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55화 (55/268)

< --   5. 전진기지   -- >         * 55화 *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비클레타가 그곳까지 200여 미터를 남겨두고 멈춰 섰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여기에서 내려야만 해.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으니까 말이야.”

바츠는 방독면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가 심한 메아리로 들렸다. 홀로 갇혔던 방안에 울려 퍼진 외침처럼 마구 떨리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전진기지를 코앞에 남겨두고 굳이 이곳에 멈춰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망설임 없이 비클레타에서 선뜻 내려서는 테라치 때문에 그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그는 약간의 의심도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제부터는 우리끼리 가도록 하죠.”

바츠는 테라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비클레타에서 내려선 뒤 손목에 차고 있던 PMP를 조작했다. 바츠가 이름을 불러 주의를 끌자, 시선도 주지 않고 간단한 손짓으로 내려야 한다는 신호만 주었다.

비클레타는 바츠가 엉겁결에 테라치를 따라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멀리 보이는 마을을 향해 힘차게 달려 나갔다. 속도는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묘하게 더 빠른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머물 곳은 저곳이 아니야. 저기는 그냥 마을일뿐이라고. 우리가 머물 전진기지는...”

비클레타가 떠나자 테라치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주변을 살피더니 마을 쪽이 아닌 전혀 엉뚱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쪽이다. 우린 저쪽으로 가야만 해.”

바츠는 납득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이미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테라치의 뒤를 묵묵히 따라야만 했다. 그는 무엇인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비록 의아함으로 혼란스러웠지만, 겨우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지상으로 나온 자신보다는 믿음직스러웠다. 그는 완벽하게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저기 같은데?”

바츠는 테라치를 따라 제법 걸었다. 가까이에 있던 마을이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꽤나 멀어져 있었다. 테라치의 손가락이 아무것도 없는 메마른 벌판에, 홀로 솟아 있는 커다란 바위를 가리켰다. 높이가 10미터는 넘어 보이는 매우 거대한 바위였는데, 척박한 황무지에 매우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바츠는 테라치와 함께 그 바위를 둘러보았다. 그 주위를 따라 돌았는데, 높이만큼 그 폭도 대단했다. 적어도 5미터는 돼보였다. 고작 한 바퀴를 돌 뿐인데도 지루하다고 느껴졌다. 중간에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만한 작은 틈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불평을 늘어놓았을 지도 몰랐다.

틈은 칼로 잘린 빵처럼 반듯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금속처럼 깔끔하게 잘린 상태는 아니었지만, 피부가 닿더라도 긁히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매끈했다.

테라치가 그 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바츠는 그 뒤를 따랐다. 아르크에서 헌터놀이를 할 때면 가끔 헤러티커가 되어서 좁은 곳에 몸을 숨기고는 했는데 불현듯 그때가 떠올랐다. 최대한 어둡고 깊숙한 곳에 숨어야만 한다. 그래야 술래인 헌터가 찾지 못할 테니 말이다. 이곳은 술래를 피해 숨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잘 찾아온 것 같다.”

틈새를 지나오자 꽤 널찍한 공간이 나왔다.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삶은 달걀을 세로로 세워 중앙에 구멍을 낸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지하로 내려갈 수 있도록 만든 철제 계단이 있었다.

이번에도 테라치가 앞장섰다. 그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그의 발소리가 탕탕거리며 들려왔다. 거의 직각에 가까운 기울기여서 좌우로 난간이 없었다면, 오르내리기 상당히 불편한 계단이었다.

계단을 내려서자 주변이 완전히 캄캄하게 변했다. 열 발자국 앞에 낡은 금속 문에 달린 창문으로 노란 빛이 보이지 않았더라면 전혀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그렇다고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바츠는 혼자가 아니었고, 테라치의 손목에는 PMP의 녹색 화면이 빛을 충분히 뿜어내고 있었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 울퉁불퉁한 바닥이 조금 방해가 될 뿐이었다.

“샤워장인 것 같지?”

테라치가 창문으로 빛이 보이던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줄을 잘 맞춰 선다면 네 사람이 겨우 들어설 수 있는 작은 공간이 나왔다. 반대쪽으로는 들어온 쪽의 문과 똑같은 문이 보였고, 좌우 양쪽 벽에는 낡은 샤워기가 2개씩 달려있었는데 한 눈에도 소독을 할 수 있는 샤워부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르크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아르크에서는 천장에 달린 살수장치를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자동적으로 소독약이 뿜어져 나왔었다. 그러나 이곳은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낡은 샤워기가 고장이라도 난 듯 했다. 샤워기의 헤드를 손로 툭툭 건드려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해야 하나 본데?”

그때였다. 테라치가 샤워기마다 바로 옆에 검은색 유리로 만들어진 작은 상자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엄지와 검지의 끝을 동그랗게 말아 쥔 정도 크기의 원형 킷이 들어 있었는데, 한두 개가 아니라 각각의 상자가 모두 절반씩 채워져 있을 정도로 양이 많았다.

테라치가 그 중 하나를 집어 들어, 가까운 샤워기 밑동 작은 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그 위에 붉은색 버튼을 손바닥으로 눌렀는데, 그의 손이 떨어지는 순간 샤워기에서 소독약이 쏟아져 내렸다. 사레라도 걸린 것처럼 몇 번이나 머뭇거리며 중간에 멈출 것처럼 굴었지만 몸을 씻어내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바츠는 테라치를 똑같이 따라했다.

