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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50화 (50/268)

< --   4. 지상으로   -- >         * 50화 *

집사. 이름만으로도 생소한 단어였다. 그들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진 것이 없었다. 바츠도 미사훈련소에 와서나 겨우 몇 번 들은 것이 전부였다. 수업도중 흥분한 마티프가 가끔 언급했던 기억이 있다. 그들은 헌터보다도 더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다.

“대체 그게 뭔가요?”

마티프는 헌터가 단단한 칼날이라면 집사는 숫돌이라고 했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헌터였다. 헌터의 훈련과정을 똑같이 따르고 같은 목적을 가지고 육성된다. 다만 졸업을 앞둔 마지막 1년을 두고 둘의 운명이 갈릴 뿐이라고 마티프는 말했다.

한쪽은 남은 1년을 미사훈련소 안쪽에 마련된 특별한 훈련시설에서 보내게 된다. 인위적으로 다양한 악조건이 설정된 공간으로, 그곳에서 이제 곧 주어질 카니지 블레이드의 숙련도와 지상에서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한 최종 점검을 하게 된다. 음식이 지급되지 않은 채 며칠을 버텨야 할 때도 있고, 오물과 폐수만 지급받은 채 각종 시뮬레이션을 체험해야만 한다. 마치 가상으로 만들어진 공간으로 보이지만 그건 모두 실제였다. 매년 헌터가 배출되는 수가 그리 많지 않은 이유가 그 때문이다. 입학과 승급 자체도 까다로웠지만, 이 마지막 1년을 견뎌내지 못하고 탈락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해마다 사망자도 나왔다. 그 안에 마련된 수많은 시련들이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깊은 회의감을 느끼게 만들어 삶을 단념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물론 물리적인 피해로 사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반면 다른 한쪽은 훈련 방식에 대해 완전히 비밀에 부쳐있었다. 마티프조차도 잘 모른다고 했다. 작은 방안에서 이루어진다고만 알고 있다고 했다.

바츠는 그 낯선 이름에 왠지 모르게 겁이 났다. 일반학교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그들에 대해서는 존재 자체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미사훈련소를 다니는 동안에도 신경 쓴 적이 없었다. 오로지 헌터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지금에야 가끔 우연히 거론되었었다는 기억이 날 뿐이다. 작은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마티프는 느닷없이 그 이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쭉 지켜봐 온 결과를 통해 숙고해서 결정된 사안이다.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다. 네 말대로 넌 성적이 두 번째로 뛰어났으니까 말이야. 모든 교관들이 고심해야만 했지.”

마티프가 사무실의 공기가 답답한지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사실 우린 처음부터 네게 강력한 헌터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다. 오로지 네 풍부한 감성에만 집중했지. 하지만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었어. 정말 대단한 발전이다. 우리의 불신을 부끄럽게 만들었지. 정확히는 내 판단이 틀렸던 것이다. 아주 잘해주었어.”

마티프의 시선이 바츠의 어깨너머로 이동했다.

바츠는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지난 2년간 서로를 돌보며 의지했다. 고단한 미사훈련소의 과정도 힘들다고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잘 견뎌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자 위안이었다. 늘 가까이에 있었고 필요할 때면 함께 했다. 때때로 닥쳤던 역경도 그래서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친구. 더 많은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 안에는 너무도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죠? 우리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바츠는 그가 자신보다도 친구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구는 마티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자신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티프의 시선이 다시 바츠에게로 돌아왔다.

“우린 미사훈련소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다. 물론 너희들은 느끼지 못할 거야. 하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다. 아르크 내부에는 수많은 빌리캄들이 이곳저곳을 누비고 있으니 말이야. 그것들은 아주 소중한 눈이지. 내가 이곳에서 많은 녀석들을 지켜봤지만 너희들처럼 이렇게 똘똘 뭉쳤던 녀석들은 본 적이 없어. 다들 자신을 단련하는 데에만 급급하지. 매년 이곳에 새롭게 오게 되는 다른 녀석들과 너희들이 다를 수 있었던 것은 바츠 네 영향이 크다. 네 세심한 감정들이 주변 사람을 하나로 엮을 수 있게 만들었단 말이다. 물론 항상 좋았던 것만은 아니야. 모두를 하나로 엮을 수는 없지. 그래도 네 존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높이 살만한 값어치가 있다는 말이다.”

바츠는 뜻밖의 소리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까지 빌리캄은 그저 벽이나 천장에 붙어 다니며, 녹을 벗기고 광택을 내는 청소 로봇으로만 알고 있었다. 레벨1의 주거지역에는 결코 오지 않는 못된 로봇으로 말이다. 하지만 마티프는 그 로봇이 아르크 내부를 돌아다니며 여기저기를 감시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이었다.

