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 지상으로 -- > * 48화 *
며칠이 지났다. 바츠는 작년과 다름없이 미사훈련소로 등교하고 있다. 어떤 날은 벨리타와 함께 집을 나섰고, 어떤 날은 아델리나와 함께였다. 가끔은 버니에투와도 함께 할 때가 있었는데, 벨리타와 아델리나와는 다르게 혼자서 찾아온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혼자 온 날에는 쭈뼛거리기 일쑤였다. 대게 테라치나 아델리나가 같이 할 때에만 찾아왔다. 그가 생각보다 낯가림이 심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아델리나가 자신도 벨리타처럼 도울 수 있다는 말을 했을 때에나 의욕적으로 나섰던 것을 보면 틀림없다. 그는 마음씨가 착하지만 항상 눈치를 보다 뒤늦게 시작한다. 주목받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일 것이다. 그는 여전히 수줍음이 많았다.
어쨌든 집안은 북적였다. 케일리가 있을 때보다도 훨씬 시끄러웠다. 테라치가 매일 신경써주겠다고 한 것이 무안할 정도였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C, P, H!”
바츠는 아델리나와 버니에투와와 함께 CPH놀이에 푹 빠져 있었다. 저녁으로 먹을 빵을 오븐에 넣어두었던 것을 잊을 정도로 즐거웠다.
CPH놀이는 둥글게 모여 앉아 각자 한쪽 손을 가운데에 모으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부 주먹을 쥐고 있어야 하고 구호와 함께 손의 모양을 바꾸면 된다. 손의 모양은 그대로 주먹을 쥔 채 머물러 있는 것, 검지만 펴는 것 그리고 엄지만 구부린 채 나머지 손가락을 전부 펴는 것 이렇게 총 세 가지이다. 주먹은 프레이를 뜻한다. 그리고 검지만 편 것은 카니지 블레이드를, 엄지만 구부리고 나머지 손가락을 편 것은 헤러티커를 의미하는 데, 프레이는 카니지 블레이드를 이기고, 카니지 블레이드는 헤러티커를 이긴다. 그리고 헤러티커는 프레이를 이기는데, 승자가 남은 사람들에게 벌칙을 주게 되는 게임이다. 보통 머리카락 한 가닥을 뽑는 것이 일반적이다.
“탄다!"
게임을 하는 내내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있던 바츠가 처음으로 이겼을 때였다. 아델리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부엌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바츠는 그녀가 벌칙을 피하기 위해 달아나는 줄 알았다. 버니에투와도 저쪽으로 달아나는 아델리나의 뒷모습을 보며 낄낄거리는 것을 보면 같은 생각인 듯 했다. 하지만 부엌에서부터 풍겨져 나오는 텁텁한 냄새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천장의 옅은 연기는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어떡해!”
바츠는 아델리나의 비명소리에 서둘러 부엌으로 달렸다. 버니에투와가 그 뒤를 따랐다.
그녀는 한쪽 팔을 들어 안쪽으로 얼굴을 감싸, 입과 코를 틀어막고 있었다. 폐기물 처리장의 악취도 거뜬히 이겨내는 그녀지만 이번만큼은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돌아보는 눈빛이 불안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용기가 셈 솟았는지 오븐의 덮개를 용감하게 열어젖혔다. 동시에 화들짝 놀란 사람처럼 뒤로 껑충 달아나기는 했지만 충분히 과감한 행동이었다.
오븐의 덮개가 열리자, 그 안에 가득하던 뿌연 연기와 진한 탄내가 아델리나를 쫓듯이 빠져나왔다. 연기는 그대로 부엌의 천장으로 달려가 눌러 붙었다. 그리고 탄내는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내가 할께!”
이번에는 버니에투와였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가 안쪽에 새카맣게 타버린 빵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접시와 함께 개수대 안으로 던져버렸는데, 뿌연 연기 속에서도 뿌듯해하는 표정이 빛났다. 은근히 옆에 있던 아델리나가 칭찬을 해주길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그가 빵을 꺼내는 동안 부엌을 탈출해 멀리 빠져나와 있던 터였다.
