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 지상으로 -- > * 46화 *
“바츠도 잘 알지? 나 결혼하기로 했어.”
차분하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너무 놀라운 상황에 기가 막혀 어리둥절한 것이다. 눈앞의 만남이 재작년 내부 경고등이 변했던 것만큼 놀라웠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년 전이다. 그때도 새해를 맞이해 빅애스가 개방되었었다. 수십 명의 엔지니어가 오갔고, 확인을 할 수는 없지만 일부 헌터도 오갔을 것이다. 그런데 외부 엔지니어가 돌아왔을 때 문제가 생겼다.
아르크 내부에는 오염 감지 시스템이 있다. 프로버라고 불리는 것으로 일정 농도로 유지되고 있는 내부 공기에 바이러스로 인한 변화가 생기면 바로 감지해 위험을 알리는 장치이다. 환기구 입구마다 함께 설치가 되어 환기구가 주변 내부공기의 순환을 위해 공기를 빨아들이는 순간, 중합효소 연쇄 반응을 통해 바이러스를 검출, 확인하게 된다.
중합효소 연쇄 반응이란 100℃에 가까운 열을 이용해 열변성 과정을 거친 후, 염기로 이루어진 시발체를 결합시켜 바이러스의 DNA를 합성하는 것으로 이미 20세기에 개발된 특정 표적 유전물질을 증폭하는 방법이다.
환기구가 빨아들인 주변의 공기가 장치를 통과하는 짧은 순간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르크의 통제실로 실시간으로 보내지는 한편, 동시에 환기구마다 바깥쪽에 설치되어 있는 경고등을 통해 그 위험도를 알린다. 플랫폼의 경고등과는 다른 것이다. 플랫폼의 경고등은 평상시에 완전히 꺼져있지만 프로버의 경고등은 항상 녹색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검출 결과에 따라서 황색과 적색으로 차례로 변하는데, 황색은 주의를 뜻하는 것으로 빠른 환기와 충분한 제독만 이루어진다면 안전하나, 적색은 오염을 뜻하는 것으로 밀폐를 통한 완전봉쇄나 소각을 통한 전소로도 안심할 수 없는 극히 위급한 상황을 의미했다.
그런데 그 경고등이 외부 엔지니어들의 귀환과 더불어 황색으로 변했던 것이다. 정확히는 샤워장으로 향하는 입구부터 1-1까지 이어진 복도에 설치된 경고등들이 변했다.
바츠는 막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황색등을 직접 목격하게 되어서 크게 놀랐었다. 경고등이 변한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근을 지나던 군인이 가끔 외부로부터 유입된 먼지만으로도 경고등이 변하는 경우가 있다고 안심을 시켜주지 않았더라면, 가까운 경비대로 달려가 신고를 했을 지도 모를 만큼 덜컥 겁이 났었다. 한마디로 오작동이었던 셈이다.
“왜 아무런 말이 없어. 무슨 말이라도 해봐.”
케일리의 옆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키도 크고 말끔한 사내였다. 무엇보다도 왼쪽 어깨에 레벨1이 아닌 레벨2를 나타내는 페인팅이 눈에 띄었다.
바츠는 그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결코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썩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케일리가 웃는 얼굴로 다가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으로 잠자리에서 스스로 일어난 아이처럼 칭찬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바츠의 멍한 반응을 보더니, 이내 뒷걸음질로 물러나며 어색한 시선으로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애써 밝은 표정으로 자신의 남자에게 팔짱을 끼는 걸 보면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바츠는 케일리의 뜬금없는 행동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는지 심경이 복잡했다. 머릿속의 혼란이 황당함으로 마비되었다.
남자는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자신의 팔에 매달리는 케일리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반대쪽 남은 손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보란 듯이 애정을 과시했는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몸부림으로 보였다.
“안녕, 바츠. 우리 처음이 아니지?”
물론이다. 그와는 벌써 몇 번이나 만났었다. 비록 꽤 오래전 일들이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단 한 번도 유쾌했던 기억은 없다.
그가 활짝 웃으며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바츠는 남자의 손을 그냥 빤히 바라보며, 결국 그가 머쓱한 얼굴로 케일리에게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우리 이야기를 듣고 기꺼이 나서주었어. 우린 쫓겨나지 않을 거야. 그렇지?”
“물론이야. 내가 그렇게 두지 않아.”
케일리가 자신의 옆으로 돌아온 남자에게 물었다. 목소리에 힘이 있었지만 분명 애원에 가까웠다. 남자는 그것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뿌듯한 표정으로 흔쾌히 대답했다. 단단히 기가 산 사내들이 으레 보이는 모습이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고 턱 끝은 절로 치솟는다. 지금이라면 그 어떤 부탁도 들어줄 수 있고, 그 무엇도 해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케일리는 남자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을 듣고도 불안한 기색이 보였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대답 같았는데 이상했다. 걱정스런 얼굴로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의 대답이 그렇게 신뢰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바츠는 그녀의 표정이 어두운 이유가 남자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대신...”
