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44화 (44/268)

< --   4. 지상으로   -- >         * 44화 *

1월 1일. 그날이 어김없이 다시 돌아왔다. 빅애스가 열리는 암흑기. 그 시간이 시작되었다. 떠나갈 사람들과 떠나온 사람들이 교차한다. 어느 쪽으로 향하든 고개는 모두 밑으로 처져있고, 발걸음은 느리며 호흡은 가쁘다. 누구하나 입 안에 침묵을 물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다. 쓰린 삶이 토해지지 않도록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다. 가끔은 멍한 두 눈이 회의감을 말하기도 하지만, 마주치지 않고 이별하는 서로의 뒷모습을 통해 열의를 다진다. 그것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를 알고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를 위해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아르크 레벨1 거주자들의 삶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심장에 단단히 새겨진 신념 하나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확인하기 어려운 약속만을 굳게 믿은 채, 온 몸을 저주받은 세상으로 던진다.

바츠는 집으로 달렸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헤러티커처럼 거칠게 호흡하고 있었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새 학년으로의 진학에 대한 설렘과 승급에 대한 기쁨에 이성을 잃은 것은 아니다. 의미 없는 이른 해방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일반학교를 졸업하게 되는 케일리가 느낄 해방감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미사훈련소에서의 구속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케일리는 일반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기술학교로의 진학은 실패했다. 그녀의 성적은 형편없었다. 비단 그녀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녀처럼 진학을 하지 못한 사람은 꽤 된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르크의 일부 어머니들처럼 갖가지 허드렛일을 하며 아르크의 눈 밖에 나지 말아야 하는 것뿐이다. 그녀는 스스로의 힘만으로 아르크에 머물 수 있는 자격을 잃었다. 그것이 정당한 것인지는 모른다. 그저 룰이자 관행이었다.

그런데도 바츠가 그녀를 만나러 달려가는 발걸음이 가볍고 즐거운 이유는 드디어 오늘 아버지가 돌아온다는 기쁨 때문이었다. 긴 시간이었다. 처음은 아니었지만 3년이라는 시간은 앞으로도 영원히 짧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빨리!”

바츠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짐을 문 앞에서 아무대로나 집어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기다리고 있던 케일리를 향해 외쳤다. 그녀는 바츠가 성화를 부리며 재촉하는 와중에도 거울을 들여다보며 몇 번이고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바츠가 충분히 예쁘다고 말해주기 전까지 계속됐다. 전 같았다면 그녀를 따돌리고 테라치와 함께 먼저 플랫폼을 향해 달려갔겠지만 올해는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테라치는 플랫폼에 가지 않는다. 그는 홀로 애니의 집으로 갔다. 아델리나가 버니에투와의 집에 가서 놀자는 제안을 했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원해졌다며 아델리나가 생떼를 부렸지만 소용없었다. 바츠는 테라치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가 오늘 같은 날일수록 더욱 애니를 만나고 싶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델리나가 소리를 지르며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그래도 도리가 없었다.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테라치에 대해서 안다면 그녀도 이렇게 고집을 피우지 못했을 것이다.

바츠는 그 사실이 떠오르자 분명 기분 좋은 날임에도 불구하고 케일리와 함께 플랫폼으로 향하는 길이 조금 우울하게 느껴졌다. 케일리가 자신의 늦장으로 기분이 상한 줄 알고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힘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찝찝한 기분이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부풀었던 기대감이 죄책감이 되어 가슴 한 켠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찝찝한 기분이 플랫폼 대기실까지 이어졌다.

대기실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벌써부터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도 이번에 가족 중 누군가를 지상으로 내보내야 하는 사람일 것이다. 물론 이제 곧 돌아오게 될 가족 생각에 너무 감격스러운 나머지 울음을 터뜨린 것일 수도 있다.

바츠는 그 모습을 보며 자신도 괜히 코끝이 찡했지만, 어떻게든 참아보기 위해서 노력했다. 지난번에 아버지와 약속했던 것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헤어지고 다시 만날 때마다 매번 눈물을 쏟아대는 바츠에게 아버지는 지난번에 떠나기 직전, 이번에 다시 만나게 되면 서로 웃는 얼굴로 보자고 했다. 바츠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가슴이 울렁댔지만 끝가지 참을 생각이었다. 케일리가 가까운 쪽 손을 꼭 잡는 것을 보면 그녀도 분명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녀 역시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엔지니어들이 플랫폼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모습에 바츠도 울컥했지만 눈을 부릅뜨며 안간힘을 써서 버텼다. 이곳까지 이어져온 찝찝하던 기분이 다시 뚜렷해진 것도 그때였다. 대기실에서 함께 플랫폼을 내려다보던 다른 가족들의 탄식이 쏟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환호성대신 비통에 젖은 비명을 내뱉으며 술렁였다. 일부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어떻게 된 것이냐고 반복해서 물었다. 누군가를 붙잡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허공에 대고 지껄이는 혼잣말이었다. 플랫폼으로 모습을 드러낸 엔지니어의 숫자가 고작 10명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돌아오는 엔지니어의 수는 적어도 30명 아니 20명은 됐어야 했다. 이렇게 적은 수가 돌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바츠는 혼란스런 마음에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다른 사람들은 그 원인은 모르지만 이유만큼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두 눈이 붉게 충혈 된 케일리가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차마 그녀의 시선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자신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그들 사이에서 아버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충분히 꼽을 수 있는 숫자였지만 100명은 모여 있는 것처럼 아버지를 찾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던 탓이다. 모두 똑같은 복장으로 얼굴에는 방독면을 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되뇌었다.

엔지니어들이 샤워장으로 모습을 감추자 사람들이 대기실을 빠져나가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무료로 배급표를 나눠줄 때처럼 서로 먼저 가기 위해 몸싸움을 했다. 바츠도 달렸다. 정확히는 케일리가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먼저 달리기 시작한 것이었지만 불만은 없었다. 이렇게라도 달려가서 아버지를 만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플랫폼과 연결된 통로의 입구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입구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시도 간절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일부는 억울한 일을 당한 것처럼 통곡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엔지니어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의 옷 위에 아직 마르지 않아 고스란히 남아있는 소독약에도 아랑곳없이 달려 나가 부둥켜 앉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서로를 안은 채 소리 내어 울었다. 만남의 감격인지, 안도의 기쁨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보듬고 있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그 모습을 넋이 나간 표정으로 지켜보며 자신의 차례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바츠도 마찬가지였다. 케일리와 함께 샤워장 통로를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엔지니어가 방독면을 벗었을 때, 그의 머리칼이 금발이고 낯선 얼굴의 사람들이 그를 껴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바츠는 그제야 그 찝찝한 기분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뻥 뚫린 하얀 가슴을 검은색 상실감이 채우게 될 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생겨난 불안이었다. 그리고 그 기분이 현실이 되자 머릿속에 한 줄기 문장이 제멋대로 정렬했다.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

케일리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계속해서 울었다. 바보처럼 울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처럼 울었다.

바츠는 그 모습에 화가 났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녀 탓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탓도 아니었다. 대체 누구에게 이 원망을 물어야 할 지 알 수가 없어 갑갑했다. 집을 뛰쳐나가야 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문을 세게 닫을 참이다. 물론 그 전에 울지 말라며 위로도 할 것이다.

“바보야, 그만 울어! 왜 우는 거야!”

바츠는 생각한데로 다 했지만 그녀의 울음소리는 잠시 그쳤다가 다시 시작됐다. 문틈으로 새나오는 흐느낌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너무 슬펐다. 있는 힘껏 닫아 버린 문에 등을 기대고 서야 할 만큼 기운도 없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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