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 전진기지 -- > * 56화 *
“그것의 사용법은 아는가?”
테라치가 방에서 나오자, 칼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테라치는 벨트에 달린 주머니들을 주섬주섬 정리하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안에 뭔가 많이 챙겨 넣은 듯 주머니가 한껏 부풀어 있었는데, 부피에 비해서 그렇게 무겁지는 않은 듯 했다.
“꺾은 뒤에 피부에 붙이면 되죠.”
테라치가 칼의 물음에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냈다. 피부색과 같은 색상을 띄는 정사각형의 작은 밴드였다. 한쪽 면에 붙어있는 얇은 막을 제거하면 어디든 쉽게 접착시킬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테라치는 그것을 능숙하게 사용했다. 양끝을 손으로 잡고는 딸깍 소리가 나도록 앞뒤로 한 번 꺾더니 자신의 목덜미에 붙였다.
“잘 알고 있군. 꺾는 횟수에 따라 체내로 흡수되는 양을 조절할 수 있네. 다섯 번까지 가능하다고는 하는데, 내 경험으로는 두 번이 가장 적당하더군.”
칼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명심하도록 하죠.”
테라치는 칼의 당부를 마지막으로 자신의 짐을 챙겼다. 그리고는 바츠에게 잘 있으라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이곳을 떠났다. 그가 문 앞에서 망토를 두르는 동안 바츠가 서둘러 다가가 보았지만 별다른 아쉬움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오래 전부터 이곳에 다니던 사람처럼 칼의 말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허, 냉정한 친구로군.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않고 가는군.”
칼이 그 모습을 보고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정말 테라치에게서 서운함을 느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바츠는 테라치를 대신해서 칼에게 변명을 해야 했다. 테라치가 무엇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로인해 그가 무례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는 분명 이곳에 오래 머물지 말라는 칼의 주의가 없었더라면 상냥한 말투로 친절한 이별을 준비했을 것이다.
“어머니를 찾을 생각 때문일 거예요.”
바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칼에게 말했다.
“어머니? 그의 어머니는 아르크 밖에서 살고 있었나?”
“그게...”
칼이 진지한 눈빛으로 관심을 내비쳤다. 침대 위에 누운 사람처럼 힘을 쭉 빼고 있던 상체를 절반쯤 일으켰을 정도로 매우 궁금한 모양이었다. 바츠는 그 모습에 거부감을 느꼈다. 말문이 막힐 정도로 살짝 불안하기까지 했다. 그가 또 서운함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대답하기 꺼려졌다.
“똑똑한 친구로군. 잘했네. 차나 한 잔 할 텐가?”
“차요?”
“차를 모르나? 하긴 모를 수밖에 없겠군. 아르크에서는 본 적이 없을 거야.”
칼이 느닷없이 화제를 돌렸다. 곤란해 하는 바츠를 괴롭히고 싶지 않은 듯 했다. 생소한 단어에 바츠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기어이 몸을 완전히 일으키더니 저쪽으로 향했다. 걸음을 떼는 것조차 힘겨워 보이는, 거동이 불편한 몸이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주둥이로 뿌연 김이 나오고 있는 것이 눈으로도 보이는 금속 주전자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자, 마셔보게. 뜨거우니 조심하는 게 좋네.”
칼이 주전자에 담긴 물을 근처에 있던 금속 잔에 따라 건넸다. 바츠는 잔은 받아 들었지만 내용물을 보자 맛을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평범한 물이었는데 상한 물처럼 녹색 빛을 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칼이 손짓으로 마셔보라며 재촉했다. 그런데도 바츠가 쉽게 용기를 내지 못하자, 결국 본래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가 몸을 뉘며 잔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처럼 진한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의심하는 자세가 아주 좋군. 하지만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은 모두 기억해야만 할 것이네. 그렇다고 얽매일 필요는 없네. 자네의 의지가 중요하니까. 이곳은 아주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지. 많은 헌터들이 다녀갔고, 여러 명의 집사가 존재했네. 내가 하는 말들은 그 시간들이 시행착오를 통해 축적되며 만들어진 노하우들이네. 그러니 되도록 따르는 편이 나을 것이네. 최소한 참고는 하는 것이 좋겠지.”
칼이 숨이 찬지 한차례 호흡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 틈에 바츠는 손에 들고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셔보았다. 뜨거운 열기가 몸의 긴장감을 풀어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온기가 온몸으로 퍼지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혀끝이 마비되는 듯한 텁텁한 맛은 인상을 구기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었다. 녹물을 마신 것처럼 불쾌했다.
