크의 눈이 고장 나는 바람에 방향을 잃고 오랜 시간을 돌아오지 못하고 방황했다고 했다. 소지하고 있던 식량은 이미 전부 소비해버렸고, 주변에는 회색 바위와 메마른 모래뿐이어서 프레이를 찾기도 불가능해 곧 굶어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우연히도 지나던 한 무리의 떠돌이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에게서 소량의 말린 고기를 얻었다고 했다. 너무 맛있어서 굶주린 와중에도 일부만 먹고 전진기지로 돌아와 다른 헌터들에게도 맛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서 전진기지에 머물고 있던 헌터에게 맛보여주었을 때 들었던 말은 그 고기가 인간의 고기 같다는 말이었다고 했다. 그 헌터는 전에도 자신에게 똑같은 고기를 나눠준 헌터가 있었는데, 그가 인간의 고기라며 건넸었다고 했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애니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충격적인 사실은 그보다 더 놀라운 일로 인해서 금방 잊혀졌다. 마티프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던 당일, 애니의 집에 놀러갔다가 그녀의 아버지인 빌리언을 만났던 일이 바로 그 것이었다.
그는 체구가 굉장히 큰 사내였는데, 레벨5에서 보았던 3미터 높이의 거목을 연상케 했다. 그러나 그는 생김새와 다르게 굉장히 상냥했고, 애니와 에슬란과 어울려 주는 것을 아르크에 오게 된 것보다도 더욱 기쁘다고 말했다. 그때 그의 표정이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며 감격에 겨워했던 것을 보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츠가 테라치와 함께 헌터가 될 것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었다. 그리고 승급 발표 후, 둘이 2학년으로의 진학이 확정되었을 때는 간단한 파티까지 열어주었다. 소량이었지만 베이컨과 달걀, 사과와 염소의 뒷다리고기까지 평소에 맛보기 힘든 음식들을 대접해주어서 크게 놀라게 했다. 물론 테라치는 그때도 침착했다.
2학년으로 진학이 결정된 사람은 총7명으로 바츠의 반에서는 다섯 명이나 결정이 됐다. 바츠와 테라치, 아델리나, 버니에투와 그리고 지훈이었다. 가이즈카는 겨우 진학이 가능한 성적이었는데, 마지막에 스스로 군인이 되겠다고 진로를 바꿨다. 지훈이 그 소식을 듣고 가이즈카를 멍청이라며 마구 비난했지만 가이즈카는 그냥 웃는 것으로 말았다. 끝에 둘이 서로를 부둥켜안았던 것을 보면 지훈도 진심이 아니라 아쉬운 마음에 그랬던 것 같다. 남은 두 명은 2반에서 결정이 되었다. 포르쿠얀이라는 아이는 테라치 다음으로 2등 자리를 놓치지 않던 아이였는데, 독특하게도 레벨2 거주자였다. 그들 특유의 거만함이 몸에 배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른 아이들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그렇다고 벨리타만큼 친절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못마땅함으로 가득했다. 반대편 사람을 언짢게 만들기에 충분한 눈빛이었다. 그래도 냄새가 난다는 둥, 비렁뱅이라는 말 등으로 조롱을 하지는 않으니 참지 못할 것은 없었다. 남은 마지막 아이는 아네트라는 금발의 여자 아이였는데, 콧등과 눈 밑에 주근깨가 많은 귀여운 아이였다. 테라치가 반갑다며 손을 내밀었을 때 당황해서 우물쭈물했던 것을 보면 수줍음이 많은 아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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