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 지상으로 -- > * 49화 *
“그거 좀 기분 나쁘다.”
그날 저녁, 바츠는 벨리타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그 감정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녀가 이해하고 함께 흐뭇해 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야기를 다 듣고는, 자신의 양 어깨를 감싸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차가운 물에 발이라도 담군 것처럼 보였다.
“생각해봐. 자기 누나의 흉터를 만지면서 그런 말을 한다고? 그리고 가족들은 그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고? 소름끼친다. 꼭 상처가 생기길 바랐던 사람들 같잖아.”
그 행동들을 가볍고 간단하게 생각하던 바츠에게는 새로운 시각에서의 접근이었다. 그들은 분명 즐거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처 자체를 원했다거나 하는 그런 비정상적인 감정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오래된 아픔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견뎌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에슬란은 그 아픔으로 인해 약간의 정신적 충격이 있는 것일 뿐이고 말이다. 로리나와 했던 약속을 떠올리면 자신할 수 있었다. 벨리타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듣고 보면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충분히 그렇게 판단할 수도 있었다.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동의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입 밖으로 내는 데에는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오늘도 자고 갈 거야?”
바츠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녀하고는 즐거운 생각과 행복한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다. 쓸데없는 논쟁거리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글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밥은 먹었고...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벨리타가 빈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오히려 되물었다.
바츠는 매일같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자주 방문하고 있는 그녀가 사실 조금은 걱정이었다. 바로 옆집이었거나 같은 구역, 하다못해 같은 레벨에 거주하고 있었더라면 훨씬 덜 했을 테지만 그녀의 집은 레벨2에 위치해 있었다. 그녀가 자주 찾아오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특히 그녀의 부모님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절대 긍정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찾아올 때마다 부모님에게는 무슨 말을 하고 오는지도 궁금했다.
“나는 네가 있으면 당연히 좋지. 하지만 벨리타의 부모님이 걱정하실 테니까...그래서 그래.”
“정말이야? 나 가고나면 아델리나를 부르려는 것은 아니고?”
벨리타가 부엌으로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코끝을 찡긋하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니야! 내가 왜 그러겠어! 정말 네가 걱정돼서 그래. 난 네가 곤란하게 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벨리타는 바츠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더니, 다시 돌아와 접시를 내려놓고는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리고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던 바츠의 바로 앞에 우뚝 서서 허리를 천천히 구부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지켜보던 바츠의 이마와 자신의 이마가 맞닿을 때까지 바짝 수그렸다.
“그래서?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바츠는 바로 코앞에 그녀의 얼굴이 드리우자 목이 졸린 것처럼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겁에 질린 것처럼 얼굴이 빳빳하게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이런 모습을 보고 무서워할까 두려웠다.
하지만 정작 벨리타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눈가와 목소리에는 애정이 잔뜩 묻어났다. 그녀의 검은 눈만 바라보고 있는 바츠에게만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바츠의 눈에는 마치 어둠 속 무거운 적막처럼 영혼을 빨아드리는 그녀의 눈동자만 보일 뿐이었다.
바츠는 자신의 몸이 의자에서 떨어져 나와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대에 찬 목소리로 재촉하는 그녀의 사분사분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입술이 바들바들 떨려서 울음을 터뜨려야만 할 것 같았다.
“어서, 어서 말해봐.”
전혀 긴장한 기색이 보이지 않는 벨리타는 오히려 즐거운 모양이었다. 바츠가 머뭇거릴수록 점점 더 기뻐보였다. 테라치가 들이닥치지 않았더라면 바츠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을지도 모른다.
“바츠! 밥 먹었어?”
벨리타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저쪽으로 몸을 던져 멀찍이 달아났다. 지금 막 접시를 부엌에 갔다두기 위해 일어난 사람처럼 태연하게 자신의 접시를 집어 들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것 같은 테라치에게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테라치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기는 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다. 벨리타의 천연덕스러운 인사를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바츠가 벨리타와 식사를 같이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그냥 돌아갔다.
바츠는 괜히 얼굴이 뜨거웠다. 부끄러운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민망함에 온몸이 간지러웠다. 그가 장난스럽게 놀리며 무안하게 만들었다면 좀 나았을 지도 모른다. 애써 부정하기 위해 발끈하게 되겠지만 기분은 더 좋아졌을 테니 말이다. 왠지 아쉬웠다. 물론 그에게서 그런 행동을 기대하는 건 어려웠다. 그를 오랫동안 알아왔지만, 상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돌아가자 부엌에서 눈치를 보던 벨리타가 혀끝을 내밀며 수줍은 미소를 보내주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오늘을 어떻게 추억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어쨌든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반복되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테라치는 수업이 끝나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애니의 집에 놀러 갔다. 그가 돌아오는 건 저녁 늦은 시간이 되어야만 했다. 바츠는 가끔씩 그를 따라가 에슬란과 어울렸다. 그는 애니와 단둘이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종종 로리나도 함께 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지는 모른다. 바츠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바츠는 에슬란과 카드놀이를 하는 것에 빠져 있었다.
아델리나는 혼자 시간을 보내는 날이 부쩍 늘어난 듯 보였다. 수업이 끝나면 버니에투와가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 같았지만, 말을 들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어느 날 아네트와 어울리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아델리나에 대해 물었을 때에 돌아온 답변이 시원치 않았다. 꼭 작년에 가이즈카와 다툰 지훈을 보는 듯 했다. 쌀쌀맞았지만 은근히 걱정하는 말투였다.