케일리가 고개를 돌려 남자를 한차례 바라보며 뜸을 들였다.
“대신 내가 결혼하게 되면 넌 여기에 혼자 살아야 돼. 난 레벨2로 가게 되거든. 레벨2로 가는 것이 허락되는 건 나뿐이야.”
바츠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예상이 완벽하게 빗나갔다는 사실로 충격을 받은 탓이었다. 미처 다잡지 못한 머릿속에 작별이라도 고해야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밀려들어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잘 할 수 있지? 누나가 자주 올게. 테라치에게도 널 잘 돌봐달라고 이야기해둘 거야. 너하고는 정말 친하잖아.”
케일리는 잠시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의사를 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였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바츠는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또 다른 혼란으로 전염되고 있음을 느꼈다. 헤어졌던 둘이 어떻게 다시 이어지게 된 것인지 궁금했고, 결혼이라는 것이 이렇게 쉽게 결정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문제인지도 궁금했다.
“단 둘이 이야기하고 싶어...”
바츠는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남자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워낙 짧은 찰나였던지라 눈치를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케일리에게 달콤한 말로 인사를 한 후 뒤이어 바츠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바츠에게 하는 인사는 짧고 어색했다.
“어떻게 된 거야? 이미 헤어진 지 한참 됐잖아.”
바츠는 남자가 나가자마자 케일리에게 물었다.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남녀 관계는 다 그래. 싸우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지. 하지만 다시 만나고 다시 사랑하게 돼. 그게 남녀 관계야. 네가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려울 거야. 하지만 그건 사실이야. 아빠와 엄마도 가끔 다퉜었다고. 물론 너는 너무 어려서 기억도 못하겠지만. 어쨌든 특별한 일이 아니야.”
“행복해? 아빠와 엄마처럼 행복할 수 있어?”
케일리는 도도한 태도로 거들먹거리다가 혀라도 깨물었는지 잠시 멈칫한 후에 대답했다.
“...물론이야. 당연하지. 결혼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야.”
“알았어. 내 걱정은 하지 마. 난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어. 난 헌터니까.”
“그래, 넌 헌터야. 누구보다도 강한 헌터라고.”
바츠는 자신을 향해 확고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케일리를 향해 자신 있게 말했다. 이제는 집에 혼자 남게 된다는 사실로 조마조마한 마음에 초조하기는 했지만, 그녀와 함께 아르크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에 비해서는 훨씬 덜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불어 그녀가 자신으로 인해서 근심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맞아. 기억해? 내가 작년에 얻어온 헤러티커 엄지 말이야. 누나에게 줄 게. 누나에게 도움이 될 거야.”
바츠는 케일리가 레벨2로 가게 되었을 때도 생각했다. 그들이 그녀를 바로 자신들의 구성원으로 인정할 리가 없었다. 그녀가 차별을 받을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었다. 헤러티커의 엄지는 그녀가 그들의 핍박을 견뎌내는데 보탬이 될 것이다.
“어디에 뒀어? 선반 위에 두었어?”
바츠는 케일리가 잊고 가지 않게 미리 챙겨둘 수 있도록 지금 주고 싶었다. 그런데 케일리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겁에 질린 사람마냥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작년에 손가락 성형을 하려고 저금통을 뒤져갔을 때와 꼭 닮아있었다.
“응?”
“헤러티커 엄지 어디에 두었냐고. 지금 챙겨놔. 누나는 덜렁대니까 놓고 갈지도 몰라.”
바츠는 그 낌새를 놓치지 않았다.
“왜? 무슨 일 있지? 무슨 일 있는 거지?”
“사실...”
바츠는 케일리의 대답을 듣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결혼을 위해 그에게 헤러티커의 엄지를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그녀가 정말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렇게 해서 맺어진 인연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모르고 있는 걸까? 그것은 정말 쓸모없는 짓이었다. 아직 일반학교에 입학도 하지 못한 에슬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억울한지 큰소리치며 반발했다.
“우리가 여기서 쫓겨나면 아무 소용없는 거라고! 그리고 그는 아직 나를 사랑해! 겨우 그런 걸로 결혼을 결정할 만큼 바보가 아니라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흔쾌히 결혼을 수락했을 리가 없어! 그리고...”
바츠는 케일리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집을 뛰쳐나갔다. 그녀의 목소리가 뒤통수로 계속 날아들었지만 절대 멈추지 않았다. 입가에 당장 그와 결혼을 취소하라는 말과 함께 그는 누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미친 듯이 맴돌았다. 걸음을 멈춘다면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말 것이다. 그녀는 정말 바보였다. 곤혹스런 일들이 그녀를 괴롭히게 될 것이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결혼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그리고...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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