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53화 (53/268)

< --   4. 지상으로   -- >         * 53화 *

어릴 적 한 밤중에 잠에서 깨면 어두운 방안의 차가운 눈동자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잡히고는 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다. 어둠 속 어딘가에 몸을 감춘 채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생각으로 잔뜩 겁에 질린다. 바츠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안에 떨다 침대 밑에서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면 온몸이 땀으로 젖고는 했다. 혹시라도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는 것 같으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잔뜩 움츠러들었다. 홀로 남겨진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에 위축돼, 누군가가 구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해진다.

바츠는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한 가지 주문을 떠올리고는 했다.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허락이 된 주문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찾을 수 있고, 자신의 잘못 앞에서도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그런 주문이다. 가끔은 반복해서 불러야만 하지만 대게는 한 번만으로도 족하다.

‘아빠.’

부를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위대한 마법. 부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질 수 있는 위로였다. 하지만 이 주문을 외려면 특별한 언어가 필요하다. 평범하게 불러보아도 충분하지만 정확한 언어를 구사했을 때 비로소 가장 효과적이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이 언어를 사용할 줄 안다. 다만 진한 교감이 없다면 아무리 가까운 사람끼리라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난해한 언어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언어들이 탄생하고 사라지는 동안에도 꿋꿋이 살아남았는데, 나이가 어릴수록 구사하기 쉽고, 갓 태어났을 때에 제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순수하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소리 내어 울며 주문을 외고는 했다. 정작 자신이 내뱉으면서도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는 언어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달랐다. 그때마다 작은 랜턴을 들고 허겁지겁 달려왔던 것을 보면, 분명 그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단 한 번도 실망시켰던 적이 없다. 아버지는 항상 응답했다.

그리고 지금, 바츠는 그때 그 주문이 필요하다고 절실하게 느꼈다.

“자유를 위하여...”

바츠는 머릿속에 떠오른 주문을 외자 헛웃음이 터졌다. 자신의 주문이 아니었다. 에슬란이 입버릇처럼 내뱉던 그만의 주문이었다. 머릿속에 왜 이것이 떠오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불현듯 떠올라 멋대로 내뱉어졌다. 때마침 작은 소란과 함께 음식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그 이유를 찾기 위해 한참 고민했어야 했을지 모를 정도로 뜻밖이었다.

어둠이 모든 것을 앗아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도 소리와 향은 멀리까지 퍼져나갔고, 따뜻한 온기 역시 주변을 마음대로 맴돌았다.

바츠는 바닥을 더듬어 음식을 찾았다. 적당히 데어진 스프와 말랑말랑한 빵 그리고 주먹크기의 열매 몇 개였다. 손에 닿는 감촉만으로도 굉장히 신선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맛도 보지 않았는데, 지난 기억들이 떠오르며 입안을 자극했다. 눈앞에 아른거려 직접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전에 세워두었던 계획을 다시 침착하게 따르기만 한다면, 지금의 상황을 무사히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외마디 기합소리로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발목을 붙잡았다. 방이 어두워지고 첫 식사를 끝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갑자기 시작된 복통이 화장실을 들락거리게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게 허겁지겁 식사를 하다 보니 배탈이 난 것이 틀림없었다. 계획을 다시 시작하기는커녕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화장실을 드나드는 동안 혹시라도 실수를 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바츠를 더욱 괴롭게 했다.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채 움직여야 하는 것 자체가 곤욕이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최악으로 변했다. 온몸에 힘이 빠져, 앉아있을 기력조차 없었다. 길어야 하루면 낫게 될 것이라는 스스로의 위안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배탈은 연일 계속되며 매우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20회 가까운 식사를 할 때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연이은 배탈로 축 늘어진 몸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바츠는 큰 결심을 해야 했다.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병도 이겨낼 수 없다는 기본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이대로 늘어져서 배를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신체가 견뎌낼 수 있도록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다. 떠오르는 건 딱 하나였다. 계획한 생활을 다시 이어가는 것이다. 훈련으로 단련하는 동안에는 아팠던 적이 없었다. 이렇게 앓고만 있으면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상황만 자꾸 악화될 뿐이다. 그래서 바츠는 배탈이 조금 사그라지거나, 상태가 조금이라도 호전이 되면 틈틈이 가볍게 움직이며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자신의 모습이 불쌍하다는 생각에 서러웠지만 이를 악 물고 버텨냈다.

“젠장!”