지훈은 의외로 포르쿠얀과 자주 어울렸다. 반에서 지훈의 이상한 소리를 가장 잘 들어주는 사람이 그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훈이 그런 소리를 늘어놓을 때마다 귀를 쫑긋 세우고 관심을 보였다. 가끔은 다른 아이들이 화들짝 놀랄 만큼 격한 반응으로 공감을 하기도 했는데, 바츠에 눈에는 억지에 가까운 궤변에 호응하는 모습이 괴상하게만 비쳐졌다.
지난번에는 좋은 식재료는 전부 특정 일부만 누릴 수 있도록 공급이 된다는 말로 한참을 떠들었다. 레벨1이나 레벨2 거주자들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식재료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이유로 실제 아르크에 존재하는 식재료 중 레벨1과 레벨2의 상업 지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딱히 공감이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작년 애니의 집에서 빌리언에게 승급 축하 파티로 염소고기를 대접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틀린 말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수긍하며 그의 말에 힘을 실어주게 되면 그가 이상한 소리를 더욱 많이 늘어놓게 될 것 같아, 어차피 레벨1과 레벨2의 상업 지구에 있다고 하더라도 거주자들이 구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핀잔으로 대신했다.
“믿기 싫으면 신경 쓰지 말라고! 괜히 비꼬며 빈정거리지 말고!”
포르쿠얀이 그런 바츠를 향해 불쾌한 말투로 소리를 질렀다. 당사자인 지훈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는데, 옆에 있던 그가 나선 건 뜻밖의 일이었다. 지훈도 놀랐는지 조용히 눈치만 살폈다. 테라치가 진정시키며 중재를 하는 바람에 일이 더 커지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의외였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그는 항상 바츠를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바츠의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보다 못한 지훈이 따로 자신이 했던 말들은 모두 그냥 추측일 뿐이라는 말로 그를 달래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지훈이 늘어놓았던 불확실한 말들을 전부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버니에투와가 그만두라고 무섭게 윽박지르다 결국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보고 싶고, 믿고 싶은 것만 인정하려고 했다. 진실이 무엇인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듯 보였다. 그에게는 자신이 보고 믿는 것이 곧 진실이었다.
그리고 2학년 마지막 시험이 있던 날, 그의 불만이 결국 사고를 쳤다. 겨루기에서 바츠에게 패한 그가 경기가 끝나고 나서 흥분한 나머지 바츠를 뒤에서부터 덮쳐왔던 것이다. 다행히 그가 휘두른 연습용 검이 뒤통수가 아니라 오른쪽 어깨를 후려치는 바람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대단히 위험한 순간이었다. 마티프는 그에게 최종 성적의 50%를 감점처리 하는 징계를 내렸다. 거의 퇴학에 가까운 중징계였다. 그 때문에 그의 부모님이 며칠 동안 계속 찾아오며 항의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마티프의 결정을 번복시킬 수 없었고, 오히려 부사령관에게 미사훈련소의 교관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주의를 들어야 했다. 포르쿠얀은 사실상 종업 성적 미달로 3학년으로 승급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감히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어? 두고 보자.”
그는 종업식 날, 바츠를 무섭게 노려보며 해코지를 할 것처럼 굴었다. 그걸 지켜본 아델리나가 사이로 끼어들며 그를 밀쳐 버렸고, 버니에투와가 자신의 덩치를 이용해 그를 쫓아내주었지만 찝찝한 기분으로 매우 우울했다. 들뜬 가슴으로 케일리에게 승급 사실을 알리고 싶었던 마음이 싹 달아나버릴 정도로 최악이었다. 하지만 정말 최악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제가 왜 헌터가 될 수 없는 거죠? 제 종업 성적은 테라치 다음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마티프가 3학년으로 승급할 인원을 발표할 때, 바츠를 누락시켰던 것이었다. 종업 성적이 2등이었던 바츠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3학년으로의 승급은 테라치와 아델리나 그리고 버니에투와 이렇게 셋만 결정이 되었다. 종업 성적은 3학년으로의 승급을 충족하지만, 1학년 때 그대로 검술이 전혀 늘지 않은 지훈이 탈락한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납득할 수 없어요! 제가 뭐가 부족했던 거죠?”
바츠는 억울한 마음에 수업이 끝나고 마티프를 찾아가서 따져 물었다. 테라치는 물론이고 아델리나와 버니에투와도 함께 해주었다. 다들 제 일처럼 나서줘서 너무 고마웠다. 버니에투와의 퇴학을 막기 위해서 똘똘 뭉쳤었던 그때가 떠올라 굉장히 힘이 되었다. 마티프가 사과를 하고 승급될 인원을 이제라도 제대로 다시 발표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티프는 이미 발표된 명단을 바꿀 생각이 없어보였다.
“바츠, 넌 헌터가 될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제외된 것이 아니다. 넌...”
대신 매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것은 배급표 두 장으로 우유를 사러갔다가 콜라라고 불리는 탄산음료를 보게 되었을 때처럼 충격적인 일이었다.
“넌...집사 과정을 밟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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