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 지상으로 -- > * 45화 *
“무슨 일이야? 지금 울고 있는 거 케일리 맞지?”
결국 바츠가 간 곳은 테라치의 집이었다. 서너 걸음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이다. 그는 다행히도 제발 문을 열어달라는 바츠의 간절한 마음을 들어주었다. 애니의 집에서 일찍 돌아와 있던 그는 케일리의 울음소리를 전부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벌써 근심이 드러나 있었다.
바츠는 테라치에게 오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단 한마디면 설명이 가능한 일들이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생각을 해야 할 정도로 길고 복잡하게 늘어놓았다. 불필요한 말들이 많았다. 오히려 가장 필요한 그 한마디는 따로 빠져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어렵지 않게 전부 알아들었다. 푸른 눈이 두 눈을 꿰뚫고 들어와, 그때로 시간 여행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는 이롤로와는 달라. 이미 헌터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쫓겨나지는 않을 거야.”
그의 위로에 바츠는 자신의 갑갑한 마음이 불안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말끝에 ‘아마도’라는 말이 생략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배려였다. 그 정도를 이해 못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사실을 받아드려야 하는 것은 지금으로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츠는 본인 스스로는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아버지를 잃게 되었다는 슬픔에 모든 사고가 정지되어 있었다.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하고 있기 힘들 정도로 공황상태였다. 그런데 테라치의 위로가 코앞에 놓인 현실을 여과 없이 전했다. 바츠가 다시 이성을 찾고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갑갑한 마음을 털어내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문제를 제대로 인지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분명 위안으로 삼기에는 쓸모없는 것이었다. 테라치 나름대로 안심시키기 위한 행동인 듯 했지만 바츠의 기분은 묘하기만 했다.
바츠는 테라치의 위로 아닌 위로를 듣고 나서야 자신이 곧 아르크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지도 못한 와중에도 자신의 처지를 걱정해야 하는 모습이 스스로도 역겨웠다. 그리고 두려웠다. 이대로 케일리와 함께 내보내지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너무도 무서웠다. 책으로만 보던 헤러티커의 손톱이 목 줄기에 닿아 있는 것만 같았다. 아직 누군가를 지키기에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기껏해야 혼자 달아날 수나 있을 것이다. 우울한 기분을 위로받고 싶었는데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던 사실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잠시였지만 테라치가 원망스러웠다. 비록 위로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노력은 할 수 있는 일이지 않은가? 게다가 마주앉아 있는 사람은 답답한 버니에투와나 고지식한 지훈이 아니었다. 그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테라치였다. 그에게도 서투른 것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러나 혼란스런 바츠의 얼굴을 바라보는 테라치의 시선은 의아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위로가 완전히 어긋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그의 위로는 분명 진심이었다.
바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애써 몇 마디 더 건네기는 했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그 역시 오늘만큼은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오늘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실수였다. 그도 힘들어 하고 있을 텐데 자신의 상처까지 의지하려고 했다니, 정말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그를 부담스럽게 만들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의 엉뚱한 위로가 이해됐다.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하지만 테라치는 바츠가 문을 나서며 미안하다는 말을 건넬 때도, 부사령관에게 부탁해보겠다는 말을 하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했다.
바츠는 그가 부담감을 내려놓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저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집으로 돌아오자 케일리는 진정이 된 듯 보였다. 조금 훌쩍이고는 있었지만 더 이상의 울음소리는 없었다.
바츠는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손아귀에 전부 들어올 만큼 작고 가녀렸다. 그녀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애써 웃어 보이며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왔다. 그녀의 손은 부드러웠다. 뭉툭하게 잘린 새끼손가락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볼에 남아있는 눈물을 대신 훔쳐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다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관뒀다. 대신 방으로 들어가 짐을 챙겨두는 것으로 그녀의 수고를 덜어주고자 했다.
먼저 슈트케이스를 침대 위에 펼쳤다. 아버지의 옷가지를 제외한다면, 잘 정리해서 케일리의 옷까지 모두 담기에 충분한 크기이다. 그 다음에는 드렁크를 가져와 잡동사니를 담을 것이다. 그럼 마음을 추스른 케일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뭐하는 거야?”
바츠가 방에서 부산을 떨자, 케일리가 참지 못하고 다가와 물었다.
“내가 옷이랑 필요한 물건들 챙겨놓을 테니까, 누나는 나중에 내가 못 챙긴 것이 있는지 살펴봐줘.”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케일리가 슈트케이스에 옷가지를 담고 있던 바츠의 손목을 잡아챘다. 표정을 보니 정말 몰라서 묻고 있었다. 바츠는 그런 케일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녀도 결국 인지하게 될 일이었다.
“어차피 우리는 곧 쫓겨날 거잖아. 미리 짐을 싸 둬야지. 그래도 오늘은 여기서 잘 수 있게 해주겠지?”
“바츠, 그렇지 않아! 누가 그래?”