하지만 시간이 빠르지만 느리게 흐르는 동안에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츠에게는 참혹한 순간들이었다. 복통은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곧 죽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아 눈물이 났다. 이제 끝이라는 마음으로 마지막 식사를 했다. 달콤한 소스가 입안을 적셨다. 복부의 통증을 느끼는 와중에도 맛있는 요리에 침이 고인다는 사실이 역겨웠다. 급격히 밀려드는 피로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자해를 했을지 모를 정도로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 큰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괴롭히던 복통이 말끔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뒤로 몇 번의 설사가 더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상태가 예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히려 복통이 사라지자 배속이 허전할 정도였다. 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 생긴 새로운 기회에 절로 눈물이 났다. 너무 기뻐서 웃음도 났다. 처량하게 느껴지는 처지가 안쓰러워 소리 내어 울어야 했다. 이곳에서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잊고 있었던, 자신이 여기에 와 있는 이유도 이제야 겨우 기억이 났다.

바츠는 상태가 호전되자 묘한 해방감으로 인한 기쁨보다도 지금 이 시간이 끝나면, 달려 나가 마티프는 물론이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찾아내 전부 살해할 것이라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색이 바란 다짐을 다시 끄집어내고 있었다. 잊었던 분노도 피어올랐다. 그래서 더욱더 훈련에 매진했다. 컴컴한 어둠은 자신있게 몸에 두르고, 차가운 침묵은 구석으로 멀찌감치 몰아놓았다. 오로지 다시 나가게 될 날만을 기다리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드디어 1년. 바츠가 방안에 갇힌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이 돌아왔다. 바츠는 자신이 그 안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 가늠하지 못하지만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음은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에는 ‘벌써’라는 말로 간단히 정의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지나는 무의미한 순간들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바츠에게는 지독하게도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으로, 그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순간들이었다. 삶이 끝나는 그날까지 잊을 수 없는 강렬한 기억이었다.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아래서 위로,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도 훨씬 느렸다. 벌어지는 틈만큼 점차 증가하는 눈부신 빛이, 모습을 다 드러내지도 않았는데도 바츠의 시야를 방해했다.

바츠는 시리다 못해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밝은 빛에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다. 간신히 그 뒤로 누군가 두 사람이 서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바츠는 문을 향해 달렸다. 머릿속으로 문이 완전히 열리게 되는 때와 자신이 그 앞에 도착하게 될 때를 신중하게 계산하며 달렸다. 눈을 뜨지 못해서 앞을 볼 수 없었지만, 마지막 잔상을 떠올리며 자신 있게 몸을 날렸다. 문 뒤에 서 있는 그 사람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서였다. 그에게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을 것이라고 계속 되뇌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난 과거로 인한 분이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바츠는 자신이 몸을 날렸다는 것까지만 인지한 채 더 이상 기억할 수 없었다. 머리로 전해지는 강한 충격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뭐야, 또 야? 이놈들은 매번 이렇군. 대체 우리한테 왜 달려드는 거야?”

“몰라. 미사 교관이 같이 가주지 않았다면 이놈이 날 어떻게 했을 지도 몰라. 완전 또라이야.”

바츠가 다시 정신을 차린 건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지난 후였다. 아직 눈을 뜨지는 못했지만, 조금은 화가 난 목소리로 어이없어하는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는데, 둘 모두 약간 흥분된 상태였다.

“분노가 그들을 버티게 하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흥, 잘난 척 하지 말라고. 아무리 그래도 이놈은 정상이 아니니까.”

그때였다. 둘 사이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더 들려왔다. 그는 두 사람과 다르게 굉장히 차분했다. 다른 두 사람이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말했다.

바츠는 그가 누구인지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지난 시간 동안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유일한 목소리였다. 절대 잊을 수 없는 걸걸하고 차분한 목소리. 마티프. 그가 분명했다.

“여긴...어디인가요?”

바츠는 아직도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밝은 조명이 아니었는데도 눈을 뜨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마티프는 다른 두 사람을 내보낸 후에 대답했다.

“여기는 레벨5의 연구실이다. 정확히는 회복실이지.”

“어떻게 된 건가요?”

“넌 무사히 수업을 마쳤다. 이제 전진기지로 가야만 한다.”

마티프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지금요? 전 이제 겨우 나왔을 뿐이라고요. 너무 피곤해요.”

“그래, 안다. 하지만 당장 가야만 한다. 어제가 1월1일이었으니 말이야.”

바츠는 자신의 옆으로 무엇인가가 던져지는 것을 느꼈다. 겨우 실눈을 뜨고 살펴볼 수 있었는데, 검은색 가죽 옷과 방독면 그리고 검 한 자루였다.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것들이었다.

“꾸물거릴 틈이 없다. 어서 그 옷으로 갈아 입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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