바츠는 아직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잔을 옆으로 보이는 테이블 위로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칼이 그 모습을 보며 웃었지만, 다시 잔을 집어 들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방안에 홀로 갇혀서 시간을 보내는 훈련을 했겠지? 정확한 이름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그곳을 나르의 집이라고 부른다네. 우리의 정신을 마구 휘저어놓으니까 말이야. 방금 전 그 치와는 무슨 관계인가?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둘은 적어도 막역한 사이일 것이네. 한 눈에도 서로를 믿고 의지한다는 것이 느껴졌으니 말이야. 아까 그 치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더군. 그리고 자네는 단 한 번도 그에게 의문을 제시하지 않고 말이야. 틀림없네. 자네 둘은 굉장히 각별한 사이였을 거야. 하지만 보게. 조금 전 자네는 그 치에게 어떻게 했지? 이제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이별 앞에서 그에게 어떻게 했나? 간단하게 인사만 건넸지. 내일 당장 볼 수 있을 것처럼 말이야. 그 치가 그랬기 때문이라는 말은 하지 말게. 자네는 그를 위해 나한테 불필요한 변명을 했을 정도니까. 가족은 있겠지? 그들은 보고 왔나? 기억도 나지 않지? 정신이 없었다는 변명을 하고 싶나? 나르의 집은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곳이네. 우리가 가지고 있던 감정을 전부 억압하지. 하루 빨리 다시 예전의 감정을 찾게. 그리고 그 감정을 일리트시에서 찾아오는 사람들과 아르크에서 오게 되는 사람들에게 사용하게. 헌터들은 예외네. 그들에게는 반드시 지금처럼 대하게. 물론 결정은 자네가 하는 것이네. 하지만 내 말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먼 곳에서 돌아오는 헌터들은 아주 무서운 전염병을 가지고 다니니까 말이야.”
칼은 거친 호흡을 간신히 붙들며 한참동안 혼자서 떠들었다. 혼자 묻고 답하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굴었다. 아르크에서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던 지훈보다도 더욱 괴팍한 사람 같았다. 특히 마지막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가리킬 때에는 기분이 묘했다.
바츠는 그가 일부로 자신에게 겁을 주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참이 실수하지 않도록 긴장할 수 있게 말이다.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자네는 이제부터 이곳의 신이 되어야만 하네. 신이 무엇인지는 아는가?”
바츠는 이어지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자네를 지켜주고, 가족을 지켜주고, 우리가 신념을 지킬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해주는 사람이지. 자네가 믿어야만 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해야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하지.”
“사령관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바츠의 물음에 칼이 잠시 입을 닫았다. 거의 쉬지 않고 말을 하느라 지친사람처럼 눈을 느리고 침착하게 한 차례 깜빡였다.
“...현명한 대답이군. 교육을 아주 잘 받았어. 정말 무섭군. 그래, 자네는 이곳의 사령관이 되어야만 하네. 나를 놀라게 하는군. 사령관이라니.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대답이야. 어쨌든 크게 다르지 않네. 자네는 이곳에서 헌터와 일리트시의 주민들에게 사령관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네.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가?”
바츠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르크를 지켜내기 위해 수많은 헤러티커와 아이기스를 상대로 위대한 승리를 거둔 것이 사령관이었다. 비록 지금은 많이 약해져서 헤러티커의 엄지로 겨우 연명하고는 있지만, 그처럼 되어야 한다는 말은 쉽게 받아드릴 수 없었다. 정작 그렇게 말하는 칼 본인조차도 그만큼 위대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좋아, 그가 돌아온 모양이군.”
칼이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맨 처음 보았을 때처럼 누웠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온 몸에 긴장을 풀며 의자에 완전히 기댔다.
바츠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처음에는 바로 알지 못했다. 칼이 늘어뜨린 몸으로 눈을 감더니 어딘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인지할 수 있었다. 매우 작은 소리였지만 문밖에서 복도를 울리는 탕탕 거리는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테라치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마도 조금 전 이별에 못내 아쉬웠기 때문인 듯 했다. 하지만 이것이 그저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역시 혼자가 아니었군요.”
한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방독면과 검은 옷, 영락없이 헌터였다. 그는 테라치와 키는 비슷했지만 몸은 좀 더 크고 다부졌다. 또한 밝은 금발대신 금속 빛을 띄는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방독면을 벗고 이쪽을 향해 바라볼 때 빛나는 회색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빛날 것 같을 정도로 매우 인상적이었다.
“오...‘라파엘’, 정말 와주었군.”
칼이 다시 눈을 뜨더니 그를 향해 반갑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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