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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54화 (54/268)

< --   5. 전진기지   -- >         * 54화 *

바츠는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경황이 없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들었다. 밝은 조명에도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티프는 자꾸만 재촉했다. 준비를 다 끝내고 플랫폼을 향해 걷기 시작했을 때에도 걸음을 서두르라고 몇 번이나 다그쳤다.

“자, 이제부터는 혼자 가야 한다. 방독면을 쓰고 이곳을 지나 곧장 밖으로 향하거라. 그럼 밖에 너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절대 방독면을 벗으면 안 된다. 피부의 노출도 최대한 삼가야 한다. 그리고...”

플랫폼 입구에 도착하자 마티프가 몸을 돌려 세우더니, 비틀거리며 겨우 뒤를 쫓던 바츠와 마주섰다. 그리고는 양어깨를 붙잡고 당부하기 시작했는데, 마주보고 선 둘의 키가 그리 차이 나지 않았다. 마티프의 눈이 손가락 한 마디정도 위에 있었다.

“...배운 대로만 하거라. 너의 모든 자유는 의무와 책임에서 비롯된다.”

바츠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통로로 등을 떠밀려 얼떨떨한 상태로 샤워장을 통과해야 했다. 대답할 틈이 없었다. 황급히 방독면을 뒤집어쓰는 것도 바빴다. 샤워장의 소독약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진하고 역한 향이 헛구역질을 유발했다. 플랫폼으로 나왔을 때에는 한쪽으로 가 한참동안 헛구역질을 이어가야 했다. 허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했다.

“괜찮나? 처음인가 보군.”

근처에 있던 군인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의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꽉 막힌 듯 답답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흥이 묻어있었다.

바츠는 그를 떼어내고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빅애스가 허공에 매달린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2층 대기실 유리 너머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웅장한 덩치가 경외감을 불러 일으켰다. 직접 가까이에서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 밑을 지날 때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벅찬 기분으로 심장이 뛰었다. 미처 방독면을 빠져나가지 못한 거친 숨소리가 고스란히 귓속으로 돌아왔다. 밖으로 내딛는 첫걸음이 이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입구를 나서자 울퉁불퉁한 길이 언덕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름 정비를 해놓은 것처럼 보였지만 아르크 내부처럼 깨끗하게 다듬어진 것은 아니었다. 출입을 하는데 불편함은 없지만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가끔 발에 채일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정작 시선을 사로잡은 건 길 좌우로 높게 솟구쳐 있는 암석으로 이루어진 가파른 절벽과 까마득한 천장이었다. 수업시간에 영상으로만 보았던 아르크의 입구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가끔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질 때면, 괜히 고개를 들어 확인하고는 했다.

바츠는 한쪽 벽으로 붙어, 손을 대고 걸었다. 아직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지 못한 신체를 의지하기 위해서였기도 했지만, 암벽 자체의 감촉을 느끼고 싶었다. 두툼한 가죽 장갑 때문에 제대로 된 촉감이 전해지지는 않았다. 차가운 냉기가 조금 느껴질 뿐이었다. 암벽의 감촉이라기보다 길을 따라 안쪽으로 밀려드는 바람 때문에 착각한 것이었다.

밖에서부터 불어 내려오는 바람은 아르크 내부에서 느꼈었던 바람과는 조금 달랐다. 보다 시리고 날카로웠다. 그러나 묘하게도 기분은 더 좋았다. 아르크 내부에서 느꼈던 바람이 텁텁하고 무거웠다면, 지금의 바람은 훨씬 가볍고 상쾌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산뜻함이었다.

언덕을 반쯤 오르자 끄트머리에 서 있는 두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 사람은 낯선 기계 위에 올라타 좌우로 길게 튀어나온 막대를 잡고 있었는데,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고 엉덩이를 뒤로 뺀 자세가 우스꽝스러웠다. 그는 재밌는 자세를 유지한 채 쉴 새 없이 주변을 경계했다. 목에 소총을 걸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군인인 듯 했다. 그 옆에 다른 사람은 헌터로 보였다. 검은색 가죽 망토로 몸을 두른 것과 그 사이로 보이는 검 자루를 보니 틀림없었다. 그는 기계 뒤쪽에 엉덩이를 기대고 선 채 손목에 차고 있는 PMP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계 위에서 긴장한 듯 보이는 사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둘은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고 있었다. 굉장히 서먹서먹해 보였다.

바츠는 좁고 흐릿한 방독면의 시야가 매우 불편하게 느껴졌다. 평상시보다 고개를 더 많이 써야만 주변을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걸을 때마다 좌우로 흔들려 현기증까지 일었다. 그래서 앞에 보이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였다.

그들이 바츠의 존재를 알아차린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발소리를 듣고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헌터로 보이는 사내가 몸을 일으켜 반겨줄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갑자기 고민이 생겼는지 더 이상 다가오지는 않았다. 바츠가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기다렸다.