바츠는 바로 옆에 나란히 서서 아직까지도 팔을 내리지 않고 있는 아델리나와 뿌연 연기 속에서 이쪽을 향해 서운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버니에투와를 차례로 살폈다. 그러자 아델리나의 시선이 버니에투와와 바츠를 오갔고, 버니에투와의 시선도 바츠와 아델리나 사이를 오갔다. 셋의 시선이 서로 번갈아가며 몇 번이나 교차했다. 괜히 어색하고 민망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침묵이 만들어졌다. 벌칙이라도 있었으면 좀 나았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때, 버니에투와가 더 이상 침묵을 견디기 힘든지 한쪽 볼을 긁적이며 이쪽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아델리나는 그 모습을 보고 큭큭거리며 웃는 것으로 침묵을 깨뜨렸다. 그가 매만진 볼에 까만 검댕이 묻어났기 때문이었다.
바츠도 따라 웃었다. 아델리나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자신의 배로 가져갈 정도로 신나게 웃는 모습을 보니 즐거웠다. 버니에투와만 상황을 모른 채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자신을 보고 웃는 이유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바츠는 그를 위해 볼에 묻은 검댕을 직접 손으로 닦아 보여주었다. 그는 그제야 아델리나가 자신을 보고 웃는 이유를 알아채고는 웃지 말라며 신경질을 부렸다. 하지만 아델리나가 겨우 그런 것에 겁을 먹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웃음은 계속됐다. 그리고 버니에투와는 허탈한 표정이었지만 결국 그녀를 따라 웃는 수밖에 없었다.
바츠는 저녁으로 감자나 먹게 되었는데도 이상하게 전혀 아쉽지 않았다. 오늘 같은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매일 빵을 태워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완전히 변해 버린 미사훈련소의 수업처럼, 지금의 사이가 변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미사훈련소의 수업은 작년에 비해서 크게 변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교본을 가지고 하는 수업은 없었다. 실습 위주의 수업과 체력 단련이 주를 이루었다. 짝을 이뤄 매일 같이 연습용 검으로 대련을 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근력과 지구력을 향상하는 훈련이 반복됐다. 또, 틈틈이 효율적인 자세를 가르치는 마티프의 지도가 있었고, 3일에 한 번 꼴로 실습장에서 프레이를 상대로 진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검을 쥐는 손이 익숙해졌다. 두 달이 지났을 때에는 검을 한 손으로도 자유롭게 다룰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허수아비를 베는 것쯤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이제 허수아비를 베는 일은 고작해야 수업이 시작하기 전, 몸을 푸는 준비운동밖에 되지 않았다. 한 달이 더 지났을 때에는 고정시켜 둔 프레이의 숨통을 끊는 일도 어렵지 않다. 풀어놓은 프레이와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시시할 정도였다.
바츠는 그때부터 수업이 끝나고 별도로 검술훈련장을 찾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단상 위에 올라 허수아비를 베거나 혼자서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일은 이제 유치했다. 검을 휘둘렀을 때 손목과 팔꿈치 그리고 어깨로 전해지는 진짜 생명체를 찌르거나 베었을 때 그 특유의 둔탁한 느낌이 없으면 따분하기만 했다. 대신 검술훈련장에는 미사훈련소의 새로운 1학년 아이들이 보였다. 여전히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일반학교에 다니는 다른 레벨의 아이들이었지만, 그 사이에서 그들을 찾아보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 다른 레벨의 아이들이 대부분 마땅한 놀이가 없어 취미 정도로나 즐기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미사훈련소의 아이들은 허공에 검을 휘두르더라도 필사적이었기 때문이다.
바츠는 자신의 모습도 저들과 닮아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왠지 부끄러웠다. 하지만 저때의 노력이 앞으로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후회하지는 않는다. 저들도 시간이 흐르면 같은 것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부끄러움은 단 번에 사라지고 뿌듯함이 자리를 차지했다. 그래서 검술훈련장을 지날 때마다 그들을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비록 지금은 시간이 지루하게 지나겠지만 결국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고스란히 돌아오게 될 테니 포기하지 않길 빌었다.
하지만 시간은 바츠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흘렀다. 2학년이 된 뒤 첫 시험을 치렀다. 테라치는 또 다시 만점으로 1등을 차지했다. 성적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겨루기였다. 테라치는 2학년 모두를 손쉽게 제압했다. 바츠도 예외는 아니었다. 충분히 그를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상상 이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프레이보다도 빠른 것 같았다. 그리고 힘은 검을 맞부딪히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로 강력했다. 보다 놀라운 것은 그가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게는 너무 쉬운 일인 것처럼 보였다.
