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 지상으로 -- > * 52화 *
바츠는 굉장히 예민해진 상태로 며칠을 지내게 되자, 마음속에 터질듯 한 분노만 남았다. 심장은 아무 때나 심하게 두근거렸고, 호흡은 점차 거칠어졌다. 불안과 초조가 자꾸만 극도의 흥분상태로 만들었다. 문을 걷어차는 것은 예사였다. 기운이 빠질 때까지 문을 걷어차고 나서 돌아서면, 다시 끓어오르는 분노로 또 다시 문을 걷어차야 했다. 기력이 다할 때까지 반복됐다. 그러다가 다리를 들 힘조차 없어지면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 허공에 대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악에 바친 욕설들이 대부분이었다. 마티프에 대한 저주도 빠지지 않았다. 그를 살해하고 말겠다며 몇 번이나 다짐했다. 나중에는 이명 현상이 생길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고막이 아플 정도로 들려오는, 고음의 얇은 사이렌소리가 자꾸만 괴롭혔다. 그럴 때마다 괴성을 지르고 방안 이곳저곳을 달리며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었다. 가끔은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착각도 들었다. 침대를 뒤집어 밑을 확인하고, 갑자기 화장실로 달려가 안을 살펴봐야만 했다. 한 번은 고개를 돌리다가 구석에서 사람의 실루엣을 보기도 했다. 물론 황급히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지만, 이대로 계속되다가는 스스로가 이상해지고 말 것이라는 공포감이 들었다. 당장 포기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바츠는 계속해서 버텨냈다. 생전 처음 마주친 지독한 고통들로 너무나 힘들었지만 끝끝내 이겨내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의 성공을 기다리는 케일리가 떠올랐다. 미사훈련소의 입구에 찾아와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벨리타도 생각났다. 교실에 앉아 수업을 듣는 와중에 가끔씩 자신을 떠올리다 지적을 받는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이어서 테라치도, 아델리나도, 버니에투와도 차례로 모두 기억났다. 그들도 각자 자신의 길을 걷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용기를 갖도록 만들었다. 조금 더 견딜 수 있는 힘이 솟았다. 그러나 이것들이 지금의 상황을 이겨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바츠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된 것은 오히려 따로 있었다.
바츠는 소중한 사람들이 떠오르자, 반드시 견뎌 내야한다는 의지가 생겼다. 하지만 이 의지는 얼마 남지 않은 촛불처럼 금세 사그라지고 말았다. 그들에 대한 행복했던 기억이나 추억은 그저 스치는 기분 좋은 바람일 뿐이었다. 그런데 매일 제공되는 두 번의 식사는 달랐다. 미각은 물론이고 후각과 시각 심지어 청각까지 자극하며 활력을 주었다. 누군가는 이 소리를 듣게 되면 쉽게 믿지 못할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고작 음식을 먹으며 위로를 받을 수 있느냐며 반문하게 될 것이다.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바츠는 이곳에서 생전 처음 보는 음식들을 먹으며 자꾸만 시험대에 오르는 자신의 정신을 부여잡을 수 있었다. 바츠에게 음식은 홀로 고립된 이곳에서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위안이었다.
식사는 문 옆 직사각형의 작은 통로를 통해 안으로 지급되었다. 대게 원형 접시에 담아 전해졌는데, 첫 식사를 받았을 때에는 낯선 음식들로 두 눈이 휘둥그레져야만 했다. 혼자 방안에 갇혔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정신이 팔렸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요리들이었다. 맛은 물론이고 조리된 형태며 냄새까지 모든 것이 새로웠다. 여태까지 먹었던 음식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괜찮은 요리라고 불릴 만한 음식 중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던 것이, 각종고기를 다져 만든 패티(Patty)가 전부였던 터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나 돼지 등 동물의 고기를 발라내고 남은 찌꺼기들로 만든 것이다. 팬에 기름을 둘러 지져낸 뒤 그 위에 소금을 뿌려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패티는 바츠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제공받는 식사는 모든 것이 그 이상이었다. 정말 최고의 요리들이었다.