“당신들...누구야?”

“바츠?”

바츠는 그 앞에 서서 먼저 물었다.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이 이들이라는 건 이미 눈치 챘지만 그들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러자 헌터로 보이는 사내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안쪽으로 울리는 목소리로 인해 본래 목소리보다 더 굵게 들렸지만, 바츠가 알아듣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테라치?”

“바츠, 너 맞구나!”

바츠는 그 목소리를 단 번에 알아보았다. 무려 1년 동안이나 듣지 못했는데, 오히려 더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테라치가 기쁜 목소리와 함께 바츠를 끌어안았다.

“어떻게 된 거야? 괜찮은 거야? 정말 궁금했다고.”

테라치는 바츠를 한 차례 안고나더니, 흥분된 목소리로 질문을 쏟아냈다.

“응. 너는? 넌 괜찮아?”

“물론이야. 난 무사히 졸업을 했어. 아델리나랑 버니도 졸업을 했고 말이야. 그 둘은 이미 먼저 떠났다고. 이곳에서 집사와 함께 출발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 네가 맞았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델리나와 버니는 먼저 떠났다니?”

“아, 바츠는 잘 모르겠구나. 우리 아르크에는 전진기지가 총 세 곳이야. 일리트시라고 불리는 곳이랑 오브러시라고 불리는 곳 그리고 보르쉬치라고 불리는 곳인데, 아델리나는 오브러시로 갔고, 버니는 보르쉬치로 갔어.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방금 전에 출발했어. 아델리나가 굉장히 걱정하다가 갔는데 아쉽다. 우리는 일리트시로 가게 될 거야. 이걸 타고 동쪽으로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할거야.”

테라치가 자신의 등 뒤로 군인이 올라타 있는 기계를 가리켰다. 꼭 살찐 돼지가 앞발을 양 옆으로 쭉 뻗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놀랍게도 허공에 떠 있었다. 비록 높이 뜨지는 못하고 기껏해야 사람의 발목 높이였는데, 밑으로 자꾸만 먼지를 일으키고 있는 것을 보면 안에서부터 강한 바람이 밀려나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안한데 조금 서둘러 줬으면 좋겠군.”

바츠와 테라치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내내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주변을 경계하던 군인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겁에 질렸는지 상당히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래, 우선 타자. 우린 가야 한다고. 걱정하지 마, 이게 바로 비클레타야.”

테라치가 그의 등 뒤로 올라탔다. 바츠는 잠시 망설였지만 테라치가 능숙하게 그와 같은 자세로 그의 등에 매달리는 것을 보고, 테라치에게로 똑같이 했다. 그러자 그가 비클레타를 출발시켰고, 비클레타는 기침할 때와 비슷한 소리를 몇 번 내더니 앞으로 튀어나갔다. 매우 빠르지는 않았지만 걷는 것보다는 더 빨랐고, 있는 힘껏 달리는 것보다는 조금 느린 정도로 바람이 선선하게 일 정도의 속도였다.

바츠는 비클레타를 타고 동쪽으로 한참을 달렸다. 회색빛 하늘이 어스름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변이 우중충하게 보였다. 하지만 단순히 어둡기만 했더라면 이 정도까지 황량하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닥에는 작은 수풀조차 보이지 않았고, 가끔 눈에 띄더라도 갈색 빛이 감돌아 생기가 전혀 없었다. 이따금씩 보이는 나무들도 마찬가지였다. 턱을 들고 올려다봐야 하는 높은 교목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기껏해야 성인 가슴 높이의 관목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마저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드물었다. 사진으로만 볼 수 있었던 푸르른 숲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꼭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것처럼 온 세상이 메말라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거 시끄러운 걸?”

테라치는 삭막한 세상을 보며 아무런 감흥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오로지 고장 난 환풍구처럼 투박한 소리를 내는 비클레타에만 관심이 있었다. 정확히는 주변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게 맞았다. 그의 눈에는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비클레타로는 헤러티커를 따돌릴 수 없겠다거나, 비클레타의 동력은 어디서 얻는지 궁금하다는 것 따위의 쓸모없는 소리만 했다.

하지만 바츠는 레벨1 주거지역처럼 생동감을 느낄 수 없는 세상이 쓸쓸하게 다가왔다. 이토록 을씨년스러운 곳에 과연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막연한 기분에 속이 울렁거렸다. 테라치가 갑자기 소리치며 앞쪽을 가리키지 않았더라면 또 한 번 헛구역질을 했을지도 몰랐다.

“저기가...전진기지인 건가?”

바츠는 테라치의 어깨너머로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꽤 오래돼 보이는 건축물이 보였다. 얼핏 보아도 한두 채가 아니었다. 마을처럼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다만 여기저기 파손되어 낡은 모습일 뿐이었다. 유지보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듯 했다. 여기저기 구멍이 나거나 무너져 내려 바람조차 막기 힘들어 보였다. 저런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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