“네가 집사로서 매우 적합 판정을 받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넌 헌터로서도 부족하지 않은 능력을 소유하고 있어. 하지만 우리는 절박함에 주목해야만 했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말이야. 게다가 아르크의 기술은 아직도 많은 부분 부족하다. 과거의 기술들을 다시 찾는다고 하더라도 재현을 할 수 있는 마땅한 설비도 없지. 인공태양을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그보다 상대적으로 간단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 존재하는 설비들을 유지 보수하기 위한 부품도 이제는 그리 넉넉지 않을 걸? 새로운 설비를 제작한다는 건 기대도 할 수 없지. 이곳은 애초에 인간이 최소한의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제작이 된 것이지, 더 많은 연구를 위해 지어진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는 차가운 금속이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감수성이 필요할 뿐이다. 그것도 특별한 감수성이 말이다.”

바츠는 마티프의 마음을 결국 돌리지 못했다.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는 필요하다면 부사령관에게 요청해서라도 설득하게 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이었다. 서운한 감정이 밀려들었지만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테라치가 어깨에 손을 올려 애틋한 시선으로 위로해준 것이 그나마 조금 도움이 되었다. 아델리나는 바츠보다도 더욱 억울해했다. 예전처럼 떼를 쓰며 울지는 않았지만, 잔뜩 흥분해서 마구잡이로 억지를 부리는 것은 여전했다. 바츠가 헌터가 되었을 때보다 더 많은 혜택이 가족에게로 돌아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마음을 가라앉혔다.

바츠에게 남은 가족은 케일리가 전부였다. 유일한 진짜 가족이었다. 바츠는 그녀에게 부족하지 않은 배급표가 돌아가고, 그녀가 좀 더 편한 삶을 누릴 수 있다면 헌터든 집사든 뭐가 되었든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 정확히는 우리를 위해 큰 결단을 내린 것처럼 자신도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그녀의 희생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그럼 레벨2 거주자들의 시선에 그녀를 괄시는 눈초리는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럼 헌터가 된 것과 마찬가지인 것 아니니? 축하한다. 너무 아쉽게만 생각하지 마렴. 누구도 자신이 원하는 데로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는 거란다. 때로는 원치 않는 힘든 결정을 해야만 할 때도 있지.”

바츠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테라치와 함께 애니의 집으로 갔다. 오늘 다음 학년으로 승급하게 되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빌리언이 작은 파티를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빌리언은 기술학교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시험을 치르게 되어서 참석하지는 못했다. 그는 성인반을 무사히 졸업하게 될 것이다. 대신 로리나가 약속을 지키며 시무룩한 바츠를 위로해주었다. 그녀는 마치 케일리의 용감한 결정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나 집사가 뭔지 알아! 밖에 있을 때 하얀 안경을 낀 아저씨랑 할머니가 말하는 걸 들은 적 있어! 헌터의 약점은 집사라고 했다고!”

다들 식탁에 모여앉아 로리나가 준비한 팬케이크를 먹으려고 할 때였다. 설탕시럽으로 자신의 케이크를 흥건하게 적시던 에슬란이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바츠는 자신조차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이제 곧 11살이 되는 에슬란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는 이제 일반학교 2학년이 될 뿐이다. 우울한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그래서 평소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호응해주었을 테지만, 오늘은 조금 무뚝뚝한 태도로 관심을 보이는 척만 했다.

“하얀 안경을 낀 아저씨가 누군데?”

“몰라, 하지만 할머니가 그랬어. 그 아저씨 때문에 이렇게 외쳐야 한다고. 자유를 위하여!”

에슬란이 애니의 흉터를 가지고 장난칠 때나 하던 말을 자신 있게 내뱉었다.

바츠는 한숨이 절로 났다. 그는 아직 너무 어렸다. 그가 조금은 자신을 생각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서운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제 딴에는 다른 때와 다르게 침울한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한결 나았다.

애니의 집에서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자 케일리가 아델리나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테라치는 내년부터는 미사훈련소에서 숙식을 해결하게 되니, 미리 짐을 싸놓아야겠다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언제 볼 수 있는 거야?”

케일리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물었다. 그녀는 다시 볼 수는 있는 거냐는 질문을 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바츠는 그녀에게 애써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1년 뒤면 될 거야. 중간에 내가 포기하면 더 빨리 볼 수도 있고. 너무 걱정하지 마. 헌터가 되려면 누구나 다 거쳐야 하는 일이라고.”

“아델리나가 그랬어. 대체 집사라는 게 뭐야?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다고. 헌터는 가끔씩 돌아올 수도 있잖아. 하지만 집사가 돌아왔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고.”

바츠는 케일리에게 괜찮을 거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그녀는 지금 당장 헤어지는 것도 걱정이었지만, 그 다음에 대해서까지도 벌써부터 불안해하고 있었다.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내가 레벨2에 살든 레벨4에 살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내가! 내가 그 자식, 아니! 그 사람이랑 결혼한 게 다 무엇 때문인데! 대체 왜!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

그녀가 화를 냈다. 차라리 함께 밖으로 나가자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바츠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델리나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도 그녀는 단단히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어떤 위로라도 해야만 했는데, 펑펑 눈물을 쏟아내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아랫입술에 못 보던 멍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져주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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