샤워장을 빠져나오자 금속으로 만들어진 널찍한 통로가 나왔다. 중간 중간 경고등이 설치된 모습이 아르크와 매우 흡사한 곳이었다. 다만 관리가 되지 않아서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녹이 슬어있었고, 경고등이 시종 황색등을 반짝이고 있다는 것이 달랐다. 천장도 매우 낮았다. 머리 위로 손을 뻗을 수 없을 정도였다.

테라치가 고개를 돌려 바츠를 바라보더니, 어깨를 한차례 으쓱하고 나서 걸음을 옮겼다. 철제 계단을 내려올 때처럼 그의 발소리가 또 다시 땅땅거리며 울렸다. 바츠는 그 뒤를 바짝 쫓았다. 그의 발소리가 울릴 때마다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어디선가 무엇인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몇 걸음 후에 코너를 돌아섰을 때에는 그런 긴장감이 다 부질없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코너를 돌자마자 바로 발견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문 뒤로, 굉장히 친숙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각종 집기며 가구들이 빼곡히 들어서있는 공간이 나왔다. 레벨1의 주거지역과 매우 닮은 형태의 가정집이었다. 철재로 만들어진 서랍과 테이블, 옷장과 의자 등 모든 것이 평범한 가정집의 모습이었다. 한쪽에 벽난로가 없었더라면 이곳이 아르크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똑같았다. 조명도 적절했다. 여기저기 너부러진 옷가지들과 각종 서류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쓰레기들로 매우 지저분했지만 사람이 살기에는 충분한 곳이었다.

“거기에 방독면과 망토를 벗어두게.”

그런데 그때, 방안 어딘가에서 늙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낯설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이질감이 없이 편안했다.

바츠는 화들짝 놀라 방안을 둘러보았다. 집기와 가구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는데다가 너무 어질러져 있어 쉽게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방독면의 좁은 시야는 이렇게 복잡한 곳에서 낯선 사람을 찾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막 방독면을 벗은 테라치가 어깨를 두들겨 눈치를 주지 않았다면 한참을 찾아 헤맸어야 했을지 모른다.

그는 벽난로 앞에 마주보게 놓인 커다랗고 둥근 모양의 의자에 앉아있었다. 동물의 털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의자였다. 어두운 갈색 털이 그가 입고 있던, 본래는 검은색이었을 색이 바란 가죽 옷을 교묘히 숨겨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의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백발이 아니었더라면 쉽게 찾아보기 어려웠다.

“누구십니까?”

테라치가 그의 말을 착실히 따르며 물었다. 바츠 역시 뒤늦게 그를 따랐다. 바로 옆 벽면에 못을 박아 옷걸이를 만들어 둔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 방독면과 망토를 차례로 걸었다.

“항상 같은 질문들을 하는 군. 이곳에 머물고 있을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노인이 반문하며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그럼 어르신이 일리트시의 집사십니까?”

테라치가 자신감 있는 걸음으로 그에게로 다가가며 물었다. 바츠는 조심스럽게 따랐다.

“그렇다네. 내가 이곳의 집사네. 어르신이라는 말은 좀 불편하군. 편안하게 칼이라고 부르게. 아르크의 눈이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자네가 새로운 집사인 모양이군.”

노인의 시선이 자신의 바로 앞에 선 테라치를 지나 그 뒤로 다가서고 있던 바츠에게로 향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왼쪽 팔을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자네는 내 것을 쓰면 되니까 말이야.”

그의 손목에는 굉장히 오래된 낡은 PMP가 채워져 있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금속의 광택도 남아있지 않았고, 화면도 금이 간 채로 이따금씩 흔들렸다. 테라치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PMP와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눈으로 바라보았지. ‘저게 과연 작동이나 할까?’ 하고 말이야. 하지만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네. 내가 수십 년을 사용하는 동안에도 단 한 번 고장이 난 적이 없지. 자네도 마찬가지일 거네.”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 거죠?”

바츠가 물었다.

“우선 자네는 저쪽 방으로 가보게. 파일박스가 있을 텐데, 2번째 서랍을 열면 패치 형 식량이 있을 것이네. 필요한 만큼 챙겨서 떠나게. 떠나는 시기와 돌아오는 시기는 모두 자네 마음대로네. 다만 이곳에는 가능한 오래 머물지 말게. 헌터가 여럿이 모였을 때 좋은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 말이야.”

칼이 테라치를 반대쪽 방으로 보냈다. 조명이 이곳보다 조금 어스름한 곳이었는데, 노인의 PMP화면처럼 가끔씩 깜빡거리며 자신의 수명을 알리고 있었다.

“자네는 잠시 나와 함께 이렇게 앉아 있다가, 저 치가 떠날 때 인사나 해주게.”

바츠에게는 자신의 앞자리를 권했다. 그가 앉아있는 의자와 똑같은 의자였는데, 몸이 밑으로 쑥 꺼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푹신푹신한 의자였다. 어쩌면 침대보다도 더 편안했다. 그대로 완전히 몸을 늘어뜨리고 잠을 자더라도 불편함이 없을 것 같을 정도로 안락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