케일리가 이번에는 바츠의 어깨를 잡아 강제로 몸을 돌려세웠다. 그리고는 정말 화가 난 사람처럼 따져 물었다.
“이롤로도 그랬잖아!”
바츠는 숨김없이 말했는데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짜증이 일어, 소리를 지르며 그녀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다. 덕분에 쳐내진 그녀의 손이 슈트케이스에 부딪히며 옷가지가 침대 밑으로 전부 쏟아져 내렸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바닥에 버려지듯 너부러진 옷가지들이 너무 슬퍼보였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너는 곧 헌터가 될 거라고! 그리고! 그리고 나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아!”
케일리가 다시 한 번 바츠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이번에는 양쪽 어깨 모두였다. 자신의 말에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서 강조할 때 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녀의 행동에서 아무런 신뢰를 느낄 수 없었다. 그녀의 말에 얼마나 많은 모순이 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헌터가 아니야! 아직 쓸모가 없다고! 누나가 여기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데? 누나도 여기에서는 쓸모없는 사람일 뿐이라고!”
바츠는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케일리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게 될지 알면서도 망설이지 않았다. 다시 울음을 터뜨릴 수도 있다. 어쩌면 저주를 퍼붓겠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상처를 보듬기도 전에, 냉혹한 현실을 맞닥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저주를 퍼붓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 침착하게 변하더니 목소리마저도 단호해졌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걱정하지 마. 우리는 절대 쫓겨나지 않아. 알았지? 누나만 믿어. 누나가 상업 지구에 가서 잡일이라도 하면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짐 싸지 않아도 돼. 넌 그냥 내일 평상시처럼 미사로 등교를 하면 된다고. 아무 일 없을 거야. 알겠지? 내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응.”
바츠는 케일리가 이렇게 단호한 모습을 보이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간단한 거짓말도 티가 날 정도로 마음이 여렸다. 항상 그런 그녀를 바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녀가 너무도 착하기 때문이었다. 가끔 약은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애교에 불과했다. 그녀는 바보처럼 보일 만큼 순수하고 착했다. 그리고 그만큼 나약해보였다. 그녀의 작은 어깨처럼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안심시키고 있었다. 마치 악몽을 꾸고 소리를 지를 때면, 용감하게 달려와 힘을 실어주던 아버지처럼 믿음이 가는 모습이었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불신으로 바라보던 시선이, 잠시 고장 났었던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혹시나 하는 희망이 피어올랐다. 한편에는 막연한 믿음이라는 불안이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정말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음날, 바츠는 케일리의 말대로 평소대로 학교에 갔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다시 마음이 우울해졌으나, 그녀가 억지로 떠미는 등쌀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녀의 자신감은 하룻밤이 지나는 동안에도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녀가 고작 상업 지구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것으로는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집을 나서는 자신을 배웅해주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기대감이 밀려들었다. 오늘이라도 아버지가 돌아올 것만 같았다.
새해 첫 수업은 별 거 없었다. 마티프가 또 다시 담당 교관이었는데, 첫날이니만큼 어렵게 굴지 않았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앞으로 수업 방향에 대한 설명이 줄을 이었다. 작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조금 더 관대해 보였다. 1학년을 무사히 마친 것에 대한 예우인 듯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섭지 않게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올해 처음으로 자신을 만나게 된 포르쿠얀의 넋을 완전히 빼놓았다. 삐딱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이마가 맞닿을 정도로 포르쿠얀의 얼굴에 자신의 검은 얼굴을 가져다대고는, 일말의 자비도 없이 고막이 터질 만큼 사나운 호통을 내질렀다. 아마도 작년에 2반이었던 포르쿠얀에게는 매우 낯선 상황이었을 것이다. 2반을 담당했던 교관은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늙은, 백발의 노인이었으니 말이다. 바츠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아네트 역시 크게 놀란 모습이었다. 그의 공포스런 모습에 놀라지 않은 건 작년에 1반이었던 바츠와 그 친구들뿐이었다. 이제는 너무 익숙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그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며 낄낄대다가 한 소리를 들었을 정도다. 포르쿠얀과 아네트가 마티프에게 제대로 말을 건네기까지 반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야만 할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무슨 일 있어? 너 되게 이상해 보여. 꼭 이롤로 같아.”
하지만 바츠는 예외였다. 바츠는 테라치는 물론이고 아델리나와 버니에투와 그리고 지훈이 킥킥대는 동안에도 멍한 얼굴로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앞자리에서 신이 나서 웃고 있던 아델리나가 우연히 그 모습을 발견하고 묻는 걱정 어린 말에도 무심하게 손만 내저었을 뿐이다.
바츠는 불안과 초조, 기대와 희망이 뒤엉킨 감정으로 그 어디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환기구를 지나는 바람처럼 빠르게 지나는 것으로만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기 너무 힘들었다. 머릿속의 혼란이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을 추스르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케일리가 뜻밖의 만남을 준비한 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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