“넌 생각이 너무 많아. 조금만 더 냉정해지라고. 그냥 네 몸에 맡겨. 네 몸은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가 애써 위로했지만, 바츠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를 이길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말이다. 그는 빅애스처럼 견고했다. 가끔 집에 찾아오면 요령을 물어보기도 했지만, 시원한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그의 눈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것 같았다. 그저 나름대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벨리타가 와 있구나?”
그리고 그러는 동안 케일리도 몇 번 다녀갔다. 그녀는 처음으로 돌아왔을 때에, 속옷차림의 벨리타를 보고 크게 놀랐었다. 그대로 얼어붙어 말까지 더듬었다. 밝은 얼굴로 인사를 했던 벨리타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익숙해져 있었다. 벨리타가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오히려 이부자리를 살펴줄 정도다. 아델리나나 버니에투와도 마찬가지다. 케일리는 그들을 모두 가족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 절대 굶으면 안돼. 알았지?”
케일리가 주머니에서 5장의 배급표를 꺼내 바츠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는 매번 소량의 배급표를 가져왔다. 아마도 자신의 몫을 가져오는 것일 것이다. 테라치가 항상 먹을 것을 나눠주고 벨리타가 가끔씩 배급표를 선물해 주기 때문에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도 한사코 거르지 않았다. 혼자 남겨진 바츠가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오히려 그녀가 더 걱정이었다. 자주 오는 것도 아닌데, 올 때마다 그녀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기 때문이다.
“...그가 못 살게 굴어서 그래.”
바츠의 걱정에 대한 케일리의 대답이었다.
“왜 그러는 건데? 누나는 그의 아내잖아?”
“넌 아직 어려서 몰라. 그런 게 있어. 어른이 결혼을 하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상대방을 괴롭히기도 해. 밤마다 말이야. 그는 그게 잦을 뿐이야.”
바츠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을 확인하는 게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이라면 차라리 사랑을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벨리타를 많이 좋아하지만 괴롭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른들도 다를 리가 없었다. 누군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것으로 밖에 표현이 되지 않는다. 절대로 거칠게 변할 수가 없다. 만약 소중한 사람을 거칠게 대한다면 그건 그 사람이 상대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똑같은 것이다.
“근데 웃기지 않아? 왜 사람들은 불만을 이야기하지 않을까?”
다음날, 지훈의 이상한 소리가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궤변은 여전했다. 테라치의 검술실력만큼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넌 네가 레벨1에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바츠는 그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당연한 대답이 나오는 문제에 자꾸만 이유를 물었다. 차라리 아르크에서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묻는 것이 대답하기 쉬울 것이다.
“레벨4에 살면 왜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곳은 연구원들이 사는 곳이니까. 그리고 그들은 우리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 그 대가로 그들이 그곳에 머무는 거라고. 일종에 권리지. 우리가 헌터가 되어서 아르크를 위해 헌신하는 대가로 자유를 보장받는 것과 같은 거라고. 게다가 우리에게도 연구원이 될 기회는 주어져 있지. 쉽지 않을 뿐이지만 말이야.”
지훈이 바츠의 대답을 듣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바로 그게 무서운 거야. 누구나 거주지를 바꿀 수 있는 기회는 마련돼 있어. 네 말대로 쉽거나 편하지는 않지만 말이지. 그리고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언젠가 자신도 그것을 누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가만히 지금의 체제에 순응하는 거야. 사실 그 기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데도 말이야. 웃기지 않아? 절대 갈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바츠는 절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미쳐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이를 먹고 키가 자라는 것처럼 변했으면 하지만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기본적으로 삐딱하게 자리 잡은 신념부터 변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러길 바랐다. 그렇다고 꼭 그런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도 있다.
“자유를 위하여!”
에슬란이었다. 에슬란은 일반학교에 입학을 했다. 하지만 가끔 찾아가면 여전히 버릇처럼 그 말을 내뱉고는 한다. 아직도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주문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보통 일반학교의 입학과 동시에 주문을 떼버리는 아이들에 비하면 조금 늦는 편이었다. 그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지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막상 그때가 오게 되면 왠지 서운할 것 같아 차마 바랄 수만은 없었다. 그냥 지금처럼 순수하게 웃고 떠들 수 있었으면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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