가장 처음 마주한 음식은 손바닥보다 큰 돼지고기 덩어리와 으깬 감자 그리고 콩이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고기가 검은색 소스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끈적한 달콤함이 적당히 질긴 식감과 어우러져 굉장한 맛을 내고 있었다. 애니의 집에서 맛보았던, 오븐에 구운 염소 뒷다리고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고기를 자주 접할 수 없던 바츠에게는 이런 조리 방법이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뿐이었다. 다음날 제공된 시큼한 노란색 음료도 인상적이었다. 대단히 신맛으로 혀끝에 닿으며 절로 눈이 감겼는데, 마시고 나면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도 한결 좋아졌다. 음료라고는 무른 사과를 갈아 만든 주스와 탄산이 든 물이 전부였는데 정말 새로운 맛이었다. 매번 돌아오는 식사시간이 기다려질 정도로 행복했다. 지속되는 불안과 초조를 덜어주는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식사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거르지 않고 매일 두 번 제공되는 식사는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바츠는 음식을 먹고 날 때마다 묘한 행복감에 잠시 이성을 찾을 수 있었다. 틈만 나면 온갖 부정적인 생각으로 괴로웠지만 이때만큼은 달랐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편안했다. 그래서 그 시간을 이용해 차분하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자신만의 하루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다시 느낄 수 있어야만 지금의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최대한 유동적이지 않은 기준점을 정하는 일이었다.
바츠는 자신이 잠에서 깨는 찰나를 기준점으로 삼았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하게 몸을 푼 뒤, 미사훈련소에서 배웠던 훈련들을 천천히 답습하는 걸 반복했다. 근력과 지구력을 단련하는 것부터 검술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똑같이 되풀이했다. 그러자 차츰 마음이 안정적으로 변했고 분노도 사라져갔다. 자신만의 일과를 반복할수록 더욱 좋아졌다. 전보다 잠도 편히 잘 수 있었고, 거칠던 호흡도 진정됐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마음이 차분해지기 시작하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여유는 어느 날 문득 특별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매일 제공되고 있는 두 번의 식사가 항상 같은 시간에 지급되고 있는 것 같다는 의심이 바로 그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그들은 분명 매일 같은 시간에 식사를 공급하고 있었다.
바츠는 식사시간에 주목했다. 매번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거의 일치했고, 그것을 기준으로 다시 일과를 정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낮과 밤의 경계를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하루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생겼다. 만약 성공하게 된다면 수면시간보다도 훨씬 고정적인 기준점으로 인해, 보다 더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바츠는 자신의 계획이 유효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에 온 뒤 가장 뚜렷하게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루가 지나고 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균형적인 생활이 가능했다. 머지않아 분노도 사라졌고, 불안과 초조도 느낄 수 없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스스로가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도 이제는 편히 잔다. 밝은 조명 따위는 더 이상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드디어 이곳에 적응하게 된 것이었다.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매우 오랜 시간이었다. 스스로 정한 일과를 정상적으로 소화한 것만 100여 번이었으니, 아무리 못해도 반년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지나온 시간만큼 견뎌낸 고통은 비례했다. 지금은 완전히 익숙해져서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아찔할 정도로 끔찍한 시간들이었다.
“어때? 견딜 만 했나?”
마티프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때쯤이었다. 그는 고작 하룻밤 자고 온 사람처럼 태연하게 물었다. 해치(Hatch)가 다시 열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르크의 빅애스가 열리는 감동을 느낀 바츠와는 전혀 달랐다.
바츠는 그를 보자 지난 시간이 다시 떠올랐다. 그에 대한 원망도 함께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감정이 진해질수록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는 쾌감이었다. 그냥 기분이 좋았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기도 했고, 환희가 밀려드는 것 같기도 했다. 마냥 기뻤다.
“나쁘지 않았어요. 음식도 입에 맞고요.”
바츠는 힘들고 너무 무서웠다며 우는 소리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렇게 칭얼거리게 되면 자신이 패배자처럼 비쳐질 것 같았다. 그래서 최대한 덤덤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그거 다행이군. 이제부터는 조금 달라질 것이다. 다시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거야.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끝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하거라.”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을 듣더니,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툭 던져놓고는 다시 방을 빠져나갔다. 굉장히 오랜만에 조우하게 된 것인데, 그는 전혀 반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에게서 그 어떤 아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츠는 해치가 내려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무뚝뚝한 그의 태도에 대해 야속함을 느꼈다. 그에게는 간단한 격려나 위로가 그렇게 어려운 일인 모양이었다.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후회감이 들었고, 그는 선생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불평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를 향한 비난을 무작정 늘어놓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 같았던 조명이, 그의 퇴장과 함께 동시에 전부 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마치 방안의 모든 빛이 그를 따라 달아나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새하얗던 세상이 일순간에 캄캄한 암흑으로 변했다. 바로 코앞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진한 어둠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밥도 먹을 수 없을 거라고요!”
바츠는 무심했던 마티프의 대한 불평대신, 현 상황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혹시라도 그가 듣기를 바랐다. 허공을 더듬고, 벽을 더듬어 간신히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마구 두드렸다.
“열어줘! 열어달라고!”
지칠 때까지 계속 소란을 피웠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기 전에 몸을 돌려 벽에 등을 기대는 순간, 무거운 침묵과 캄캄한 암흑이 이제는 자신과 함께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오래된 기억이 슬그머니 기어 나올 수 있도록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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